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신화로 만나는 삶의 이야기들 3강
약 찾으러 지옥에 간 여신
옛날, 옛날 한 옛날에 불나국이라는 나라에 딸만 일곱을 둔 오구대왕과 길대부인 부부가 살았다. 아들을 기대하던 오구대왕은 일곱 번째 역시 딸이 태어나자 불같이 진노하여 갓 태어난 아기를 서해용왕에게 진상품으로 갖다 바치라고 명한다. 길대부인은 슬픔과 분노를 머금고 아기를 몰래 빼돌려 옥함에 넣어 나라의 서쪽 끝에 있는 수미산 기슭에 버린다. 버린 아이라 하여 아기의 이름을 '바리데기'라 했다. 한편 세상을 등지고 산속 깊은 곳에 들어와 하늘과 구름을 이불삼고, 땅을 요삼아 살아가던 비리공덕 할미 할아범 부부는 약초를 캐러 다니다 오색운무가 가득한 가운데 아기울음소리가 들리는 옥함을 발견한다. 아기의 입에는 왕거미들이 귀에는 불개미들이 바글거렸고 몸통에는 뱀이 휘감고 있었다. 놀란 부부가 아이를 계곡물에 씻기자 거미와 개미떼들은 희고 붉은 꽃잎이 되어 물위로 흘러갔고 커다란 뱀은 나뭇가지가 되어 떠내려가 버렸다. 하늘과 땅, 산과 들에서 빌리는 공덕으로 살아가던 이들 부부는 젖 없는 아이 젖 주어 기르는 공덕을 최고의 공덕으로 알고 이 아이를 데려다 정성껏 키웠다.
오구대왕은 막내딸을 죽이라 명한 이후에 이름 모를 병에 걸려 시름시름 앓기 시작했다. 왕이 병들자 불나국은 점점 피폐해져가기 시작했다. 왕의 병은 아무도 고칠 수 없었고 죽지도 살지도 못한 채 십오 년이 흘렀다. 어느 날 길대부인의 꿈속에 푸른 옷을 입은 어린 소년이 나타나 왕의 병은 일곱 번째 딸이 가져다주는 서천서역국의 약수와 꽃으로만 고칠 수 잇다고 전한다. 왕은 여섯 딸들을 불러 누가 약수를 가져다줄 수 있을지 물었으나 아무도 나서는 이가 없었다. 서천서역국 가는 길은 한 번 가면 다시 돌아오기 힘든 길이었기 때문이다. 오구대왕은 하는 수 없이 일곱 번째 공주 바리데기를 찾는다.
바리데기는 자신을 버린 부모가 미웠지만 낳은 공덕도 공덕이라 여기고 서천서역국을 향해 길을 떠난다. 무쇠신에 무쇠두루마기 무쇠패랭이로 남장을 하고 얼굴에는 재를 바른 채 무쇠주령을 가슴에 품고 무쇠지팡이를 집고 바리데기는 길을 잡았다. 높은 산과 깊은 물, 사막과 화염산, 얼음산과 눈보라를 거쳐 걷고 또 걸어 어느 마을에 도착했을 때 어느 할미 하나가 얼음물에 빨래를 두드리고 잇엇다. 서천서역국이 어디냐는 바리데기의 물음에 할미는 검은 빨래는 희게 흰 빨래는 검게 해놓으면 알려준다고 퉁명스럽게 말하고는 산더미 같은 빨래 뭉치만 남기고 사라진다. 바리데기는 검은 빨래는 방망이를 두드리고 물에 헹궈 희게 만들고 희 빨래는 흙에 담궈 두드려 검게 만든다. 숙제를 모두 마친 바리데기에게 천태산 마고할미는 산모퉁이를 왼편으로 돌아 개울 세 개 건너편에 살고 있는 탑 쌓는 노인에게 물어보라 알려준다. 탑 쌓는 노인네는 쌓는 즉시 무너져 버리는 돌들로 108일 만에 돌탑하나를 완성하면 알려 주마 한다. 바리데기가 이 숙제를 끝내자 노인은 금주령과 낭화 세 가지를 남기고 사라졌다.
