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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만권의 정치철학-고전으로 이해하는 정치사상 <당대편>] 3강 미셸 푸코, <감시와 처벌>
고전으로 이해하는 정치철학 <당대편>에서 세 번째로 다룬 고전은 미셸 푸코의 1975년 작 <감시와 처벌>이다. <감시와 처벌>은 그의 대표작이자 동시에 전환점이다. <감시와 처벌> 전, 그러니까 1975년까지 그의 철학이 ‘지식의 고고학’이라면, <감시와 처벌> 이후에는 ‘권력의 계보학’이라고 불린다. 지식의 고고학이란 이제는 더 이상 그렇게 생각하지 않는 것들, 즉 단절된 지식을 고고학과 같이 발굴하여 해석을 가하지 않고 관찰하는 것을 의미한다. 계보학은 오늘 날 우리의 사고방식과 지식을 권력과 관계 지어 탐구하는 방식이다.
소크라테스, 플라톤 이후 철학의 목표는 진리 추구에 있었다. 푸코는 이 ‘앎을 향한 의지’가 참과 거짓을 늘 대조시키고, 거짓은 나쁜 것으로 여겨 배제 시키는 일종의 권력을 낳는다고 보았다. 다시 말해 하나의 지식이 ‘진리’라는 이름으로 권력을 만들어 내면, 이 권력은 배제라는 수단으로 다른 담론의 형성을 막아 자신을 정당화하기 위한 지식을 재생산하고, 이 지식은 다시 권력을 강화 시킨다. 이와 같이 진리와 권력의 관계-서로를 재생산하는 관계를 푸코는 ‘진리의 레짐’이라고 불렀다. 또한 그는 진리의 레짐이 이미 우리의 일상 속에서 작동하고 있다는 데에 주목했다. 일상에 퍼져있는 (종속적) 지식은 권력관계를 구축하고, 개인이 스스로를 조정하고 굴복하게 만든다고 했다. 푸코가 말하는 ‘권력’이란 이처럼 알게 모르게 일상에 내재되어있는 힘을 의미한다.
푸코는 권력을 “국가 대 개인”의 프레임 속에서 이해하는 전통적인 방식을 ‘비판의 집중화(centrality of criticism)’라고 불렀다. 그는 앞서 말 한 대로 “권력이 지식과 관련을 맺으며 국가뿐만 아니라 사회 내의 모든 분야와 일상생활(법률, 학문, 사회, 공장, 기업, 학교, 성생활 등)에 구축되어 있다”고 보았다. 보이지 않지만 일상 속에 깊이 들어와 있는 권력에 대한 비판에 기존의 국가-개인 프레임은 적절치 않다. 푸코는 새로운 연구 방법, 즉 계보학을 창안한다. 계보학은 “특정한 사회기제에 존재하는 지식을 역사적이고 비판적인 관점에서 탐구‧비판”한다. 국가-개인 프레임에 비해 훨씬 미시적이고 세부적이라 할 수 있는데 푸코는 이를 ‘비판의 지역성(locality of criticism)’이라고 불렀다. 이 방법론을 통한 연구에서 권력은 “전략으로서 이해되어야”하며, 권력지배의 효과는 “배열, 조작, 전술, 기술 작용 등에 의해 이루어”진다. <감시와 처벌>에서 푸코는 권력이 인간의 신체를 다루는 기술, (종속적) 지식을 불어넣는 전략을 분석함으로서 사회를 구성하는 메커니즘을 보여주고자 하였다.
<감시와 처벌>은 루이 15세 때 있었던 끔찍한 신체형(신체형벌, 고문) 묘사로 시작한다. 전근대 사회에서 권력이 가하는 폭력은 “‘진실’을 밝힌다는 명목으로 정당화”되고, 구경꾼들에게 왕이 절대 권력이라는 종속적 지식을 심어주는 역할을 하였다. 그러나 형벌이 주는 공포감이 “수형자에게 부과된 치욕이 효과”를 “동정이나 영광”으로 역전 시켜, “사형집행인의 합법적 폭력이 불명예스러운 행위로 변화”되는 부작용(?)이 있어, 19세기에 접어들면서 잔인한 신체형은 사라진다. 근대적 형벌은 정신에 대한 형벌, 자유를 박탈하는 형벌이며 신체는 이를 위한 도구이자 매개체가 된다. 또 단순히 범죄에 대한 징벌에서 범행의 재발을 막기 위한 ‘교정’으로 초점이 바뀌고 처벌의 목적 역시 “죄인을 개조”하는 것으로 변화한다.
