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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국근현대사II] 10강, 5.16은 불가피한 선택이었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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들어가며
안녕하세요. <교과서 저자와 함께 읽는 한국 근현대 II> 도 어느덧 막바지를 향해 가고 있습니다. 이번 시간에는 한국전쟁(남북전쟁) 이후 이승만 정권과 장면, 그리고 박정희 정권을 아우르는 역사를 다루었습니다. 이날 26분 정도가 참석하셨습니다^^
이날 강의장에 한 시간 일찍(6시) 도착했는데 영상물을 상영하고 있었습니다. 영상물은 이 강의에 참여하시는 한 참여자께서 제공해주셨는데 역사적 자료를 바탕으로 이승만의 행적을 비판하는 내용이 담겨 있었습니다. 제 학창시절 근대사를 배우며 막연하게 생겼던 의문들이 이 영상물을 통해 점점 해소되어가는 느낌을 받았습니다. 단절되어 있던 사건들 사이의 연결고리를 발견하거나 또는 그동안 잃어버렸던 퍼즐 조각들을 찾아 기억의 빈자리에 끼워넣는 것 같았습니다. 특히 중반에 윤봉길 의사가 남기신 글귀가 가장 기억에 남습니다. “개인의 자유는 민중의 자유로부터 얻어진다.” 로 얼추 기억하는데, 보이는 글귀 자체에 우리의 가슴을 뜨겁게 하는 무언가가 담겨있는 것 같습니다.
이날도 이 선생님께서는 조금 늦으셨습니다..(30분^^;;;). 제 개인적인 생각으로는 기다림이 길어질수록 강의에 대한 기대도 더욱 커지는 것 같습니다.
그리고 이 선생님의 강의는 역시 저의 기대를 저버리지 않았습니다. 이번 시간에는 앞서 말씀드린 것처럼 전후 한국의 역사를 다루었습니다.
국군포로 문제
한국전쟁은 근본적으로 같은 민족 간의 전쟁이다 보니 포로 교환이 잘 이루어지지 않았습니다. 전쟁 초기 북한은 포로들에게 사상 교육을 실시하고 전향 여부를 물었다고 합니다. 이때부터 지금까지 풀려나지 못한 포로들을 우리 남쪽에서 추정하기로는 약 5만명 정도가 된다고 합니다. 그중 254명 정도가 파악되고 있는데 국군포로문제는 오늘날까지 복잡한 문제로 남아 있습니다.
또한 그동안 우리 쪽에서 북으로 보냈던 북파공작원의 수도 정확히 추산되지 않은 상황입니다. 이들을 대략 7천명 정도로 추정하는데 이중 미귀환자가 얼마정도 있는지는 아무도 모릅니다.(아마 정부는 알 수 도 있겠죠..) 이들의 송환은 정치적으로 더욱 민감한 문제일 겁니다.
2005년 8월 열린 제11차 이산가족 상봉에서 정현한 할아버지(왼쪽)가 국군포로로 생이별한 북측의 형 정진현 할아버지를 만나 얼싸안고 있다. 북한은 국군포로의 존재를 인정하지 않기 때문에 이날 만남은 ‘특수이산가족 상봉’이라는 이름으로 이뤄졌다.
출처 : 세계일보
어느 국군포로의 수기에 따르면, 북한군 포로 수용소에서는 정신교육을 매일 실시했다고 합니다. 전쟁 직전에 월북했던 사람들이 선동하여 인민군에 입대를 권유했답니다. 이때 국군포로의 실상은 하루 식량은 안삶은 옥수수 배급 두 차례가 전부였기에 춥고 배고픈 현실 속에서 많은 사람들이 전향, 북한군에 입대했다고 합니다. 특이한 점은 당시 이렇게 북한군에 재입대 했다가 다시 국군에 포로로 잡힌 경우, 전향을 다시 하면 원래 소속인 국군으로 편입시켰다고 합니다. 이러한 사람들은 포로수용소에서 자대 배치를 받은 뒤, 전후 1980년대까지 감시를 당했다고 합니다. 이 수기는 이러한 처지에 놓인 국군포로가 증언한 내용이며, 이 분은 자신의 처지와 현실에 울분을 갖고 있었다고 합니다.
