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여섯번째┃캐나다의 코리안 댄서, 그만큼의 즐거움
인터뷰 · 글: 박현아 느티나무 시민기자
‘내가 춤출 수 없다면, 그건 더 이상 나의 혁명이 아니다’ - 엠마 골드만
‘즐겁지 않다면, 그건 더 이상 교육도 배움도 아니라고 생각해요’ - 주은경
생초보 시민기자의 여섯 번째 인터뷰 글이다. 인터뷰를 처음 시작할 때 많이 두려웠다. 나의 글 솜씨라는 것이, 그 이력이 너무 허접해서... 사실 일기도 쓰지 않는 내가 그나마 매일 끄적이는 건 가계부 정도? 이러니 겁만 났겠는가? 땀도 나고 눈물도 나고... 밤새워가며 글 쓰자니 하품도 났다. 그래서 제발 인터뷰이만이라도 아는 사람으로 해달라고 응석까지 부렸던 게다. 세상엔 몸으로 들이박아 봐야 알게 되는 것들이 많은 법. 아는 사람, 모르는 사람 다 인터뷰해보고 알게 된 건 둘 다 어렵더라는 것... 아니 아는 사람이 쬐금 더 겁나고 무섭더라는 것...
인터뷰 자리에 앉는 그녀의 손에 종이가 들려있다. 짐작이 갔지만 예의상 물었다. 그건 뭐예요 선생님?
“아... 혹시 내가 인터뷰하다가 꼭 해야 하는 말을 빠트릴까봐..” 그러고는 아무것도 들리지 않은 내 손을, 달랑 스마트폰의 녹음기능을 찾아내 탁자에 올려놓고는 포즈상태로 기다리는 내 얼굴을 물끄러미 바라본다. 왜요? 제가 무슨 잘못이라도???
바로 쪼인트 까였다. 에구구... 그 상황에서 그녀가 나에게 했을 법한 얘기들, 그 상황에서 내가 경력 14년의 방송작가에게서 들을 법한 잔소리들... 죄다 들었다. 요약하자면 기자로서 최소한의 준비성 뭐 그 정도 되겠다. 살짝 억울하긴 했지만 용케 참고 화제 전환을 꾀한다. 선방 맞고 얼떨떨해진 얼굴로 날린 나의 라이트 훅, 지금까지 쭉 일만 하신 거예요?
그녀의 일 - 방송 그리고 시민교육
“그러고 보니 아파서 1년 정도 쉬었던 거 빼놓고는 일 안 한 적이 없었던 것 같네요. 나이가 많으니 그동안 해 온 일도 많고... 노동자 교육단체에서 한동안 일했어요. 몸이 아파 잠시 쉬다가 자유기고가 일도 하고 자서전 대필도 해보고. 그러다 방송작가 일을 해야겠다 맘먹고 94년에 KBS에서 추적60분을 시작으로 그쪽 일을 하게 됐지요. 그렇게 방송작가 일을 한 게 14년인데 중간에 99년부터 5년 동안 성공회대 사회교육원에서 기획실장을 병행했어요. 노동대학, 교사교육프로그램을 했지요.”
작년 가을 스웨덴 시민교육 포럼에서 참여연대 시민교육을 소개했다.
일과 관련해서 그녀가 느끼는 두 가지 정체성이 있다. 하나는 방송작가, 다른 하나는 시민교육전문가. 둘 다 멋지지만 한 때 방송 쪽 일에 관심이 있던 나로서는 방송작가로서의 그녀의 이야기가 더 궁금하다. 아니 험하기로 소문난 그 바닥에서 무려 14년을? 그것도 그 허약 체질로?
“방송 일의 매력이라... 난 호기심이 강해요. 이건 뭐지? 하는 생각... 그 대상이 사람이든 다른 무엇이든 궁금해 하고 알고 싶어 하는 욕구, 난 그게 저널리스트의 기본자세라고 봐요. 근데 방송일은 그 해답을 남이 해 준 이야기만으로 채우는 게 아니라 내가 직접 취재도 하고 그 취재내용을 가지고 내 판단도 해야 하고... 팩트와 현장에 굉장히 밀착할 수 있다는 것, 그게 엄청난 매력이죠.” 그래서 몸이 아파 그만 두어야할 때까지 그녀는 그 일을 했던 거였다. 육체의 한계라는 물리적 힘이 그녀를 떼어 놓지만 않았다면 지금도 그녀는 현장을 누비고 있을 것이란 얘기다. 밖으로 보여지는 그녀의 가냘픈 이미지와는 사뭇 다른 그녀의 청춘과 그녀의 일 이야기들. 그러고 보면 강인함, 단단함 이런 것들은 몸이 아닌 정신에 깃드는 것인가 보다.