푸코는 다시 범죄를 저지르지 않는 신체, 다시 말해 “복종시킬 수 있고, 쓰임새가 있으며, 변화시킬 수 있으며, 나아가 완전하게 만들 수 있는 신체, 바로 순종하는 신체”에 주목하였다. 그는 18세기 군대, 학교, 구빈원의 억압적인 규율 중에서 폐쇄적 공간배치와 개인의 서열화가 ‘순종하는 신체’를 만드는 결정적 역할을 하였다며 다음과 같이 말했다. “규율은 ‘독방’, ‘자리’, ‘서열’을 조직화함으로써 복합적인 공간을, 즉 건축적이면서 동시에 기능적이고 위계질서를 갖는 공간을 만들어 낸다. (...) 그 공간은 개개인을 작은 단편으로 절단하고, 또한 조작 가능한 관계를 수립한다.” 푸코는 건축화 된 규율을 17세기 페스트의 도시와 판옵티콘에서 찾았다.
17세기 페스트가 발생한 도시에서는 “엄격한 공간 분할이라는 행정조치”가 취해진다. 각 가정집의 문을 밖에서 걸어 잠그고, 매 아침 창문으로 점호를 하는 등 폐쇄, 봉쇄, 배제, 분할과 통제가 주를 이루는 이 조치는 주민들의 안전을 명분으로 개인에 대한 끊임없는 감독과 감시를 정당화한다. 어기거나 반발하면 사형. “위계질서, 감시, 시선, 그리고 기록행위가 구석구석까지 스며든, 페스트에 감염된 도시, 개개인의 신체를 명백히 감시의 대상으로 확장하는 권력의 운용 속에서 꼼짝 못하게 된 도시”의 일상적‧건축적 형태가 바로 벤담의 ‘판옵티콘’이다.
판옵티콘의 구조는 우리가 익히 아는 대로이며(강의록 p.49~50 참고), 광인, 병자, 죄수, 노동자, 학생(어린이) 수용을 목적으로 한다. “측면에서의 불가시성”(원형건물의 분할된 부분들과 완전히 분리된 독방들)은 개인들을 완전히 개체화 하고 집단행동을 원천봉쇄하여 질서를 만든다. “가시성”(충분한 빛과 감시자의 시선)은 자율성을 만든다. 여기서 말하는 자율성은 개인이 감시를 내면화하여 더 이상 감시를 받지 않더라도 스스로를 규율하는 것, 나아가 스스로 ‘권력의 전달자’가 되어 질서를 지키지 않는 사람을 배제 시키는 것을 의미한다. 푸코는 이 판옵티콘을 “인간의 일상생활과 권력과의 관계를 규정하는 하나의 방식”이라고 보았으며, 판옵티콘에서 볼 수 있는 자율성이 “근대적인 개인의 자율성의 실체”라고 말한다. 이는 인간의 이성과 합리성에 대한 믿음을 기초로 하는 자유주의자들에 대한 공격이라고 할 수 있다. 또한 민주주의나 전체주의 사회나 똑같이 판옵티콘을 메커니즘으로 하고 있고, 단지 감시탑의 개방성만이 차이이며 이 차이가 메커니즘의 부패를 막는다고 보았다.
이쯤 되니 나는 물론이고 수업을 함께 듣는 분들이 다 같이 힘들어하시고 우울해하셨다. 학교에서 푸코를 배우는 내내 우울했다는 옆자리 언니의 말이 백 번 이해가 되면서 답답함이 목까지 차오르는데, 무거워진 분위기에 당황하신 김만권 선생님께서 <감시와 처벌>과 계보학의 의의를 다시 상기시켜 주셨다. 푸코는 계보학을 통한 권력 비판이 대안을 줄 수는 없다고 인정하면서, 전통적인 프레임 내에서 획일적인 권력 비판과 대안이 잘못 된 것임을 보여주는 것이 계보학의 목표라고 했다. 다르게 생각하면 다르게 행동할 수 있다. 모든 것이 ‘구성’된 것이라면, 새로운 구조를 만들어 낼 수 있는 가능성 역시 우리에게 있다.
푸코에 의하면 근대 권력은 제재 수단을 폭력에서 감시와 처벌로 바꿨고 자유박탈입니다. 근대 자율성은 내면화된 권력을 이행하는 것이라니 이래저래 근대화는 자유가 없는 샘입니다.
마을공동체는 역사와 전통을 간직한 나름에 관습이 있었고 얼굴 맞대며 오래 같이 살아 내면화된 범절을 지키고 서로 속사정을 살피며 고만고만하게 살았는데요 새로운 경험과 삶을 찾아 고향을 떠나는 일부가 있었으나 자유를 찾아서는 아니었습니다. 마을공동체가 변함없는 그저그런 일상이었으나 자유박탈은 아니었으니까요. 그리고 근대화, 도시화되며 사정이 달라졌지만 마을공동체는 한창 찾고 있는 지역사회 모습입니다.
예나 지금이나 고만고만하고 예측할 수 있는 삶은 중요한바 권력은 실상을 잘 모르므로 일상에 공동체를 구축해야겠다는 생각입니다.
추신 : 푸코 강의를 들으며 내 일상이 감시와 처벌이었다니 기분이 상했는데요 우리 일상으로 만들면 되겠구나 위안을 얻었습니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