금주령을 흔들자 길이 접혀 수만리 길이 한 달음이 되고 너른 강은 시내처럼 좁아졌다. 이윽고 바리데기가 도달한 곳은 칼산지옥 구렁지옥 배암지옥 한빙지옥 불산지옥 물지옥 철정지옥 무간지옥이었다. 수많은 죽은 영혼들이 참담한 꼴로 죽지도 살지도 못한 채 끊이지 않는 고통에 몸부림치고 있었다. 그들의 고통에 눈물 흘리던 바리데기는 노인에게서 받은 꽃들을 이들에게 던져준다. 바리데기가 던진 꽃에 닿은 영혼은 철로 된 높은 지옥성에서 꽃처럼 떨어져내려 황천강에 흘러갔다. 지옥을 지나 솜털도 가라앉는다는 약수 바다에 이르렀을 때 바리데기의 은덕을 입은 영혼들이 나타나 바리데기를 들어 올려 무사히 바다저편까지 날라주었다.
바다 저편에는 서편서역국에는 하늘의 노여움을 사 지상에서 유배된 무상선인(무장승)이 약수를 지키며 살고 있었다. 무상선인은 지상의 여인과 만나 혼인하면 하늘에서 지은 죄를 탕감 받을 수 있었다. 무상선인은 바리데기에게 몸값으로 날 없는 낫으로 나무하기 삼 년, 차돌 깨트려 불씨 묻기 삼 년, 밑 빠진 독에 물 긷고 서천 꽃밭에 물주기 삼 년을 요구한다. 그렇게 아홉 해를 지낸 후 바리데기는 무상선인과 "천지로 장막삼고 일월로 등촉삼고 산수로 병풍삼고 샛별로 요강삼고 썩은 나무 등걸로 원앙금침 잣베개삼아 두고" 혼인하여 아들 일곱을 낳는다. 그렇게 이 모든 과정을 마치고 바리데기는 약수 한 병과 서천 꽃밭에서 자라는 살살이꽃, 뼈살이꽃, 숨살이꽃을 들고 일곱 아들과 남편과 함께 불나국으로 돌아온다. 바리데기의 귀환을 기다리지 못하고 이미 숨이 끊어져 살이 짓무르고 있던 오구대왕은 바리데기가 가져온 약수와 꽃들로 되살아나 일곱 번째 딸인 바리공주에게 대가로 무엇을 주랴고 묻는다. 바리공주는 재산도 권력도 싫다며 자신은 모든 버려진 존재들의 슬픔과 원한을 위로하는 자가 되리라고 말한다. 바리공주는 이로서 죽은 자들을 저승으로 안전하게 이끄는 여신으로 봉해진다. 뿐만 아니라 무장승은 시왕으로, 일곱 아들은 칠성신으로, 비리공덕 할아범은 산신으로 할미는 평지신으로 봉해진다.
바리데기, 또는 바리공주는 우리나라 무당들이 몸주로 받들어 모시는 무조신이다. 무당들은 진오귀굿판에서 항상 바리공주풀이를 한다. 바리공주가 공주이면서도 버려진 모든 것들의 슬픔과 고통을 자신의 것으로 알고 느끼듯이 무당들 자신도 고통에 휩싸인 존재들의 아픔을 자기의 것으로 느끼고 그들의 고통을 덜어주어야 한다. 바리데기풀이는 한 사람의 무당으로 입신하는 과정을 상징적으로 나타내고 있는 입무담의 전형적인 형식을 취하고 있는 이야기다. 또한 평범하게 살았거나 또는 부귀영화를 누리고 살았음직한 고괴한 아이가 뜻하지 않은 고난을 겪고 보통 사람이상의 존재로 거듭나는 영웅이야기의 전형으로 보이기도 한다. 그러나 특정인의 입무담이나 영웅이야기를 넘어 한편으로는 한 사람이 어떤 과정을 거쳐 자기 자신을 넘어 커다란 인격으로 성장해나가는지를 보여주는 모두의 이야기이기도 하다.
바리데기 공주가 길대부인의 태에 들 때 일월성신과 청룡과 황룡, 금거북과 오색구름이 나타났다고 한다. 귀한 존재로 이 땅에 왔으면서도 그녀는 버려져야 했다. 딸이라서 버려졌다는 이유가 오랫동안 이 땅을 지배했던 남녀불평등의 모순을 반영하는 듯이 보이기도 하지만 그보다 더 심층에서는 아들이건 딸이건 간에 우리 모두가 버려진 아이로 태어난다는 점에 주목할 필요가 잇다. 사람으로 태어난다는 것은 어머니로부터 분리된다는 것이다. 나의 가까운 혈육인 어머니의 몸에서 분리되고 먼 혈윤인 하늘과 땅으로부터 분리된다. 태어나 한 사람으로 살아간다는 것은 이 분리를 경험하고 그 분리됨 속에서 면면히 흐르고 잇는 비분리된 뿌리와 연결되어 있음을 다시 자각하는 일련의 과정을 겪는 일이다. 말하자면 우리는 모두 버려진 아이로 태어나 스스로 분리를 넘어 연결로 나아가는 과정을 겪는 것이다.
