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눈으로 듣고, 귀로 보는 세상의 이야기
눈으로 듣고 귀로 보는 세상의 이야기
"삶의 길목에서 만나는 신들의 이야기" 1강 후기 이 현 숙
"명쾌하게 드러낼 수 있는 진실과 모호하게 드러낼 수밖에 없는 진실이 있습니다."
말로 전달할 수도 없고, 공유할 수도 없지만 불현듯 찾아와 깊은 흔적을 남기는 어떤 느낌, 형언하기 어려운 불길함과 저절로 예측되는 감각의 비상함 때문에 다른 세계에 잠시 다녀온 듯한 낯선 경험. 그것들을 당연하게 세상 밖으로 끌어내는 노련하고 편안한 손길이 김융희 교수에게서 느껴졌다.
인간을 혼란에 빠뜨리고 공포에 사로잡히게 하는 원형은 바로 '무지'라는 것을 둥글고, 찰지게 증명해 보인 "삶의 길목에서 만나는 신들의 이야기" 첫 수업은 기대 이상이었다. 신화 강좌는 인간의 깊고 끈끈한 무의식, 욕망과 만나는 가볍고도 무거운 여행이 되리라 예상했다. 그래서 더욱 길잡이가 중요한 여행이었다. 노련한 길잡이 김융희 교수는 수영할 줄 모르는 우리들을 검은 밤바다로 슬그머니 밀어 넣으며 두렵고도 강렬한 전율을 느껴보게 했다. 눈 먼 이후의 삶을 찾아 광야로 떠난 '오이디푸스'를 만나려면 우리도 어둡고, 차가우며, 언제 나를 집어삼킬지 모르는 파도의 공포를 깊은 무의식의 자아로 떨쳐내야 했다.
매번 삶의 교차로에서 '선택'의 고문을 당하는 인간에게 '너는 누구인가?'라는 근원적인 질문은 선택 그 자체를 멈추게 하는 것이었다. 대상을 식별하고 '앎'을 주는 태양이 도리어 빛의 그늘로 우리의 눈을 멀게 한다. 예언과 치유와 음악의 신인 '아폴론'은 인간이 눈을 통해 알게 되는 지혜를 관장하지만, 눈 먼 예언자 테레시아스에 의해 볼 수 없었던 진실을 알게 된 오이디푸스가 스스로의 눈을 찌르고 만 것은 '아폴론'에 대한 반항이자 단편적인 세계(시각적, 이성적)에 대한 부정이었다. 오이디푸스로 대변되는 인간은 잘못된 선택을 한 죄로 인해 고통스러운 것이 아니라 '무지'로 인해 혼란의 나락으로 떨어지고 만 것이다. 그렇다면 운명을 건 선택의 도박 속에서 희로애락을 겪어야 하는 인간은 운명의 영원한 노예란 말인가?
신들의 세계는 인간의 도덕적 잣대나 윤리관으로 설명할 수 없는 자유롭고, 적나라하며, 무시무시한 세계이다. 그렇지만 그러한 신화 속 이야기를 들여다보는 인간의 시선은 거울을 보는 자의 시선이다. 말 그대로 거울에 드러난 모습은 인간의 마음속에서 투영된 모습이라는 것이다. 운명의 가혹함, 신화로부터 도출된 무의식의 지배로부터 한결 가벼워지게 하는 해석이다. 김융희 교수는 "신화가 저자 미상의 구전으로 전해졌기 때문에 다층적이고 다양한 해석을 내릴 수 있는 것이며, 근대와 현대를 대표하는 정신의 질병으로 인해 잃어버린 균형감각을 되찾는 지혜를 준다"고 했다. 그러므로 우리들은 더 이상 동굴에 묶여 모닥불에 비친 그림자에만 구속되는 연민의 대상이 되어서는 안 된다는 플라톤에게 귀 기울일 필요가 있다.
인륜법과 자연법의 불일치 틈바구니에 인간이 놓이게 되면서 파멸의 길을 걷게 된 것이 '비극'의 탄생이라고 한 '헤겔'의 말에서 오히려 위안을 찾아야 하지 않을까? 예측할 수 없고, 알 수 없는 힘의 자연은 언제나 인간에게 두려움의 대상이었지만 인식과 의식의 한계를 벗어나 밑바닥 깊숙이 억압해오던 '앎'너머의 세상으로 들어선다면 우리는 어느새 눈으로 듣고, 귀로 볼 수 있는 확장된 세계를 경험할 수 있을 것이다. 아폴론과 디오니소스, 아테나와 아프로디테가 공존하는 신화를 통해 우리가 새로운 눈으로 보아야 하는 지혜가 무엇인지, 무엇이 나를 억압해왔는지, 억압되어 왔던 내 안의 또 다른 나는 누구인지 찾아가는 이 여행이 달밤의 숲 속 축제에 초대받은것처럼 설레고 기대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