외부소식 l ※ 광고성 게시나 게시판 도배, 저작권 침해 게시글은 삭제됩니다.
여덟번째┃다시 처음이라오
- 4.jpg [File Size:276.0KB]
- 3.jpg [File Size:325.2KB]
- 2.jpg [File Size:241.9KB]
- 5.JPG [File Size:102.5KB]
- 1.jpg [File Size:127.8KB]
느티나무 백인보 여덟 번째 - 수강생 정애자
인터뷰 · 글 : 박현아 느티나무 시민기자
띵~동~
‘바쁜 아침... 15분 늦을 것 같아 죄송합니당’
문자가 왔다. 15분이라... 그 정도면 보통 사람들은 그냥 늦는다. 별 거 아니라고 생각하는 거다. 늘 깎아 놓은 듯 단정하신 선생님의 이미지가 떠올라 빙그레 웃고 말았다. 기다림의 초조함이 풀리며 한결 느긋해진다. 카페 구석에 가방을 내리고 준비해온 인터뷰 질문들이나 점검해볼까 하고 있던 순간, 어느새 맞은편 소파에 그녀가 자리를 잡고 앉는다. 이건 뭐 꼭 집어 약속에 늦었다고도 할 수 없는 시간 아닌가. 정작 10분도 넘지 않을 지각을 두고 이렇게 살뜰하게 살피는 그녀... 잘 닦아 놓은 유리창에 선뜻 손을 대지 못하듯 흐트러짐 없는 그녀의 태도 앞에서 질문을 던져야할 내 입도 그렇게 굳어버렸다.
카페 통인에서 정애자 수강생
뭘 물어야할까? 사람들은 그녀에 대해 무엇을 알고 싶어 할까?
“글세요, 뭐 좀 상투적이긴 하지만 나이 들어가는 것에 대해 물어보는 거 어떨까요? 아니면 노년의 에로스에 대해 어떻게 생각하시는지 물어도 괜찮을 것 같고...”
인터뷰를 앞두고 조언을 구했던 정세윤 간사의 의견 또한 내가 준비해 간 것들과 크게 다르지 않았다. 그렇지, 69세의 수강생이 인터뷰이라면 우리가 생각할 수 있는 질문들이란 다 거기서 거기... 나이를 빼고 생각하는 게 쉽지 않다. 이 빈약한 상상력을 가지고 뭔 놈의 인터뷰를 한다고, 그것도 백회씩이나, 쯧쯧...
줄기찬 반성 끝에 숙고해서 던진 첫 질문, “저, 선생님 올해 연세가... 예순 아홉 맞으시죠?”
기댈 곳이라곤 그 빈약한 두뇌 밖에 없는 내 입이 고생이다.
나는 사서(司書)다
그 바보 같고 재미없는 나의 첫 질문에 “네”하고 짧게 끊으신다. 뜨끔...
지금 필요한 건 뭐? 스피드! 바로 다음 질문으로 패스~
누가 봐도 곱게 자라시고 많이 배우신 티가 나는데... 맞죠?
“대학에서 사회학을 전공했어요. 이 땅의 모든 어머니가 그렇겠지만 저의 어머님이 훌륭하셨다고 봐야죠. 일제시대를 사셨던 분인데 그때 인품이 좋은 일본인 가족을 만나서... 그 분들이 어머니를 자기 딸처럼 대해주셨다고 그러셨죠. 그 집 아이들과 같이 놀고 여행도 같이 데리고 가고... 그런 경험들을 해서 그런지 당시로 보면 상당히 깨치신 분이었지요. 제가 고등학교 졸업 하던 해에 펜팔로 사귀던 남성여고 친구 만나러 부산에 혼자 가는 걸 허락하실 정도였으니까요.”
1943년 생으로 대학에서 사회학을 전공한 여성. 참고로 우린 엄만 1948년 생으로 시골 초등학교 졸업이 학력의 전부다. 내 친구들 엄마들도 사정은 다 비슷했다. 많이 배워야 고등학교, 그래선지 대학 나온 엄마를 둔 친구들은 뭐가 달라도 달랐다. 어린 맘에 그런 똑똑한 엄마들 둔 게 마냥 부럽기만 했는데... 지금 보니 선생님이 딱 그런 케이스다.
