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열한번째┃짜장면 더 주세요~
느티나무 백인보 열한번째 - 수강생 이혜란
인터뷰 · 글 : 박현아 느티나무 시민기자
지금 그녀는 사뭇 심각하다. 메뉴판의 구석구석을 예리한 눈으로 훑어 내리고 있다. 내게 눈길을 주지 않은지 벌써 3분도 넘었다. 그럴수록 그녀가 선택할 메뉴가 더 기대되고 궁금하다. 대체 뭘 시킬까? 일찌감치 평소 즐기는 ‘삼선짬뽕’을 고른 난 길어지는 그녀의 시선만 하릴없이 쫓고 있다. 메뉴판이 자꾸 뒤쪽으로 넘어간다. 어허~ 요리는 안 됩니다, 혜란씨...
“난...... 그럼...... 마파두부!”
드디어 그녀의 결정이 내려졌다. 마파두부? 왜?
“우리집에 없는 메뉴였거든요.” 아, 무척 단순한 이유구나... 메뉴 선택을 둘러싼 짧은 순간의 긴장이 풀린다. 난 뭐 내가 모르는 근사한 거 시킬 줄 알았는데... ㅎㅎㅎ
“마파두부 맛이 어땠는지 기억이 안 나서요. 예전에 먹어 본 적은 있는데...”
이혜란 수강생
왜 하필 중국집에 갔을까? 그녀를 키운 건 팔 할이 ‘다꽝과 춘장’이라서?
그녀와의 인터뷰를 위해 점심약속을 잡은 후, 잠시 뭘 먹을까 고민했었다. 파주에 있는 그녀가 일산으로 건너온다 했으니 일단 메뉴는 내가 골라야 할 것 같았다. 제일 먼저 자주 가는 중국집 ‘차이홍’이 떠올랐다. 거기 짜장 정말 맛있는데... 입맛을 다시다 곧바로 그녀가 중국집 딸 출신이라는 생각이 났다. 어쩐다? 중국음식 질리도록 먹어서 싫어할지도 몰라...
“중국집? 괜찮아요. 전 지금도 중국 음식 좋아하고 잘 먹어요^^” 입맛도 주인 닮아 순하고 착하네요, 혜란씨^^
예전에 같이 강의도 듣고 함께 영화도 보고, 집이 같은 방향이라 차도 함께 타고 온 적이 많아서인지 얼굴 못 본지 꽤 지났음에도 우리는 별로 서먹하지 않았다. 무릇 식사는 편한 사람과 함께 해야 맛을 느낄 수 있는 법. 그렇담 그날 점심이 맛이 있었냐면.. 사실 그러질 못했다. 밀린 수다를 해결하느라 면은 무한정 불고 밥은 식고... 그래도 좋아하는 짜사이는 실컷 먹었다. 헤헤...
울타리
중국집을 나와 커피숍으로 자리를 옮겼다. 공식적인 인터뷰를 시작하기 전, 또 다시 긴 수다가 이어진다. 최근 아카데미에서 재미나게 들었던 심리학 강의를 놓고 내가 썰을 좀 길게 풀자 한참을 듣고 있던 그녀가 한마디 던진다.
“맞아요. 부모의 역할이 중요하죠. 아이들은 부모의 등을 보며 자란다는 말이 있잖아요...”
같은 얘기라도 팩트만을 길게 나열했던 나보다 동화작가인 그녀의 짧은 표현이 더 멋스럽고 옹골차다. 부모의 등이라.. 그녀가 평생을 바라보았을 부모의 등, 그 얘기부터 시작해야겠다.
“2남2녀 중에 막내였어요.” 으흥? 막내? 우와! 완죤 장녀 포스인데?
“그렇죠? 살면서 한 번도 막내 같다는 소리 못 들어봤어요. 다 장녀로 보더라구요.” 잠시 그녀가 뜸을 들인다. 평소에도 말을 천천히 하는 그녀는 생각도 차분하다. 사람들이 모두 그녀를 장녀로 보는 건 이런 진중한 면 때문일 것이다.
