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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만권의 정치철학 당대편]자크랑시에르, 민주주의는 왜 증오의 대상인가
지난 수업(4월16일), 세월호 1주년 추모식을 앞에 두고 저희는 참여연대 강의실에 않아 ‘호모 사케르’를 배웠습니다. ‘재물로 바칠 수도 없고 누가 죽여도 괜찮은 존재’. 주권을 통해 ‘고립’과 ‘피해’가 정당화 된 존재들. 세월호 유가족들이 그랬고, 비정규직 노동자들이 그랬습니다. 나의 부모님이 그러했고 내가 그러했습니다.
아감벤은 우리에게 주권 권력이 무엇을 배제하면서 자신의 힘을 키우는지 알아채야 한다는 조언은 주었지만 호모 사케르로써 어떻게 살아가야 하는지는 알려주지 않았습니다.
일주일간 광화문과 시청에선 많은 일들이 있었습니다. 모두 또 한 번 큰 실망과 좌절을 했고 그래서인지 강의실의 분위기는 가라앉아 있었습니다. 김만권 선생님도 힘든 일주일이셨는지 회의감에 절은 눈빛으로 강의를 시작하셨습니다.
자르 랑시에르 <민주주의는 왜 증오의 대상인가>
주제가 낯설었습니다. ‘민주주의가 증오의 대상이 된다.’니. 저는 민주주의를 한 번도 의심하지 않고 ‘좋은 체제’로만 여겨왔기 때문입니다. 어른들도, 학교에서도, 정치권에서도 ‘민주주의를 침해’하는 것들로부터 민주주의를 지켜야 한다고만 했지 ‘이게 다 민주주의 때문’이라고 증오를 표현하는 것은 한 번도 들어본 적이 없는 것 같았습니다.
민주주의가 공공 영역을 확대하고 모든 존재의 동등한 발언권을 중요하게 여기면서 숨겨져 있던 존재들의 발언이 사회로 표출되기 시작했습니다. 그것들을 ‘사회 혼란을 야기한다.’며 비난을 하는 사람들이 있는데요, 그들이 바로 민주주의 혐오자들입니다. 민주주의 혐오자들은 민주주의를 ‘이기적 개인들이 삶의 모든 에너지를 개인적 만족을 추구하는 쪽으로 돌리는 형태’로 봅니다. 국가 전체, 공동체 전체의 이익보다 개인의 행복과 이익을 더 중요하게 여기는 자들이라는 것이죠. ‘민주적 인간=이기적 개인+탐욕적 소비자’로 공동재산의 구축을 방해하는 자들로 여깁니다. ‘민주주의에 대한 증오’를 다원성에 대한 증오로 이해하니 많은 사람들이 떠오르더군요. LGBT퍼레이드에 진입하여 주기도문을 외우는 보수단체들, 외국인 노동자에 대한 차가운 시선, 사업이 되어버리는 다문화 가정. 집회를 공권력에 대한 위협이라며 비난하는 사람들...
민주주의에 대한 혐오에는 정치의 엘리트주의도 섞여 있습니다. 플라톤의 ‘철인 정치’가 그들의 입장의 대표격이지 않나 싶습니다. 통치할 자격이 있는 사람들은 따로 있다는 것이지요. 플라톤은 정치인의 자격을 ‘통치행위를 갈망하지 않는 자’라고 했습니다. 바로 ‘철인 정치’이지요. 통치는 하늘로부터 부여받은 권력으로 신에게 직접 부여받거나 추첨이라는 행운으로 부여받을 수 있는데 그 추첨이 바로 민주주의의 투표라고 했습니다. 그러나 플라톤의 철인 정치에는 딜레마가 있습니다. 정치인이 정치를 원하지 않는다는 것입니다. 철인은 현실 세계에서 이상 세계를 깨달은 사람입니다. 그는 사실 현실에서 더 이상 살고 싶지 않은 사람입니다. 그가 정치의 임무를 부여 받았을 때, 그는 ‘연민’으로 시민을 통치하게 됩니다.
