외부소식 l ※ 광고성 게시나 게시판 도배, 저작권 침해 게시글은 삭제됩니다.
신화로 만나는 삶의 이야기들 5강
두 얼굴의 신, 트릭스터 -김융희-
*북아메리카 원주민들에게 퍼진 신화 트릭스터는 코요태의 모습을 하고 있다. 코요태는 개과의 동물로 이리 같기도 하고 늑대 같기도 한데 덫을 놓아도 잡을 수 없는 동물이라고 한다. 덫에 걸린 다른 동물을 잡아먹고 덫 주위에 자신의 흔적을 남겨서 자신이 다녀갔음을 알리기까지 한다는 것이다. 그렇게 영리하고 꾀가 많아서 다른 동물에 비해 오래 살아남은 동물이다. 코요태의 모습을 한 트릭스터는 정체성이 고정되어 있지 않다. 트럼프에서 다이아몬드·하트 따위에 속하지 아니하며 가장 센 패가 되기도 하고 다른 패 대신으로 쓸 수 있는 조커와 같은 신이다. 트릭스터는 트릭(trick)을 쓰는 자를 뜻하지만 속임수, 사기, 비열한 수법, 계략 같은 뜻에 걸맞게 합리적인 목적을 가지고 사기를 치는 게 아니라 장난꾸러기 신이다. 트릭의 다른 뜻인 재주나 곡예에 가깝다 할 수 있다. 그래서 주변 사람들에게 바보 취급을 받기도 하고 왕따를 당하기도 하지만 그 뿐이다. 목적이 없는 트릭이므로 주변의 시선에 아랑곳 하지 않는다. 코요태 트릭스터의 문제는 항상 심심하다는데 있다.
어느 날 심심한 코요태는 고라니 간을 꺼내서 여성의 질을 만들고 콩팥으로는 가슴을 만들어 자신에게 붙이고는 암컷이 되어 여러 동물들과 교합을 한다. 하다하다 나중에는 서캐와도 합하였다. 마을에 들어가 추장의 아들과 결혼하여 네 명의 잘 생긴 아들까지 낳는다. 한 날 그는 길을 걷다가 한 소리를 듣게 된다. "나를 씹는 사람은 똥을 쌀 것이다" 트릭스터가 둘러보니 덤불위에 알뿌리 하나가 보였다. "나는 이것을 씹어도 절대로 똥을 싸지 않을 거야."라고 중얼거리며 그 알뿌리를 입에 넣고 우물거리며 가던 길을 갔다. 한참을 가던 그는 "그렇게 많던 알뿌리는 다 어디로 간 거야? 대체 그 따위 것들이 나를 어떻게 할 수 있다는 거야? 내가 똥이 마려울 때 똥을 쌀 뿐이지" 이렇게 말하는데 갑자기 방귀가 나왔다. 그러자 그는 "이게 바로 그 의미로군. 하지만 난 방귀만 좀 뀌었을 뿐이야. 난 여전히 위대한 존재라구" 또 방귀가 나왔다. 이번에는 좀 더 센 방귀였다. "내가 어리석었던 걸까? 사람들이 나를 바보라고 부르는 것이 이 때문인가?" 이번에는 직장이 따끔거릴 정도의 방귀였다. 그는 똥을 싸지 않을 거라고 다짐을 했지만 계속 방귀가 나왔고 그 힘이 세져만 갔다. 나중에는 온몸이 하늘로 치솟았다가 다시 땅으로 곤두박질치는 바람에 배가 땅에 철퍼덕 부딪쳤다. 그제야 문제의 심각성을 파악한 그는 통나무를 부둥켜안았다. 통나무와 함께 하늘로 치솟았다가 떨어지면서 통나무에 깔리는 바람에 거의 죽을 뻔 했다. 미루나무, 참나무를 잡아도 마찬가지였다. 트릭스터는 마을로 가서 마을에 있는 집, 사람, 개 그리고 그밖의 모든 것들을 자기 배위에 올려놓았다. 그러자 이번에는 방귀가 폭발하면서 그 모든 것들이 사방으로 날아가 버렸다. 사람들은 공중에서 떨어지면서 화가 나서 서로에게 소리를 질렀고 개들도 마구 울부짖었다. 트릭스터는 그 모든 광경을 보면서 웃음을 참을 수가 없었다. 그때 뱃속이 견딜 수 없을 정도로 쓰리더니 드디어 똥이 나오기 시작했다. 처음에는 조금씩 나오던 똥이 점차 많아지더니 모든 것을 뒤덮으면서 쌓이기 시작했고 똥을 피해서 나무 꼭대기로 올라간 트릭스터는 더 올라갈 곳이 없어지자 미끄러져 똥더미 속으로 떨어지고 말았다. 그는 결국 자신의 똥으로 온몸이 뒤덮인 채로 간신히 거기서 빠져나왔다. 또 길을 가던 코요태는 심심함을 견디지 못하고 산을 만들고 평원을 만들고 땅에 여기저기 색칠을 하고 나무를 심어 정원을 만든다. 창조주로 보기엔 너무 시시하지만 창조적 트릭스터의 모습이다. 자신의 오른팔과 왼팔이 말도 안 되게 싸우는가 하면 도무지 심각해 보이는 일이 없다. 말하자면 우리에게 익숙한 신화적 존재와는 많이 다르다. 고유의 정체성이 없을 뿐만 아니라 옳고 그름, 멋지고 추하고 하는 개념이 없다. 규범이나 양식이 없는 무 매너의 존재다. 세련되고 교양 있는 신이 아니다. 살아가면서 종종 매너나 적절한 예법에서 벗어난 사람을 만나면 처음에는 신선하기도 하고 뭔가 세 보이는 것 같아서 호기심으로 다가가지만 허접해 보여서 뒤로 물러서게 되는 코요태와 같은 인물이 우리 주변에도 있다.