“전 좀 늦되는 아이였어요. 가끔 엄마가 얘가 죽었나 살았나하며 쿡 찌르고 지나가시곤 했지요. 뭔가 혼자서 골똘히 생각하는 시간이 많았던 것 같은 데 지금도 그때 내가 무슨 생각을 했는지는 기억이 나지 않아요. 거의 밖에 나가지도 않았고...” 성격분석 테스트로 보자면 그녀는 전형적인 ‘내향’이라는 얘기... (심리학 강의 수강 후 온통 세상이 심리로만 보여서 큰일이네... ㅋㅋ)
“5살 때 부산으로 이사를 갔는데, 그 때 살게 된 집에 대한 기억... 그 공간이 제게 무척 특별했어요. 세 가구가 모여 사는 집이었는데, 마당은 공동으로 쓰고... 그리 잘 사는 거 아닌 낮은 기와집... 집의 외부는 다 가겟방이고 그 안쪽으로는 큰 마당이 있는... 그 마당에 대한 기억이 많이 남아요.” 마당에 뭔가 특별한 거라도?
“아니 뭐 대단한 게 있는 건 아니고 그냥 작은 동물들 정도... 개도 키우고 고양이도 키우고 토끼도 있었고.. 모두 아버지가 키우시던 것들이었죠. 그 안에서 혼자 만족하며 잘 놀았어요.” 중국집 하시느라 바쁘셨을 텐데도 그렇게 동물들을 키우셨다니 아버지가 다정다감하신 편인가 봐요?
“그 점에 있어서 무척 운이 좋다고 느껴요. 아버지가 자식들한테 무척 잘 해 주셨죠. 이뻐죽겠다 이런 건 아니지만... 자라면서 한 번도 아버지에게 맞은 기억이 없어요. 가끔 엄마한테는 이눔의 가시나하면서 등짝도 한 대씩 맞곤 했는데 아버지는 전혀 그러지 않으셨죠. 아버지가 나를 굉장히 이뻐한다는 느낌을 듬뿍 받으며 자랐죠.”
좋은 부모가 되기 위한 첫 번째 조건, 아이가 충분히 사랑받고 있다고 느끼게 하는 것. 아이가 진실로 사랑받고 있다 느낀다면 부모의 소소한 잘못들은 쉽게 용서가 된다고... 아이들은 그렇게 부모를 잘 용서하는 존재라고 강의 때 들었다. 그런 자랑스런 부모를 소개하는 시간이라 그런지 그녀의 얼굴은 평소보다 더 온화하다.
아버지가 중국집을 하면 배달도 나가고 그러셨을 텐데... 친구들이 놀려댈 수도 있고... 혹시 그런 아버지가 부끄럽거나 창피하진 않았어요?
“아뇨. 전 그런 아버지를 한 번도 부끄러워 한 적 없어요.” 음... 아주 잘 자라셨군요.
“나를 둘러싼 세상이 흔들림 없이 단단하다고 느낀 건 오히려 부모님 두 분이 함께 중국집을 해서인지도 모르겠어요. 다른 집들은 부모님들이 일하러 밖에 나가 계시는 그런 구조라면 저희집은 자식들이 공부하러 밖에 나가는 구조였지요. 부모님은 늘 가겟방과 연결된 중국집에서 함께 일하시고... 언제든지 제가 집에 돌아가면 부모님은 항상 그 자리를 지키고 계셨죠.”
마당에서 토끼랑 놀다가 눈을 돌리면 엄마 아빠는 늘 중국집 주방에서 일을 하고 계셨다. 그렇게 부모님은 항상 그녀의 시선 안에 머무셨다. 든든한 울타리... 그것이 그녀가 알고 있는, 그녀가 한평생 보고 자라난 부모의 등이다.
“두 분이 평생 한 공간에서 일하셨는데도 싸우시는 거 한 번도 본 적 없어요. 가진 게 없으셨지만... 아니 성실함 말고는 가진 게 없는 분들이셨죠. 아버지는 전형적인 경상도 남자였는데도 자식들한테는 그러지 않으셨어요. 막내라고 저만 예뻐한 게 아니라 자식들 넷 모두에게 똑같이 하셨죠. 근데 사실 아버지가 그러는 데는 사연이 좀 있어요.”
아버지의 엄마 즉, 그녀의 친할머니는 정신이 온전치 못한 분이셨다. 신내림을 받아 잘못됐다고 알려진 할머니는 젊었을 때부터 전형적인 치매노인의 증세를 보였다. 집에 있다가도 세상에 한 번 나가면 오랫동안 돌아올 줄 몰랐고 모습을 감출 때처럼 올 때도 그렇게 불쑥 가겟방에 얼굴을 디밀었다. 그런 어머니 밑에서 견뎌내야 했을 아버지의 어린 시절과 그런 어머니를 자식처럼 품에 안아야했던 아버지의 나머지 세월...