바리데기의 친부모는 자신의 진정한 뿌리, 또는 세계와의 연결을 망각하고 있는 자들이며 바리데기를 양육한 비리공덕 부부는 그 연결을 자각하고 그 연결 속에서 살아가는 이들이다. 오구대왕은 분리된 세계의 극단에 서있는 인물이다. 그는 아들을 낳아 왕위를 계승해야 한다는 사회법에 고착되어 있는 인물이다. 이 세계 속에서 나와 타인은 철저하게 분리된 개체로 존재한다. 의미 있는 것은 오직 사회적 규율뿐이다. 한편 바리데기를 키우고 거둔 비리공덕 부부는 수미산에 사는 이들, 말하자면 인간세계의 규율에 얽매이지 않고 자연법에 귀속된 삶을 사는 사람들이다. 이들이 기댄 곳은 왕궁의 권력이 아니라 자연에서 나고 자라는 것들이며 그것도 소유나 착취가 아닌 빌리는 공덕이다. 바리데기는 인간세계의 바깥으로 밀려나 자연계의 질서와 법을 깨달아 가면서 자라난다. 그녀가 서천 서역국행을 자청하는 것도 인간계의 법률에 깨달아서가 아니라 자연계의 법칙에 대한 깨달음 때문이다. 그가 믿는 법칙은 천지자연이 나와 한 몸이듯이 부모도 나와 한 몸이며 더 나아가 내게 고통을 준 자들과도 한 몸이라는 깨달음이다.
서천서역국으로 가는 행로는 인간계를 벗어나 다른 차원으로 이동해가는 긴 여정이다. 이 세계에서 바리데기는 길 없는 길을 걸으며 이 세계에서 규정된 시간 공간의 법칙이 뒤집히고 뒤틀어진 다른 질서의 세계 속에 발을 들여놓는다. 수만리 길이 한 걸음이 되기도 하고 먼 바다가 작은 시내가 되기도 한다. 이 세상에서 무게를 지닌 모든 것들을 집어 삼키는 바다를 날듯이 사뿐히 건너가기도 하고 검은 빨래를 희게 빨기도 해야 한다. 이 세계에서 유용해 보이는 모든 노구들은 아무 소용이 없다. 꾀도 지략도 통하지 않는다. 날 없는 낫으로 나무를 해야 하며 돌을 깨트려 불씨를 묻고 밑 빠진 독으로 물을 길어야 한다. 불가능해 보이는 이 모든 일들을 해낼 수 있는 유일한 방법은 마음 다하기다. 자꾸 무너져 내리는 돌탑 쌓기를 마칠 수 있었던 것은 그 날의 천지자연의 흐름을 읽고 하루에 돌 하나씩을 얹음으로 서이다.
그녀는 그렇게 해서 얻은 꽃을 고통 받고 있는 원귀들에게 던져준다. 돌탑 쌓기를 주문했던 노인은 석가세존이었고 노인이 던져준 낭화 세 가지는 부처가 깨달음의 가르침으로 들어 올렸던 꽃이다. 바리데기가 움직일 때마다 꽃들이 따라 움직인다. 바리데기의 입과 귀를 틀어막고 바글거렸던 왕거미 불개미는 꽃잎으로 변하고 천지자연의 흐름과 하나가 되어 쌓아 올린 돌탑의 대가로 얻은 꽃들은 고통 받는 혼들을 평화로 이끈다. 서천꽃밭에 자라는 꽃들은 이 세상에서 죽어가는 살과 뼈와 숨을 살린다. 세상의 논리와 노예가 된 오구대왕을 살리는 것은 저편에서 온 물과 꽃이다. 그녀는 분리된 이편과 저편을 하나로 합쳐 분리의 병을 치유하는 자가 된다.
