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열번째┃그랜드 마스터(Grand Master) -下
느티나무 백인보 열번째 - 강사 이재형(미트라 한의원 원장)
인터뷰 · 글 : 박현아 느티나무 시민기자
화려한 휴가
최고의 관심사를 위해, 자신부터 행복한 치료사가 되기 위해 그는 어떻게 놀고 있을까?
“뭔가를 결정할 때까지는 보는 사람이 답답할 정도로 생각하고 정리하고 또 생각하고 그런 성격이에요. 그러다 결심이 서면 그때는 과감하게 밀어붙이죠.” 그 과감함으로 그는 휴가도 통 크게 간다. 착실하게 일하다가도 결심이 서면 모두 정리하고 한 1년 쯤 놀아버린다.
“6년 정도 일하면 1년 정도는 제 스스로에게 안식년을 주곤 했어요. 주위 한의사들이 그런 저보고 부러워하기도 했지만 걱정도 많이 하더라구요. 그렇게 정리하고 나서 다시 기반 잡으려면 무척 힘이 드니까요. 첫 안식년 1년은 가족들과 함께 미국에 가 있었구요. 그 다음 안식년 1년은 혼자서 인도 등에 갔었어요.”
휴가가 1년이면 대체 뭐 하고 노세요?
“물론 쉬기도 하고 제가 좋아하는 공부도 하고 그러는 거죠. 미국에서는 듀크대에 있는 통합의학센터에 있었어요. 동서양의 의학과 대체의학 이런 걸 주제로 의사들이 모여 케이스도 나누고 실험도 하고... 그런 공부에 같이 참여했죠. 인도에 있을 땐... 근데 인도라는 곳은 인도스러운 것만 있는 게 아니에요. 전 세계의 테라피스트(치료사)들이 모여드는 곳이죠. 제가 간 곳에도 테라피 프로그램을 300가지나 가지고 있더라구요. 그런 다양함을 경험하고 일부 도움이 되기도 했어요. 근데 또 하나 거기서 하는 걸 보니까 ‘내가 자신감을 가져도 되겠구나’ 그런 생각이 들더라구요. 성에 관련된 테라피에 대해서는 유럽이나 인도 출신의 치료사들보다 제가 더 좋은 성과를 내고 있구나를 확인했던 것이지요. 제가 하는 프로그램은 명상과 한의학, 서양의 심리학을 통합해서 만들었기 때문에 명상만 강조하는 그들의 프로그램보다 나은 성과를 내는 것이 아닌가 생각하고 있습니다.
그러면 말이 안식년이지 안식은 아닌데요?
“그 대신 틀에 박혀 하지는 않아요. 무슨 코스를 꼭 끝내야겠다 그런 것도 아니구요 그냥 놀면서 쉬면서 재밌는 것만 골라 하는 거죠.” 끊임없이 공부하시는 것 같아요...
“아, 예 그런 것 같아요. 나이가 마흔이 넘어가면서는 세상에서 제일 재밌는 게 공부가 되었습니다. 예전에는 안 그랬는데... 제가 스포츠 되게 좋아하거든요. 그전엔 피곤하면 운동하면서 풀고 그랬는데 그래서 피곤할 때 책 보는 아내가 참 이상했는데 어느 날 보니 제가 책도 보고 그러고 있더라구요. 근데 사실 책 보며 하는 공부도 좋지만 그 보다는 직접 경험하며 하는 걸 더 좋아해요. 공부해 가면서 인간과 삶에 대해서 통찰력이 더 넓어지고 의식이 확장되는 느낌... 아하! 그렇구나... ‘아하experience’가 제일 맛있더라구요.”
공부얘기가 나오자 각자 한 마디씩 거들었다. 인터뷰 현장에 동행하셨던 장정아 선생님도 해야 하는 공부가 아니라 하고 싶어 하는 공부가 얼마나 재미난 것인지에 대해 열변을 토하셨고 거기에 보태 나는 대학이라는 거, 학문이라는 거 이왕 하려면 철이 좀 들고 공부가 뭔지 좀 알게 된 후에 할 수 있다면 얼마나 좋을까 그런 얘기를 주절거렸다. 한창 잘 나가는 20대엔 실컷 연애하고 세상과 놀고 자연도 좀 들여다보고 그러다 방방 뜨기만 하던 몸의 에너지가 차분히 가라앉기 시작할 때... 그때 쯤 공부할 수 있다면 모두가 학문의 맛이 뭔지 어렴풋이 알게 되지 않을까?