아버지의 멍든 가슴을 이제 다 자란 막내딸이 띄엄띄엄 헤아리고 있다.
“단란하고 따듯한 가정에 대한 꿈이 있으셨겠죠. 그 욕구대로 살아오신 걸 테구요. 살면서 이런 저런 일을 겪을 때마다 아버지가 제게 베풀어주신 사랑이 얼마나 큰 것인지 자꾸 깨닫게 돼요. 저는 단 한 번도 나를, 우리 가족을 둘러싼 울타리가 흔들릴 것이라고 생각해 본 적이 없어요. 실제로 그랬던 적도 없었고... 가난했지만 어린 나를 둘러싼 세상은 단단했죠. 그래서인지 저는 세상 사람들이 다 저처럼 자란 줄 알았어요. 그런데 나중에 보니 아니더라구요...”
사랑받고 지지받고... 세상 아이들이 다 그렇게 자라난다? 만약 그럴 수 있다면 세상은 좀 더 단순해 질 것이다. 이 세상에 존재하는 다양하고 복잡한 이론들은 아예 태어나지도 못했을 것이다. 사랑받으며 자라난 아이들은 타고난 본성대로 순하게 커나갈 것이고 더 이상 남들과의 경쟁에서 이기기 위해 온몸에 독기를 품을 필요도 없을 것이다. 그 독이 결국 우리 모두를 아프게 하는 세상 따위는 결코 오지 않을 것이다. 아이들이 모두 혜란씨처럼 자라난다면... 어쩌면 우리 모두는 그녀처럼 동화를 쓰고 그리는 사람의 따뜻한 눈을 갖게 될 지도 모른다. 이 모든 부질없는 상상 속에서 그래도 잠시... 행복해진다.
동화를 만드는 사람
그녀가 내게 준 두 권의 동화책... <짜장면 더 주세요!>, <우리 가족입니다>
첫장을 넘기니 직접 적어 넣은 짤막한 글귀가 눈에 띈다.
‘박현아님에게... 너무 여성스러운 거 아시죠? ^^ 이혜란 드림’
이혜란님의 동화책 - 짜장면 더주세요! / 우리 가족입니다
아이들에게 이 책들을 건네주던 날, 난 무지 어깨에 힘주며 말했다. 봤지? 엄마 친구 중엔 이런 사람도 있다구! 그러거나 말거나 아이들은 금세 책에 얼굴을 파묻어 버린다. 그러고는 연방 탄성을 내지른다. ‘우와~ 진짜 그림 잘 그린다!’ 아이들의 세계는 단순하다. 그림을 실물과 똑같이 그리면 훌륭한 작가인 거다. 이혜란 작가는 그런 이유로 우리집에서 더없이 훌륭해졌다.
보림출판사가 개최한 창작그림책 공모전에서 대상을 수상하며 작가로 데뷔한 그녀. 간혹 우리는 실력 있는 신인이 나타나면 혜성처럼 등장했다 한다. 그러나 그렇게 반짝이는 혜성들도 실은 칠흑의 우주를 몇 만 년씩 거슬러 온 것들이다. 그 과정에 받쳐진 시간에 비하면 우리들 눈앞에서 잠시 빛을 내는 그 순간은 오히려 찰나에 가깝다. 그녀도 혜성처럼 그럴 터였다.
“그림 잘 그리고 그림이 재밌고... 그래서 미대에 가고 싶었는데 집안 형편 상 미대에 보내달라는 말은 못 하겠더라구요. 미대에 가려면 학원에 다녀야하는데 그럴 여유도 안 되고... 그래서 데생 시험이 없는 전문대에 들어갔어요. 근데도 억울하다거나 꼭 미대에 가야된다거나 그런 생각은 안 들더라구요.” 나중에 사회에 나와 이런 저런 일을 겪다보니 가끔 아주 가끔은 떼라도 부려서 미대에 갈 걸 하는 생각도 없진 않았다. 세상은 단순하고 순하기만 한 그녀의 생각과는 전혀 다른 모습을 하고 있었다.
“졸업하자마자 작은 출판사에 취직을 했죠. 규모가 너무 작아 디자인, 편집자, 일러스트레이터까지 동시에 해야 했어요. 책 하나를 만들어 내는 전 과정에 참여한 셈이죠. 물론 덕분에 일을 많이 배우기도 했어요. 근데 그 출판사.. IMF때 망했어요.”
