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어서와 '세계시민주의'는 처음이지?
저는 대학, 대학원을 다닐 시절 이주노동자 관련 NGO단체에서 인턴 및 자원활동을 했었어요. 그 때 경험들은 제 마음속에 아직 선명히 남아있어요. 너무 열악한 노동환경, 미등록 체류라는 이유 하나로 쇠창살 뒤에 갇힌 미등록이주노동자의 모습, 국내 노동자와 외국 노동자 간의 갈등까지… 시간이 지난 지금도 '세계는 점점 작아지는데 사람사이는 왜 더 멀어지는 걸까' 고민을 품고 살고 있어요. 그래서 <포퓰리즘 시대, 다시 만나는 세계시민주의> 강의가 열린다는 소식을 보자마자, 그동안 고민했던 것들을 이번 강좌를 통해 더 발전시켜 볼 수 있지 않을까하는 기대로 강의를 등록했어요! 하지만 솔직히 이야기하면, 철학 이야기라… 너무 어렵지 않을까 망설이기도 했어요. 저 같이 아무렇게나 생각하는 사람에게는 세계시민주의+철학에 대한 강의는 작은 도전이었어요. 결론은… 도전하길 잘했습니다!
#첫 걸음 - 강의를 통해 그 동안 뜻을 분명히 하지 않고 써 왔던 ‘세계평화’며 ‘세계시민’ 등에 대한 의미를 생각해볼 기회를 가질 수 있었어요.
첫 강의에서 세계평화에 대한 칸트, 한상원 교수님(강사님), 다른 수강생님들의 의견과 제 생각을 종합해 세계평화를 전쟁과 폭력이 없는 상태를 넘어서서 환대와 연대가 있는 상태로 스스로 정의해보았던 게 기억나요. 바람이 크죠? 그리고 이제는 당연히 여기는 국제기구의 탄생 배경을 칸트의 철학을 통해 이해할 수 있어 유익했어요. 앞으로 국제기구의 기능에 어떤 점들을 기대할 수 있을지, 지금은 어느 정도에 와있는지 판단해 볼 수 있는 생각의 틀이 조금은 생긴 것 같아요.
#생각하는 재미- 철학자들의 시선을 빌려 세계시민사회의 바람직한 모습을 가늠해보고, 그 모습을 현재와 견주어 볼 수 있었어요.
한상원 교수님께서 매 강의때 마다 세계시민사회와 관련된 칸트, 마르크스, 칼 슈미트, 발리바르 철학자들의 서로 다른 생각과 주장을 정리하여 비교해주시는데, 지금 돌이켜 보면 이게 마치 네 명의 철학자가 앉아서 토론을 하고 교수님이 마치 사회자인 것 같은 장면처럼 느껴지네요. 개인적으로 발리바르에 대한 마지막 강의가 기억에 남아요. 세계시민권과 세계시민사회를 발전시킬 방법을 고민하는데 있어…(제가 이해한 바에 따르면) 발리바르는 경제적이거나 도덕적 것에 치중된 관점에서 벗어나 국가와 국민의 경계를 인정하는 관국민적(transnational) 관점에서 갈등의 실재를 인정하고 세계정치(Cosmopolitics)를 위한 제도화가 필요하다고 이야기 하잖아요. 발리바르의 철학은 현실적으로 이룰 수 있는 세계시민사회가 어떤 형태를 갖추어야 하는지에 대한 논의의 시작점을 제공해주는 것 같아요.
그 동안 어렴풋이 이러면 좋겠다 하는 생각들이 철학자들의 제안을 양분삼아 자라난 것 같아요.
- 우리가 국경을 민주화할 수 있을까? 국가의 사회경제적 지위와 관계없이 시민들이 동등하고 상호적인 정치적 권리를 가질 수 있을까? 그러려면 어떻게 해야 할까?
- 한국사회에서는 이주민과 외국인들에게 어떤 정치적 권리를 가지는 것이 마땅할까? 세계시민으로서 세계정치에 대해 어떤 권리와 의무를 가져야 할까?
#알고 느끼고 있는 것과의 연결 : 세계화=갈등?
