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열번째┃그랜드 마스터(Grand Master) -上
느티나무 백인보 열번째 - 강사 이재형(미트라 한의원 원장)
인터뷰 · 글 : 박현아 느티나무 시민기자
가슴이 콩닥거린다. 드디어 갱년기? 아니다. 가슴이 두방망이질을 시작한 건 한통의 메일을 받고 나서부터다.
‘이재형선생님이 흔쾌히 오케이하셨어요’
백인보를 처음 기획할 때, 느티나무를 구성하는 모든 이들을 아우르는 작업이 되길 소망했었다. 강의를 듣는 수강생을 포함하여 강의를 하시는 선생님들 그리고 실질적으로 느티나무를 꾸려가는 간사들까지... 그래서 백인보가 우리 모두가 함께 하는 온전한 나무의 모습이 되길 바랐었다. 몇 번의 계절을 거치며 백인보도 이제 10회를 맞았다. 열 번에 한 번씩은 강사진을 인터뷰하겠다던 처음의 계획을 지킬 순간이 온 것이다. 별다른 고민 없이 인터뷰이가 정해졌다. 내 마음 속 랭킹 1위는 이재형 선생님이었으니까... 왜냐고? 물론 절절한 사연이 있다.
인터뷰 요청을 드려놓고 한동안 초조했었던 것 같다. 혹시 너무 스케줄이 바쁘셔서 거절하시는 건 아닌가하는 사이, 메일이 왔다. ‘흔쾌히’ 수락하신다는... 역쉬, 랭킹 1위다운 멘트! 흥분한 나머지 답장을 보내며 감정을 너무 격하게 드러내고 말았다. ‘까악!’이라는 감탄사까지 찍어 보낼 필요는 없었는데... ㅠ_ㅠ
미트라 한의원 수련실에서
미트라 한의원. 진료실 위층에 위치한 수련을 위한 공간에 자리를 잡고 앉는다. 공간이 주는 아늑함에도 불구하고 곧 인터뷰를 시작해야 하는 내 마음은 편치 않다. 회를 거듭해도 늘 인터뷰의 시작은 어색함과 긴장의 범벅이다. 장소와 상황에 어울리는 자연스러운 말 한 마디, 그것이 얼마나 어렵고 위대한 것인지를 깨닫는 시간. 손수 차를 준비하는 그의 뒷모습을 바라보며 귀한 시간을 내주신 것에 대한 고마움의 인사를 전한다. 긴장타파를 위해 호들갑 떠는 내 목소리를 다독거리듯 선생님의 음성은 차분하기만 하다.
“저한테도 즐거운 시간입니다. 다른 매체들과도 인터뷰 여러 번 해봤지만 이 자리가 더 편하고 좋은데요.” 그럴 리가요? 저흰 뭐 내로라하는 언론사도 아니고 근사하게 활자화돼서 대중들에게 뿌려지는 것도 아닌데요...
“왜곡 없이 써주실 거니까요...^^” 아, 네. 그거 하난 확실하죠... ㅎㅎㅎ
그의 다정한 말 한마디와 환한 웃음에 긴장과 어색함이 한결 옅어졌다. 지금이다, 인터뷰를 시작해도 되는 자연스러운 순간은....
선생님 어렸을 적 얘기부터 듣고 싶습니다.
가슴에 씨앗 하나를 심고
“저는 무척 가난했습니다”라는 말로 그가 자신의 이야기를 시작한다.
“남자들은 가슴으로 하는 공부가 참 쉽지 않은지라 저도 마흔쯤 되어서야 가슴과 존재에 대한 공부를 시작했어요. 작업을 하다보니 어려서 가난 때문에 생겼던 트라우마가 내 안에 상당히 깊게 자리 잡고 있다는 걸 알게 되었습니다. 가난해서 뜻대로 하지 못했던 것들, 그것 때문에 부모님들이 힘겨워했던 것... 세상에 복수하고 싶은 마음...”
세상의 모든 가난이 다 어둡고 음울하게 기억되는 건 아니다. 하지만 대부분의 가난은 을씨년스러운 배경으로 등장하기 마련이다. 그리고 그것이 유년의 기억과 함께일 때, 상처는 더욱더 깊게 아리다.