그 후 벤처라는 광풍이 불기 시작했다. 그녀도 그림하는 친구들을 모아 애니메이션 회사를 차렸다. 하지만 3년이란 세월을 쏟아 붓고도 그 일은 성공하지 못했다.
“직장생활 시작하면서 십여 년은 무척 힘들었어요. 내가 누군지도 모르겠고 내가 뭐하는 건지도 모르겠고... 일은 주어지니까 미친 듯 해내긴 하는데... 일 잘한다는 칭찬은 늘 듣는데... 여전히 내가 뭘 하고 있는 지 모르겠더라구요. 그러다 서른 살 즈음에 친구가 자살을 했어요.”
애니메이션 회사 일을 함께 하던 친구. 그는 사생아였다. 엄마가 아빠로 지목한 사람을 찾아갔지만 그 남자는 아빠임을 부정했다. 그런 곡절을 겪어내며 친구는 평생 지독하게 살았다. 사람이 저렇게까지 지독해질 수도 있구나... 그 친구를 보며 깨달았다.
“늘 절 부러워했어요. 따뜻한 기운이 느껴진다면서... 저한테는 별로 특별할 것도 없는 제 가족 얘기를 그 친구는 눈을 반짝거리며 듣곤 했죠.”
성공해서 아버지한테 인정받고 싶어했던 친구. 애니메이션 일이 뜻대로 풀리지 않자 함께 했던 모두에게 힘든 시기가 찾아 왔다. 그리고 그 시절의 어려움은 유독 그 친구에게 더 가혹했다.
“죽겠다고 약을 잔뜩 먹고는 마지막 전화를 제게 했더라구요. 그 순간 그 친구가 짊어진 모든 외로움과 두려움이 한꺼번에 느껴졌어요.”
웬만한 사람들은 취직하고 결혼하고 아이도 낳고 인생에서 안정을 찾아갈 무렵... 그녀는 많은 걸 잃은 느낌이었다. 죽은 친구는 그렇게 남은 자들에게 생의 물음들을 던지고 있었다. 난 그동안 무얼했나... 이제 어떻게 살아가야 하는가...
서른살 겨울, 그렇게 덜컥, 평생을 살았던 부산을 떠나 서울로 왔다. 한겨레에서 하는 그림책 전문학교에 들어갔다. 그림책에 그림만 그리는 게 아니라 글도 함께 쓰는 그런 공부를 시작했다.
“글 쓰고 그림 그리고... 그렇게 내 작업을 시작했죠. 일단 먹고는 살아야하니까 아이들 전집류에 들어가는 삽화들 그리는 일도 병행해야 했어요. 그렇게 한 삼사년 하다 보니 인생이 바닥을 치기 시작하더라구요.”
생활고, 외로움, 정체성의 문제 등이 한꺼번에 짓눌러대는 하루하루... 그 무렵 옥상에 자주 올라갔다. 반지하에 살았던 그녀는 광합성을 위해서라 했지만, 햇빛이든 뭐든 그녀의 눅눅한 가슴을 덥혀줄 온기가 필요했을 터였다. 태어나서 죽을 때까지 우리는 산다고 말하지만 어느 시기 어느 지점은 때론 사는 게 아니라 그저 버텨내는 것, 그것뿐일 때가 있다.
그렇게 어둡고 축축한 길을 한동안 걷던 어느 날. 오랫동안 준비했던 <우리 가족입니다>가 공모전의 대상으로 뽑혔다. 그렇게 그녀의 가족 이야기는 그녀의 첫 번째 책이 되었다. 대도시의 지하세계에 머무르기만 했던 그녀에게 지상의 세계는 한순간 동화처럼 열렸다.
“동화작가로 정식으로 데뷔하고 난 지금도 여전히 삽화 일을 해요. 하지만 예전처럼 이 일을 안 하면 굶는다 차원이 아니기 때문에 같은 일을 하더라도 느낌은 전혀 다른 거죠. 그림만 그려주는 일이라도 이젠 글이 제 맘에 들고 제가 그 이야기에 공감할 수 있는 그런 것만 골라서 할 수도 있구요.”