다음 안식년에는 뭘 하실 생각이세요?
“아직 결정된 건 아니지만, 스탠포드대학에 가볼까 생각도 합니다.. 사실 아직까지도 우리 사회에서는 제가 말하고 있는 동양의 성의학 원리들이 공식적으로 잘 받아들여지지 않아요. 서양의학의 관점으로만 보는 분들의 공격도 있고요. 그래서 스탠포드에 가려고 하는 건데... 거기에 열린 마음으로 심리적인 영역과 의학의 영역을 합쳐서 만든 ‘전립선 치료 프로토콜(일정한 형식과 절차)’이 있더군요. 열린 마인드에 희망을 갖고 심리적인 것과 의학적인 것을 합해 놓은 형태이기 때문에 제가 가면 전립선 치료와 성문제 등에 대하여 더 잘 할 수 있을 것 같아요. 제가 제안을 하면 그쪽에서 오픈 마인드로 반기지 않을까 생각도 하고 그렇게 되면 교환연구원이나 교환교수로 가볼까 하는 생각이 있죠. 스탠포드에서 인정하면 한국에서의 무조건적이고 감정적인 공격은 좀 조용해지지 않을까... 씁쓸하지만 그런 기대가 있습니다.”
스탠포드 말고 다른 계획도 있다.
“오롯이 내 자신의 수련을 좀 더 깊게 해볼까 하는 마음도 있어요. 때론 모든 게 무상하기도 해서요. 사회를 향해 자꾸 내 소리를 내려고 하는 이유가 무엇 때문인지 자주 들여다봐요. 내 존재를 입증해 보려고 하는 건가, 그러는 게 혹시 어릴 적 트라우마와 아직도 연관이 있는 건가 하는 생각에 스스로가 안쓰러울 때도 있구요. 그래서 사회가 나를 알아주는 것과 상관없이 내 향기를 가지고 나의 일을 하나 만들어 볼까하는 생각도 있습니다.”
밝은 웃음을 잃는 법 없던 그의 얼굴에 쓸쓸함 한줄기가 휙하고 지난다. 도인 같은 풍모로 자기만의 학문적 세계를 이야기할 때 느껴졌던 어려운 마음과 거리감이 그가 ‘무상함’을 말하는 순간 와르르 무너져 내린다. 나보다 많은 걸 알아도, 나보다 더 넓은 세계를 더 높은 곳에서 내려다볼 수 있어도... 그도 때론 쓸쓸하다는 것. 그것이 이 순간 지극히 평범한 삶을 사는 나와 여러모로 비범하기만 한 그와의 간극을 좁힌다. 인터뷰를 하며 알아가는 세상은 이렇게 우리가 서로 많이 닮아 있다는 것, 모든 생명을 지닌 것들은 기댈 곳이 필요하다는 것, 나무가 공기에 기대어 서 있듯 사람은 사람에게 기대어 살아간다.
그와 비스듬히 서서 서로를 받치며 살아가는 이에 대한 이야기를 물을 차례는 그렇게 왔다.
나라를 구하신 분
“아내는 제게 그룹 과외를 받던 학생 중 한 명이었어요.” 그 말에 장정아 선생님이 한 말씀 하신다. 참 여러모로 소설적인 인생이셔요^^
“그때 아내가 고2였는데... 대학 입학했을 때도 술 가르쳐준다면서 만나고... 그러면서 가까워졌죠.”
이분이 바로 ‘나라를 구하신’ 바로 그분이다. 뭔 얘기냐고?