“서울 영천에서 살았는데 금화초등학교에 다닐 때 6.25가 터졌어요. 다시 환도해서는 덕수초등학교를 다니게 되었죠. 당시만 해도 덕수초등학교를 나오면 거의가 실력 있는 상급학교들로 진학을 했죠. 남자아이들은 경기, 서울, 경복 이런데 가고. 여하튼 어려운 시절임에도 어머니 덕분에 초등학교를 무사히 졸업할 수 있었어요.”
중학교도 입시가 있던 시절이다. 좋은 학교를 가려면 지금처럼 부모의 서포트가 필요했던, 그래서 있는 집들은 과외도 하고 숙식을 함께 하는 가정교사도 있었던 때...
“남들처럼 할 수 있는 형편은 못 되었어요. 그냥 간신히 중고등학교를 다녔는데 중3, 고1 때는 책에 빠져서 학교공부도 제대로 안 했지요. 교과서 뒤에다 책 숨겨서 수업시간에 보고... 을유문화사, 정음사에서 나온 책들이었죠. 그래서 대학 못 가는 줄 알았어요. 워낙 책을 좋아해서 국문학과 가고 싶었는데... 4년 기숙사 생활을 해야 하는 학교의 사회학과에 가게 된 거죠. 대학 때는 전공보다도 4년 내내 기숙사에 있으면서 사회생활에 대해 더 많이 배웠어요. 한 방에서 선후배들과 함께 지내야 하니까...”
카페 통인에서 정애자 수강생
학교라는 제도권 교육조차 여자한테는 언감생심이던 시절이었다. 하지만 개념 있는 어머니 덕분에 살림밑천 따윈 되지 않아도 되었다. 차비가 없어 걸어야하는 날들도 있었고 교복도 한 벌 뿐이었지만 여자도 공부해야 한다는 어머니의 신념 아래서 문학과 책으로 가득한 유년을 보낼 수 있었다. 아르바이트도 도서관에서 했다. 그리고 그 일은 평생의 업이 되어 졸업 후 모교 도서관에 사서로 남았다. ‘사서’라는 말조차 무척 낯설었던 1960년대 중반의 일이다.
“우리나라에 도서관학과가 처음 생긴 게 1957년이에요. 그 전에는 자격증이라는 것도, 제대로 된 교육 기관도 없었죠. 연세대 도서관학과가 1961년 처음 졸업생을 배출하면서 사서라는 것이 전문직으로 출발하는 계기가 되었어요. 그러면서 연세대 한국도서관학당에서 1년 과정의 사서교육프로그램을 운영했는데 저도 그 과정을 이수했고 그렇게 자격증을 따서 정식으로 사서가 되었습니다.”
우리나라 사서의 역사를 정확한 년도까지 들어가며 줄줄이 꿰는 그녀. 사서라는 직업에 대한 애정과 자부심으로 그녀의 목소리는 지금 ‘볼룸 업’ 중이다.
그렇게 책을 좋아하시더니 책과 한평생을 보내셔서 그래 얼마나 많이 행복하셨어요?
“새 책을 보면 기분 좋았죠. 쉽게 접할 수 없는 책들도 먼저 볼 수 있었구요. 하지만 그게 전부는 아니에요. 도서관에서 일한다고 하면 사람들이 좋겠다고 얘기해요. 책 많이 보고 책 빌려 주고... 그렇게 단순하게들만 생각하죠. 하지만 책을 구입해서 그 책이 서가에 꽂히기 전까지 해야 하는 작업들은 결코 단순하지 않아요. 지금처럼 모든 게 전산화되기 전에는 책을 일일이 분류하는 일도 쉽진 않았죠. 미국의 경우 국회도서관에서 새 책을 모두 분류해서 내보내기 때문에 대부분의 도서관들은 그걸 따라만 하면 되는데 우린 일일이 각 도서관들이 그 일을 해야 했어요. 그래서 당시는 그런 작업을 하는 정리실이 매우 중요했었지만, 지금은 아웃소싱도 많이 하고, e 좋은 세상 덕분에 이용자 중심 도서관 또는 정보관으로 발전 중이죠.”