그녀는 일을 통해 자신이 점점 강해지는 것 같다고 말한다. 서둘러 가는 길이 아니기에 바닥의 흙부터 고르게 펴고 그 위에 단단한 벽돌을 쌓는다. 온화한 미소와 나지막한 음성을 지녔음에도 뭔가 강인해 보였던 그녀, 오늘에서야 그 이유를 알았다.
“사회에 나와 일을 하면서 제가 어떤 사람인가를 알아 갔던 것 같아요. 제가 좋아하는 선생님이 한 분 계신데 그분이 그러시더라구요. 너는 자가발전하는 케이스라고... 처음부터 잘나고 똑똑하고 그런 게 아니라 하나 부딪히고 하나 깨닫고 또 딴데 가서 부딪히고 또 하나 깨닫고... 그렇게 천천히 넓어지는 타입... 글까지 함께 하는 작업을 해서인지 평소에도 스스로에 대한 생각을 많이 하는 편이에요. 이야기를 만들 때도 새로운 것을 만들어 내기보다 내 안에 있는 것들을 끄집어내는 편이니까... 내가 어떤 사람인지, 내 주변에 어떤 사람들이 있었는지 하는... 사람들이 이야기...”
그녀는 그렇게 사람에 대한 이야기로 다시 네 번째 작품을 구상 중이다.
사람 이야기
“지금 준비하고 있는 건 국회의원에 관한 이야기예요.” 국회의원?
“네. 아이들에게 여러 직업에 관해 소개하는 시리즈인데 거기서 제가 맡은 게 국회의원이에요.” 그렇구나... 그럼 어떻게 준비하고 계세요?
“지난 3개월 동안 국회로 출근했어요. 국회의원의 모델로 민노당 대표 이정희 의원을 선택했거든요. 그분 사무실로 거의 매일 출근하다시피 했죠.” 진짜? 어때요, 거긴?
“새로운 걸 많이 접하고 배우는 기회가 됐죠. 정말 넓은 세상이더라구요. 국회본청에 갔더니 대한민국을 움직인다는 사람들이 눈 앞에서 왔다갔다 하는데...한EU FTA 농성땜에 갔었죠. 진보라는 것... 사람들이 앞으로 나아간다는 것... 그게 과연 뭘까 하는 생각이 들었어요. 정치란 새로운 세상을 만들어 가는 것이라고 생각해요. 그래서 다른 무엇보다 창의적이고 상상력이 요구되는 직업. 그런데 우리는?? 나는 아이들에게 뭐라고 얘기해야할까..어떻게 하면 같을 수 없는 이 다양한 사람들을 모두 품을 수 있는 세상을 만들 수 있을까...고민하죠. 그리고 무상의료도..무상이란 단어는 맘에 안들지만...”
그녀가 관심을 두는 사람들 이야기 안에는 각자 다르게 살아가는 우리와 그 안에서 함께 살아가야 하는 나의 이야기가 섞여 있다. 그 이야기는 정치뿐 아니라 이 세상을 이루는 모든 것에 해당한다. 참여연대도 느티나무도...
“참여연대 강의만 해도 처음에는 비슷한 성향의 사람들이 모인 것처럼 보이지만 이야기를 나누다 보면 서로 생각하는 게 다르고 하는 얘기가 달라요. 결국 같을 수 없는 거죠. 제가 만드는 책만 해도 나한테 이러이러한 일이 있었어 하고 책을 만들어 내놓으면 그 책을 똑같이 읽어도 사람들은 저마다 다르게 느끼고 다르게 받아들여요. 내 책을 읽었지만 그걸 통해 자신의 이야기를 따로 만들어 가는 거죠.”
그녀가 말하는 사람이란 결코 같지 않은 우리일지도 모르겠다. 그러나 결국 사람들이 내는 각각의 이야기도 때로는 같은 공간에서 함께 울려야 한다는 것을 그녀는 잊지 않는다.
작가되길 잘 했다 생각하시죠?
“내 책을 통해서 각자 자신을 돌아보게 되는... 그런 모습을 볼 때 작가로서 무척 기분 좋아요. 어깨도 으쓱해지구요, 아, 나 괜찮은 사람이구나...” 맞습니다. 혜란씬 정말 괜찮은 사람이에요 ^^ 근데 이렇게 괜찮은 아가씨가 여직 솔로이신 이유는?