“저한테 헌옷 하나 얻어 입히시겠다고 친척집 앞에 서 계시던 어머니에 대한 기억이 있어요. 손아래 분이셨는데도 추운 날씨에 어머니를 밖에 한참 서서 기다리게 하더군요. 헌옷을 넘겨주면서 어머니를 무시하는 듯한 태도까지 보이면서 말이죠.”
서글픈 마음이 들었다. 자신도 모르게 주먹이 쥐어지고 세상에 복수하고 싶었다.
“억울함 같은 거였죠. 그런데 그런 상처가 불행한 일이긴 하지만 사람들은 대부분 그런 것들 때문에 성장하게 되더라구요. 가슴 속에 씨앗 하나를 심는 거죠. 그런 고통 때문에 이를 악물고 노력하기도 하고... 내 작업을 하면서 괴로움의 본질이 그런 기억과 연결되어 있다는 걸 알았을 때.... 풀고 싶어졌어요. 그런 생각으로부터 출발하여 인간의 본질이 무엇인가 고민하게 되었고... 삶의 바닥까지 가보고 싶어졌던 것 같아요.”
어린 날, 많은 씨앗 중에 가난을 가슴에 심어야했다. 그의 말대로 그것도 생의 에너지를 품은 것이기에 그를 밀어올리고 성장시켰다. 그렇게 어른이 되면 어린 기억은 작아질 것이라고 커 보이지 않을 것이라고... 그 씨앗이 어른이 된 후에도, 내 아이가 그 시절의 내 나이를 넘어 훌쩍 자라난 이후에도 두고두고 가슴을 흔들어댈 거라는 걸 그땐 알지 못했다. 가슴이 서글프게 흔들릴 때마다 다시 어린 날로 되돌아가 같은 슬픔 속에 서 있어야한다는 걸... 우리는 어렸기에 알지 못했다. 마흔이나 먹은 어른이 되고도 다시 ‘가슴 공부’를 시작할 수밖에 없었던 이유... 그 씨앗에 얽힌 얘기는 이렇게 시작된다.
“아버지가 그 당시 면허 없이 일하시던 재야 한의사셨어요.” 한의사이셨는데도 가난하셨어요?
“네... 참 가난한 분이셨지요. 치료비를 굉장히 싸게 받으셨어요. 비싸게 받으면 꼭 부작용이 생긴다고 그러시면서 분수껏 살아야 한다고 말씀하시곤 했죠.” 그런 도덕적인 아버지 밑에서라면 가난이 꼭 그렇게 견디기 힘든 건 아니었을 것 같은데요....
“그래도 힘들었어요. 어쩌다 무면허 의료행위를 단속한다는 소문이 있을 땐 면허가 없던 아버지는 보름씩이고 밖에 나가지도 않고 집에만 계셨어요. 그런 아버지의 모습이 어린 제 눈에는 비참하게 보였어요. 아버지 당신도 비참하셨겠죠.” 그래도 양심을 가지고 의술을 베푸는 아버지라면 존경할 수 있지 않을까요?
“예, 그런 면은 존경스러웠죠.... 세상 모든 것은 양면을 가지고 있는 것 같아요. 그런 존경스러운 면도 있지만 그것의 그늘은 소심함으로 느껴졌었죠.”
이재형 미트라 한의원 원장
위대한 유산
유복하게 자라지는 못했다. 그래도 아버지는 그에게 정직함을 유산으로 물려주었다. 그렇다면 그의 맑은 눈빛은 아버지로부터 온 것이다. 그러나 그토록 소심하던 아버지에게서 그는 놀라운 유산을 하나 더 물려받게 된다.