“거의 15년 가까이 방송일 하면서 다양한 것들을 경험했죠. 시사프로그램, 토론프로그램, 역사 · 문화다큐, 휴먼다큐프로그램... 그것들 모두 내게 큰 공부였다고 생각해요. 사람과 현장에서 배우는 것들이 배우는 것으로 그치지 않고 내 안에서 어떤 울림으로 소통이 일어나면... 굉장히 재밌어요. 하나의 프로그램을 처음부터 마무리까지 나만의 방식으로 엮어내고 구성해내는 것도 엄청난 즐거움이구요.”
그녀는 방송일이 자신이 가진 즐거움에 대한 욕구를 넉넉히 채워주었던 직업이라고 말한다. 부럽다. 일에서 즐거움을 느낀다는 것... 그 단순한 것이 뜻대로 안 돼 허우적거리는 수많은 중생들 앞에서... 선생님! 이 정도면 선생님의 인생은 성공적이었다고 치죠?
그런데 얘기를 듣다보니 정작 성공의 포인트는 다른 데 있었다.
관계와 소통을 향하여
겉모습이 다가 아니지만 살다보니까 겉으로 풍기는 것도 깡그리 무시할 건 아니라는 깨달음을 얻기도 한다. 밖으로 드러나는 이미지, 외모 등이 권력이 되는 시대 아니던가. 아버님께서 학문을 하시던 분이라는 얘기를 들은 기억도 있고 또 겉으로 드러나는 이미지도 있고 해서 물었다. 그렇게 곱게 자라신 분께서 왜 그리 험악한 청춘을 보내신 건가요? 물론 시대 탓만은 아닐 꺼라는 나름 여자로서의 직감도 있었다.
“대학교 1학년 때 합창반에 들어갔었어요. 한 학기 정도 열심히 활동했는데... 너무 공허했어요. 즐겁고 재미나게 놀긴 하는데 그 안에 뭔가 진실한 것이 빠져있다는 느낌... 전 예나 지금이나 뭔가 깊이 소통하고 있다는 느낌이 없으면 그 안에서 재미를 못 느껴요. 그래서 사회과학 써클에 들어갔죠. 그러다 10.26이 일어났고 학교는 휴교에 들어가고... 사실 대학 때 꿈은 교육학과 교수가 되는 거였어요. 그 꿈을 위해서라도 내가 한국사회에 대해서 혹은 우리 역사에 대해서 제대로 아는 게 중요하다고 생각했었구요.”
아, 시작이 그렇게 된 거였구나... 그러면 사회와 역사에 대한 공부만 열심히 해도 되지 않았을까? 이 의문은 촌스럽긴 하지만 많은 사람들이 실제로 그렇게 살았기에 묻는 것이다. 나 또한 그런 삶을 살아 온 많은 사람들을 알고 있기에 그래서 그녀가 그렇게까지 ‘행동’해야 했던 다른 이유나 계기 혹은 내적 동기가 있었는지 꼭 알고 싶었다.
“있었죠. 그런 거... 근데 이렇게 귀한 걸 여기서 말해도 되나?” 그럼 어디서 하실려구요? KBS 다큐프로그램에서? 에이... 그러지 마시고 초보기자 기 좀 살려주시죠.
“아마 광주 그 일이 아니었다면 난 다르게 살고 있을 지도 모르겠어요.... 1학년 여름부터 배우기 시작한 피아노에 한참 빠져있을 때였죠. 난 피아노 치고 있는데... 광주에서는 사람들이 죽어가고... 이 장면이 도저히 해석이 안 되었어요. 건반을 두드리는 내 안에, 저 속 밑에서 올라오는 분열감. 머릿속으로는 이렇게 생각하는데 내 인생은 그것과는 다르게 살아갈 때, 예컨대 용기 있는 인생이 중요한데 나는 그렇지 못할 때... 이건 또 뭔가... 완전 실존적 체험이었죠.”