“절대 결혼 안 함... 이런 거 아니구요, 생각은 늘 있어요. 올해 안에 어떻게 해 보긴 해야겠는데...” 생각이 늘 있었던 것치곤 많이 늦은 감이... 직업도 든든한데 안 해도 되지 않을까요? 골드미스, 그거 하면 되지...
"늦어진 이유라... 아무도 모르죠, 왜 이렇게 됐는지는. 근데 전 성장에 대한 욕구가 강한 편이에요. 결혼하고 내 가정을 꾸리게 되면 그 속에서 또 다른 성장을 하지 않을까 생각하는 거죠. 왜 다들 결혼하고 아이 키우고 하면서 부처가 된다고 하잖아요...” 부처요??? 네... 부처가 되지요. 일그러진 부처... 인상 험악한...
“어쩔 땐 내가 아직 철이 덜 들었구나 하는 생각이 들 때도 있어요. 아이들을 키우며 함께 성장하고 싶은 그런 거... 지금의 나가 아닌 또 다른 나를 경험해 보는 것... ”
결혼에 대한 생각을 말하면서 그녀는 그것 또한 자기 자신에 대한 욕심인 것 같다했다. 스스로가 좀 더 넓어지고 싶은 욕심에 결혼을 생각하는 것이라고... 정체되는 것에 대한 두려움일지도 모른다했다. 늘 확장되기를 꿈꾸는 그녀의 이상형은 어떤 남자일까?
“딱히 이상형은 없는데... 그냥 자기 삶을 잘 누리고 사는 사람?”
올해 우리 나이로 40이 된 막강 동안의 그녀. 결혼을 꿈꾼다하니 인생 선배로서 노파심이 부글부글 끓어오른다. 자신의 삶을 누린다는 핑계로 가족의 삶을 담보 잡을 수도 있다... 남자가 너무 현실감각이 없어도 안된다... 나의 잔소리는 길어만 진다. 그 때 섬광처럼 뇌를 스쳐가는 게 있었다. 아... 맞다! 심리학 시간에 들었는데요, 혜란씨... 사랑받고 잘 자란 아이들은 배우자를 골라야 하는 어려운 선택도 건강하게 잘 해낸다네요. 혜란씬 틀림없이 좋은 사람을 찾아낼 꺼예요. 그러니 이제 잔소리는 끝!
어른의 탄생
넓어지고 확장되어지고 그렇게 어른이 되고 싶다는 이 골드미스 아가씨가 느티나무에서 처음으로 들은 강의는 바로 ‘어른의 탄생’이다. 누군가가 너는 어른이 좀 돼야해 하며 그녀에게 추천해 주었다는 데... 어땠어요?
“그림책 작업을 하면서 내 안에 있는 에너지가 점점 고갈되어 간다는 느낌을 받았어요. 충전이 필요하다고 할까... 그래서 참여연대 강의를 듣게 된 거죠. 어른의 탄생 강의는... 기대했던 것과 조금 다르긴 했어요. 그런데... 워낙 사람한테 관심이 많은 편이라... 사람은 어쩔 수 없이 사회적인 동물인 거잖아요. 남편, 아이들 이 속에서 부대끼다 보면 자신의 밑바닥이 까발려지는 경험도 하게 되고 또 그걸 딛고 조금씩 자라기도 하고... 그런데 정작 난 그런 경험이 부족하고 그래서 궁금했죠. 어른이 된다는 게 뭔지... 결과적으론 만족하는 편이에요. 강의 들으면서 새로운 사람들 많이 만나고 그들 생각을 알게 되고... 그곳에 모인 다양한 사람들이 신기하게 느껴졌어요. 재미도 있고... 국회의원 책 준비하면서는 실질적인 지식도 필요했구요... 그래서 한동안 복지와 관련된 강의들을 많이 들었죠.”
일 때문에 들어야 했던 거면 재미는 별로였겠네요?
“아뇨. 재미있어요. 그동안 몰랐던 것도 새로 알게 되었구요... 복지라는 게 단순하게 말하면 우리 모두 같이 잘 살자 그런 것이긴 하지만... 안으로 들어가면 좀 더 복잡해지는 거죠. 지금은 당연하게 누리고 있는 의료보험 같은 경우도 누군가 그걸 위해 인생을 받쳐가며 노력했기에 가능했다는 거... 이런 건 그동안 생각지 못했던 부분들이죠. 그런 것을 하나하나 깨달아 가며 나도 내가 하는 일이 누군가에게 도움이 되면 좋겠다... 그런 생각이 들었어요.”