그녀의 일 이야기를 길게 들었다. 그리고 그녀가 마음껏 얘기하도록 내버려 두었다. 한 사람의 인생에서 37년 간 이어졌던 단 하나의 직업.... 그런 생각이 들자 그녀가 내뱉는 얘기들이 그저 인터뷰어가 던진 질문에 대한 답변으로만 들리지 않았다. 젊은 날을 전부 받쳐서 해낸 일과, 그 길었던 시절에 대해 추억하며 기리는 시간... 이미 그곳에서 멀리 떠나와 있음에도 채 식지 않고 있는 그녀의 가슴.......
지난날이라는 딱지를 붙이고 빛이 바래는 모든 것들이 나를 슬프게 한다.
스캔들
빈약한 두뇌에 대한 보상인 듯 과하게 발달된 EQ 덕분에 시선이 자꾸 인터뷰 현장에 머무르지 않고 흐려진다. 그렇게 한동안 그녀가 머물렀을 도서관의 서가 어디쯤에 서서 오래된 책들 냄새를 맡았다. 그러다 불쑥 궁금해졌다. 평생 책만 사랑하신 건 아니시죠?
"스캔들이 있었죠." 그녀가 결혼이나 연애가 아니라 정확이 ‘스캔들’이라 말하는 데는 이유가 있었다.
“여행도 좋아하고 산행에도 관심이 많았어요. 어느 날, 서점에서 ‘산(수락산우회 발간)’이라는 무크지를 보게 되었는데 그 안에 1년 치 등산 일정표가 있는 거예요. 5월 둘째 주에 그 책을 들고 찾아갔지요. 1965년 일이에요. 그 모임에서 그를 만났죠.”
무슨 사연이든 먼저 정확한 년도부터 대며 말문을 여시더니 스캔들 이야기가 나오자 드디어 몇 월 몇째 주까지 등장한다. 사랑의 기억은 그렇게 예리하다.
“당시 모임에 뜸하던 한 남자에 대한 얘기들을 사람들이 많이 하더라구요. 제가 가지 않은 울릉도에 그 사람이 왔었는데 무척 재미있었다고... 도대체 어떤 사람일까 궁금해 하다가 등산 전 모이는 자리에서 몇 번 그를 봤고... 그러다 그 모임 누군가의 결혼식에서 그를 꽤 오래 보게 된 거예요. 근데 그 때 그 사람이 어떤 상태였냐면, 친구가 만나던 여자와 헤어졌는데 그 여자를 위로한다고 만나다가 그 여자와 결혼을 했다고 하더라구요...”
유부남이라구요? 느긋하게 듣고 있다가 깜짝 놀랐다. 그걸 알고도 만나셨어요? 진짜?
그래... 난 촌스럽다.
“그때는 관계가 그렇게까지 발전될 거라고 생각하지 못했죠. 그 이듬해 모임에서 울릉도에 또 갔는데 안 온다던 그가 거기 왔더라구요. 여행이 끝나고 모두 서울로 올라가는데 우리 둘은 그의 누나가 있는 마산까지 같이 갔고 거기서 하루를 보내고 올라왔죠.”
일은 그렇게 시작되었다. 애초부터 조용하게 마무리될 연애는 아니었다. 아니나 다를까 폭풍이 분다.
“그 때가 1969년도예요. 근무하는 학교도 기독교 계열이라 아침마다 예배드리는... 그런 곳에 미니스커트에 손톱을 기다랗게 기른 여자들(그 남자의 부인과 그 부인의 이모란다...)이 들이닥쳐서는 학교를 발칵 뒤집어 놓았죠. 지금 생각해도 참 책임감 없는 남자였어요. 자기 선에서 마무리 짓지 못하고 일을 그 지경까지 만들다니...”
이건 아니다 싶었다. 그래서 만나는 걸 그만 두었다. 하지만 한 번 풀린 감정은 쉬이 정리되지 않았다. 근무지도 다른 곳으로 옮겼다. 그냥 다녀도 별 문제 없었을 테지만 도저히 그렇게 할 수 없었다. 직장이기 이전에 4년을 공부했던 모교 아니었던가... 얼마 후 그 남자의 이혼 소식이 들려왔고 그 여인들은 옮겨간 학교에 다시 나타나 행패를 부렸다. 더 먼 곳으로 갈 수 밖에 없었다. 그렇게 울산의 학교로 떠났다.
“그렇게 멀리 떠났을 때 그 사람과 완전히 정리가 되었어야 신수가 편했을 텐데... 그러질 못했어요. 결국 1971년도 가을에 결혼식을 올렸죠. 혼인신고는 미뤄둔 채 그렇게 그 남자와 4년을 살고 나선 미련 없이 그 곁을 떠났어요. 너무 힘들게 해서 견딜 수가 없었죠......”
