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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만권의 정치철학 - 고전으로 이해하는 정치사상 <당대편>] 5강-한나 아렌트, <인간의 조건>
3월부터 매주 목요일 저녁을 함께 했던 고전으로 이해하는 정치철학 <당대편>, 어느덧 반환점을 돌았네요. 다섯 번째 수업에서 다룬 고전은 한나 아렌트의 1958년 작 <인간의 조건>입니다. 한나 아렌트는 근대성의 병폐와 ‘악’을 다뤄내면서 명성을 얻었습니다. 급진적 악을 다룬 <전체주의의 기원>, 야스퍼스의 영향을 받아 일상의 악을 탐구한 <예루사람의 아이히만>, <혁명론>, <자유란 무엇인가> 등등 흥미를 끄는 제목의 저작이 많습니다. 또 스승이자 연인이었던 하이데거가 소멸과 맞닿은 사유를 중심으로 철학을 펼쳐나갔던 반면, 아렌트는 ‘인간의 본질을 이루는 것은 생각함이 아니라 행위함’이라며 새로운 시작, 탄생과 행위를 철학의 중심에 놓았습니다. 또한 유태인으로서 몇 번이나 끔찍한 상황에서 극적으로 탈출했던 경험은 그녀의 철학과 삶의 자세 곳곳에 매우 큰 영향을 끼친 것으로 보입니다.
할머니 아렌트가 아니라 좀 젊은 아렌트네요^^
<인간의 조건>은 얼핏 제목만 보면 인간으로서 갖추어야할 조건과 인간 본성을 탐구한 책처럼 보입니다. 그러나 <인간의 조건>은 인간이 이미 조건 지워졌다는 것, 즉 인간적 제약성 자체를 의미합니다. “인간의 삶과 지속적인 관계를 가지는 것은 무엇이든 인간의 실존조건이라는 성격”을 가지므로 “인간이 무엇을 하든 언제나 조건 지워진 존재”라고 할 수 있습니다. <인간의 조건>에서는 이러한 주어진 제약을 다루어가는 ‘활동’에 관한 이야기입니다. 실제로 아렌트는 이 책을 ‘Vita Activa(활동적인 삶)’, ‘Amor Mundi (love of the world)’라고 불러주길 원했다고 합니다.
<인간의 조건>은 두 가지 트랙으로 구조화하면 이해하기 보다 쉬운데요, (수업 중 판서 참고) 첫째, 인간의 실존조건에 따른 ‘세 가지 활동적인 삶’으로서 ①노동 ②작업 ③행위, 둘째, 각각의 삶이 위치하고 있는 ①공론영역 ②사적영역이 있습니다. 결론부터 이야기하자면, 아렌트는 각각의 활동의 중요도가 뒤집히고 각각의 삶이 원래 위치해야할 곳에서 이탈하여, 공론영역과 사적영역의 경계가 흐려지면서 결국 두 영역 모두 사라지게 된 것이 근대사회의 문제라고 보았습니다. 강의록의 순서와 같이 노동부터 차례대로 살펴보겠습니다.
노동(Labor)은 생명 유지라는 필요성에서 나오는 동물적 특성입니다.(Homo Laborans) 생명을 유지하기 위해서 인간들은 무언가를 끊임없이 소비해야하죠. 아렌트는 세 가지 활동 중에서 노동(과 소비)가 가장 파괴적이고 지속성이 짧으며, 그렇기 때문에 노동하는 동물은 “무세계성”을 띤다고 표현합니다. 노동하는 동물은 “자기 신체의 사적 성격 속에 갇혀서 누구와 함께할 수도 없고 온전하게 의사소통도 할 수 없는 충족에만 사로잡혀 세계로부터 추방”되기 때문입니다. (여기서 세계란 사람들이 모여 같이 무언가를 하는 곳, 즉 공적영역이라고 이해할 수 있습니다.) 따라서 노동이 있어야 할 곳은 엄연히 사적영역입니다. 그러나 근대세계에서 노동하는 동물이 공론영역에 자리 잡게 되었고, 아렌트는 이를 두고 ‘근대세계가 필연성〔필요성〕에 거둔 승리’라고 표현했습니다. 필요성의 충족만을 위해 힘쓰는 자들이 공론영역을 차지하게 되어 결국 진정한 공론영역은 사라지고 “공개적으로 이루어지는 사적 활동”만이 존재하게 된 것이 근대의 문제입니다.