“갑작스럽게 암에 걸리셔서 돌아가셨어요. 병원에서 이런저런 방법을 쓰면 몇 개월 더 살 수 있다고 그랬는데 일언지하에 거절하셨죠. 보통 암환자들이 말기에 이르면 극심한 고통 때문에 진통제를 더 달라고 하던가하는 식으로 매달리는 모습을 보여요. 근데 저희 아버지는 무척 당당하셨어요. 침상에 누우신 채로 본인 묏자리는 이렇게 하고 관은 석관으로 하고 방향은 이렇게 하고 하시면서 침착하게 다 지휘하시더라구요. 그러시더니 어느 날 스스로 곡기를 끊으셨어요. 그 와중에서도 문병 온 사람들을 배려하시는데... 당신이 죽을 때 무언가를 토해낼지도 모르니 괜히 옆에 있다 그거 뒤집어쓰지 말라시며 사람들을 뒤로 물러나게 하셨어요. 나중에 말씀할 기력도 없어지자 사람들이 오면 손가락 세 개를 펼쳐 보이셨죠. 그러면 사람들이 알아서 뒤로 세 발자국 물러났어요. 그렇게 단정하고 당당하게 죽음을 맞이하는 아버지가 너무 멋있어 보였습니다. 나도 나중에 저렇게 죽어야겠다 생각하게 되었구요..”
흔치 않은 죽음이다. 인간이 느끼는 모든 공포의 근원에 죽음이 있고 그것은 쉽사리 넘어설 수 있는 게 아니기에 그 앞에서만은 역사의 그 많은 위인들도 끝내 의연할 수 없었다. 자신의 마지막을 자신의 통제 하에 둔다는 것, 삶의 처음과 끝을 관통하여 끝내 충만할 수 있는 자만이 누릴 수 있는 임종... 그것이 아버지의 마지막 유산이었다. 우리가 부모로서 자식에게 물려줄 수 있는 것들 가운데 ‘위대한’이라는 말을 붙이고도 부끄럽지 않은 것들이 과연 무엇인지... 생각이 깊어진다.
“아버지가 장손이셔서 그런지 가난한 와중에도 주변 친척들을 따뜻하게 살피셨던 것 같아요. 어쩌다 잘 모르는 먼 친지분들을 만났을 때 제가 누구의 아들입니다라고 인사드리면 모두들 아, 그러냐면서 저를 무척 환대해주셨어요. 너의 아버지는 훌륭하신 분이다라고 제게 말씀들 하셨죠.”
그는 유산으로 두 가지만 꼽았다. 그러나 그의 아버지는 그의 생각보다 더 많은 걸 물려주신 분이다. 아버지의 아들임을 자랑스러워 할 수 있는 빛나는 순간들도 함께 물려주신, 사람들 사이에 섰을 때 자식을 환대받게 만든 아버지... 그의 생각보다 아버지는 더 큰 존재로 그의 곁을 지키고 있었음을... 나이가 지긋해져도 아들은 아버지의 모든 걸 보지 못한다. 내 존재의 근원을 뛰어넘지 못하는 자연의 섭리가 그 안에 있기 때문이다.
그런 아버지를 두고도 그는 끝내 ‘소심하다’라는 형용을 놓지 못했다.
“아들 다섯 중에 제가 막내인데 위의 형들 모두 실업계에 진학했어요. 한의사였음에도 식구들 배를 곯게 하시더니 대학 보내는 건 자신 없다하시면서... 저도 공고에 입학하라셨는데 그 때 형들이 나섰지요. 우리가 어떻게든 힘을 보탤 테니 하나라도 인문계 보내자고... 그래서 저만은 인문계에 갈 수 있었던 거죠. 지금도 아버지가 조금만 더 뱃심이 있었다면 어땠을까하는 생각을 해요. 형님들 중엔 공부를 상당히 잘 하시는 분들도 계셨는데...”
광주에서 최고 명문으로 꼽히는 광주서중에 다니던 둘째 형은 공부를 무척 잘해 반장도 하고 5.16장학금이라는 것도 받고 그랬다. 그런 아이를 공고를 보낸다하니 공고 보내려고 장학금 주며 공부시킨 줄 아냐고 하시며 담임선생님이 원서를 써주지 않으셨다. 그러나 아버지는 결국 그런 형들을 모두 실업계에 입학시켰다.
“아버지도 아버지의 고충이 있으셨지만, 또 다른 요소로는 형제들 모두가 다 착했던 거죠. 공부 잘 해도 아버지가 공고 가라면 공고 가고 상고 가라면 상고 가고... 저도 형들이 아니었으면 아버지가 하라는 대로 공고 갔을 거예요. 나중에 커서 생각해 보니 그렇게 부모 말씀 잘 듣고 효도한다는 게 언제나 좋은 것만은 아니라는 걸... 칭찬이 때론 독이 될 수도 있는... 효자 콤플렉스에 갇혀 용감하게 자기 삶을 살지 못할 수도 있다는 걸... 그래서인지 제가 아버지가 되니 제 아이들은 그렇게 키우고 싶지 않다 다짐하게 되더군요.”
