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감성적 인간, 호모 에스테티쿠스를 위한 일곱 개의 열쇠 2강 (5/15)
얼마 전 야옹이의 똥통을 갈 때의 일이었다.
집에 야옹이들을 키워서 야옹이 똥통 속 모래의 굳은 배설물들을 구멍이 송송 뚫린 삽으로 퍼내는 중,
비닐 장갑을 낀 손으로 본의 아니게 오줌으로 굳은 모래를 잡아야 했었다.
헌데, 그 굳은 모래가 묘한 촉감을 주는 것이었다.
매우 말랑말랑 하기도 하면서,
촉촉하면서도,
촉감만으로는 뭔가 향긋한 냄새를 풍길 것만 같은.
사실.... 그러니까 내가 좋아하는 촉감이었다.
헌데, 그 본질이 모래와 야옹이 오줌이라는 생각에 본의 아닌 당혹감에 휩싸였었다.
내 느낌도 거짓이 아니었고,
또한 그 본질도 거짓이 아니었다.
헌데 피식 웃음이 나오는 것이,
오줌이 굳은 모래라는 것에 갖고 있던 나만의 편견이 와장창 깨졌기 때문이었다.
그리고 내가 본질을 안다고 으스대면서,
한 물체의 촉감까지 안다고 으스대고 있었구나, 새삼 느꼈던 것 같다.
그리고 확장된 생각은, 내가 많은 것을 안다고 으스대며 세상을 보고 있었던 게 아닐까...
그럴 것이라 단정하고. 제대로 들여다 보지 못 하고 있는 것은 아닐까.
얼마 전 들은 2강, '직관, 우주로부터 오는 메세지' 강의가 생각났다.
데카르트가 기독교의 맹신의 세계관에서 벗어나기 위해 주창한 '합리성'이
이제 우리 삶 곳곳을 차갑게 침투해,
오히려 진정 주인이 되어야 할 우뇌의 역할,
즉 통합적이고 종합적인 사고를 해야 하는 역할을 잡아먹고,
차가운 주인 노릇을 하고 있다고.
모든 것을 재단하고, 줄 세우고, 우열을 가르고, 인간은 거기에 휩쓸리고.
그래서 인간은 마음을 관통하는 직관을 무시하고,
또한 직관을 감지하는 방법을 상실하게 되었다고.
또한 직관이 큰 역할을 한 삶의 사건들을 제대로 읽을 수 없게 만들었다고.
점점 둔한 직관을 가진 인간들의 발달한 좌뇌는 삶과 세계를 피폐하게 만들고 있으며,
이제 우뇌에 우리의 관심을 돌려야 한다고, 선생님이 말씀 하셨다.
그리고 직관이 우세하고 합리성이 열등한 것이 아니라,
직관과 합리성이 균등하게 발전해야 하는 것인데,
지나치게 합리성이 비대해진 세계 때문에
우리는 행복할 수 없다는 말도 하셨다.
사실, 합리성을 주장하는 좌뇌의 역할은
막상 지키기는 어렵지만, 일목요연하게 지켜야 할 목록을 가지고 있어서 쉽고 마음이 편하다.
선명한 목표가 있기에.
하지만 세계를 있는 그대로 느끼는 직관의 세계는
어떠한 매뉴얼도 없기에 더 당혹스러운 부분도 있는 것 같다.
하지만 이 세상을 하나도 제대로 알 수 없다는 겸손한 마음,
그리고 어설픈 잣대를 들이대기 보다는, 맨눈으로 세상을 바라보고,
발바닥에 닿는 촉감 하나하나를 새로운 마음으로 느껴보는 게 그 시작이지 않을까 싶었다.
뭔가 쉽지 않은 일들이지만.
하지만 '해야한다'는 기준이나 의무나 명령의 말들을 걷어낸 세상은 얼마나 넓을까?
어쨌든 좀 더 넓은 세상에 가고싶다.
지금, 여긴 좀 답답하니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