에로스 강의 중 한두 번 이재형 선생님과 뒷풀이 자리를 함께할 기회가 있었다. 강의 주제가 주제이니 만큼 정말 실생활에서도 서로 온전히 소통하며 사시는지 궁금했다. 그 질문에 그런 것 같다고 답하시던 선생님. 부러우면 지는 거라지만 뒷풀이 내내 선생님의 이야기를 들으면서 열 번이고 백 번이고 난 계속해서 지고만 있었다. 아! 저분을 데리고 사는 여인은 무슨 복인가... 그러다 심술이 나서 한마디 던졌다.
선생님과 사시는 그분은 도대체 무슨 복이시래요? “전생에 나라를 구했나 봐요”하시고는 웃으신다. 그 대답에 합석했던 여자 수강생들은 모두 전의를 불태웠다. 우린 지금부터 살림 때려치우고 나라를 구해야 한다!
“한의대 준비하면서 결혼을 하게 되었죠. 아내가 고생이 많았어요. 어렵게 자란 사람인데 맑고 착하고... 깊은 느낌 그런 게 참 좋았어요.” 말씀을 들으니 어쩐지 두 분이 굉장히 닮았을 것 같아요.“저보다는 그릇이 더 크구요, 무슨 일이든 차근차근 쌓아나가는 끈기가 있죠. 저는 그렇게 차근차근 하는 건 잘 못 해요. 마음에 드는 게 있으면 확 쏠렸다가 또 옮겨 가고...”
그 끈기를 통해 아내 분은 지금 판사로 재직 중이시다. 주로 ‘나라’와 관계있는 일만 하시는 거 보니 이분이 뭔가 스케일이 큰 거를 이루어내는 능력은 확실히 있으신 것 같다. 19살에 만났으니 연애까지 합치면 30년이 족히 되는 세월. 아무리 나라를 구한 내공의 소유자와 우주적 철학을 가지고 있는 자의 만남이라지만 내내 마냥 좋기만 했을까?
“전 늘 제 아내를 존경하고 사랑하는 마음이 있어요. 아내는 어땠는지 잘 모르겠지만 저는 아내가 싫었던 적은 단 한 번도 없었어요.” 아, 네... 그럼 부부 관계에서 생기는 문제나 마찰 같은 것은요?
“문제들이야 왜 없겠습니까만 결정적으로 큰 것은 없었다고 생각하는 거죠...” 아니, 그럼 선생님을 찾아오는 많은 문제 부부들의 괴로운 마음을 어떻게 이해하세요?
“저에게는 이런 부부관계에 대해 이해하는 관점이 있습니다. 남녀의 차이에 대한 오해로, 또 의사소통법의 문제로, 원가족의 이해의 부족 등으로 부부관계의 갈등이 빚어지지만 또 하나의 축인 부부의 성이 온전히 만나지지 않을 때 결정타가 되는 것을 많이 확인하게 됩니다. 몸과 마음의 기를 교류하는 방식을 제대로 익히면 부부관계의 큰 문제는 없어지리라 믿는 것입니다.”
그 철학 언제부터 실천하신 거예요?
“결혼 생활 처음부터요.” 결혼할 땐 한의사도 아니셨잖아요?
“이쪽 학문에 계속 관심을 두고 공부해 와서 결혼 전부터 알고 있었죠.” 꼭 만나서 물어봐야겠다, 나라 구하는 법! 그럼 부인께서도 부부관계에 대해서 같은 생각이실까요?
“그거야 모르지요. 다만 쑥스럽지만 제가 아내에게 들은 기분 좋은 칭찬에 의하면, 아내는 제가 따뜻한 사람이라고 말하더군요. 적어도 남녀에 대한 차별은 뼛속 깊이까지 전혀 없는 사람이라고...” 그러니까 두 분이 서로 존경하시는 사이시군요?
“아내가 절 존경하는 지는 잘 모르겠어요. 실은 제가 생활적인 면에서는 모자란 부분도 많은데... 못도 잘 못 박구요, 실생활에서 보통 남자들이 담당하는 일들을 전 잘 못해요. 살면서 이사를 총 8번 정도 했는데 한두 번인가는 이사갈 집을 당일까지 모른 적도 있어요. 아내도 처음엔 그런 면 때문에 많이 속상해 하더니 이젠 포기한 것 같아요. 노력해도 안 되는 부분이니까요.”