내 머릿속에서 아름다운 피아노 선율 사이로 죽어가는 사람들의 모습이 어지럽게 지나갔다. 인생에서 간혹 나 혼자만이 절대에 가까운 강렬함으로 경험하게 되는 일들 혹은 순간들이 있다. 그런 것을 실존적 체험이라 한다면 그런 체험들을 입 밖으로 끄집어낼 때 드는 불안과 공포를 난 이해한다. 어느 누구한테도 이해받지 못할 것이라는 느낌, 그 순간의 그 느낌은 죽었다 깨나도 나 혼자만 알 것이라는 정서적 격리감. 그리고 그것들을 언어로 표현해내야 할 때의 당혹감. 언어라는 필터를 지나자마자 발가벗겨지는 실존의 맨살. 그래서 사람들은 입을 다문다. 아니면 그런 경험은 어차피 설명이 불가하기에 그대로 맘속에 이미지 파일로만 놔두는 지도 모른다.
하지만 그녀의 그 절대적 경험은 그날 오디오 파일이 되어 내 폰 속으로 들어가고 지금 이 순간 텍스트 파일이 되어 사람들 앞에 펼쳐진다. 진정한 파일 공유란 이런 것이다. 내가 인터뷰 속에서 낚아채고 싶은 것도 사실 사람들 각각의 인생에 깊게 각인되어 있는 한 순간, 한 장의 스틸 컷, 바로 그것이다.
“내 안에서 와장창하고 부서져 내리는 느낌... 피아노만 치고 있을 순 없었지요. 시위현장에 나갈 때... 물론 무서웠어요. 그래도 가야하니까...”
분열감의 실체를 알고자 했던, 그래서 동시대의 사람들과 더 깊은 소통을 하고자 했던 그녀. 많이 두려웠으나 그녀는 정면으로 부딪쳤다고 했다. 그리고 그 시절도 지나갔다. 90년대 초반, 현실사회주의가 무너졌다. 80년대와 90년대는 그렇게 달라졌다. 거대담론 안에서 함께 소용돌이치던 사람들도 뿔뿔이 흩어져만 가고... 그렇게 포스트모던의 시대가 왔으나 지난 간 것들은 그것대로 채 정리되지 않아 어지러웠고 앞으로 온다는 시대는 추상에 휩싸인 채 그것대로 정신이 사나웠다. 그 역사의 한 페이지에 끼여 대학시절을 보낸 나에게 90년대는 온통 ‘해체’와 ‘키치’(정통에 대한 이단)로만 기억된다.
“사실 써클에 몸담고 학생운동할 때도 전 비주류였어요. 물론 제가 기질적으로도 내성적이고 그래서 맨 앞에 나서지 않은 거일 수도 있지만... 그래서 오히려 선두에 서서 조직을 이끄는 동력이 되었던 사람들이 보지 못했던 것들, 그들이 볼 수 없었던 것들을 전 뒤에서 혹은 조금 떨어져서 볼 수 있었는지도 모르죠. 그 당시는 정해진 목표를 향해 나가는 힘만이 중요한 시대였던 것 같아요. 운동의 전망이 불투명해지고 나니 목표를 향해 나가는 여러 가지 방법과 길들이 중요해지기 시작한 거죠.”
많은 사람들이 그 시대를 과도한 엄숙주의 문화 혹은 획일화의 초점에서 비판하는 것을 들었다. 하지만 그런 지적들을 마주대하는 그 순간에도 내 마음 속 그 시대를 치열하게 살아낸 이들에게 가진 부채의식은 조금도 가벼워지지 않는다. 내가 섣불리 그녀의 청춘에 대해 감상을 덧붙이지 못하는 것, 그 이유 또한 여기에 있다. 그녀의 청춘이기 전에 내 청춘이기도 했던 그 시절... 하지만 여전히 난 뒤죽박죽이고 이제는 바뀌었다는 오늘날의 ‘시대정신’이 도통 뭔지 감도 오질 않는다.
하여, 이 혼돈의 시절에서 그녀는 어떻게 빠져나왔는지 그 대답이 무척 절실했다. 잡고 가던 끈을 놓쳐버렸을 때 어떻게 하셨어요?
