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신화로 만나는 삶의 이야기들 6강
놀이하는 어린이, 춤추는 신들
인도에는 춤의 왕이라 불리는 신이 있다. 그의 이름은 시바 나타라자(Shiva Nataraja)다. 시바 신은 인도의 세 주요 신 중에 하나로 그가 담당하고 있는 영역은 파괴다. 모든 생겨나는 것을 무로 돌리는 것이 시바의 힘이다. 베다를 만들고 암송했던 인도의 전통에 의하면 이 세계는 세 가지의 커다란 힘이 주재한다. 고요하고 아늑한 태초의 우유바다에서 비쉬누라는 이름의 신이 자다 깨다를 반복한다. 그가 잠을 자기 시작하면 그의 배꼽으로부터 연꽃 한 송이가 피어나고 그 연꽃 속에서 세계의 모든 환영을 창조하는 브라흐마가 태어난다. 한 브라흐마가 태어나면 신의 햇수로 사천팔백 년을 살다 사라지고 비쉬누는 잠시 잠을 깨었다 다시 잔다. 그는 무한히 이어지는 잠과 꿈ㅇ,ㄹ 만드는 근원적인 힘이다. 한편 이 모든 잠과 꿈의 경계 너머에 그 꿈을 물거품으로 돌려버리는 소멸과 파괴의 신이 있다. 그가 바로 시바다. 인도의 이 세 신은 각각 유지-창조-파괴의 국면을 상징한다고도 한다. 또한 베다 철학의 기본 틀인 사트바(Sattva:평온과 고요)-라자스(Rajas:활동)-타마스(Tamas:어둠)의 힘을 상징한다고도 한다. 그런데 이 세 가기 힘이 모두 시바로부터 흘러나온다고 한다. 그는 존재하는 모든 것들의 바탕에서 움직이고 있는 근원적인 신성을 대표한다.
비쉬누가 몽롱한 상태의 우유바다에 누워 떠다니고 있을 때 멀리서 하나의 환상이 엄청난 빛을 뿜어대면서 그에게 다가왔다. 그는 머리가 넷 달린 브라흐마였다. 브라흐마는 누워있는 비쉬누에게 물었다. "너는 누구인가? 너는 어디에서 왔는가? 여기서 무엇을 하고 있는가? 나는 모든 존재의 최초의 부모이다. 나는 나 자신으로부터 비롯된 자이다!" 비쉬누는 그 말에 찬성할 수 없었다. "내가 바로 우주의 창조자이자 파괴자이다. 모든 우주는 나의 꿈으로부터 비롯된다." 이 두 신이 서로 자기가 우주의 근원적인 자라고 주장하면서 티격태격하고 잇을 때 불꽃에 휩싸인 거대한 남근이 우유바다로부터 떠올랐다. 그 높이나 깊이는 측량할 수가 없는 것이었다. 이 광경을 놀라서 바라보던 두 신이 그 크기를 알아보기로 했다. "자네는 밑으로 뛰어 들어가게나. 나는 위로 날아가 볼 테니. 우리 저것의 끝을 한 번 찾아보세." 비쉬누는 멧돼지로 변하여 아래로, 아래로 뛰어들었고 브라흐마는 거위로 변하여 위로, 위로 날아갔다. 그러나 이 두 신이 정 반대방향으로 아무리 내달려도 그 끝에 닿을 수가 없었다. 그 거대한 남근이 계속 자라났기 때문이었다. 한참이 지나 이 두 신이 지칠 때쯤 되자 남근의 틈새로부터 시바가 나타났다. 브라흐마와 비쉬누는 시바에게 엎드려 경배했고 시바는 자신이 우주의 근원임을 엄숙히 선언하였다. 브라흐마와 비쉬누는 자신이 낳은 것이며 자신 안에 영구히 거주한다는 선언이었다. 자신은 시바 하라(Shiva-hara), 즉 '되돌리고 소멸시키는 자, 다시 빨아들이는 자'라는 것이다. (하인리히 침머, <인도의 신화와 예술>에서) 시바 신은 끝없이 팽창하는 우주의 남근이면서 동시에 생겨난 모든 것들을 다시 거둬들이는 소멸의 힘이기도 하다. 모든 생겨나는 것을 관장한다고 여겨지는 브라흐마나 그것의 토대이자 그것을 유지시키는 근원자라고 여겨지는 비쉬누 모두 부풀었다 줄어들기를 반복하는 거대한 우주의 힘인 시바의 다른 표현에 불과하다.