이렇게 큰 틀에서 얘기하던 그녀가 살짝 다른 포인트로 넘어간다.
“그런 생각들을 하다가도 ‘나라도 잘 사자, 엉뚱한 짓 하지 말고...’ 이렇게 급하게 주제 파악이 될 때가 있죠. 인터넷 기사 같은 거 보면 요즘 하도 이상한 사람들이 많아서... 늘 먹고 사는 문제에만 치중하는 세태인 거죠. 그 무엇보다 인간 그 자체의 문제에 대한 고민과 논의도 중요한데...”
그녀가 사람이 사람을 평가하는 문제에 대해 길게 얘기한다. 중국집 딸로 태어나 정확하게 소시민으로서의 삶을 살아온 그녀. 민노당 대표 사무실을 들락거리며 한동안 빈번히 들었던 계급, 노동, 해방이라는 말들. 아는 동료 작가에게서 들었다던 ‘너는 나면서부터 계급성이 획득된 삶을 산 거고 그래서 네가 부럽다’던 말... 어차피 사람은 자기 그릇 크기대로 사는 것 아니겠냐는 단순명료한 그녀의 철학... 그녀가 인터뷰 말미에 꺼내놓은 무거운 말들과 내가 거기에 보탠 어지러운 말들이 뒤섞인다.
“중국집과 국회... 이렇게 엄청나게 차이나는 두 곳을 다니면서 이 세상에서 과연 내 위치는 어딘가 하는 생각이 들더라구요. 처음에 동화를 쓸 때는 그냥 무작정 내가 가장 잘 아는 내 얘기에서 시작했는데... 뭔가 큰 것들에 대한 고민이 있었던 것도 아니고... 그런데 내가 만든 결과물들이, 내가 밟아 나가는 발자국들이 나만의 것이 아니라는 게 느껴지기 시작한 거죠. 내가 만든 책이 단순이 나를 밥 먹여주는 것의 차원으로만 끝나 버리는 게 아니라는 거... 그것에 대한 책임감... 그래서인지 일 때문에 강의를 들을 때도 이왕 듣는 거 제대로 잘 듣자.. 이런 생각을 하는 거죠.”
가끔 어렸을 때를 생각해 보면 어른들이란 내가 이해하지 못하는 말들을 무진장 길게 얘기하는, 재미없는 짓들만 골라 하면서 쓴 술이나 들이키는, 그런 따분한 존재였다. 세상을 가까이서 들여다보면 안다. 지금 이 순간을 지겨워하고 재미없어 하는 사람들의 절대 다수는 어른이란 걸. 어른이 된다는 건 어쩌면 세상이 심심해지는 것일 지도 모른다. 재밌고 신나는 건 모두 아이들의 몫이고 더럽고 위험하고 어려운 일들은 늘 어른들의 몫으로 남는다. 그 무료함을 딛고 진정한 어른으로 탄생하기 위해 노력해야 하는 시간들이 연거푸 쏟아지는 것, 어쩌면 그게 어른의 삶일지도... 젠장...
그녀와 나누는 어른들의 대화는 그렇게 계속 이어졌다.
아버지의 손
마사회에서 매년 실시하는 ‘전국민말타기운동’ 이벤트에 당첨되어 승마를 시작하게 되었다는 그녀... 취미를 시작하게 된 계기도 어째 좀 동화 같은 그녀에게 마지막으로 꿈을 물었다.
“살아가면서 내가 세상에 대해 알아가고 배워가는 것들을 내 안에서 하나하나 쌓아올려서... 그렇게 진정성을 가지고 동화를 만들고 싶어요.” 꿈처럼 그렇게 할 수만 있다면 그 책이 얼마나 팔릴 지 따위의 걱정은 하지 않는다. 세상은 이렇단다하고 아이들에게 ‘제대로, 잘’ 이야기 해줄 수 있는 사람이 되는 것, 그런 동화책을 만드는 것...
“아이들이 보는 책이라도 해서 무조건 사실과 다르게 아름답게만 꾸며진 세상을 보여주고 싶지는 않아요. 내 책엔 세상의 미운 면들을 가리지 않고 그대로 드러내고 싶어요.”
세상의 미운 면이라... 갑자기 그녀가 그린 동화책의 한 장면이 스친다.