“그 이후로 삶의 방식이 변화하기 시작했다는 것을 느꼈죠. 가까웠던 친구들이 많이 결혼하고 애 낳고... 그러다보니까 서로 만나기도 힘들고 만나도 딱히 할 얘기가 없더라구요. 그래서 제가 한 것은 ‘모임’을 만드는 것이었어요. 친구들 집에 한 달에 한 번씩 모여서 토론도 하고 전문가들 초빙해서 강의도 듣고 함께 공부도 하고... 정말 끈끈한, 강력한 아줌마 모임이었어요.”
그녀에겐 조직이 아니더라도 큰 문제가 될 건 없었던 것이다. 아니 오히려 이제 개인을 하나의 틀로만 옭아매던 힘을 떠나 더 그녀답게 관계를 만들어갈 수 있게 되었다는 표현이 맞는지도 모르겠다. 파편화되기만 하는 개인들의 시대에 다시 한 번 정면으로 부딪쳤던 힘, 그건 소통과 관계에 대한 꿈을 포기하지 않는 것. 그것이 바로 그녀 인생의 그토록 내게 성공적으로 비춰지는 까닭이다. 떠나간 청춘 이후의 빈자리는 그렇게 사람 냄새로 소복이 묻힌다.
가르칠 수 있는 용기 그리고 즐거움
“엄청난 것이 무너지고 사라진 것은 맞는데 그렇다고 우리 곁의 온갖 문제들이 함께 사라진 건 아니잖아요. 쉽게 말해 인류가 추구해야하는 보편적 가치는 여전히 남아 있는 것이고... 결국 각자의 주체가, 그것의 든든함이 중요한 것 같아요.”
그래서 그런 그녀가 지켜내고 있는 느티나무는 뿌리가 튼튼하다. 그 뿌리가 관계와 소통에 바탕을 두고 있기에... 그녀에게 공부란 ‘나’만의 소유물이 아니기에...
2010년 가을 맥주강좌에서. 가운데가 주은경 부원장
“제가 생각하는 교육은, 공부는... 지식과 정보를 쇼핑하듯이 소비하는 건 절대 아니라고 생각해요. 내가 이 공부를 통해 어떻게 더 나은 삶을 만들어 갈 것인가, 어떻게 내 안의 분열감을 극복하고 인생 전반을 조화롭게 가꿔나갈 수 있을 것인가를 고민하는 공부. 제대로 된 공부는 우리가 지식을 매개로 다른 사람과 나누는 대화 그리고 자신과 나누는 대화가 적절한 조화를 이루는 것 아닐까요? 그래서 지금 배우는 이것이 내 삶에 어떤 의미가 있는지 그리고 난 이런데 그럼 넌 어떤지... 서로가 서로에게 거울이 되어 비춰볼 수 있는 공부... ” 그런 소통과 관계를 지향하는 공부에서 그녀가 맡은 역할은 담임교사이다.
“전 스스로 새로운 의미의 담임선생님이라고 생각해요. 사람들의 공부가 소비로 그치지 않게 소유물로 전락하지 않게 만드는... 함께 공부한다는 진정한 의미의 교육을 실천적으로 이끌어내는 역할이 바로 나의 몫이죠. 그런 역할을 잘 해내기 위해서 고민하는 것들이 무척 많아요. 사소하게는 간식부터 시작해서 공간의 배치까지 세심하게 배려하고 기획하려고 애쓰죠.”
교향악단의 지휘자, 방송프로그램에서의 PD, 교실에서의 담임... 더 나아가 배움의 서포터. 결국 한 마디로 그녀는 자신이 교육디자이너라고 소개한다. 혼자가 아닌 다른 이와 함께 여서 더 뜻이 깊어지는 배움, 이것이 우리의 담임선생님, 가르칠 수 있는 용기로 가득 찬 그녀가 꿈꾸는 교육이다. 거기에 하나 더! 즐거움을 추가한다. 즐겁지 않다면 그게 무슨 배움이고 공부란 말인가?
“캐나다의 가톨릭 공동체에서 7주 동안 일하고 기도하며 지낸 적이 있어요. 우연히 그곳 사람들 앞에서 한국 무용을 출 기회가 생겼었는데 그 이후로 절 코리안 댄서라고 기억한대요. 최고의 찬사죠. 춤추는 거 잘은 못 하지만 재미있어요.” 아, 춤추며 노시는구나...