부부관계에 대해서 집요하게 물었던 건 그도 평범한 부부들처럼 오랜 결혼 기간에서 오는 다양한 문제들을 겪었을 거라는 확신이 있어서였다. 툭하면 싸움으로 번지는 대화와 더 이상 즐길 수 없는 성과, 반복되는 일상이 주는 권태... 그리고 그 확신은 상식적으로도 정당한 것이었다. 그에게는 어떤 부부문제들이 있었는지, 그 문제들은 어떤 계기로 불거졌는지, 어떻게 극복해냈는지... 그런 경험들을 고수에게 꼭 듣고 싶었다. 하지만 그런 나의 꿈을 그는 무참히 폐기처분시키고 말았다. ㅠㅠ
쟌다르크의 오른팔
부인과의 관계는 그렇다 치고 그러면 아빠에 대한 아이들의 평가는 어떤가요?
“제가 최근에 구본형씨의 책을 읽다 공감하는 부분을 발견했는데... 자신은 굉장히 수동적인 사람이더라고, 근데 이걸 능동적으로 바꾸려면 거기에 드는 에너지 비용에 비해 결과는 보잘 것 없더라고... 차라리 수동적인 특성을 살려보려 애쓰는 게 더 현명하겠다는 생각을 했대요. 예를 들어 사냥을 할 때도 능동적인 사람들은 창을 들고 쫓아가 사냥감 척추에 창을 꽂으면 되는 거고 자기처럼 수동적인 사람들은 덫을 쳐놓고 기다리면 된다는 거죠.”
저기요 선생님, 지금 무슨 말씀을 하시는 건지...
“근데 그렇게 수동적으로 해서 사냥에 성공하려면 그 덫이 매력이 있어야 한다는 거죠. 그 말에 공감이 가더라구요. 저도 수동적인 사람이라... 그렇다면 나도 매력이 있어야 하겠는데 그게 뭘까... 고민하다가 딸들에게 물어봤죠. 그랬더니 큰딸이 ‘아빠는 솔직한데 그 표현들이 공격적이지 않아서 사람들이 편안해 하는 것 같다’고 그러더라구요. 그래서 나만의 매력을 잘 활용해 보려고 메모까지 해 두었죠. 앞으로 그걸로 덫을 놓으려구요.”
둘째 따님한테도 물어보셔야죠, 수동적이시니 매력 하나 갖곤 어려울 텐데... ㅋㅋ
“둘째는 아빠하면 제일 먼저 떠오르는 이미지가 식탁에서 밥 먹으며 무언가를 재미있게 설명해 주는 모습, 그게 좋았다고 말하더라구요.”
결론적으로 그가 사냥감에게 어필해야 할 필살의 매력은 ‘온화함’인 듯하다. 나도 그 매력의 가치를 충분히 인정한다. ‘이재형’하면 온화한 웃음과 나지막한 목소리가 먼저 떠오르니까... 타고난 걸까?
“태생적인 것도 일부 있겠지만 사실 어렸을 땐 좀 까칠한 성격이었어요. 몸이 늘 건강하지 못해서 그랬겠죠. 사실 성격도 건강과 관련이 많더라고요. 실제로 비장과 위장이 약한 사람은 인간관계에서도 비위가 약해서 싫어하는 사람이 많게 됩니다.. 제가 그런 경우였는데 이런 원리들을 이해하고 수련을 통해서 비위가 건강해지면서 성격도 많이 변한 것 같아요. 지금은 100명 중에 20명 정도만 밉고 80명 정도는 크게 밉지 않고 이해로 봐지니 저로서는 큰 발전인거죠.”
건강을 얻었다고 해서 이런 온화함까지 덤으로 생긴 건 물론 아니다. 수동적인 그가 지닌 그 매력은 사실 능동적인 노력에서 왔음을... 이런 매력을 십분 살려 조만간 비폭력대화와 남녀 간의 차이를 이용한 원리 등을 결합해서 의사소통에 관한 프로그램을 꾸릴 계획도 갖고 있다. 이렇게 온화한 덫을 놓을 줄 아는 아빠는 아이들에게 무슨 이야기를 할까?