작업(Work)에서 가장 중요한 가치는 유용성입니다. 노동과는 달리 “자연적 환경과 전적으로 구별되는 인공적 세계의 사물들을 제공”하여 “세계에 지속성과 견고성을 부여”합니다. 시장에서 거래되는 재화를 생산하는 것은 물론, 사회 제도를 만드는 것 역시 작업에 속합니다. 전자의 경우는 사적영역에, 후자의 경우는 공적영역에 위치합니다. 작업을 통해 인위적인 세계를 건설하는 인간은 자연에 대한 객관적인 태도를 취할 수 있으며, 이는 인간이 필요성과 탐욕이라는 자연적(동물적) 특성에 저항할 수 있는 가능성을 제공합니다. 그러나 작업에는 공리주의의 문제가 내재되어 있습니다. 앞서 말했듯이 유용성의 가치에 사로잡힌 제작인(Homo Faber)에게는 목적이 수단을 정당화 합니다. 따라서 작업을 위한 재료를 얻기 위해서 자연에 가하는 폭력은 모두 정당화됩니다. 뿐만 아니라 “모든 목적이 어떤 다른 맥락에서는 다시 수단이 되는 사슬”과 같습니다. 선생님께서는 이해를 돕기 위해 의자 생산의 예를 들어주셨습니다. 의자를 만드는데, 사실은 의자 자체가 목적이 아니라 그 의자를 책상과 함께 두는 것이 목적이라고 하면, 의자는 목적에서 수단으로, 1차적 가치에서 2차적 가치로 전락하고 맙니다. 또 의자와 책상을 만들어 내는 게 목적이 아니라 그것들을 방에 놓는 게 목적이라면... 이런 식으로 끊임없이 목적이 다시 수단이 되는 일이 발생합니다. 제작자로서 인간은 도구화의 문제, 즉 “내재적이고 독자적인 가치를 상실”하는 문제에 봉착합니다.
행위(Action)는 “사물이나 물질의 매개 없이 인간 사이에 직접적으로 수행되는 유일한 활동”이고, 그 근본조건은 다원성입니다. 여기서 다원성은 “‘동등성’과 ‘차이성’이라는 이중의 성격”을 가집니다. 동등하게 다른 존재이기에 사람들 사이의 거리가 의미 있어지고, 비로소 말과 행위를 통한 ‘참여’, 즉 정치가 일어납니다. 따라서 행위는 공공영역에 위치합니다. 아렌트가 “제2의 탄생”이라고 부른 참여는 “우리가 결합하기를 원하는 ‘타인의 현존’에 자극 받은”것입니다. “노동처럼 필연성〔필요성〕에 의해 강요된 것이 아니고 작업의 경우처럼 유용성 때문에 추진된 것도 아니”라는 점에서 아렌트는 행위만이 자유로운 활동이라고 보았습니다. 아렌트는 고대 그리스의 폴리스에서 다원성과 참여의 원형을 발견하고, 폴리스의 발생이 “인간이 사적생활 외에 일종의 두 번째 삶인 정치적 삶을 부여받았음을 의미한다.”고 말했습니다. 고대 도시국가에서부터 이미 사적영역과 공적영역의 분리가 일어났으며, (근대 이전까지) 뚜렷이 구분되는 실체로 존재해온 것입니다.
공론영역에서 ‘공’이란 누구나 볼 수 있고 들을 수 있다는 점에서 “가장 폭넓은 공공성을 가진다는 것”과 “세계가 공동의 소유”라는 것을 동시에 의미합니다. 세계에서 산다는 것, 즉 공론영역에서 행위하는 것은 마치 다양한 사람들이 탁자에 둘러 앉은 것과 같습니다. 다양성의 기반 위에서 다르지만 평등한 사람들 사이(in-between)에서 정치가 만들어지고, 정치는 사람들을 이어줍니다. 대중사회의 문제는 탁자의 부재, 즉 정치의 부재인 셈입니다. 아렌트는 아리스토텔레스를 인용하며 “행위(praxis)와 언어(lexis)”만이 ‘정치적 삶’을 구성한다고 했습니다. 힘과 폭력으로는 사람들을 이을 수 없다는 것입니다. 한편 행위자가 모습을 드러내는 현상공간으로서 공론영역은 행위와 말의 방식으로 사람들이 함께 사는 곳이라면 어디에서나 잠재적으로 존재하며, 공론영역을 존재‧보존 시키는 힘이 ‘권력’이라고 정의했습니다. 결국 자유와 권력 모두 공공의 장에 모습을 드러낼 때, 즉 행위 할 때만 구현할 수 있습니다. (여기서 아렌트에 대한 해석이 갈립니다. 현실적으로 일반 사람들이 공공의 장에 모습을 드러내는 경우가 거의 없다는 점에서 엘리트주의‧보수주의라고 보는 시각도 있고, 혁명‧시민불복종의 순간에 집중하여 아주 급진적인 해석을 하는 견해도 있습니다.)
한편 사적(가정)영역은 필요와 욕구의 동인에 의해 이뤄지며, 타인과의 관계가 사라지면서 “삶 그 자체보다 더 영속적인 어떤 것을 성취할 수 있는 가능성”을 박탈당합니다. 그러나 그녀는 사적영역에서의 사적 소유(≠wealth)를 “삶의 필연성을 지배함으로써 잠재적으로 자유로운 사람, 즉 자신만의 삶을 초월하여 모든 사람이 공통적으로 참여하는 세계에 들어가는 사람이 된다는 것을 의미”한다고 보았습니다. 즉 사적 소유가 한 인간이 정치적 존재가 되기 위해 필요한 요소라고 보았습니다. 이러한 시각은 사적 소유를 문제로 보았던 맑스와도 다릅니다.
