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근대 문명에 대한 성찰 3강 후기
1강에서는 ‘civilization’의 어원을, 2강에서는 서양에서 문명의 개념이 역사적으로 어떻게 전개 되었는지 이야기 되었습니다.
이번 3강에서는 중국과 일본의 ‘문명’개념에 대해서 고찰했습니다.
세계가 한동네처럼 왕래하기 전에는 왕래 가능한 범위 안에서 각각의 문명이 형성되어 있었다. 한,중,일 동아시아의 중심문명은 중화문명이었다. 그 문명의 주체는 중국 대륙의 중심부에서 활동했던 한족(漢族)이었고, 그 문화는 덕치와 예교라는 ‘유학’으로 대표 된다 이들은 자신들이 사는 곳이 세상의 중심이라고 생각했기 때문에 이곳을 ‘중앙의 땅(中國)이라고 불렀고 그 주변의 이(異)종족들을 오랑캐라고 불렀다. 이들은 중화문명이 유일한 문명임을 주장하며 조공체제와 같은 정치,경제,외교적 관계로 전개하거나 군사적 정벌 행위와 같은 팽창원리로 작동 되었다. 중국 대륙 오른쪽에 접해 있던 한반도는 그 문명의 강한 자장 안에 있었고, 바다를 사이에 두고 떨어져 있던 일본은 오랑캐에 가까웠다. 즉 일본은 중화 주의적 질서 속에서 상대적으로 변방에 속해 있었고, 그 때문에 사상적으로도 어느 정도는 자립적이었다.
이런 분위기속에서 근대 서양의 등장은 중화 이외에 다른 문명이 존재함을 알려준 대사건이었다. 19세기 중반에 일어났던 아편전쟁에서 중국이 패하면서 동아시아에서 중국의 위상은 흔들리기 시작했고 비참한 근대가 시작되었다. 서양의 군사기술을 수입하며 위기에 대처하려던 중국의 노력은 1895년 청일전쟁에서 패배함으로써 허무하게 끝났다. 패전국 중국은 국제법에 의해 승전국 일본에 막대한 전쟁보상금을 지불해야 했다. 기다렸다는 듯이 돈을 꿔주는 유럽제국들에게 그들이 원하는 땅(홍콩, 상해 등 5개항구의 할양)을 넘겨주며 중국은 반식민지(半植民地)로 전락했고, 그 보상금은 일본 근대화의 자본이 되었다. 이때부터 동아시아에서 우월함을 자랑하는 문명은 중화가 아니라 civilization이 되었고, 동아시아에서 문명의 중심을 자처하는 자부심은 작은 섬나라 일본의 것이 되었다.
에도 시대 말 일본은 온통 ‘존왕양이(尊王攘夷)’사상으로 물들어 있었다. 즉 일본인들은 신에게 선택된 유일한 민족이며 그 위대함을 이해하지 못하는 야만인들을 물리쳐야 한다는 특이한 민족주의가 팽배했다. 존왕양이파 지사들은 도쿠가와 막부가 서양제국을 상대로 싸울 능력이 없다고 판단하자 막부를 무너뜨려 메이지유신을 단행하고 ‘유럽화’를 초기 노선으로 정했다. 탈아입구론(脫亞入歐論)을 주장한 후쿠자와 유기치는 ‘유럽화’의 대표논객이었다. 그의 『문명론의 개략』은 ‘civilization'의 번역어로서 ’문명‘을 유통시키고 정착시켰다. 후쿠자와가 이야기한 ’문명‘은 사회진화론을 받아들이면서 국민국가의 성취를 목표로 하는 것이었다. 역사는 진보하며 그 진보의 선두에 유럽이 있고, 일본의 과제는 지력을 키워 전쟁을 통한 독립국가로 진보하는 것이라고 본 셈이다. 후쿠자와는 이러한 문명이 공자로 대표되는 중화문화와 다르다는 점을 지적하고 아시아의 유일한 문명국 일본과 그 나머지 비문명국들의 관계로 아시아를 규정했다.