시바의 이야기는 현대 천체물리학의 빅뱅과 블랙홀의 이미지를 떠오르게 한다. 태초의 그 날(물리학자들의 계산에 의하면 137억 년 전쯤) 우주는 하나의 작은 씨앗이 폭발함으로서 생겨났다. 호두보다도 작은 우주의 씨앗이 '펑!' 하고 터지더니 엄청난 크기로 부풀기 시작했다. 태초에 폭발의 진동하는 힘과 팽창하는 힘은 지금 이 시간에도 계속 움직이고 있어서 별과 별 사이, 은하와 은하 사이는 계속해서 멀어지고 있다. 이 끝없는 멀어짐이 어느 날인가 정지되면 그 때부터 우주는 수축하기 시작할 것이라고 한다. 그리고 어느 날엔가 최초의 그 작은 씨앗 같은 어둠속으로 존재했던 모든 것들이 사라지게 될 것이다. 모습을 갖고 생겨난 모든 것들은 끝없이 부풀어 오르는 그 최초의 씨앗으로부터 생겨났고 생겨난 모든 것들은 다시 그 최초의 씨앗으로 되돌아갈 것이다. 시바는 그 모든 생겨났다 사라지는 모든 것의 근원적 힘을 나타낸다.
시바의 이런 모습을 나타내는 형상이 바로 시바 나타리자이다. 그의 오른쪽 손바닥에는 모래시계 모양의 북이, 왼쪽 손바닥에는 불꽃이 안겨있다. 다른 한 쌍의 오른손은 '두려워 말라!'라는 수인을 나타내고 왼손은 높이 치켜든 자신의 왼 발을 가리키고 있다. 이 손은 코끼리의 코를 흉내 낸 포즈라고 한다. 코끼리의 코는 그의 아들인 가네샤를 나타낸다. 가네샤는 장애를 제거하는 신이다. 모래시계 모양의 북은 우주적 리듬을 상징한다. 불꽃은 나타났다 사라지는 것, 활활 타오르면서 동시에 모든 것을 무화시키는 힘을 상징한다. 그의 손은 그 불꽃을 받치고 있는 그릇과 같은 모양이다. 불꽃은 그릇에 담겨있기는 하지만 결코 고정될 수응 없다. 그것은 생성과 소멸이 동시적으로 벌어지는 하나의 사건으로만 실존한다. 그의 머리카락은 사방으로 뻗어나가 그를 둘러싸고 있는 화염바퀴로 이어진다. 그의 춤 자체가 하나의 불꽃과 같다. 인도에서 긴 머리카락은 생명을 지닌 것들이 경험하는 삶의 다양한 면모들을 상징한다. 머리카락을 자른다는 것, 삭발한다는 것은 삶이 가져다주는 모든 것들과 단절한다는 뜻이다. 삶의 희노애락을 만들어내는 모든 생명의 작용들을 거절하고 그 모든 것들을 하나의 환상으로 되돌리며 그 환상들 너머의 부동의 존재에만 전념하겠다는 의지의 표현이다. 불교도들은 머리카락을 자르지만 시바교도들은 긴 머리를 그대로 기르고 다닌다. 시바의 머리카락은 우주적 화염바퀴와 연결되어 있다. 목숨 가진 것들이 느끼는 모든 기쁨과 슬픔, 애착과 분노는 시바의 머리카락으로부터 비롯되어 나타났다 사라지면서 끝없이 불타오르고 있는 우주적 그림을 그려낸다. 그는 모든 것들이 불처럼 피워 올랐다가 아무 일도 없었던 것처럼 사라지는 일이 반복되어도 이 모든 일에 안심하라고 말한다. 내가 소중히 여기고 아끼는 것들이 사라져도, 또는 무섭고 두려운 일들이 나타나도 이 모든 일이 그저 축복이니 안심하라고 말한다. 그의 얼굴은 지극히 평화롭다. 그의 발밑에는 난쟁이 악마 아파스마라 푸루샤(Apasmara Purusha)가 엎드려 있다. 그 인물은 무지와 망각을 나타낸다. 우리가 화려하게 나타났다 사라지기를 반복하는 우주적 환영의 핵심인 영원한 부동성을 지각할 수만 있다면 시바의 머리카락은 잘라내야 하는 장애가 아니라 휘날리는 축복이 된다.