시베리아 입무담에서 샤먼은 주로 남성들이었다. 그들은 일찍이 쌰먼의 운명을 타고 나 샤먼으로 지목된 이후에는 스승의 요구에 따라 최소한의 식량만을 지니고 마을에서 멀리 떨어진 외딴 곳으로 간다고 한다. 인간화 되지 않은 풍경을 지닌 어딘지 알 수 없는 외딴 곳에서 그는 무엇인가를 배워야 한다. 야생동물이 들끓을 수도 있고 더위와 갈증에 지쳐 미쳐버릴 수도 있다. 모래바람에 몸을 맡겨야 할 수도 있고 더위와 갈증에 지쳐 미쳐버릴 수도 잇다. 어쨌든 미래의 샤먼이 될 그들은 그런 가운데 몇 날 며칠을 보내야 하고 드디어 죽음을 맞이한다. 독수리나 늑대가 다가와 그의 몸을 갈가리 찢어 먹어버리고 괴물이 나타나 온몸을 난도질해 솥에 넣고 삶는다. 뼈는 뼈대로 살은 살대로 발라지고 죽은 그의 영혼은 천계를 여행한다. 하늘의 메신저가 나타나 그를 데리고 저 세상 여기저기를 보여준다. 약초를 보는 눈을 주고 영혼의 병을 알아보는 눈을 준다. 죽은 그의 영혼은 죽은 그의 몸으로 다시 내려오고 흩어져 구워지고 삶아졌던 그의 몸은 다시 붙어 되살아난다. 그는 그럼으로써 샤먼이 되는 것이다. 미르치아 엘리아데가 전하는 시베리아 무당의 입무담이다.
바리데기 이야기는 샤먼의 입무담이기는 하지만 시베리아 남성 무당들과는 다른 색깔의 이야기다. 그녀는 저 세상으로의 여행으로 고통을 경험하기는 하지만 그의 몸이 잘라지고 삶아지는 경험은 하지 않는다. 그녀가 하는 경험은 자기 해체의 경험이 아니라 일상의 노동을 자청하는 일이다. 물긷기 빨래하기 불때기 꽃가꾸기 돌탑쌓기 등등 이 세상에서도 흔히 벌어지는 일이다 게다가 혼인하여 아이 낳는 일까지 한다. 그러나 세상에서도 쉬워 보이는 그 일들이 저 세상에서는 그리 녹록치 않다. 일을 완수하는 기준이 다르기 때문이다. 이 모든 여정을 거쳐 그녀가 배우는 것은 연민이다. 연민은 타인의 고통을 추론을 통해서 짐작하는 것이 아니라 그냥 그렇게 나의 고통으로 느끼는 것이다. 추론은 나와 타인의 분리를 전제로 하지만 연민은 분리 이전의 느낌이다. 그냥 당신이 그러하므로 내가 그러한 것이다. 내가 아프니 아픈 곳을 낫게 하고자 할 뿐인 것이다.
우리는 세상을 나와 너, 그것으로 나눈다. 너는 내 앞에 있는 자, 나와 연결되어 있는 자이다. 그러나 그것은 나와 아무런 연결이 없는 존재다. 나는 그것에게는 무관심하지만 너에게는 무관심할 수 없다. 너는 또 다른 나이기 때문이다. 우리는 그것에 대해서는 객관적 시각을 취할 수 있지만 너에 대해서나 나에 대해서는 그럴 수 없다. 근대 이후에 우리는 세계에 대해 객관적 시각을 가질 것을 배우면서 살아왔다. 세계에 대해 거리두기, 세계의 소란에서 벗어나 바깥의 있는 사람의 눈으로 세계를 바라보기, 세계와 냉정하게 거리를 두는 일은 우리의 일상 생활속에 차고 넘쳐난다. 고객을 대하는 판매직원의 태도 속에, 환자를 대하는 의사의 태도 속에, 알지도 못하는 전화 저편의 목소리에게, 뿐만 아니라 우리가 매일 먹어치우는 동물들에게, 들판의 꽃들과 나무들에게, 강과 산, 바다에게 우리는 얼마나 객관적이고 냉정한가. 그 모든 것들이 '그것'의 세계 속에 귀속되어 있다. '그것들'의 세계에 둘러싸여 사는 우리들은 이제 자기 자신마저 '그것'으로 보기 시작했다. 우리는 괜찮은 '그것'이 되기 위해 우리를 기계 고치듯이 고치며 온갖 그것들로 감싼다. 백 년 전쯤에 누군가가 말했던 사물화와 도구화, 소외가 이제 일상이 되어 버린 것이다. 오구대왕의 병은 나를 제외한 모든 것들이 네가 아닌 그것으로 보게 된 데서 비롯된다. 그 병을 고칠 수 잇는 것은 세계를 '그것'이 아닌 '당신'으로 볼 수 있는 힘에 의해서이다. 그리고 그 힘은 그토록 우리가 자주 입에 담는 '공간'의 힘이다. 바리데기를 모시는 무당들은 하늘과 땅에서부터 시작하여 집안의 부뚜막과 변소에 이르기까지 하다못해 집밖과 마을을 떠도는 온갖 객귀와 잡귀까지 불러 모아 한 판 거나하게 잔치 굿을 벌린다. 모두가 함께 평안해야 온 누리가 평안하기 때문이다. 그렇게 해서 바리데기 여인들이 이 세계에 가져다주는 것은 숨과 피와 살을 살리는 꽃, 모두를 당신으로 변모시키는 힘, 사랑이다.