아버지는 초등학교만 나오신 분이셨다. 모두가 함께 어려웠던 시절을 살아내며 독학으로 한의학을 공부해내신 강인한 분이셨지만 넓은 세상을 두루 살필 여력은 없으셨다. 입학만 하면 과외다 뭐다 해서 학비 정도야 충분히 아들들 스스로가 감당해 낼 수 있을 터였는데... 아버지는 두려우셨다. 그러다 혹시 고등학교도 졸업하지 못하는 건 아닌가. 그 두려움이, 자식을 향한 과잉된 염려가 아들들 앞에서 그를 소심한 부모로 남게 했다.
“제가 대학 원서를 쓸 때 진학담당 선생님께 우리 얘가 경희대 한의학과에도 합격할 실력이 되느냐고 조심스럽게 묻던 아버지가 생각납니다. 장학생도 될 수 있다는 말을 듣고서도 꿀꺽 본인의 한은 삼키고 정작 제 사주에 금과 수의 기운이 있으면 좋다고... 아이를 위해서는 공대나 해양대에 보내야 한다고 말씀하셨어요. 지금 제가 음양오행의 공부를 좀 하고나서 보니 꼭 그렇게 해석할 것만도 아닌데 하는 아쉬움이 남습니다만...”
나라에서 인정한 자격이 없어 세상에 마냥 떳떳할 수만은 없었던 아버지의 의술. 그것이 왜 한으로 남지 않았겠는가. 아들을 한의대에 보내는 것으로 말끔히 씻어 버릴 수 있는 상처. 번듯한 한의사로 자라난 아들 옆이라면 쳐진 어깨를 한번 쯤 펴 볼 수도 있었을 터였다. 하지만 그런 길을 앞에 두고도 아버지는 자식을 먼저 생각했다. 그것이 소심함이라면 자식을 향한 부모의 사랑이란 때론 그렇게 자신을 작게만 만드는 것인지도 모른다.
이재형 미트라 한의원 원장
드디어 한의사가 되다
가난이라는 서글픈 씨앗, 세상 앞에서 끝내 소심하기만 했던 아버지의 그늘. 그 아래서 보내야 했던 긴 시간들... 순탄치 못한 길을 걸으면서도 끝내 놓지 못했던 공부... 그 이야기 안에도 아버지가 있다. 아버지와 아들은 그렇게 질기게 얽힌다.
“서울에 있는 대학 보낼 형편이 안 된다고... 그래서 전남대 공대에 장학생으로 입학하게 되었지요.”
효자 콤플렉스에 압도되었던 그이지만, 학교가 어디든 내 공부만 열심히 하면 된다는 신념도 있었다. 그것은 아버지가 귀에 못이 박히도록 되뇌던 말씀 ‘사람 위에 사람 없고 사람 밑에 사람 없다’라는 것과 다르지 않았다.
“그 이후에 연구직 공무원으로 직장생활까지 하고 있었는데 건강하시던 아버지가 갑작스레 돌아가셨어요. 생이 참 허무하더라구요... 산다는 건 정말 순간이구나...”
갑작스런 아버지의 죽음은 24시간 온종일 내가 하고 싶은 것을 해야겠다는 깨달음을 남겼다. 중간에 이런 저런 이유들에 밀려 포기했던 공부를 다시 시작했다. 그렇게 나이 서른에 한의대에 입학했다.
“한의학을 시작한 건... 아버지의 영향이 컸다고 봐야겠죠. 한의사로서의 아버지를 쭉 지켜보면서 자라왔고 만년에 음양오행으로 명리 보는 거 관상 보는 거 굉장히 재밌어 하셨는데 그 때 저를 많이 데리고 다니셨죠. 또 집에 친구들이 놀러오면 사주도 봐 주시고... 저도 흥미를 많이 느꼈습니다. 그래서인지 커서 다른 일을 하게 되더라도 이 공부만은 취미로라도 계속 하고 싶었어요.”