존재하는 것들이 경험하는 좋은 일과 나쁜 일, 기분 좋은 일과 기분 나쁜 일, 또는 우리가 섣불리 선이니 악이니 꼬리표를 붙이곤 하는 여러 가지 사건들에 대해 춤추는 시바는 그것이 무엇이든지 축복이라고 말하고 있다. 나에게 유리하기 때문에 좋은 일이고 나에게 불리하기 때문에 나쁜 일이라 생각하는 것은 우리의 거칠고 조야한 소아적 집착에서 비롯된 관념이다. 물론 세상은 그러한 크고 작은 집착들이 교차하고 분투하는 장이다. 우리는 게임에서 이기고 싶어 하고 승자가 되어 원하는 모든 것들을 소유하고 싶어 한다. 그것이 재산이 되었든 권력이 되었든 아름다움이 되었든 사랑이 되었든 말이다. 그러나 무슨 일이 나에게 벌어진다 해도 그것이 오로지 기쁨으로만 남아 있는 것도 슬픔으로만 남아 있는 것도 없다. 한편으로 유리한 일이 다른 한편으로는 불리한 일이다. 아들이 말을 타다 다리를 못쓰게 되어 슬퍼하던 아버지가 아들이 그 때문에 전쟁에 나가지 않게 되어 기뻐하게 되는 것이다. 그렇다면 내게 때로는 기쁨을 때로는 슬픔을 가져다주는 이 모든 삶의 사건들을 전부 부정하는 것이 적절할까? 모든 것이 부질없으니 아예 모든 것을 단념하고 세상으로부터 뒤돌아서면 나이 삶은 괜찮은 걸까? 아니면 태어난 것이 부질없으니 스스로 목숨을 끊어야할까? 부정의 논법은 오랫동안 철학과 종교가 권장해오던 지혜 중에 한 가지였다. 우리가 감각으로 경험하는 모든 것이 환상이라고 주장했던 플라톤이나 하느님에 나라에 집을 지으라고 했던 예수의 가르침이나 머리카락을 자르고 왕궁을 떠나 보리수 밑에 정좌한 부처 모두 부정의 길을 간 자들이다. 그들은 부정의 방식으로 평화를 얻었고 그것으로 자비와 연민을 알았다. 춤추는 시바는 다른 길을 열어 보여준다. 머리카락을 자를 필요도, 세상을 등질 필요도 없다. 무의미해 보이는 변화의 상들과 사건들, 그것이 바로 신성이다. 무지와 망각에 빠지지만 않는다면 우리는 기쁨과 즐거움뿐만 아니라 슬픔과 고통 속에서도 평화로울 수 있다. 모든 것을 생겨나게 하고 다시 되돌리는 시바가 그러하듯이 우리 역시 모든 것들이 불타오르며 소리와 형상을 만들어내고 있는 그 불꽃 한가운데서 평화롭게 그러나 격렬하게 춤출 수 있다.
두려움 없이 앞으로 나아갈 때 우리는 놀이하는 어린이가 된다. 니체는 인간이 낙타와 사자, 어린이의 세 단계를 거친다고 한 적이 잇다. 낙타의 단계는 등에 짐을 실은 짐이 우리의 삶을 끌고 가는 단계이다. 우리에게 부과된 의무와 책임들이 삶의 주인으로 자리 잡고 있다. 낙타의 단계에서 우리 의식은 이렇게 말한다. '삶은 원래 고달픈 거야. 하지만 어쩌겠어. 짐을 지고 갈 수밖에. 내가 짐을 지지 않는다면 난 먹이감과 따뜻한 잠자리를 빼앗기고 쫓겨날지도 몰라. 내가 게으름을 피우거나 탈출한다면 세상은 나를 버리고 내 모든 것을 빼앗아버리겠지.' 낙타의 차원에서우리는 힘에 복종하고 사회적 통념에 복종한다. 삶은 등에 얹은 짐을 통해 의미를 지니고 그가 얼마나 많은 짐을 군소리 없이 목마름을 참고 싣고 갔는지에 따라 평가된다. '음, 훌륭한 낙타야!'