그러나 현실에서 정치는 특별한 사람에게 주어지는 권력인 것 같습니다. 정치인들이 지닌 스펙과 재산의 크기를 보면 그러합니다. 선거 기간 길거리는 ‘학벌’과 ‘직위’, 그리고 ‘군대’가 적힌 현수막과 명함으로 가득하게 됩니다. 그리고 그들이 ‘정치인’이라는 자격을 갖게 되는 동시에 얻는 특권과 이득들을 보면 그러합니다.
정치란 무엇일까요? 플라톤의 말처럼 연민을 가진 철인의 통치인 걸까요? ‘우리 지역’의 활성화일까요?
랑시에르는 정치란 권력을 가진 이들의 이득을 위해서, 먹고 사는 것이 일단 중요해서 다음에 해결 되어야 할 문제로 미뤄진 존재들을 겉으로 꺼내서 사회가 그들을 감각하게 만드는 일이라고 합니다. 감각된다는 것은 드러난다는 것입니다. 겉으로 보여 지고 그 소리가 들리고 그에게 목소리를 전달할 수 있을 때 우리는 그 존재를 ‘감각한다.’고 할 수 있습니다. ‘감각’되는 방법은 사회의 질서로부터 그 존재들을 불일치시키는 것입니다. 불일치란 ‘몫이 없는 자들’이 다수의 말에 따르는 것을 멈추고 ‘나를 위한 분배를 해 달라’고 주장하는 것입니다. 이것은 합의된 권리를 요구하는 것이 아니라 새로운 권리를 주장하는 일로 사회 안정을 통해 이득을 보는 자들이 매우 두려워하는 일이지요.
불일치 작업은 매우 조용하게, 은밀하게 일어날 수도 있습니다. 노동자들이 밤에 다음 날의 노동을 위해서 잠을 자는 것이 아니라 자신의 권리를 위해서 모여 학습을 하는 것이 그 예이지요. 학습은 노동자들의 내면에 불일치를 만들어 낼 것이고 그 혼란이 사회로 표출되었을 때 정치적 불일치가 발생하게 됩니다. 그리고 이러한 혼란이 랑시에르가 생각하는 민주주의입니다.
"민주주의는 헌정의 한 형태도 아니며 사회의 한 형태도 아니다. 인민의 권력이란 사회 구성원 전체의 권력이 아니며 다수의 권력도, 노동계급의 권력도 아니다. 그것은 단순히 통치 받을 자격만큼이나 통치할 자격을 가지지 못한 자들(데모스: 자신의 몫을 가지지 못한 자들로서 기존의 나눔의 경계에 의문을 제기하는 자들)의 고유한 권력인 것이다.“
정치의 역할은 공공 영역에 배제된 자들의 자리를 만들고 그들을 지지하는 것이며 배제된 자들을 감각하려는 노력이 정치인들이 해야 할 노력입니다. 경제 성장이 정치의 목표가 되어선 안 됩니다. 그러나 마냥 정치인들이 바른 정치를 하기를 기대하고 기다려서는 안 됩니다. 투표라는 형식에 기대도 안 됩니다. 민주주의는 제도도 아니며 정치 방법도, 사회 형태도 아니기 때문입니다. 랑시에르는 민주주의는 가지지 못한 자들의 권력 그 자체이며 데모스의 권력을 포기하는 것은 정치 자체를 포기하는 일이라고 했습니다. 이 말은 어쩌면 정치인들이 정치를 포기한다면 데모스들이 정치하면 된다는 말인지도 모르겠습니다.
“민주주의는 자신만이 보유하는 고유하며 항구적인 행위에만 자신의 운명을 맡기고 있다. 이러한 민주주의의 모습은 철학의 힘을 사용하는 데에 익숙한 자들에게 충분한 공포감과 증오감을 자극할 만한 것이다. 그러나 반대로 어느 누구와도 공평하게 권력을 나눠 가질 수 있는 사람들에겐 민주주의는 용기와 기쁨을 선사한다.”
