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서울 ,도시와 공간의 인문학 , 대중 가요에 대하여
어제 이영미 선생의 강의는 잘 들었읍니다. 매우 유익하고 재미 있었읍니다
1930년대 들어서야 한국 대중 가요가 본격적으로 성장하게 된 배경으로 선생님은 일본에서 근대 음악을 공부하게 된 세대가 등장한 것이 그 주 요인이라고 말씀하셨읍니다
어제도 잠깐 질문을 드렸지만 여전히 의문은 남습니다
그러한 능력을 가진 사람들이 존재해도 소비자가 존재하지 않으면 시장이 존재할 수 없기 때문에 대중가요 시장이 성립하는 것은 아마도 힘들었을 겁니다
서울의 인구가 1920년대부터 급격히 증가해서 음악 소비시장이 커져야지만 대중 가수도 대중 작곡가도 생겨날 수 있었을 겁니다
인구 증가만으로는 소비시장이 커진다는 보장이 일반적으로 없을 겁니다
가격 인하의 방법은으로 물론 대량생산이 있긴 하지만 , 그 전에 기술발전이 있어야 될 겁니다
그래서 위키피디아를 찾아보았읍니다
다음은 위키피디아 글의 일부를 번역한 겁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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Gramophone record
From Wikipedia, the free encyclopedia
http://en.wikipedia.org/wiki/Gramophone_record
진동하는 펜을 사용하여 소리를 종이 디스크들에 그래프로 표현하는 장치는 1857년에 프랑스의 Édouard-Léon Scott de Martinville 에 의하여 만들어졌다. 그 메커니즘은 음자동그래프(phonoautograph)라고 알려졌다.
1877년에 토머스 에디슨은 음 자동 그래프와는 다르게 기록하고 그 기록된 음을 재생할 수 있는 음그래프(축음기)를 발명하였다. 에디슨은 기록 매체로서 은박지 실린더를 사용하였다.
그 축음기 실린더는 1880년대 초에 시작된 기록된 음 시장을 지배했다.1888년에 Emile Berliner에 의해 측면이 잘린 디스크 레코드가 발명되었다.
1918년 측면 삭제 디스크 레코드 제조 특허가 만료되면서 수 많은 디스크 레코드 회사들이 생기면서 실린더 레코드를 추월하기 시작했다. 에디슨은 1929년에 실린더 생산을 중단하였다.
1920년대에 공학자들은 마이크로폰으로 소리를 붙잡고 그것을 진공관으로 증폭시키고, 그 증폭된 시그널로 전자기 레코딩 헤드를 구동시키는 기술을 개발하였다. 광범위한 진동수 범위가 그 레코드의 홈들의 높이(pitch)에 의해서만 제한된 , 재생 볼륨이 크게 증가하여 기록될 수 있게 되었다.
1925년에, Victor 회사는 획기적인 Victor Orthophonic Victrola, 를 도입했는데, 이것은 전기적으로 기록된 디스크들을 플레아하도록 고안된 것이었다. 그 음향 수직 축음기들(Orthophonics)은 가격이 미국 달러로 $95-$300(2007년 달러로 $1140-$3600)에 달했는데, 그와 비교하여 가장 저렴한 Electrola는 $650(2007년 달러로 $7500) ###
마지막 구절에서 보듯이 1930년대 들어와서 가격이 급락했읍니다
노래를 사려면 그 노래를 들어봐야 했을 겁니다
단지 축음기만으로 노래가 퍼지는데에는 시간이 많이 걸렸을 겁니다
특히 대중가요는 많은 사람들에게 팔지 않는한 이익이 남지 않았을 것이기 때문에
광범위한 대중에게 그 노래를 들어보게 하는 것이 대중 가요 시장의 존재의 선결조건이었을 겁니다
그래서 라디오의 역사를 찾아 봤읍니다
다음을 보면 (이것도 역시 위키피디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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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20년대 중반 최초의 진공관들은 라디오 수신기와 트랜스미터들을 혁명화 하였다.