사랑은 비극이어라, 추억은 다르게 적히고, 잘 가라는 인사도 없이 이별이 치러진다. 어제와 같은 시간은 계속 흐르고, 내 앞에 앉은 그녀의 머리 위로......... 바람이 분다.
“이런 얘긴 이렇게 환한 대낮에 이렇게 하는 게 아닌데, 술 한 잔 걸치면서 해야 하는데...”
닦아 놓은 유리창 같기만 하던 그녀였다. 언제나 너무 반듯하여 그 안에 이렇게 소용돌이 치는 사랑 이야기가 있을 거라곤 상상치 못했다. 세월을 거슬러 보니 그 맑은 유리창에 거친 흙비가 뿌리고 얼음이 쩡쩡 달라붙는다. 홑겹으로 바람 앞에 덜컹거리며 흔들렸을, 그럼에도 금이 가지 않은 채 견고하게 내 앞에 앉아 있는 그녀... 여전히 손대기 겁날 정도로 맑게 빛나는 유리창이다.
무소의 뿔처럼 혼자서 가다
“그런 일이 있고 나서 내 안의 방어기제가 단단해졌어요. 그러니 연애가 어렵더라구요. 남자와 함께 있을 때면 곁에 오지 말라는 경고가 어떻게든 내 몸에 나타나는 거죠.”
그녀와 같이 에로스 강의를 들었다. 그래서였을까... 그래도 여전히 사랑은 중요한 거 아니냐고, 여자로서의 인생도 있는 거 아니냐고, 약간은 따지듯 물었던 것 같다.
“사랑... 불타는 가슴은 여전히 저도 중요하다고 봐요. 나 또한 그런 기억은 무수히 많고... 다만 불타는 가슴이 향하는 곳이 반드시 이성이어야 할 필요는 없다고 생각해요.”
이런 그녀의 말에도 난 꿋꿋하게 ‘사랑은 늙지 않는다’라는 표제를 달고 나온 이번 주치 시사인을 앞으로 디밀었다. 어떻게 생각하세요?
“사랑은 늙지 않는다... 맞아요. 맞긴 맞는데, 내 경우는 그 삶의 에너지가 이성이 아닌 다른 곳으로 옮겨갔다고 할 수 있죠. 무소의 뿔처럼 혼자서 가라라는 말도 있잖아요, 혼자서 강하게 그렇게 살아가는 것...”
서로 사귄 사람에게는/ 사랑과 그리움이 생긴다.
사랑과 그리움에는 괴로움이 따르는 법/ 연정에서 근심 걱정이 생기는 줄 알고
무소의 뿔처럼 혼자서 가라
숲속에서 묶여 있지 않은 사슴이/ 먹이를 찾아 여기저기 다니듯이
지혜로운 이는 독립과 자유를 찾아/ 무소의 뿔처럼 혼자서 가라
- 무소의 뿔처럼 혼자서 가라 <불경 '숫타니파타' 중에서>
한번 불타올랐던 자리는 다시 불이 붙지 않는다. 사랑 앞에서 이미 그녀의 피부는 무소의 그것처럼 단단해져 있었다.
“그렇게 스캔들이 끝나고... 직장이 학교다 보니 출퇴근 시간도 정확한 편이었고, 그러다 보니 세상을 좀 넓게 살 수 있는 조건이었어요. 70년대 초반 즈음 바오로서원에서 지금처럼 사회교육을 했었는데 좋은 것들이 많았고, 전진상 교육관, YMCA도 그랬고, 인사동 태동서원에서 하는 고전 교육 프로그램도 들었고. 그러다가 83년에 교육대학원에서 사서공부도 조금 더하고 모교 대학원에서 문헌정보학 수료도 하고 그러다가 다시 방송통신대 중어중문학과에 입학했어요. 그때만 해도 방통대가 5년제였죠.”
무소의 뿔이 무서운 기세로 향한 곳은 공부였다. 끝이 없는 공부 얘기를 듣다보니 그녀의 스캔들이 새겨놓은 상처가 이 만큼이었나 하는 의심마저 들었다.