남북 모두 포로의 출신성분을 의심했습니다. 사실 상상조차 할 수 없이 힘들었던 당시이기에 우리가 어떻게 판단해야 할지 어려운 경우도 있습니다. 현재 북한에 있는 5만명의 포로들이 자발적으로 남은 것인지, 강제로 남은 것인지 알 길이 없습니다.
또한 우리의 경우 인민군인데 전후에 귀환하지 못한 사람들은 지리산에 빨치산으로 남겨졌습니다. 이들을 우리는 대한민국 국민이 반란을 일으킨 것으로 간주하여 처벌했습니다.
여담으로 이 선생님은 한국전쟁 때 세균전이 있었는지에 대한 의혹을 들을 수 있었습니다. 당시 몇몇 증언이 있었다고 했는데, 만일 실제로 있었다면 끔찍한 일이 아닐 수 없습니다. 또 국제적으로 금지된 대인지뢰가 전쟁중, 전후에 매설되어 한반도 도처에 있다고 합니다.
민주주의의 부재, 50년대 한국 정치
1948, 50, 52, 54, 56, 58, 60 순서대로 대선, 총선, 대선, 총선.... 이 실시되었다고 합니다.
대한민국 초대 대통령이었던 이승만은 한민당과 연합하여 대통령에 당선되었습니다. 당시 연합 정당인 한민당은 내각제를 선호했지만 이승만이 대통령 중심제를 주장했습니다. 결국 대통령 중심제가 관철되었고 나아가 내각 임명에서도 한민당은 배제되었습니다. 이로 인해 한민당은 야당으로 돌아서게 됩니다.
48년 초대 대통령 선거는 간접선거인 반면 52년에는 직선제로 바뀌게 됩니다. 이때부터 이승만의 위기이자 고민이 시작됩니다. 52년 5월 부산 정치 파동으로 헌법을 개정하는데 이때를 가리켜 ‘발췌개헌‘ 이라고 합니다.
대통령은 중임이 불가하기 때문에 이승만이 56년에 다시 대통령을 출마하는 것은 불가능했습니다. 하지만 이승만은 다시한번 꼼수를 써 54년 초대 대통령에 한해 그 조항을 적용하지 않는 취지의 사사오입 개헌을 단행합니다.
60년대 선거에서 이승만은 대중의 인기가 없었습니다. 사실 이미 56년 선거 때 부통령에 장면이 당선되었고, 대통령 후보로 2등을 했던 조봉암도 이승만을 위협했습니다. 이러한 상황에서 장면암살을 시도하고 58년에는 가장 강력한 대통령 후보였던 조봉암을 간첩죄로 처형합니다. 그래도 불안해서 1960년 우리도 잘 아는 3.15 부정선거를 저지르게 됩니다.
60년대의 3.15 부정선거는 참 웃기는(?) 선거였습니다.
크게 세 가지 부정이 있었습니다. 사전 투표를 조작하여 지지율을 기본 4할로 맞추고, 3,6,9인을 짝지어 공개 투표를 실시했습니다. 그리고 야당 참관인을 투표 당일날 투표소에서 퇴장시킵니다.
출처: http://dugok.x-y.net/kor-his/eve/3.15masan.htm
한마디로 말하면 50년대 한국의 정치는 이승만을 어떻게 대통령 만들 것인가에 초점이 맞춰져 있었다고 봐도 무방한 것 같습니다.
정의는 반드시 승리한다고 했던가요. 우리 국민들의 피와 투쟁으로 얼룩진 4.19 시민혁명을 통해 이승만 정권이 몰락하고 새 선거가 실시되었습니다.
이때 민주당이 당선되었는데 결과적으로는 아쉽게도 혁신과 개혁의 정치를 하지 못했습니다.
그리고 5.16 군사쿠데타가 벌어지게 됩니다.
5.16 군사 쿠데타와 박정희
사실 이승만이 퇴진하고 5.16이 벌어지기 전까지 장면 정부가 있던 시기를 어떻게 보느냐의 문제를 두고 의견이 갈립니다. 5.16 쿠데타를 지지하는 세력은 4.19 혁명 이후의 대한민국을 큰 혼란의 시기로 인식합니다. 이러한 시기에 유일하게 근대화 교육을 받은 세력은 군대라고 주장하며 군대에 의한 쿠데타에 정당성을 부여하고자 합니다. 반대의 입장에서는 이 시기를 일종의 과도기로 봅니다.