<트릭스터 영원한 방랑자>의 저자는 매너에 데코룸(Decorum)의 개념을 끌어들였다. 적절한 매너를 상식수준으로 익히면 촌스럽지 않고 제법 세련되어 보인다. 트릭스터는 데코룸을 위반하는 자이다. 데코룸을 익히지 못한 자를 사람들은 바보라 한다. 오래된 영화 마이페어레이디를 기억하는가. 길거리에서 꽃을 파는 하층계급의 여자(오드리 햅번)가 남자에게 교양수업을 받고, 교양 있는 여자가 되지만 그 남자를 떠나는 얘기다. 그 여주인공의 태도는 데코룸의 틀에 규정된 내가 아니라는 것이다. 적절한 태도나 가치, 양식을 위반하는 자가 트릭스터다. 무언가 잘못되었다고 상정하면 잘 된 것을 밝혀서 잘못 된 것을 수정하고자 문제해결을 시도를 한다. 그 행동이 때로는 영웅적 위반으로 연결되기도 한다. 그 행동은 혁신이나 되기도 한다. 영웅적 위반은 기존의 규율을 위반하기는 하지만 그가 따르는 다른 규율에 충실하므로 그의 위반은 충분한 명분과 합리적 근거를 지닌다. 그리고 그의 위반이 성공적으로 수행되어 기존 규율을 무력화시키게 되면 그는 다른 규율을 정초하는 자로 떠받들어지기도 한다. 하지만 트릭스터의 경우에는 그렇지 않다. 그는 모방 불가능하며 그의 위반이 특별한 목적을 지니지 않기 때문에 위반의 성공에 목매지도 않는다. 실패하더라도 그뿐인 것이다. 기존 질서를 문란하게 만드는 존재를 근엄한 사회에서 가만 둘리가 없다. 그의 하찮음과 가벼움은 힘의 대결을 기준으로 삼는 사람들로 하여금 그를 희생양으로 삼기도 한다. 우리의 옛 이야기에 나오는 꼬마도깨비 같은 존재다. 인간보다 우위에 있는 것 같은데 자신의 방망이까지 빼앗기는 잘 넘어가는 일종의 바보인 것이다.
그리스 신화 에 나오는 헤르메스는 트릭스터와 동일한 신이다. 그는 제우스와 마이아 사이에서 태어난 아들이다. 그는 태어나 걷게 되면서 맨 처음 한 일이 도둑질이었다. 아무도 모르게 형이자 태양의 신인 아폴론의 소를 훔쳐 먹고 시침을 뚝 뗀다. 소의 가죽과 뼈로 리라(칠현금)을 만들어 아폴론에게 건네서 아폴론 의심을 단숨에 풀어버린다. 그런 그의 재능 때문에 제우스는 헤르메스를 자신의 메신저로 삼는다. 제우스가 준 날개달린 신발을 신고 머리에는 하데스에게 선사받은 투명 투구를 천상과 지옥을 넘나든다. 여기서 잠깐 날개에 대해 언급하자면 날개가 양 어깨에 달려야 한다는 일반적인 상상력을 사원소를 논한 바슐라르는 부정했다. 그러면서 헤르메스가 신은 날개달린 신발은 인간이 발을 박차고 올라가는 상상력으로 매우 적절하다고 했다. 바슐라르는 눈으로 보는 상상력, 즉 형상적 상상력은 관념적이기 쉬우므로 질료적 상상력을 해야 하며 진짜 중요한 것은 접촉하는 일이라고 했다. 날아오르려면 발이 가장 중요한 부분이며 새도 다리가 없으면 도약을 하지 못하고 날지 못한다. 그리고 신발은 어딘가를 간다는 것이다. 때문에 신발에 날개를 단다는 것은 천상과 지하를 다 갈수 있다는 얘기다. 헤르메스가 들고 있는 지팡이인 카두케우스 (Caduceus)는 두 마리의 뱀이 날개를 달고 기어 오르는 모습이다. 뱀은 허물을 벗고 다시 부활하는 영원성을 상징하고 지하와 지상을 넘나드는 존재이면서 원지적인 에너지를 표상하는 동물이다. 한편 새는 땅의 끈끈하고 어두운 원지성으로부터 벗어나 하늘의 자유로움을 구가하는 상징이다. 인간세상은 두 개로 나눠진 기준, 위와 아래, 좌와 우 등 수많은 둘로 나누어진 세계가 수없이 교차한다. 그러나 둘이 하나가 되고 셋이 하나가 되기도 한다. 넷 또한 하나가 될 수 있다. 다시 수백이 하나가 될 수 있다. 그 수없이 나눠진 범주 차이를 하나로 좁히는 것은 둘이 하나라는 것부터 시작해야한다. 컴퓨터부터 시작하여 우리는 2라는 숫자에 길들여져 있고 이원적 세계관에 익숙해져 있다. 그래서 마법은 불가능한 것이다. 떨어져 잇는 것들을 하나의 공통분모로 엮으면 마법은 일어난다. 살고 있는 것인가? 죽은 것인가? 삶과 죽음은 하나다. 이성과 지성 너머에 있는 나눠진 경계를 넘어서는 통합적 세계를 봐야한다. 착각은 안 보이면 없는 것으로 아는데 있다.