어찌 보면 신화의 실체는 무수한 異本이랄 수 있다. 우리의 여신'바리데기' 역시 수십 가지의 이본(異本)이 있고 그 이본 만큼이나 다양한 바리데기 또는 바리공주를 사람들은 이미 구전되는 이야기나 굿판에서 혹은 책에서 만났을 것이다. 그러나 [신화로 만나는 삶의 이야기들] 3강에서 김융희 선생님이 풀이한 바리공주는 그렇게 여러 경로로 만나왔어도 깊이 생각해 본 적이 없는 여신이다. 내가 아는 '바리데기'는 효를 강조하는 서사로 심청이와 다를 바 없는 주인공이었다.
외형적 줄거리를 간단히 언급하자면, 불나국에서 오구대왕과 길대부인의 일곱 번째 딸로 태어난 바리데기는 ‘또 딸’이라는 이유로 옥함에 넣어져 서쪽 끝에 있는 수미산 기슭에 버려진다. 그곳에는 비리공덕 할미와 할아범이 살고 있었는데 그들에 의해 바리공주는 양육된다. 바리공주를 버린 오구대왕은 병에 걸렸는데 아무도 고칠 수 없었고 바리데기가 가져다주는 서천서역국의 약수와 꽃으로만 고칠 수 있다. 하여 바리데기는 자신을 버린 오구대왕의 약을 구하러 서천서역국으로 길을 떠난다. 바리데기는 서천서역국으로 가는 도중, 여러 가지 시련이 있었으나 모두 극복해 내고 마침내 그 곳에 도착한다. 그 곳에서 약물의 임자인 무장승의 청으로 그와 결혼해서 일곱 아들을 낳고 약물을 가지고 아버지에게 돌아온다. 죽음에서 살아난 오구대왕은 바리공주에게 대가로 무엇이든 주마고 했으나 바리공주는 자신은 버려진 존재들의 슬픔과 원한을 위로하는 자가 되리라고 말한다. 이로서 바리공주는 죽은 자들을 저승으로 안전하게 이끄는 여신으로 봉해진다. 그리하여 바리데기, 또는 바리공주는 우리나라 무당들이 몸주로 받들어 모시는 무조신이 되었다.
김융희 선생님은 바리데기의 버려짐을 모태와 하나로 합쳐져 있다가 분리된 인간의 근원적 불안으로 보았다. 모태는 인간이 경험할 수 있는 가장 안락하면서도 결핍이 없는 파라다이스라 볼 수 있다. 그러므로 사람들에게 있는 회귀본능은 자연적인 것으로 보았다.
그러나 인간은 누구나 숙명적으로 세계와 분리되어야 하고 분리될 수밖에 없는 것이다. 분리된 이상 개별자로 개별의 과정을 잘 견뎌야 하고 개별자로서 전체를 보며 균형 잡힌 삶을 살도록 해야 한다는 것이다.
한층 심화된 분리의 방식으로 바리데기가 버려진 곳은 서쪽 수미산 기슭이다. 그곳은 사회의 법률이나 규율로부터 떨어진 곳이었다. 거기에 사회로부터 밀려나서 사는 비리공덕 할미와 할아범이 하늘과 땅과 산과 들에서 빌리는 공덕으로 살아가고 있었다. 말하자면 자연친화적인 세계인 것이다. 또한 바리데기가 아버지 오구대왕의 약을 구하기 위해 가는 곳은 서천서역이다. 그곳은 해를 받아서 다시 밀어 올리는, 생의 마지막 지점이면서 동시에 시작점이기도 하다. 문명 안에 살던 오구대왕의 병을 치유할 방법은 왕으로부터 버려진 바리데기가 가져올 서천서역국에 있는 약수와 꽃이었다.