“재밌게 살라고 얘기하죠. 세상은 경험해 봐야할 신비다....”
근데 정작 선생님은 진료하고 강의하고 공부하고... 아무리 배우고 가르치는 게 재밌다 해도... 그러니까 제 얘긴, 좀 다른 차원의 재미, 오락 그런 쪽으로는 뭐 없으세요?
“모든 종류의 스포츠를 좋아하구요, 사실 좀 잘 해요(일동 웃음).... 혼자 하는 운동은 별로구요 팀으로 하는 걸 더 좋아하죠. 여러 사람들이 모였을 때 나오는 의외의 힘이 역동적으로 움직이는 그런 거... 저한테는 역시 팀워킹이 맞는 것 같아요. 근데 요즘엔 시간적 여유가 안돼서 못 하죠. 공부도 몸으로 직접 경험하는 집단 워크샵 이런 걸 더 좋아하구요.”
선생님! 부인께서 나라를 구하실 때, 그때 제가 부인의 오른팔이었습니다. 그래서 부부연까지는 아니더라도 이렇게 스승과 제자로 만나게 된 거거든요... 그게 얘기가 그렇게 된 겁니다... 제가 사실 한 무술하거든요. 이제 아셨죠? 하하하
치유를 향한 꿈
여러 곳에 관심이 많은 만큼 공부한 것도 그래서 아는 것도, 능력도 많은 그. 현직이 한의사라고 해서 진료만 하지 않는다.
“구성애 선생님이 운영하시는 아우성에서도 강의했구요, 아하센터에서도 했고 기업체나 대학에서도 강의했죠.” 진료의 영역을 벗어나 가르치는 자리에 서신 이유가 있으신가요?
“예전에 수원에서 한의원 할 때, 그땐 하루에 150명 이상씩 환자를 봤어요. 부원장도 3명씩이나 두어가면서.., 근데 회의가 좀 들더라구요. 지금 이곳으로 옮겨 오면서 한의원에만 묶이지 않겠다는 다짐을 했죠. 제가 아무리 노력해도 하루에 100명 정도 볼 수 있는데 차라리 강의를 하면 더 많은 사람들을 도울 수 있지 않을까하는 생각을 했죠. 그것도 치유의 일종인 거고... 그런데 핵심적인 건, 무엇보다 배우고 가르치는 일이 제게 잘 맞는 것 같아요. 내가 잘 하고 재미를 느끼는 것, 내 향기 속에 그냥 머물러 있어도 나를 편하게 만들어 주는 것... 배우고 그 배움을 가르치는 것이 그렇더라구요. 내가 배운 것을 쉽고 재미있게 잘 전달했을 때 느껴지는 소통의 즐거움... 거기에 제 달란트(소명)가 있는 것 같습니다.”
앞으로 그 소명을 어떻게 가꾸실 생각이세요?
“ 전인치유센터 같은 곳을 운영해 보려고 준비 중입니다. ‘진정한 앎, 치유, 예술’ 이 세 요소가 결합된 형태가 될 거예요. 쉼터이기도 하고 놀이터이기도 하고 치유하는 장소이자 배움의 공간도 되는 그런 곳... 일방적으로 누가 가르치는 것만 하는 게 아니라 서로 가르치고 서로 배우는 곳이죠. 그 공간에서 제도권 학문과 재야의 학문 모두를 아우르는 배움을 실현시키고 싶어요.”
그가 설명하는 이 두 가지 학문의 특성은 이렇다. 제도권 학문은 안전하다는 것, 검증을 이미 거쳤다는 것을 장점으로 한다. 하지만 새로움을 주는 원천이 부족한 관계로 좀 답답할 때도 있고 날카로움이 덜 하다. 그에 반해 재야의 학문은 바로 그 새로움의 원천이라는 점에서 빛나는 가치를 지니지만 아직은 거칠고 때론 과장돼 있다. 그가 만들어 낼 그 어메이징한 공간에서는 이 두 학문이 조화롭게 만나 엄청난 시너지 효과를 낼 것이다.