“세상이 빠르게 변하고 발전하고 있었어요. 적응해야 했고 앞서 나가고 싶은 욕심도 있었고 그러려면 준비가 필요했죠. 도서관에서 근무한 덕분에 지금도 6개월에 30권 빌려 읽을 수 있는 혜택이 있는데 그걸 적극 이용하고 있어요. 책을 읽다보면 그 내용들과 연관 지어 읽어야할 책들이 나오게 마련인데 다는 못 읽어도 중요한 것들은 챙겨 보려 노력하구요.”
인터뷰 중간 중간 그녀가 세상을 돌아다니며 배우고 공부한 이야기들이 무수하게 나왔다. 세명대 서울강의실에서 일반인들에게도 오픈했던 사회교양 특강, 국립중앙도서관의 ‘저자와 함께하는 책세상’ 프로그램, 할머니들을 위한 동화 구연 프로그램, “작은책” 특집강좌, 수유너머 강좌 등등... 느티나무 강의만 해도 2009년부터 지금까지 쉬지 않고 수강 중이다.
"느티나무 강의에 대한 의견이라... 참 좋은 강의가 많아요. 물론 시간이 안 되어서 못 듣는 분들도 많겠지만 늘 듣는 사람들만 와서 듣고 공부하고... 너무 안타까워요. 지난번 쟈스민 혁명을 시작으로 중동 문제가 터졌을 때만 해도 느티나무에서 관련된 강의가 있었는데 사람들이 별로 관심을 보이지 않더라구요." 맞아요! 좋은 강의 많은데...저도 안타깝습니다. ㅠㅠ
"짧은 지식과 생각에서 출발하지 말고 공부해서 큰 틀을 놓고 생각해야 해요. 취업문제, 사교육 문제, 비정규직 문제들이 단시간 안에 해결될 것들이 아니잖아요. 노후문제만 해도 이 땅을 떠나지 않는 한 개인의 힘으로 풀 수 있는 게 아니고 정부와 정책의 큰 틀이 바뀌어야 하는데 그러려면 세계적 흐름, 사회 전체를 꿰뚫는 시각이 필요하고... 그걸 알려면 꾸준히 공부하고 깊이 있게 생각해야 하는 거 아니겠어요?" 맞습니다! 맞고요...
공부에 대한 엄청난 이야기들을 입만 떡하니 벌리고 듣다가 문득 그녀의 나이를 다시 곱씹었다. 69세... 하지만 난 도저히 그 나이를 물리적으로 느낄 수가 없었다. 본인이 늙었다는 생각 따윈 하지 않으시죠?
“전철 방향을 바꾸어 타거나, 자기 침에 사래가 걸린다던가, 내 발에 걸려 넘어진다거나... 내가 용납할 수 없는 미스터리들이 늘어날 때 나이 들었다는 생각은 하죠.”
아니 그런 신체적인 거 말고요, 흔히 우리가 꼰대라고 하잖아요.... 많은 사람들이 나이 먹는 걸 두려워하는 건 자신이 젊은 사람들 앞에서 꼰대짓하면 어쩌나 하는 두려움 때문이다.
“나이 차이 때문에 사고하는 방식이 다르다고 보지 않아요. 단지 사람의 다름에서 오는 것이라 생각할 뿐이죠. 뭘 하든 그 행동 때문에 행복하고 그것이 자랑스럽다면 그걸로 된 거죠. 그 기준으로 생각하면 되는 거지 나이가 무슨 상관있나요...”
소리에 놀라지 않는 사자와 같이, 그물에 걸리지 않는 바람과 같이, 흙탕물에 더럽히지 않는 연꽃과 같이 무소의 뿔을 세우고 가기에 그녀는 세월과 나이에도 걸리지 않는 것인가...
배스킨라빈스 31
사랑도 배움도 말만 나왔다 하면 내 상상력을 훌쩍 뛰어 넘는 이분께 ‘뭐하고 노세요?’를 묻는다. 일단 기대치를 높일 수 있는 만큼 올려놓고 시작했는데도 또 뒤통수 맞았다.
“오십이 넘으면서 공식적인 공부과정들이 대부분 끝나니까 주위 사람들이 이제 뭐 할 거냐고 묻더라구요. 운전도 배우고 싶었고 아마추어 무선도 배우고 싶었어요. 다시 공부를 시작해서 바로 이듬해 둘 다 자격증을 땄지요.” 아마추어 무선이요???