사자의 단계는 낙타의 단계와는 정 반대된다. 그는 지배하는 자이다. 그는 강해 보이기 때문에 모두가 그에게 머리를 조아린다. 그는 마치 자신의 모든 욕망을 실현한 자인 것처럼 보이고 자신 역시 그렇게 느끼기도 한다. '나는 최고야! 나는 내 삶의 주인이고 내 의지의 욕망과 주체야. 세상은 모두 내 발 밑에 있어. 뭐가 힘들다는 거지. 바보들 같으니라구. 해서 안 되는 게 어딨어? 그렇게 평생 노예처럼 살라구. 찌질한 것들. 하긴 착한 낙타들이 있어야 우리 같은 사자들이 편하게 사는 거지.' 자신감 넘치고 안하무인인 것처럼 보이는 사자들도 늙고 병든다. 그런가하면 어느 날 나타난 더 센 사자 무리의 등장으로 가진 것을 모두 빼앗기고 초라한 몰골로 자신의 왕국에서 쫓겨나는 불운을 맞이하기도 한다. 그가 가진 것, 그가 성취할 수 있었던 모든 것이 갑자기 물거픔처럼 사라지는 어느 날 그는 더 이상 포효하지도 기세등등하게 걸어 다니지도 못한다. 그는 절망하는 것이다.
어린이의 단계는ㄴ 어떠한가. 그는 낙타처럼 짐에 끌려 다니지 않으며 그렇다고 사자처럼 자신이 이 세상의 주인이라고 생각하지도 않는다. 그를 끌고 가는 힘은 삶에 대한 자연스러운 호기심과 즐거움이다. 그는 마치 이 세상에 처음 나온 것처럼 세상과 교류한다. 다가오는 모든 것들이 신선함으로 빛나고 그의 눈과 귀와 마음을 유혹한다. 그는 세계가 주는 달콤함에 기쁨을 느끼지만 세계가 주는 따끔함과 혹독함에 슬퍼하고 고통스러워하기도 한다. 그러나 어느 편이 되었든 그의 마음을 오래 잡아 두지는 못한다. 장난감을 빼앗겨 투정을 부리고 엉엉 울다가도 얼굴에 내리쬐는 따뜻한 햇볕과 꽃 냄새에 울음을 멈추고 배시시 웃어버리는 것이 어린아이의 차원이다. 어린이에게는 고정된 가치판단의 기준이 작용하지 않는다. 그는 때로 세상의 누구보다도 잔혹한 폭군처럼 행동하지만 바로 뒤에는 천사처럼 평화롭고 사랑스럽게 주변에 말을 건다. 어린이는 성별과 지위, 도덕과 가치판단의 구분이 자리잡기 이전의 존재이면서 동시에 그 모든 것 이후의 존재이기도 하다. 융은 어린이 원형에 대해 이렇게 말한다. "어린이는 버림받은 자, 내맡겨진 자이면서 동시에 신적인 힘을 가진 자이며, 보잘 것 없고 불확실한 시작이면서 영광스러운 결말이기도 하다," (융, <어린이 원형의 심리학에 대하여>)
시바의 화염 불꽃 춤의 한 자락인 우주의 모든 사건들 속에서 우리 역시 하나의 사건으로 실존한다. 우리가 시바의 불꽃이고 우리의 삶이 시바의 춤이며 그 모든 것들을 나타났다 사라지게 만드는 시바의 신성이 우리 안에서 고요하게 불타고 있다. 신이 추는 영원의 춤 가운데서 우리는 신이 놀이하듯이 놀이하는 존재다. 우리를 웃게 만드는 일, 울게 만드는 일, 기뻐 소리치게 만드는 일, 고통스러워 가슴을 쥐어뜯게 만드는 일, 그 모든 일들 안에서 우리가 평화로울 수만 있다면, 뺨에 닿는 햇빛에 방금 흘린 눈물이 사라지듯이 모든 허망한 집착에서 벗어나 자유로울 수만 있다면.