아버지 때문에 좋아하게 된 공부를 정작 아버지 때문에 하지 못했었다. 하지만 그 공부를 정식으로 시작하게 된 이유는 또 다시 아버지 때문이다.
“한의학은 하고 싶었던 학문이고 너무 재미있고 그래서 좋고 그랬죠. 어디 산중에 유명한 도인이 있다더라 그러면 쫓아가서 배우고... 어쨌거나 한의학이란 학문은 매일 공부해도 끊임없이 공부할 거리가 있고 내가 생각하는 삶의 목표, 영적 진화와 많이 관련이 있는 학문이라 더 좋구요. 침놓고 약 쓰는 치료법도 훌륭하지만 그것에만 국한 되는 것이 아니라 제가 지금 하는 것처럼 독특한 작업을 할 수 있는 것도 그게 한의학이라서 가능한 것이라 생각합니다. 학문적으로도 직업적으로도 굉장히 만족스럽습니다.”
에로스 강의를 들은 수강생이라면 누구나 한번쯤은 미트라 한의원을 방문해 보고 싶었을 것 이다. 다른 그 무엇보다 성 에너지가 만물의 근원임을 강조하던 그. 100일 정도 수련하면 우주적 오르가즘의 세계로 입문 할 수도 있다는 말에 가슴이 뛰었었다. 궁금해서 한의원 홈페이지에 들어가 보았다. 너무 많은 치료법에 놀라 어떻게 된 건지를 물었다.
“사람이 다 다른 것처럼. 18억 인구면 18억 개의 깨닫는 방법, 치료법이 있어야 한다고 생각해요. 자신만의 내면과 맞닿는 방법이 있어야 하는데 진짜 마스터들은 그 사람에게 꼭 맞는 방편을 스스로 찾도록 일깨워주는 분들인 거죠. 비유를 들어 설명하자면, 일시적으로 경락이 막혀있다거나 하면 침만 가볍게 맞아도 되는 거고, 내면의 진액이나 물질적 기초 자체가 약해져있다면 한약을 써야 하는 것이고, 몸의 균형이 흔들리는 게 내 안에 노폐물과 어혈 그런 것들이 꽉 차서 그렇다면 일단 해독 먼저 해야 하는 거고, 그 정도가 아니라 에너지의 방향 자체가 틀어져서 자꾸 반대로 돌고 있다고 하면 생활습관 수련을 꼭 해야 하는 것인데... 그렇게 내 안의 감정이나 감각을 온전하게 알아차리고 운영하는 방법을 배워야 제대로 치료할 수 있는 것이고, 방법은 이렇게 다양하죠”
그렇군요. 18억 개의 방편이라... 그걸 모두 알고 계시다는 건가요?
“모두 알고 있다고 생각지는 않는데요. 다만 환자를 만나서 상담하면서 내 안에서 이 환자에 맞는 방법이 떠오르기를 기다립니다. 어떤 질환에 어떤 치료법을 미리 정해 놓지 말자가 제 모토예요. 나도 모르게 무의식적으로 내 안에서 아하 하면서 떠오르는 처방이 결국 좋더라고요. ... 그러기 위해서 저는 공부할 때 굳이 하나하나 기록하고 정리해놓지 않아도 그 공부를 재밌게 경험하자 주의입니다. 그렇게 가슴으로 존재로 재미있게 맛있게 공부하면 필요할 때 나도 모르게 무의식에서 나올 거라고 믿는 거죠. 근데 진짜 이완이 되면 그게 밖으로 꺼내지더라구요. 그래서 자꾸 치료 매뉴얼을 달라고 하시면 저로서는 난처하기도 해요. 첫째 주는 뭐하고 둘째 주는 뭐하고 이렇게 계획적인 시스템을 만드는데 제가 약합니다. 그렇게 해보기도 했는데 저의 경우는 그렇게 하면 제 파장과 안 맞는지 치료법이 생명력을 잃더라구요.”
혹 기억에 남는 환자가 계세요?