최초의 라디오 방송국들
국가 연도
국가 |
연도 |
네덜란드 |
1919 |
러시아 |
1921 |
프랑스 |
1922 |
중국 |
1923 |
일본 |
1925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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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것을 보면 일본도 대중 가요 시장이 성립한 것은 1920년대 말부터 시작되지 않았나 하고 추축해 볼 수 있읍니다
물론 이것들은 다 하나의 억측에 불과합니다
그리고 선생님의 유인물에 쓰여진 관점에 대한 제 의견을 얘기하면
"대중가요는 기본적으로 도시인의 경험과 욕망, 취향 ,관습을 노래한다"
고 주장하시는데 , 제가 알기로는 거의 모든노래(80-90%?)는 남녀가 짝을 찾는 노래입니다
이것은 도시, 농촌 , 과거 현재 할 것 없이 보편적 현상이라고 알고 있읍니다
노천명 시인이 사슴을 " 모가지가 길어서 슬픈 짐승이여 " 라고 표현했는데 제가 알기로는 사슴이 우는 것은 슬퍼서 우는 것이 아니라 숫컷이 암컷을 부르는 세레나데로 알고 있읍니다
어던 으미에서 모든 노래 아니 모든 음악 모든 예술은 일종의 구애 활동이라고 저는 알고 있읍니다
(연애: 생존기계가 아닌 연애기계로서의 인간, 밀러, http://www.yes24.com/24/Goods/3267017?Acode=101)
그리고 님은 도시와 농촌 의 대립과 대비가 트롯에서만 드러나는 현상이라고 말씀하시는데
제가 알기로는 먼 옛날 수메르의 길가메시로부터 시작하여 아카이드 로부터 현대까지 인간은 한편으로 도시를 동경하면서 잃어버린 자연에 대한 향수 사이에서 갈등한 것으로 알고 있읍니다
("
The Ecology of Eden: An Inquiry into the Dream of Paradise and a New Vision of Our Role in Nature
안녕하세요, [서울 도시와 공간의 인문학] 강좌 진행을 담당하고 있는 정세윤 간사입니다.
올려주신 질문은 어제 강의를 해 주신 이영미 선생님께도 전달해 드리겠습니다.
다만, 강좌를 진행하면서 제가 이해하기로는 김백영 선생님 강의(3,4강)에서도 이야기되었듯이
30년대 경성이 가지는 특수성때문이 아닌가 싶습니다.
만주특수와 함께 급속도로 소비문화가 확산된 것이지요.
안녕하세요. 질문하신 내용에 대해 말씀드리겠습니다.
1. 특정한 문화가 시작되고 대중화되기 위해서는 여러 조건이 필요하지요. 식민지조선의 대중가요의 경우, 질문자께서 지적해주신, 도시 인구의 증가, 음반 생산량의 증가, 이것의 밭낭이 되는 기술의 변화, 이 세가지만 말씀하신 건데, 그것말고도 매우 많은 요인들이 존재합니다. 이 강의가, 음반사에 대한 강의가 아니기 때문에(당시 음반에는 대중가요 말고도 매우 많은 종류의 콘텐츠를 실었으니까요) 이에 대한 이야기를 본격적으로 하기는 힘들고요, 예술사적 흐름으로 볼 때에 대중의 예술적 관습과 취향의 변화, 그것을 가능하게 했던 대중의 사회심리 변화, 정치경제적 변화 등을 말씀드린 겁니다. 즉 트로트라는 새로운 예술적 관습을 받아들일 때까지 상당한 시간이 걸렸다는 것이고요, 그것이 1930년대 중반에 다른 요인들의 도움으로 본격화되어 나타난다는 이야기를 드린 겁니다.
또한 짐작하신 것과는 달리, 당시 라디오가 대중가요 대중화에 미친 영향력은 매우 미미합니다. 그것보다는 대중적 공연의 힘이 더 컸다고 보입니다.
2. 지적하신 남녀 간의 사랑이 주요한 소재가 된다는 것은 옳습니다. 그것이 제가 이야기한, 수용자의 경험, 욕구와 욕망, 취향, 예술적 관습을 살펴본다고 이야기한 것과 배치되는 것은 아니지요. 게다가 사랑 이야기도 시대에 따라, 양식에 따라 그 질감이 달라지고 양적 비중 역시 달라집니다. 그 미묘한 변화에 주목해야 한다는 겁니다.
3. 제가 도시와 농촌의 대립이 트로트에서만 드러난다고 말씀드린 적은 없습니다. 식민지시대에 트로트는 주로 도시의 풍경을, 신민요는 도시인이 생각하는 시골에 대한 느낌과 생각을 표현했다는 말씀을 드린 것이지요. 1960년대 이후에는 그 양상이 달라진다는 말씀을 드린 거고요.
이상입니다.
이영미