중국집 주방장이셨던 아버지... 밥은 굶지 않겠다는 생각에 시작한 그 일은 아버지 평생의 업이 되었다. 신흥반점이라는 간판을 내걸고 뜨거운 여름날에도 이글대는 화덕 앞을 떠나는 법 없던 아버지는 그렇게 자신의 일생을 받쳐 아픈 홀어머니를 모시고 자식 넷을 사랑으로 키워냈다. 그녀가 그려낸 동화 안엔 그런 아버지의 삶이 너무나도 담담하게 그려져 있었다. 아버지의 이야기를 통해 건너다보이는 그녀의 삶... 아버지의 이야기 속에 함께 뒤섞여 있는 그녀의 이야기... 어차피 아무리 길고 자세하게 이야기한들 자신이 속한 가족의 이야기와 그 가족의 가장으로서 살아낸 아버지의 삶 모두를 담아낼 수는 없다는 걸... 그녀는 아는 듯했다. 결코 아름답지만은 않은 그 동화 안에서 아버지의 손은 그렇게 밉지만 정직한 그림이 되었다.
그 손을 앞에 두고 아버지는 말했다.
“내 손이다. 이쁘제? 이 손으로 짜장 볶아서 장가도 가고 자식도 넷이나 낳고 키웠다. 지금은 손주가 일곱이고, 우리 식구 다 합치모 열여섯이다, 열여섯! 대단하제!”
그리곤 후련하게 자신의 생에 대해 일갈한다.
“이만하믄...... 잘 살았다......”
이 고단한 손으로 곱게 잘 길러낸 한 아가씨가 지금, 내 앞에 앉아 있다.
그런 그녀가 앞으로 쓰고 그려낼, 밉고 거칠지만 꾸미지 않아 더없이 정직할 이야기들을 생각하니 또 다시... 잠시 행복해진다.
오랜만에 혜란씨의 얼굴을 보니 무지 반갑네요^^
함께 '어른의 탄생'을 들었는데...탄생하려고 껍질이라도 깨고 있는지 스스로에게 물어봅니다.
부모의 등을 바라보고 자라는 아이들에게 " 이만하믄...잘 살았다..."라고 생의 마지막무렵에 할 수 있을지
자신없네요.
현아씨가 가져왔던 그림책 넘 재미있게 읽었어요.
생생하게 살아움직이는 그림을 보며 어린날의 동네중국집과 얽힌 추억도 생각났구요.
가을강좌에도 만날 수 있기를....
혜란씨가 요즘 좀 바빠서...
지금 준비하는 책 내년 총선 전까지는 나와야 한다네요.
예쁘고 착한 동화 만드느라 그런거니까 좀 봐줘야지요.
언제 또 보려나...
맨 아래 손 그림. 이혜란씨가 그린 거죠? 그 그림 보니 엄마가 내 손 만져주실 때 느낌이 확 오네요.
오늘 이소선 어머니 영결식과 노제가 있었는데 참가하진 못했지만, 이 그림을 보니 더욱 여러 느낌이 교차하네요.
따뜻한 글... 감사합니다.
저도 읽어주셔서 감사합니다. 꾸벅...
마지막 손그림과 글에서 울컥 눈물이 날 뻔 했어요. 혜란작가님의 책 꼭 읽어봐야겠어요.
좋은 글 잘 읽었어요. :)
혜란씨 책은, 보시면 아시겠지만 색도 그림도 글도 요란하지 않아요...
차분하게, 길지 않은 이야기를 천천히 들려주는 그런 동화예요.
음... 제가 혜란씨 책 판매에 나서게 될 줄이야... ㅋㅋㅋ
혜란님의 삶과 글, 그리고 말에 감동이 있어요.
좋은 글 감사해요.
저두 감사합니다. ^^ 헤헤
이혜란님의 맑음과 평안을 잘 풀어낸 박현아님
아버님의 손, 작가의 눈으로 쓰여질
세상 이야기들 기다려집니다.
바쁜날들의 쉼표, 느티나무 아래에서...
일의 즐거움, 몸 건강 함께하기를 !!!!!!!!
아이자샘! 와~ 오랫만이에요^^
요즘은 뭐 하시느라 얼굴도 안 보여주시는지...요?
언젠가, 시간이 된다면 샘 다시 인터뷰 하고 싶어요.
그동안 재미나는 일 많이 만들어 놓으세요~
하긴, 너무 알아서 잘 하시겠지만요 ㅋㅋ
건강하시죠?