“감동적인 환자들이 많이 있었죠. 자녀들까지 가출하고 부부갈등 문제로 몸 뿐 아니라 정신적으로도 황폐해져 힘들어 하던 부부가 치료를 통해 부부관계가 풀리니 저절로 자녀들이 집에 돌아와 제자리를 찾아간 경우도 있었구요. 또 그토록 밉기만 하던 남편이 사실은 그동안 자기를 계속 기다려주고 있었다는 걸 몰랐다고 눈물지으며 감사를 표하던 분은 결국 이혼 직전까지 갖던 부부 관계를 회복해내기도 했죠. 그런 깨달음의 과정을 옆에서 지켜보는 것도 무척 보람되죠. 삶의 의미를 찾지 못해 자살까지 생각하는 깊은 우울증에 빠진 분들도 있는데, 그런 분들이 활력을 찾아 자아실현의 길로 들어서서 행복해할 땐 저도 정말 기쁘고 행복합니다.”
그러나 정작 그가 중요하게 생각하는 건 ‘환자’가 아니다.
“그러나 제 목표가 누구를 돕는다는 것은 아닌 것 같습니다. 내 자신이 행복한 것 그게 제일 중요해요. 내가 불행하면서 다른 사람을 행복하게 만든다는 건 가능하지 않다고 보기도 하고요. 내가 먼저 행복해지고 그 기운이 넘치게 되면 어떻게든 전달되겠지요. 그래서 저의 최고 관심사는 제 자신을 돌보는 것입니다.”
그가 지닌 의술은 겉으로 부러지고 찢긴 상처들을 봉합하여 피를 멈추게 하는 게 아니다. 환자에 앞서 내가 먼저 행복의 충만을 알고 그렇게 행복해진 ‘나’로서 치료사의 자리에 서는 것, 문을 열고 들어가 나의 밑바닥을 훑어내는 것, 그 안에 웅크리고 있는 나를 가만히 안아 주는 것, 이 세상과 나를 뭉클하게 화해시키는 것... 내가 나를 들여다보는 성찰과 그 깨달음의 과정을 통해 병든 몸을 치유하고 아픈 영혼을 위로하는, 그렇게 존재를 처음부터 끝까지 올곧게 이완시키는 작업...
이렇게 그의 철학은 머리보다는 가슴에 새겨지는, 보다 더 근원적이고 본질적인 무엇이다.
to be continued.......
에로스 강의 기획회의에서 원장님을 뵙고 확~~~ 끌려 수강여부의 갈등을 극복하고...열공했었는데
수석기자가 원장님을 인터뷰한다는 야그를 듣고 함께 가고픈 맘에 보조로 따라 나섰다.
오랜만에 가보는 강남 한복판에 있는 소박한 한의원, 단아하고 평온한 수련실,
마주앉은 원장님은 인간계를 넘어선 분처럼 느껴졌다.
조분조분 대답하시는 모습에서도 강한 에너지를 느낄 수 있었다. 한 사람의 생애를 어찌 두어시간안에 모두 섭렵할 수 있으랴마는..그 누구보다 자기존중에 기반을 두고 삶이 정돈된 분이라 가능하게 보였다.
박기자의 낯선(?)진지한 모습에 순간순간 웃었던 기억이 난다.
인터뷰를 읽다보니 함께 했던 시간이 되살아나 즐겁다.
후속편을 기다리는 맘이 설렌다.
푸하하하~
저 가끔 꽤 진지하다구요...^^
그날은 너무 긴장을 해서리... 왜 그랬을까, 저도 생각해 보니 웃음이 나네요.
그나저나 언제나 성실한 댓글에 어떻게 감사를 표해야 할지...
항상 감사합니다. 지금도 진지해요^^
글에서 선생님의 차분하고 자상한 말씀이 보입니다.
세상에 대한 생각과 내공이 더해진 글이
좋은 울림으로 와 닿습니다.
이재형 선생님과 멋진 글쓴이 박현아 샘께
감사를 ^^
멋진 댓글을 달아주신 '느티나무 수강생'님께도 감사드립니다.
곧 이어질 '하'편도 꼭 읽어 주실꺼죠? ^^
인터뷰 글 써서 올려도 늘 댓글이 썰렁해서 사실 좀 외롭거든요... ㅎㅎ
저러더 '멋진 글쓴이'라고 해주신 말에.. 이 더위에도 힘이 나네요.
앞으로도 더 열심히 쓰겠습니다. 그나저나 언제 백회를 채우죠 ㅠㅠ