근대에 접어들어 ‘민족국가’를 세우면서 사적영역도 아니고 공적영역도 아닌 사회적 영역이 등장합니다. 원래 가정영역의 문제였던 것들이 공적영역으로 나와 이른바 ‘사회’를 형성할 때, 사람들은 부를 통해 정치적 인간이 되는 것, 즉 “공론영역에 접근하기보다, 보다 많은 부를 축적하여 공론영역이 자신들을 보호해줄 것을 요구”했고, 이것이 국가(commonwealth)가 되었습니다. 재산을 보호하는 것이 근대 국가의 본질인 것입니다. 결국 아렌트는 “공적인 것이 사적인 기능을 하는 까닭에 공적인 것이 사라지고, 사적인 것이 유일한 공동의 관심사로 남기 때문에 사적인 것이 사라짐으로써 결과적으로 이 두 영역이 사라진다.”고 합니다.
앞서 행위만이 자유로운 활동이라는 말을 했습니다. 아렌트는 <자유란 무엇인가>에서 행위와 자유는 동시에 발생한다고 했습니다. 행위가 있어야할 곳은 공론영역인 까닭에 자유 역시 공론영역에서만 구현됩니다. 또한 ‘행위하다’는 ‘시작하다(아르케인)’와 ‘누군가와 같이, 혹은 도움을 받아 완수하다(프리테인)’라는 두 가지 말에서 유래했다는 것에서, 자유는 본질적으로 타자와 세계 속에서 무엇인가를 할 때 발생함을 알 수 있습니다.
근대세계에서 결국 공론영역이 사라지면서, 근대의 인간은 자유를 잃어온 것입니다.
그러나 아렌트는 신학적 세계관에서 우리는 이미 탄생할 때 우주를 한 번 출발 시켜본 존재라는 점을 상기시킵니다. 역사는 하나의 덩어리 같아 보이고, 끊임없이 주욱 이어져온 것 같아 보입니다. 그러나 자세히 보면 단절의 순간이 있었고, 새로운 시작의 순간이 있었습니다. 역사의 무거운 흐름 속에 나를 끼워 넣어 단절을 만들고 새롭게 시작 시켜야 합니다. 우주를 출발 시켜본 존재인 우리는 행위 할 수 있습니다. 아렌트는 이것이 자유이고, 자유의 본질은 행위라고 강조하였습니다.
어떤 철학자의 어떤 책을 읽어도 늘 첫 수업의 말씀으로 돌아가는 것 같습니다. "세계의 문제와 함께할 것" 세월호 참사 1주기가 다가오고 있어서 그런지, 이 메세지가 참 절절하게 느껴집니다.
(지난 주에 수업을 들으면서 많이 어려워서 여러번 다시 읽고 정리했는데도 유독 부족함은 많고, 길이는 긴 후기가 된 것 같아서 죄송합니다...ㅠㅠ)
다른 별로 이사를 가긴 어렵고 지구가 변해야 잔득 움츠린 행위에의 충동이 해방을 맞을까하는데요 그럭저럭 먹고 살며, 직장생활에서 기운을 낼 겸 그 동안 수고를 보답해 줘야하니 올해 휴가는 가까운 곳으로 여행을 가볼까 결혼자금을 마련하고 내 집도 마련해야지 하며 또한 잔득 계획을 세우고 사는데 계속 불편한건 계획이 진척이 없고 “작업”이 반복된다는 점 때문입니다.
살아생전 햇볕이 들 날 을 바라는 마음에서 지구가 변해야겠구나 하는데요 “작업”을 반복하는 스스로를 반성하며 강구하기를 공론영역을 터 잡자입니다. 총 소유가 공론영역을 점유하여 지구는 소수 거대한 사적영역을 옹호하며 제도로 굳건히 하나 다시 인간의 실존입니다. 노동과 작업을 긍정하되 오로지 외롭지 않도록 작은 소유가 공론영역을 만들어야 한다는 생각입니다.
또한 옛 선조들이 그랬듯 일상은 소소했으며 오늘, 총 소유가 공론영역을 점유하였으나 필요가 우리를 점유하지는 않았습니다. 세월호에서 부모, 또래 심정으로 안쓰러워하고 눈물 지우는 우리와 미안한 마음을 슬어 한 켠에 미루어 담아 이제 그만 하는 우리는 다시 소소한 일상이며 같이 아파할 수 있는바 무엇이 공론영역을 점유 하였는가 입니다.
필요로부터 자유로워지는 것은 중요합니다. 그리고 총 소유가 필요로부터 자유로워져야 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