“수다 떠는 것도 좋고 사진 찍는 것도 좋고... 자연 속에 있는 거 무척 좋아해요. 여행도 무척 좋아하고... 약 25개 나라를 여행했어요” 이 많은 즐거움 속에서도 두드러지는 즐거움이 있다.
“내 자신이 나이 들어가면서 성장해 나가고 있다는 느낌을 받을 때 무척 즐거워요. 함께 일하는 간사들의 변화를 보면서 그들의 성장에서도 감동을 받죠. 마찬가지로 느티나무에 와서 함께 공부하는 사람들이 조금씩 변화해 나가고 성장했다는 느낌을 받을 때... 그 즐거움은 거의 오르가즘이죠.” 그러면서 간사들 자랑을 늘어놓는다.
“비슷한 프로그램을 운영하는 것처럼 보이는 다른 시민교육단체들과 비교해도 느티나무의 간사들은 유능하고 경험이 많다고 자부해요. 보통 시민을 대상으로 하는 강의들은 강사와 수강생들의 관계로만 끝나는 경우가 많아요. 하지만 저희 간사들은 프로그램 기획부터 시작해서 홍보, 수강생들과의 적절한 관계맺음까지 모두 경험하고 있어요. 강사 혼자만의 강의가 아니라 간사와 수강생들까지 함께 만들어 나가는 하나의 유기체로서의 강의를 만들기 위해 강사와 수강생 사이에서 간사들이 해 나가는 역할들이 만만치 않죠. 수강생들이 그런 간사들의 태도와 역할을 좀 이해해주었으면 해요.” 네, 그럴께요^^ 간사님들 화이팅!
왼쪽부터 김민수, 주은경, 정세윤
물론 느티나무 안에서 그녀가 언제나 해피한 것만은 아니다.
“마치 쇼핑하듯이 강의만 듣고 휑하니 가 버리는 사람, 자신이 얼마나 많이 아는지 과시하기 위해서 오는 것 같은 사람들을 볼 때는 가슴 아프죠, 그런 방해 요소들을 컨트롤하는 데 실질적인 어려움도 많구요. 수강생들의 다양한 욕구를 어떻게 수용해서 반영할 것인가를 고민하는 것도 쉽진 않아요. 무엇보다 좋은 강의인데도 현실적인 여건 때문에 강사비를 깎아야 할 때는 정말 괴로워요.” 하지만 여전히 그녀는 즐거움이 많다.
“결국 제 역할은 앞으로 시민교육이 가야하는 비전과 전망을 세우는 일, 느티나무에 와서 함께 공부하는 사람들이 서로 깊이 있게 소통하고 공감할 수 있는 장을 마련해 주는 일 그런 게 아닐까 해요. 근데 그런 일은 물론 제 힘만으로 되는 건 아니죠. 간사의 도움도 필요하고 더 나아가 수강생들 사이에서도 그 힘의 일부분을 끌어 와야 하고... 하지만 아무리 힘들어도 느티나무를 찾아 들어온 사람들이 자신만의 방식으로, 그들 각각의 취향에 맞는 배움과, 함께 공부할 수 있는 파트너를 찾을 수 있게... 그래서 그것들을 바탕으로 느티나무가 커다란 배움 공동체로 자라날 수 있게... 그렇게 하고 싶어요.”
그 느티나무 아래서 사람들이 배움의 즐거움을 ‘리얼하게’ 느낄 수 있도록 돕는 것, 이게 그녀의 꿈이다. 꿈마저도 느티나무처럼 단단하다, 그녀는...
크레딧
“지난 2년 동안 느티나무가 일구어 낸 가장 큰 성과는 느티나무에 애정을 가지고 함께 하는 수강생 층이 많이 두터워졌다는 점이에요. 그 분들이 중간 리더로서 참여할 수 있는 부분들을 꾸준히 늘려나가는 것이 당면 목표이기도 하구요.”
노동운동 판에도 여성이라서 혹은 기혼자라서 부딪치게 되는 사회적 한계들이 있었다고 그녀는 말했다. 뜨거운 청춘을 함께 했던 친구들이 아이를 낳고 결혼하고 그렇게 흩어져갈 때 힘들고 슬펐다고도 말했다. 하지만 그 모든 것을 극복해 낸 그녀의 힘, 시선에서 사람을 놓치지 않고 가는 것... 이것이 조직에서 공동체로 나오는 귀한 경험을 낳게 했다. 이야기하고 경험을 나누고 소통하고 공감하고.... 그녀가 무얼 하든 그 바탕은 늘 사람이다.