사람들 각자의 내면에 깃들어 있는 신성은 다양하다. 인지나 표상의 범위를 넘어선 것이 신이다. 물리적 인 것과 영적인 것이 둘이 아니라 하나인 것이 신이다. 인간의 전 삶과 우주를 다룬 것이 Veda경전이다. 그리고 각자의 신이 가지고 있는 내면의 개념을 정리한 것이 인도의 Vedanta철학이다. 인도의 신화는 무려 3억 3000명이 넘는 신이 다양한 버전으로 존재하지만 큰 범위에서 인도의 신은 Brahma, Shiva, Vishnu 이 세 신을 벗어나지 않는다.
아주 먼 옛날, 우주가 생성되던 시기에 비쉬누와 브라흐마신이 서로 자신이 먼저라며 위대하다고 논쟁을 벌이고 있었다. 이때 거대한 남근이 불꽃과 함께 솟아올라 무한 공간으로 계속 자라났다. 놀란 비쉬누와 브라흐마는 각각 멧돼지와 거위로 변신해 남근의 시작과 끝을 찾기 시작했다. 그러나 남근은 계속 커지면서 자라났고 비쉬누와 브라흐마는 어디가 끝인지 발견하지 못했다. 비쉬누와 브라흐마가 지쳐 포기했을 즈음 갑자기 남근의 가운데가 쩍 갈라지면서 시바가 나타났다.
시바는 자신이 우주의 창조자이면서 보호자, 파괴자의 근원이라고 선언했고 브라흐마와 비쉬누는 시바 앞에서 고개를 숙이며 경배했다. 이렇게 해서 남근은 시바의 영원한 창조 에너지를 상징하게 됐다.
창조의 신인 브라흐마는 유가를 네 개의 머리가 있다. 그것은 시간이 존재함을 뜻하고 홤금, 은, 동, 철의 시간으로 나뉘어서 각각 4800년, 3600년, 2400년, 1200을 나타낸다. 그 네 개의 유가가 흐르면 브라흐마가 주고 1주기가 끝난다. 브라흐마 신화 속에서 인도인들은 주기적 소멸과 주기적 몰락을 들여다 본 것이다. 보존과 유지의 신으로 알려진 비쉬누는 우유바다에서(카오스와 같은 상태)자다 깨다를 반복했다. 비쉬누가 잠을 자기 시작하면 그의 배꼽에서 연꽃 한 송이가 피어나고 그 연꽃 속에서 모든 환영을 창조하는 브라흐마가 태어난다. 한 브라흐마가 태어나면 신의 햇수로 사천팔백만 년을 살다 사라지고 비쉬누는 잠시 잠을 깨었다 다시 잠을 잔다. 그는 무한히 이어지는 잠과 꿈을 만드는 근원적인 힘이며 늘 자애롭고 밝으며 질서가 흔들린다 싶으면 바로잡는 역할을 한다. 이에 반해 시바는 광폭하고 방탕한 신으로 '파괴자'의 전형이다. 양 미간 사이에는 지혜의 눈인 제 3의 눈을 갖고 있으며 코브라를 목에 두르고 삼지창을 들고 다닌다. 종종 벌거벗은 몸에 온통 재를 바르고 요기(yogi) 자세로 고행을 하기도 한다. 이 괴팍한 신을 인도인들은 절대적으로 떠받들고 있다. 이유는 파괴란 또 다른 창조를 위해 선행돼야 하는 것인 만큼 시바를 통해 '창조-유지-파괴-창조'로 이어지는 우주의 순환 고리가 완성된다고 보는 것이다. 한 인간이 태어나 살다가 죽고 다음 세상에 다시 태어나는 것도 같은 맥락이다. 생명은 남녀의 육체적 결합에서 태동하는 것이므로 시바신이 만드는 순환 고리에 성적 에너지도 필요한 것이다. 이것이 바로 시바신이 남근의 모양으로 숭배 받는 이유다.