“아마추어 무선도 한 3년간은 정말 열심히 해서 어떤 사람과는 1년 넘게 매일 교신하기도 했어요. 사실 제대로 하려면 먼 나라 사람들과도 교신을 해야 하는데 언어 때문에 쉽지 않았죠. 넓은 세상에 대한 꿈... 그래서 에스페란토어를 배우게 되었어요.” 에스페란토어요???
“에스페란토어 하는 사람들은 세계 모든 인류가 형제자매라는 정신으로 세계평화를 추구해요. 매년 국제대회도 여는 데, 거기에도 여러 번 참석했지요. 이탈리아, 이스라엘, 크로아티아, 베트남... 작년에는 쿠바에서 했는데 거기도 갔었구요. 젊었을 때 시작했으면 더 실력이 좋을 텐데 하는 아쉬움이 많이 남아요.” 국제대회라구요???
“워낙 산을 좋아하니까 월요일이면 친구들과 등산하구요... 연극, 영화 엄청 봤어요. 그러다가 발레, 재즈댄스, 한국무용 등등 무용 쪽으로 관심이 옮겨갔었는데... LG아트센터는 개관하고 한 3년은 개근상을 탈 정도로 열심히 다녔어요. 근데 어느 날 갑자기 관람료가 너무 많이 오르더라구요. 내용도 그게 그거고 인기 있다하면 재탕하고... 국립극장에서도 좋은 공연 많이 했었는데 독립채산제가 되면서 가격이 뛰고 그러면서 그쪽도 좀 시들해졌죠.” 와....
그래도 요즘은 다시 즐거워졌다. 집근처 이화여대 안에 모모극장이 생겨서 오천원만 들고 가면 좋은 영화를 언제나 볼 수 있기 때문이다. 요즘 같은 봄밤이면 저녁식사를 마치고 산책삼아 극장까지 걸어가고 좋은 영화를 보고 다시 집으로 돌아와 잠이 든다.
인터넷에서 얼굴도 모르고 만난 이들과도 좋은 인연으로 발전해 번개모임을 갖기도 한다. 올해는 그 번개모임이 하와이에서 있었단다. 어디요??? 동네 나이트 말고 진짜 섬 ‘하와이’ 말씀하시는 거지요? 이제 놀라는 것도 힘에 부친다. 끙~~
이렇게 글로벌하고 열정적으로 노시는 이분이 자신을 위하는 것들로만 일상을 꽉 채우는 것도 아니다. 생명의 전화에서 자원활동을 30년이 넘게 했고 금요일엔 호스피스 자원봉사도 한다. 호스피스 활동을 하려고 150시간 교육도 받았단다. 내 모습이 점점 동네 바보를 닮아가고 있다.
공부, 노는 것, 사회적 역할 어느 것 하나 뒤쳐짐 없이 고스란히 담고 가는 삶... 이렇게 잘 꾸리며 살아왔고 또 그렇게 살고 있는 그녀에게도 남겨진 꿈이 있을까?
“칠십이 되면 직접 운전해서 한 5년 정도 우리나라 구석구석 여행 다니는 것 그게 지금 꿈이죠.” 워낙 여행을 좋아하기에 다음 달엔 혼자 영국으로 떠날 계획이다. 혼자서도 행복해야 진짜라는 거, 그걸 온몸으로 실천하고 있는 1인이다. 그러나 그녀의 꿈 이야기는 아직 끝나지 않았다.
“일하고 공부하고... 어찌 보면 다른 사람에게 피해를 안 주려고 노력하는 삶을 살아왔다고 볼 수 있어요. 근데 곰곰이 생각해 보니까 그게 나 하나만 잘 가꾸어 온 삶이었던 거고 거기서 문제의식이 생겼죠. 같이 잘 살아야하는데 나 하나만 편했던 공부를 해왔다는 생각... 그래서 요즘에는 공동체가 내 인생의 화두가 되었어요. 수유너머에서 같이 공부하는 젊은이들 하고 머리를 맞대고 있는 중이에요. 공동체라는 것에서 나의 역할을 찾고 싶어요.”