가장 큰 감동이 사람한테서 오듯 우리는 치명적인 상처 또한 사람에게서 받는다. 그런 상처들 하나하나를 낱낱이 드러내지 않고서도 앞으로 걸음을 내딛는 그녀의 다리가 보인다. 가끔 저 힘이 어디서 왔는가를 궁금해만 할 뿐이다. 그리고 가끔 그녀가 내 주는 길가 한 켠에서 함께 걸으며 짧은 대화들을 나눌 뿐이다. 그러면서 내가 왜 성장해야 하는가를 진지하게 고민할 뿐이다. 그리고 더 가끔 그녀가 말하는 사람과 관계와 소통을 생각할 뿐이다.
이 글을 쓰는 내내 자꾸 그녀의 얼굴 위로 엠마 골드만이 겹쳐졌다.
엠마 골드만... 러시아 태생 유대인으로 미국에서 활동했던 아나키스트. 즐겁지 않다면 그건 나의 혁명은 아니라고 했다는 그녀. 아나키즘이라는 다른 무엇보다도 더 불온해 보이는 사상 그리고 여성...
주은경... 한국에서 나고 자란 학생운동 출신의 시민교육전문가. 당최 목소리를 높이는 일 없는 그녀가 항의하듯 큰소리로 내게 내뱉은 말, “즐겁지 않다면 그게 뭐가 교육이고 배움이냐?” 그런 그녀가 보낸 불온하고 위험해 보이는 청춘 그리고 여성...
영화의 본편이 끝나고 가끔 크레딧이 올라가기 전 혹은 그 후에 짧은 문장 몇 개가 화면 위로 지날 때가 있다. 주로 실화를 다룬 영화들이 그러하다. 헌데 길었던 영화 내용보다 그 문장들 몇 개에서 더 진한 감동과 여운을 느낄 때가 있다. 왜 그럴까? 이유는 잘 모르겠지만 나도 한 번 흉내내본다. 이 인터뷰도 실화에 바탕을 둔 것이기에 그리고 그 주인공이 아직도 우리 곁에서 함께 숨을 쉬며 살아가고 있기에...
제작지원 참여연대 아카데미 느티나무
장소협찬 통인카페
특별출연 김민수
감 독 박현아
몇년간 느티나무강의를 들으며 막연히 느끼고 상상했던 은경쌤의 모습^ 과히 다르지 않네요.
가녀린 모습뒤에 숨겨진 강인한 마음... 엠마 골드만을 떠올리기 충분하지요.
지금처럼만 쭈~~~욱 가시면 은경쌤의 마음이 난향처럼 멀리멀리 퍼져갈거여요.
그렇지만 조금만 살살 가자구요. 그래야 오래도록 함께 할 수 있으니까요.
근데,박수석 특별출연한 사람은 민수씨만 아니잖아요???ㅋㅋ
괜한 딴지 였습니다. 박수석의 기사가 날로 날로 발전하는것이 배아파서용
그날 인터뷰 자리에 살짝 얼굴을 내비친 민수간사가 특별출연자로 표기된 것인데요... ㅋㅋ
뒤늦게 덧붙여진 사진을 보니, 세윤간사도 출연하셨군요... 흠... 감독님의 허락도 없이... ㅋㅋ
쿨한 인생님. 요즘 통 얼굴을 못 봬서... 잘 지내시죠?
봄바람이 살랑거리네요... 무서버...
느티나무를 통해서 좋은 사람들과 좋은 시간을 갖습니다
백인보를 통해서 그 사람들을 더 알게되네요
(( 박기자님... 지금 헤어스타일은 언제 부터 유지해 오신건지 ? 비밀스레 물어봅니다 )) ㅎㅎ
비밀스럽게 물어보신다는 분이... 홈페이지에 댓글 다는 방법을 택하신거군요?? 하하하
그럼 어떤 방식으로 답을 드려야 하나???
아... 이 짧은 머리는... 아마 작년부터??? ㅋㅋ 라임이 흉내 좀 내봤습니다.
비밀스럽게 물으셨으니 박상규 선생님에게만 알려드릴께요^^
이따....... 만나서........... ㅎㅎㅎ