이런 성적인 의미만 갖고 있는 것은 아니다. 남근과 요니라 불리는 자궁의 결합은 창조와 파괴, 삶과 죽음, 빛과 어둠, 선과 악의 통합을 의미하고 있다. 음양은 영원히 분리할 수 없고 결합되었을 때 존재의 완전성을 갖추게 된다는 심오한 철학이 들어있는 것이다
위의 그림은 춤의 왕이라 불리는 시바 나타라자 (Shiva Nataraja)다. 4개의 팔을 가지고 있고, 인간의 무지를 상징하는 난쟁이 아파스마라푸루샤(Apasmrapurua:푸루샤는 사람, 아파스마라는 망각·부주의라는 뜻)를 딛고 서서 머리털을 날리며 춤추는 모습을 하고 있다. 이것은 근원적인 신성에 대한 무지가 고통을 가져온다고 봤던 것에서 기인한다. 뒤쪽의 오른손은 모래시계 모양의 북을 들고 있는데 이는 봄, 여름, 가을, 겨울 즉, 시간을 말하는 것이다. 앞의 오른손은 손바닥을 밖을 향해 펴는 手印으로 걱정하지 말라, 안심하라는 뜻을 담고 있다. 뒤쪽 왼손은 등잔에 담긴 불을 맨손으로 받치고 있는데 태워져서 소멸하는 현상을 말한다. 앞의 왼손은 코끼리 코의 자세로 가슴을 가로질러 팔목을 반쯤 돌려 위로 올린 왼발을 손가락으로 가리키고 있다. 인도에서 코끼리는 축복, 은총, 행운의 상징이다. 몇 다발로 곤두선 머리카락은 둥근 원과 연결되어 있다. 시바는 머리카락을 환상으로 보았으며 원은 화염바퀴로 머리카락이 닿아있다. 머리카락은 인간이 경험하는 희노애락이다. 불가에서 삭발을 하는 것은 희노애락을 끊겠다는 표현이다. 출가한 부처는 사회적 자아를 끊고 관계를 끊고, 돌아앉는 것, 단절하고 부동의 자세와 연결하겠다는 것이다. 이렇듯 사발은 부정의 종교의식인 반면 시바는 긍정으로 펼쳐진 세계가 고요의 다름 아님으로 본다. 내 앞에 무슨 일이 벌어져도 축복임을 알게 되는 것. 그걸 모르는 게 무지이고 그래서 집착한다는 것이다. 모든 것은 사라지고 계속되지 않는 불과 같다. 좋은가 하면 나쁜 일이 찾아온다. 부처가 말한 권장법과 다르지 않다.'지금 여기 머무름 없이 머물러라'
융은 어린이를 버림받은 자, 내 맡겨진 자라고 했다. 신화 속에서 어린이는 안 죽고 되돌아온다. 우리를 눈물 나게 하는 어린 것들 거기에 신성이 있다. 호기심의 상징이며 출발이고 도달점인 것이 어린이다. 시바 나타리자와 통하는 이미지며 신성이다. 신성은 아름다움이나 기쁨에만 존재하는 것이 아니다. 신성은 치열한 전투 안에서도 존재한다. 우릴 분노하게 하는 많은 것들과 싸워야 하지만 그 적의 배면에도 지고의 고요함과 평화가 존재한다는 것이다. 세상은 좋음이, 각자의 좋음이 분투하는 장이다. 결과는 자아 성찰을 해야 하는 것이다. 왜곡된 거울비추기는 내 안에서 일어나는 것이다. 있는 그대로 바라보기만 해도 기쁨이 생긴다.
말, 말, 말
*사랑은 우주적 힘이 내 안을 통과하게 만드는 일이다.
*누군가를 비판한다는 것은 관계 속에서 이루어진다.
*주어진 선물에 우리 마음과 몸이 닫혀있으면 불행이 시작되는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