한 달 내내 다른 아이스크림을 먹을 수 있게 하겠다는 의미의 배스킨라빈스 써티원. 그녀의 인생 얘기를 듣고 있자니 그 다채로운 아이스크림 생각이 불현듯 났다. 그녀가 들려준 인생 이야기의 여러 빛깔들이 내 머릿속에서 맴을 돌며 섞인다. 현기증이 날 정도로 부러운 삶이다. 다양하게 공부했고 다양하게 놀았으며 한 때는 용기 있는 사랑도 한 그녀. 그런 인생이 긴 줄기를 돌아 모인 곳은 ‘나’를 포함하는 ‘우리’의 삶이다. 그녀는 지금 생각이 깊은 꿈을 꾸고 있다.
선물
인터뷰 전 ‘나이’라는 생각에서 자유롭지 못했던 나의 편견들... 그런 나의 미욱함을 깨뜨리려는 듯 그녀는 인터뷰 내내 팡팡 폭죽을 터뜨려댔다. 밤하늘 가득 퍼지는 불꽃놀이를 보는듯한 그녀의 삶 앞에서 난 그저 고개를 뒤로 젖힌 채 그렇게 하염없이 올려다보고만 있었다.
“과거는 역사이고, 미래는 아무도 모르는 것이며, 오직 현재만이 네게 주어진 선물인 게야.”
-애니메이션 영화 ‘쿵푸 팬더’ 中 대사부 거북의 대사
많은 이들이 그녀의 나이에서 인생의 황혼을 떠올릴 것이다. 삶을 하나의 직선으로 생각한다면 끝점을 향해 가고 있다고 할지도 모른다. 하지만 내가 얼마큼을 걸어왔는지 앞으로 또 얼마큼을 걸어야하는지 그 앞뒤의 길이에 집착하지만 않는다면.... 우리에게 매일은 시작도 끝도 아닌 다시 ‘처음’이다.
“생명의 전화 일을 하면서 고통 받는 사람들을 보며 내 삶을 잘 추슬러야겠다는 깨달음을 얻었어요. 호스피스 일을 하면서는 서두르지 않고 천천히 가는 것의 의미도 생각해 보게 되었구요.”라 말하는 그녀의 얼굴에서 늘 ‘처음’으로 시작되는 매일을 본다. 그 하루 하루는 우리가 유일하게 손에 쥘 수 있는 찬란한 ‘선물’들 임을... 그녀라는 유리창를 들여다보며 새삼 깨닫는다.
늘 ‘처음’으로 시작되는 하루하루에서 우리의 만남 또한 내겐 오랜만에 받아 보는 선물이었다. 오랜 된 책에서 풍기는 묵직한 냄새마냥 그렇게 향이 깊은.... 선물이었다.
뭐라 쓰고 싶은데, 너무 많은 감동과 생각이 밀려와 한 줄도 제대로 쓸 수가 없네요.
몇번이라도 다시 읽고 댓글을 달아야 할 것 같아요.(댓글 1)
아이자샘^^삶의 주인의식과 열정이 멋지고, 혜안을 지니셨던 어머님의 존재가 부럽습니다.
ㅠㅠ... 저두요... 애자샘 만나뵙고 많은 생각이 떠올라 밤잠 좀 설쳐댔죠...
전인권 '다시 처음이라오'의 가사를 인용한 글이었는데... 제목도 그렇고...
그 노래 들어보시와요... 정말 인생에는 무수한 '처음'만이 있다는 생각이 들어요.
우리가 흔히 끝이라 생각하는 죽음도 사실 내 인생에 '처음'으로 있는 사건뿐일진대...
음... 댓글2도 기대합니다. 쿨한인생님!!!
정애자 선생님, 역시 멋지시네요.
언제 술 한잔 예약할게요. ^^
- 느티나무 친구 은미 드림
으흠... 은미샘 저도 빼먹으시면 안되요 ㅠㅠ
한 사람 한사람의 얘기를 들어 보면
소설이 아닌게 없고
모두 드라마틱합니다.
정열적인 사랑 영화 한 장면과
애절한 시와
푸르고 넓은 숲이 보입니다.
계속 또다른 시작이고 즐거움 입니다.
인터뷰한 정애자 선생님과
잘 옮겨준 현아샘께 감사드립니다
^^
저도 긴 글 읽어주셔서 감사합니다. 혹시 '느티나무 수강생'님의 삶도 영화?
그렇담 인터뷰해야하는데... ㅋㅋㅋ 직업병까지 하나 얻었네요... 인터뷰질...