트릭스터의 포착 불가능성, 불분명하고 애매한 정체성을 과거 연금술사들은 수은에 투영했다. 수은을 연금술사들은 메르쿠리우스라 불렀는데 그것은 수은이 흘러 다니는 은처럼 보이면서 기화되는 속성을 가지고 있기 때문이다. 메르쿠리우스는 고대 그리스의 신 헤르메스의 로마식 표현이다. 연금술사들은 고정될 수없는 금속인 수은을 고정시키는 게 연금술사의 중요한 목표였다. '천천히 서둘러라'라 연금술사들의 기본적인 모토였다고 한다. 그들은 만지는 물질에 자신을 투영했다. 하늘에 별이 그저 흩어져 잇을 뿐인데 질서를 투영해서 별자리의 상을 만들어 내는 것과 같다. 연금술사는 영혼의 제련자다. 물질을 통해서 자신을 만드는 것이 연금술이었다. 그들은 비천한 것에서 고귀한 것을 만들어낸다. 위에 있는 것이 아래에 있고 안과 밖, 삶과 죽음, 이쪽과 저쪽이 구분 없이 넘나들었던 헤르메스가 연금술사가 모시는 신이다. 우리가 인지하는 세계는 이원적이며 정체성을 규정하는데 사용한다. 칼 융은 트릭스터가 인격이 성장하는데 긍정적 역할을 한다고 보았다. 그는 트릭스터를 그림자의 일부라고 하며 나 자신조차도 모르는 내가 밀어낸 것이 그림자, 즉 트릭스터라는 것이다. 나의 견고함이 무너지며 무의미하게 만드는 것. 난처한 국면에 처하기도 하는데 끈을 내미는 것. 모방 예측하는 버릇이 있는데 빗겨나가는 역할을 하는 것이 트릭스터다. 삶이나 존재는 이론이나 규정을 피해서 달아난다. 고정시킬 수 없는 세계와 삶에 대해 근거를 찾아내서 확률로 규정하고 힘을 갖는 것은 가장 초보적인 이론이다. 어떤 것은 맞고 어떤 때는 전혀 달리연결 된다. 맞는 것은 일부분이고 잔여여분이 훨씬 클 수도 있다. 그럼에도 왜 우리는 원인과 결과를 선택적으로 해석할까. 핑계를 대면 편해지기 때문이다. 합리화의 인위적 구성은 우리를 편하게 만든다. 우리는 그만큼 기계적으로 작동하고 있는 것이다.
트릭스터의 생기가, 집단적으로 체계화된 데코룸에 경직된 우리의 마인드에 금을 낸다. 이럴 때 코요태가 나타나면 우스워진다. 코요태는 알뿌리의 속삭임에 자기 부정을 계속 했었다. 그런 계속 된 부정에도 불구하고 속삭임이 나하고 접촉해서 내 안에 씨를 뿌리면 나와 상관없이 자란다. 그리고는 내 생각의 범위를 넘어서는 섭리가 일어난다. 코요태가 마주친 속삭임의 메신저는 도처에 있다. 다만 들으려 하는 사람에게만 들린다. 트릭스터가 파우스트에서 메피스토펠레스처럼 악마적으로 변신하기도 한다. 트릭스터는 개구쟁이에 불과한데 부정적 방식으로 전환되면 위험해서 정신병원에 갇히기도 한다. 현대문명 때문이다.
말, 말, 말.
* 세계가 상징으로 가득찬 상징적 우주로 보이기도 했다.
* 다 끓으면 제 자리로 저절로 돌아온다.
* 악몽은 경고일 수 있다. 자신이 현재 빠져있는 것에 대한 나의 의식을 깨우는 것이다.
* 내 안에 코드가 없으면 알아들을 수가 없다.
* 우리는 예상을 하고 듣는 경우가 많다.
* 재앙을 선물로 받아들일 수 있는 내 안의 트릭스터가 작동하기 시작한 건 언제인가?
(*.* 담주 10월25일 강의 후에 안성에서 종강파티 합니다. 모두 참석하셔서 즐거운 시간 갖으시길~)