“지금 재야에 있는 것들 중에 검증을 거쳐 제도권 안으로 들어오는 것들이 많습니다. 참 재밌는 것들이 많아요. 이렇게 재야와 재조가 만나는 일에 한 역할을 한다면 재미도 있지만 보람도 있을 것 같아요. 요즘 구상하는 것 중에 하나는, 이미 하고 있는 ‘LIGHT’ 프로그램에서는 주로 몸에 관련된 것들을 하고, 따로 ‘SHADOW’라는 걸 만들어 볼까 해요. S는 섹슈얼리티, HA는 힐링 아트로 예술을 통한 치료, DOW는 dream of wholeness라 해서 꿈을 통한 전인적인 치유... 이런 것들을 모두 통합하는 무의식의 작업을 해보고 싶어요.”
공간에 대한 그의 꿈은 끝이 없다. 하지만 어찌 보면 그 공간은 그의 꿈을 위한 수단일 뿐이다. 그가 그런 공간을 꿈꾸는 건 그 안에서라면 ‘내가 내 향기 안에 그냥 머물러 있어도 행복해질 수 있는’ 그의 진짜 꿈이 이루어지라 믿기 때문이다.
“전달하는 방법도 다양하게 만들 겁니다. 강의뿐만 아니라 워크샵, 몸으로 먼저 체험하고 원리를 배우는 액션 러닝의 형태도 있고, 영화나 연극을 직접 만들 수도 있는 거고 개그콘서트 같은 장르도 도입하고 싶고, 몸을 터치함으로써 할 수 있는 마사지 같은 형태도 있고, 춤을 출 수도 있고... 재밌을 것 같지 않아요?”
그러면서 아이처럼 즐거워하는 그. 진짜로 그런 공간이 생긴다면 어른들을 위한 놀이공원이 되지 않을까 싶다. 자유이용권은 얼마나 할라나요? ^^:
“그런 곳을 만들어 낡은 틀을 벗어나 현대적인 경영 방식으로 운영해 보려구요. 경영도 좀 배워야 하는데... 그래서 요즘 소셜커머스나 SNS같은 새로운 네트워킹에 관심이 많아요.”
그의 꿈 이야기를 듣다 내게도 난민과 이주여성, 미등록 노동자들을 위한 사회적 기업의 CEO가 되는 꿈이 있다고 말했다. 그러자 그가 내게 동업을 제안한다.
“제가 한의사이면서도 인간에 대한 탐구에 관심이 많다보니 가족상담 전문가, 다문화가족 상담 전문가 자격도 있어요. 그래서 저도 그런 쪽으로도 관심이 있고 앞으론 그런 영역까지 좀 폭을 넓혀 일하고 싶어요. 언젠가 같이 일을 할 기회도 있겠네요.” 저는 무조건 콜이죠, 선생님!
Grand Master
선생님이 강의하셨던 에로스 강좌를 작년 가을, 올해 봄 이렇게 두 번이나 들었다. 그만큼 내게 절실한 문제였다, 그 에로스란 놈은... 20년이 넘은 관계에 크고 작은 문제들이 어찌 없겠냐마는 그때 난 유독 부부관계의 전환 내지 회복을 바라며 힘든 시기를 보내고 있었다. 강의를 빠지지 않고 들었지만 달라지는 건 없었다. 그 결과를 두고 강의 내용만을 탓하던 시간들이었다. 모두 내가 할 수 없고 하기 싫은 내용들 뿐, 그래서 모두 내겐 너무 어려운 이야기들일 뿐... 에로스 첫 수강은 그렇게 덧없이 끝났다.
내 마음의 빗장이 어떻게 열렸던가... 이 봄, 다시 에로스 강의를 듣고 난후 내게 무슨 일이 일어났던 것인가... 내가 열리지 않는 마음 이야기를 꺼냈을 때 선생님은 어떤 가르침을 주셨던가... 그는 그저 안타까워했을 뿐이다. 여자는 마음이 열리지 않으면 그 어떤 것도 소용이 없음을 차분하게 인정해주셨을 뿐이다. 그렇게 대사부가 되어 나의 현재를 묵묵히 바라만 보며 수긍해주셨을 뿐, 거기엔 그 어떤 질타도 종용도 없었다.