하지만 우리에게 무엇보다 중요한 것은 민주화와 근대화를 어떤 과정을 거쳐서 이루어가야 하는지의 문제입니다. 이를 둘러싸고 이 선생님은 몇 가지 논점을 제시해 주셨습니다.
- 4.19 혁명 이후 장면 정부의 혼란이 우리 사회의 발전을 위한 필요한 혼란이었는가 아니면 그냥 무능한 정부로 인한 혼란이었는가?
- 박정희 대통령이 아니었어도 유사한 수준의 경제 성장은 가능했는가?
- 민주화와 산업화가 같이 이루어질 수 있는가?
마지막으로 이선생님은 역사적 근거를 토대로 박정희의 행적을 알려주셨습니다. 박정희는 일제 강점기 일본의 위성국인 만주국의 군관이었으며 군관학교에 입학하기 위해 혈서까지 썼습니다. 만주군 소위로 임관 한 뒤의 행적은 나타나 있지 않는데, 일본 패망 후 즉시 일본군을 탈출해서 광복군의 중위로 가입하게 됩니다.
한편 해방 후 친형 박상희가 남로당의 선전부장이었는데 경찰에 사살되자 이에 남로당에 가입하여 승승장구 하게 됩니다. 그러다 여순 사건을 계기로 군대 내 이른바 빨갱이 색출작업이 진행되자 박정희는 붙잡히게 됩니다. 옛 만주군관학교 출신들의 구명운동과 함께 남로당 내부 조직 정보를 누설하는 조건으로 석방되어 국군 정보 계통의 군인으로 근무합니다.
특이한 점은 박정희가 쿠데타 후에 대통령에 당선되었을 때 북한에서 친형의 절친한 친구를 특사로 파견합니다. 초창기에는 남북관계가 긍정적인 분위기였지만 미국에 발각되자 돌변, 친형의 절친한 친구이자 특사를 간첩혐의로 처형시킵니다.
여담으로 이 시기 박정희의 과거 기록을 지우기 위한 작업들이 진행되었다고 합니다. 국내 기록은 이미 거의 없앴고, 그나마 미국에 있는 자료들은 문서보관소에 가서 대출하고 반납을 하지 않는 방법을 통해 경력 ‘세탁’을 시도하였다고 합니다.
마치며
이선생님의 말에 따르면 우리는 경제성장과 관련하여 짚고 넘어가야 할 부분이 있습니다. 미국의 원조는 50년대 이후 중단되었으며 박정희 정부 시절 경제 성장 계획을 수립한 것은 사실입니다. 그러나 민주주의와 산업화를 함께 진행할 수는 없었을까요?
박정희 정부의 집권 동안 경제 성장을 위해, 또는 정권 유지를 위해 희생된 많은 사람들이 있습니다. 경부고속도로의 신화 이면에는 경부고속도로를 짓다가 사망한 사람들, 또 중단되었다가 막바지 작업을 위해 투입된 군인들의 희생이 있습니다. 당시 학교 진학률이 저조했고 대부분이 공장으로 가서 일을 했다고 합니다. 이렇게 보면 경제 성장은 한 개인의 공로나 업적이라기보다 우리 국민, 시민의 힘으로 이룩한 것으로 보아야 하지 않을까요..
출처 : 루리웹
http://ruliweb.daum.net/news/view/MD20100204143607107.daum
끝으로 박정희 대통령 기념관과 관련하여 이 선생님께서 하신 말씀을 제 나름대로 재구성하면서 후기를 마치고자 합니다.
우리가 어떤 인물이 기념할만한 인물인지 아닌지 판단할 때 어떻게 해야 할까요?
그 해답은 훗날 우리가 그 인물을 기념하는 동상이나 기념관으로 우리의 자녀들을 데려갔을 때, 자녀들에게 이 인물을 본받으라고 자신 있게 말할 수 있는지 여부에서 찾을 수 있을 것입니다.
건설현장에서 순직한 77명의 순직자를 기리기 위해 세운 탑.
“조국근대화를 향한… 거룩한 초석이 된 것이니… 우리 어찌 그들이 흘린 피와 땀의 은혜와 공을 잊을 것이랴….”
출처 : 지역정보포털
http://www.oneclick.or.kr/contents/nativecult/area09.jsp?cid=80508