세계시민주의 강의를 들으며, 최소집단효과(Minimal group effect)이라는 용어가 머릿속에서 맴돌았어요. 최소집단효과는 임의적인 기준으로 사람들을 나누어도 사람들은 집단을 이루어 집단 갈등을 겪는 사회 현상을 일컫는 사회심리학 용어에요. 이해를 돕기 위해 실험 예시를 소개하면, 한 학급의 아이들에게 수업 중 A와 B의 두 가지 예술품을 보여주고 어느 예술품을 좋아하느냐고 물었어요. 그런데 문제는 학생들이 수업 후에도 선호하는 예술품을 기준으로 집단을 나누고 각 집단을 규정하고 서로에 대한 편견을 키우고 서로를 적대시하게 되는 거에요. 즉, 아주 최소한의 조건만 주어져도 사람들은 편을 갈라 싸운다는 걸 보여주어요. 저는 이 현상이 경계는 허물어 지지만 각자의 편은 뚜렷해지는 현재 상황을 함축하여 보여주는 것 같아요. 세계화를 통해 서로가 더 노출되다 보니, 자연스레 비슷한 문화들은 융합되지만 다름을 차이로 서로를 적으로 규정짓는 일들이 더 빈번하고 강도가 심해지는 것 같아요. 물론 국가와 국민의 관계를 최소집단 조건으로 보는 건 무리가 있지만, 사람들이 실재하는 차이보다 그 차이를 더 크게 지각한다는데는 공통점이 있는 거 같아요.
그리고 사람은 추상적으로 존재하는 집단을 자기 정체성의 한 부분으로 받아들이잖아요. 그래서 세계화가 개인에게는 정체성의 위기를 초래하거나 어떤 집단에 속할 것인지 선택을 강요하는 상황을 만드는 것 같아요. 요즘의 정치는 그걸 부추겨 이용하는 것 같고요. 외부 세계의 가치가 자기가 속한 집단의 가치와 차이가 크면 개인 내적인 갈등은 물론 집단 간 갈등도 커지고요. 그래서 국가간 분쟁이든 이주민과 원주민의 갈등이든 집단 간 갈등은 해결하기가 좀처럼 쉽지 않은 것 같아요.
- 미래에는 사람들이 ‘나는 어느 나라 사람이다’라고 생각하는 것 처럼 세계시민이라는 정체성을 개인의 정체성으로 받아들일 수 있을까요?
- 세계시민은 우리에게 어떤 정체성으로 인식될 수 있을까요?
- 그렇게 된다면 경제적 지위에 따른 국제질서에서 벗어나 국제적 갈등을 해결할 수 있는 대화의 장을 만들 수 있을까요?
저의 강의후기에 있는 많은 물음표들을 보면 아시겠지만, 이번 세계시민주의 강의는 생각의 도화선을 연결하고 불을 붙이는 시간이었습니다! 그리고 강의를 통해 이주노동자 친구들과 함께 했던 활동 기억들이 많이 떠올랐어요. <포퓰리즘 시대, 다시 만나는 세계시민주의> 라는 강의 제목의 마법에 걸린 걸까요. 강의 중 “미등록 이주노동자는 ‘사회적’ 생산에 기여하지만 어떠한 ‘정치적’ 시민권도 누리지 못한다.”라는 말에 공감을 했었는데요. 이 말이 저와 동년배인 이주노동자 친구들과 대구 동성로에서 함께 이주노동자 권익보호를 주장하며 즐겁게 퍼레이드를 한 기억과 다시 만나게 해주었어요. 그 때의 저는 시위활동의 필요성과 내용을 이해하면서도 시위활동을 설명하고 설득하기 위한 ‘말’들을 찾고 싶었어요. 지금 생각해보면 ‘우리는 함께 세계시민의 권리를 찾기 위한 활동을 하고 있었구나’ 하고, 강의에서 배운점들을 통해 그때의 경험들을 다시 표현해봅니다.
마지막으로, 이렇게 소중한 강의를 해주신 한상원 교수님께 감사드리고, 참여연대 운영진분들께도 감사드려요! 이런 강의 더더더 기대해도 될까요? ㅎㅎㅎ 감사와 함께 부담을 드리고 싶어요. 하하하~ 감사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