내 안에 언젠가는 스스로 바른 길로 들어설 어진 마음이 들어있다는 걸 아셨던 건 아닌지... 그걸 미리 보시고 굳게 믿어주신 건 아닌지... 그래서 그의 가르침은 그렇게 조용하고 따뜻하기만 했던 건 아닌지...
그런 스승 밑에서 빗장은 소리 없이 풀렸다. 내 안에 측은지심이라는 귀한 마음이 생겼고, 그러자 철옹성 같기만 하던 남편이 달라졌다. 스승의 말은 그렇게 예언처럼 맞았다. 내가 바뀌자 상대가 느린 변화를 시작했다. 굳어 갈라지기만 하던 관계에 희망은 천천히 왔다. 내 마음이 조금씩 변화하기 시작했다고 말씀드리자, “정말 좋은 소식이네요. 덩달아 제 마음까지 환해지네요.”하시며 선생님이 보여주신 그 함박웃음을.... 난 오래 기억할 것 같다.
가르치는 자리에 선다고 모두 다 스승인 건 아니다. 교사, 강사, 선생님이라는 호칭과는 다르게 ‘스승’의 의미는 그래서 내게 각별하다. 내가 생각하는 스승은, 미명을(未明)을 깨우기 위해 어깨를 죽비로 내리치는 사람이 아니다. 가야할 곳을 정해주며 끊임없는 수행을 종용하는 사람도 아니다. 교육하고 교정한다는 명분 아래 얼음같이 차가운 가르침들이 이 세상엔 얼마나 많던가. 하여 내가 생각하는 스승이란 사람에 대한 애정이 모든 것의 바탕임을 절대 잊는 법 없는, 가르침이 따뜻한 사람이다. 이렇게 선생님의 인터뷰 글에 내 개인적인 얘기를 길게 써도 인상 한번 찌푸리지 않을, 오히려 맑고 환한 웃음으로 답할 거라는 믿음을 주는 사람... 내가 생각하는 스승이란 때로 이런 맹목적 믿음을 가능케 하는 그런 사람이다.
모든 사람이 스스로가 꽃이고 보석임을 깨닫는, 그래서 자기만의 고유한 향을 풍기며 함께 어우러지는 세상을 꿈꾸는 나의 스승...
“저는 이 우주에 불필요한 존재는 없다고 생각합니다. 그리고 그게 사실이라고 믿습니다. 내가 무언가 부족하고 그래서 누군가를 따라가야 하는 게 아니라 내 안에 숨겨져 있는 보석을 찾아내는 것... 모든 이가 그렇게 될 수 있는 세상 그게 제가 꿈꾸는 곳입니다.”
그리곤 나지막이 내게 묻는다. “어떤 꽃이세요? 어떤 보석이신가요?”
사람이 못나서 한 번도 내가 어떤 꽃인지, 어떤 보석인지 스스로에게 물었던 기억이 없다. 늘 내가 가지지 못한 것, 나에게 부족한 것들에 주목했고 그 결핍들을 어떻게든 메꾸어 보려 무던히도 애쓰며 살았다. 사람이 덜 돼서 자신한테만 그런 게 아니라 남들에겐 더 했다. 이 사람은 이래서 못났고 저 사람은 저래서 안 되고...
그렇게 주름지고 제 맘대로 꾸겨져 버린 깡통 하나를 발견한 그가 자세를 낮추며 묻는다. 그 진지함이 나를 꿰뚫고 깊숙이 박힌다. 문득, 가슴이 아프다.
나는 어떤 꽃이었나....
이 세상에 태어나 나 자신에게 수많은 것을 지치도록 묻고서도 단 한 번도 해보지 못한 그 물음을 처음으로 묻게 한 사람... 나의 그랜드 마스터(大師父), 나의 스승...
이게 그와의 만남을 두고 내가 그토록 가슴이 뛰었던... 바로 그 이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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