청일전쟁에서 승리함으로써 일본은 비로소 서양 열강과의 불평등조약을 해소하고 반식민지 상태에서 벗어나 제국으로 발돋움했으나 문명노선에서는 서구 열강에 대해 열등감을 인정해야하는 2등국 이었다, 이런 현실을 자각한 일본인들중에 유럽화 정책에 반대한 지식인들이 있었다. 구가 가츠난은 일본의 ‘국민적 자부심’을 환기함으로써 ‘국제상으로 대등한 권리’를 확보하고자 했다. 아시아주의의 대표논객 오카쿠라 텐신은 아시아를 부흥시키는 것은 일본의 운명이고 잠자고 있는 옛 아시아의 유대를 느끼고 소생시키는 것이 일본의 임무라고 주장했다. 일본인들은 근대주체로서 자신을 정립하기 위해 서양과 대등한 “동양”을 창출했다. 지리,문화적 존재로서 동양은 본질적으로 20세기초 일본의 관념이었다. 이러한 ‘동양’의 창출을 위해서 일본은 중국을 과거의 영화속으로 묻어버렸다. 그러나 중국의 문화는 필요했다. 일본은 과거 중국의 계승자로서 동양의 모든 속성을 소유해야 했다. 그 작업은 중국으로부터 ‘중국’이라는 국명을 빼앗고 ‘지나(支那)’라는 이름을 붙이는 것으로 상징되며 아시아의 전 과거를 수렴하는 아시아의 대표 독립국으로서의 일본이 되었다.
‘civilization’의 필요성을 깨달은 중국은 윤리와 정치제도를 의미했던 ‘체(體)’를 유지하면서 말단일 뿐인 오랑캐의 ‘기술(用)’을 배운다는 중체서용(中體西用)논리로 서양의 문명을 수입하려 했다. 중체서용의 이론가 장즈둥은 중화주의를 ‘황인종의 아시아’의 문화로 재규정했다. 그러나 청일전쟁의 실패는 중체서용의 실패를 증명하는 사건이었다. 이 실패를 반성하면서 서양의 문명은 단순한 기술이 아니라 ‘정치제도’라는 자각이 시대를 지배했다. 제도개혁운동을 주도했던 캉유웨이는 중국 고전에 실려 있는 ‘삼세설(三世說 ) 이라는 역사관을 발전사관으로 해석해, 시대의 변화에 따라 군주제, 입헌군주제, 민주제로 개혁하는 것이 공자의 뜻이라고 주장했다. 캉유웨이가 주도했던 제도개혁이 실패로 끝나자 일본으로 도피했던 개혁 세력들 중 캉유웨이의 제자 량치차오는 근대 일본이 수입해놓은 ’문명‘중에 일본인들이 국가주의로 해석한 사회진화론에 큰 관심을 보였다. 량치차오의 국민 창출 프로젝트는 백인이 갖춘 문명의 특징들을 찾아내고, 중국인도 국민국가의 국민이 되기 위해 그 특징들을 갖추는 것이었다. 그런데 강고한 문화전통을 가진 중국인 량치차오는 문명을 ’지식‘을 의미하는 인간정신의 발달로 규정한 후쿠자와 달리 ’덕(德)‘의 발전을 문명으로 가는 길로 선택했다.
앞서 말한 중화주의에 바탕 둔 서양문물의 수입태도와는 달리 중국의 봉건적 의식을 그대로 두고서는 미래가 없다는 신문화운동의 중심에 천두슈가 있었다. 그는 자신의 적을 중국 내의 비민주와 비과학으로 정했다. 그는 근대문명이라고 할 수 있는 것은 유럽만이 가진것이고 그 문명의 선구자는 프랑스라고 생각했다. 중화주의와 유학에서 등을 돌린 천두슈의 서양 따라잡기 기획은 끊임없는 자학과 또 다른 약자에 대한 가학으로 이어질 수밖에 없었다. 서구화의 길에서 봉착한 이런 곤경에서 천두슈를 구해낸 것은 1917년 러시아혁명의 메시지였다. 천두슈는 중국의 첫 번째 마르크스주의자가 되고 공산당의 창당 멤버가 된다. 마르크스주의는 인류의 해방이라는 보편적 가치의 실현을 목표로 내걺으로써, 중화주의자들에게 익숙한 보편원리의 추구라는 도덕적 가치를 회복해주었다.
100여년 전에 시작된 중화와 civilization의 충돌은 여전히 진행중인 것처럼 보인다. 중국화와 동일한 중화화(中華化)는 없었던 것처럼, 서구화와 동일한 함의를 갖는 ‘문명화’는 가능하지 않다. 각자의 현재를 이루고 있는 역사의 누적을 벗어난 길은 없기 때문이다.
가깝고도 먼 이웃나라 일본과 중국의 ‘문명’의 수입 과정을 살펴보니 소중화(小中華)이기를 원했던 조선은 어떤 과정을 거쳤을까?하는 궁금증이 생긴다. 다음 강의가 기다려지는 이유이다. (이혜경샘의 강의와 참고도서‘문명안으로’를 발췌했습니다.)
아.. 강의내용 이렇게 쓰면서 복습하셨겠네요.
저도 3강에서 일본, 중국이 근대문명에 대해 어떻게 바라보고 대응해갔는가 하는 점이 흥미로왔습니다.
특히 근대문명에 대한 중국지식인들의 고민이 사회주의 수용으로 진전된 것도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