‘항구적인 행위’가 민주주의의 운명을 만든다고 합니다. 계속, 움직이라는 말이겠지요. 7강을 통해 만난 철학자들이 똑같이 하는 말인 것 같습니다. “해라, 계속 해라. 지식인이, 정치인이 대신 해주길 바라지 마라. 직접 해라.” 덧붙여 ‘같이 하라.’고 말하는 것 같습니다. 혼자 고립되고 소외된 것이 아니라 너와 같은 이들이 분명히, 도처에 있으니 그들을 찾아서 함께 민주주의를 가지라고 말입니다.
김만권 선생님은 말씀하셨습니다. 은폐를 거부하는 것이 민주주의라고요. 그 누구의 권력에도 자신의 자유를 팔지 않는 것. 한 존재도 무시되는 것을 허용하지 않는 것이 민주주의라고 말입니다.
어쩌면 우리가 두려워해야 할 것은 혼란이 아니라 ‘고요’인지도 모르겠습니다.
끝으로 김만권 선생님이 눈물로 수업을 끝내게 했던 시 중 한 편을 소개하겠습니다.
"아빠는 그럼 사랑을 기억하려고 시를 쓴 거야?/어두워서 불을 켜려고 썼지./시가 불이야?
나한테는 등불이었으니까./아빠는 그래도 어두웠잖아?/등불이 자꾸 꺼졌지.
아빠가 사랑하는 나라가 보여?/등불이 있으니까./그래도 멀어서 안 보이는데?
등불이 있으니까."라는 구절에 내가 가진 등불은 무엇일까.. 라는 생각이 들어 덩달아 눈물이 났습니다.
당신이 들고 계신 등불은 무엇인가요..?
우리가 들고 있는 등불은 무엇일까요..???
대화(對話)
아빠, 무섭지 않아?
아냐, 어두워.
인제 어디 갈 꺼야?
가 봐야지.
아주 못 보는 건 아니지?
아니. 가끔 만날 꺼야.
이렇게 어두운 데서만?
아니. 밝은 데서도 볼 꺼다.
아빠는 아빠 나라로 갈 꺼야?
아무래도 그쪽이 내게는 정답지.
여기서는 재미 없었어?
재미도 있었지.
근데 왜 가려구?
아무래도 더 쓸쓸할 것 같애.
죽어두 쓸쓸한 게 있어?
마찬가지야. 어두워.
내 집도 자동차도 없는 나라가 좋아?
아빠 나라니까.
나라야 많은데 나라가 뭐가 중요해?
할아버지가 계시니까.
돌아가셨잖아?
계시니까.
그것뿐이야?
친구도 있으니까.
지금도 아빠를 기억하는 친구 있을까?
없어도 친구가 있으니까.
기억도 못 해 주는 친구는 뭐 해?
내가 사랑하니까.
사랑은 아무 데서나 자랄 수 있잖아?
아무 데서나 사는 건 아닌 것 같애.
아빠는 그럼 사랑을 기억하려고 시를 쓴 거야?
어두워서 불을 켜려고 썼지.
시가 불이야?
나한테는 등불이었으니까.
아빠는 그래도 어두웠잖아?
등불이 자꾸 꺼졌지.
아빠가 사랑하는 나라가 보여?
등불이 있으니까.
그래도 멀어서 안 보이는데?
등불이 있으니까.
―아빠, 갔다가 꼭 돌아와요. 아빠가 찾던 것은 아마 없을지도 몰라. 그렇지만 꼭 찾아 보세요. 그래서 아빠, 더 이상 헤매지 마세요.
―밤새 내리던 눈이 드디어 그쳤다. 나는 다시 길을 떠난다. 오래 전 고국을 떠난 이후 쌓이고 쌓인 눈으로 내 발자국 하나도 식별할 수 없는 천지지만 맹물이 되어 쓰러지기 전에 일어나 길을 떠난다.
<안 보이는 사랑의 나라, 문학과지성사, 1980>