문명을 보호하려면 바깥을 끌어들이면 안 된다. 바깥은 내 것도 없고 소속도 없는 불편한 야생이다. 그러나 문명이 에너지를 충전하려면 야생으로 가야 한다. 오구대왕이 저 먼 바깥, 저승에 있는 약수로 목숨을 구한 이유이다. 우리들 각자의 내면 또한 성이자 감옥일 수 있다. 우리가 겹겹이 입은 옷들은 외부로부터 지키려는 것에 다름 아니다. 그래서 우리는 갇히게 되는 것이다. 우리 몸에서 옷들이 벗겨져 나갈 때 편견은 걷어지고 진정한 세계를 바라볼 수 있다. 새것은 항상 필요한 것이며 그 새것은 외부, 즉 바깥으로부터 오는 것이다.
바리데기가 인간계를 벗어나 다른 차원으로 이동해가는 긴 여정에서 온갖 시련 끝에 얻은 꽃으로 고통 받은 원귀들을 꽃잎으로 떨어져 황천강을 흐르게 한다. 오구대왕의 병이 '나'를 제외한 '그것'으로 본데 있다면 그 병을 고칠 수 있는 것은 세계를 '그것'이 아닌 '당신'으로 볼 수 있었던 바리데기의 사랑이다. 어떻게 하면 그런 치유의 힘을, 사랑을 가질 수 있겠는가? 우선 나와의 거리두기를 하고 내 안에서 일어나는 것을 보라. 내가 나라고 정립시키지 못하는 것들이 내 안에 있다. 바깥을 객관적으로 볼 게 아니라 우리의 내부를 개관적으로 봐야 한다. 가까운 나는 멀리보고 먼 타인을 가까이 봐야 한다. 겹겹의 안경을 쓰고 있는데 안경을 통해서가 아닌 직접적으로 마주치는 세계를 봐야한다. 그리하면 타자와 교감은 추론에 의한 공감이 아니라 제가 저렇게 하니까 아프고 힘들고 고통스럽겠구나 하는 바리데기의 마음이 될 것이다.
무당들의 조상신이 된 바리데기는 당연하기까지 하다. 무당이 접신(接神) 상태에서 이루어지는 천상과 저승의 체험은 바리데기가 신화 속에서 했던 여행과 동일시되기 때문이다. 무당들은 온 세상에 널려있는 잡귀들까지 불러 모아 자연에 내재한 힘으로 굿판을 벌인다. 산자든 죽은 자든 모두가 평안해야 온 누리가 평안하기 때문이다. 그렇게 해서 바리데기 여인들이(무당) 이 세계에 가져다주는 것은 숨과 피와 살을 살리는 꽃, 모두를 당신으로 변모 시키는 힘, 사랑이다. 그래서 문명에 안주하지 않았던 바리공주의 선택은 신화가 된 것이다.
어느 소설가가 "하느님이 인간을 빈손으로 세상에 보낸 이유는 누구나 사랑 하나만으로 충분히 살아갈 수 있음을 알게 하기 위해서이고, 하느님이 인간을 빈손으로 저 세상으로 데려가는 까닭은 한평생 얻어낸 그 많은 것 중에 천국으로 가지고 갈만한 것은 오직 사랑밖에 없다는 것을 알려 주기 위해서" 라고 했다. 바리데기를 통해 되짚어 낸 구절이다.
말, 말, 말.
*사랑은 분리 속에서 결합을 이루는 것으로 본다.
*내밖에 있는 너와 내가 아주 깊숙한 곳까지 가는 것이 사랑이라고.
*사회적 관점(의식화 된 것) 것들을 치우고 판단을 중지하라.
*( )치기를 하고 다음에 나타나는 세계를 봐라.
*많은 걸 이용할 줄 안다 해서 인간이 우수한가?
*진짜 공감의 구조는 무엇인가?
※김융희 샘과 고미선, 김지연, 김다영, 조숙위, 황미정, 조우석, 김인숙, 주은정, 박성희, 권현희, 박순천님이
함께 부암동 백사시에서 김밥하고 포도 먹고 왔어요. 나름 소풍이었다는.
담주 화요일은 조우석님을 따라서 건강센터(?) 관람하기로. 기대만발~ ㅎㅎㅎ