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참여연대에 대한 몇 가지 오해(그리고 키워드 참석자 여러분께 드리는 감사의글)
귀국한 이후 오랜 시간 동안 참여연대 느티나무 아카데미에서 활동했다.
재미있는 건 참여연대에서 강의한다 그러면
진보 성향이라 불리는 선생님들조차 때로
"거긴 너무 나간 거 아니야"라는 말씀을 하신다.
오래전부터 생각해 왔던 일이지만,
오늘은 참여연대에 대해 몇 가지 변명을 해보고자 한다.
첫째. 생각보다 훨씬 보수적인 단체.
나에게 참여연대가 어떤 곳이냐 묻는다면
한 마디로 이렇게 대답하겠다. "생각보다 훨씬 보수적인 단체".
참여연대 내에서 가장 중요하게 여기는 가치 중 하나가
"법을 지키는 한계 내"에서 이루어지는 시민정치이다.
"준법과 불법은 현상 유지를 위한 것이고, 변화는 언제나 초법에서 온다"는 아렌트의 말을 빌자면 참여연대의 시민정치의 활동 방향은 체제 안정적이다.
예를 들어, 지난해 국정원대선개입 문제로 인해
참여연대가 주도해서 길거리에 나가 행진을 벌였는데,
지난 몇년간 진짜로 처음 있었던 일이다.
그날도 참여연대는 행진에 모인 몇몇 사람들과 내부적 충돌을 빚었다.
몇몇 사람들이 "정권퇴진" "대통령 하야"를 외쳤기 때문이다.
이날 참여연대의 이태호 처장은 이런 구호를 외치는 사람들을 일일이 찾아가
그 구호를 외치지 말라고 계속 당부했다.
제도권 정치와 맞닿은 시민운동을 하면서 지켜야 할
어느 정도의 경계라고 생각했기 때문일 것이다.
내부에 있는 활동가들과 이야기 해 보아도 그렇다.
법의 경계를 어떻게 지킬 것인가에 대한 논쟁은
참여연대 내부에서 가장 큰 고민거리이다.
현재까지 참여연대는 이 고민을 가장 보수적인 방식으로 다루고 있다.
둘째. 다른 단체를 위해 때로 이름을 내어주는 단체
어떤 작은 시민단체들이 공적인 관심이 필요한 활동에 나섰을 때,
참여연대가 주도하지 않은 활동이라도
상당수의 경우 참여연대가 주도한 것처럼 보이는 경우가 많다.
아주 단순화시키자면, 공공의 관심사가 필요한 곳에
참여연대라는 이름이 어느 정도 먹히기 때문에
참여연대가 명목상으로 주도적 위치에 서는 경우가 있다.
시민단체끼리 서로 상생한다는 입장에서 봐도
참여연대는 손해를 보는 일이라도 이름을 빌려주어야 하는 경우가 있다.
가뜩이나 자체적으로 관계하는 일이 많은데
이런 식으로 외부와 연계된 활동을 보고 있노라면
참여연대는 관계하지 않는 곳이 없는 곳 마냥 보인다.
여기 저기 다 참여연대처럼 보이는 데 이런 이유도 한 몫을 한다.
물론 참여연대도 이런 연대를 통해 내부적으로 그리고 외부적으로 얻는 것이 있음은 분명할 것이다.
셋째. 사실상의 준정당에 가까운 시민단체
원래 시민정치는 영역별 운동이 중심이 된다.
하지만 참여연대는 영역을 드나들며 활동한다.
정부 감시기구라는 명목이 있지만,
참여연대는 사실상 대부분의 주요영역에 모두 관계한다.
특히 정당의 제도화 기능이 부실한 상태에서
참여연대는 누구보다 제도화에 많은 노력을 붓고 있다.
그렇다보니 참여연대는 60여명 남짓되는 사람들이
제대로 눈도 붙이지 못한채 운영하고 있는 준정당에 가깝다.
그렇다보니 가끔씩 내부를 들여다 볼 기회가 있는 내 눈엔
많은 사람들의 자유가
이 활동가들의 밤낮없는 청춘과 땀에 의지하고 있는 듯 보인다.
많은 제도화의 결실이 정당의 업적처럼 보이지만,
사실상 알고 보면 그 제도화를 위해 끊임없이
문제제기를 한 활동가들의 노력이 그 바닥에 고스란히 담겨 있다.
더불어 참여연대는 시민단체 중 유일하게 인턴 프로그램을 운영해서
각종 시민단체에서 활약하게 될 미래 활동가를 길러내고 있다.
네째, 너무도 건강한 청년들
그리고 내가 만난 청년 활동가들은
우리가 옛날 가지고 있던 그리고 지금도 만연하고 있는
식상한 좌파와 우파의 틀에서 상당히 자유로운 친구들이다.
자신들을 좌파와 우파가 아닌 민주주의자들로 생각하고
자신이 지키는 것은 좌파와 우파의 이념이 아니라
민주적 시스템이라고 믿는다.
이 친구들은 참여연대 밖 뿐만 아니라
그 내부의 문제를 고치는 일에도 관심이 많다.
이 친구들이 분노하는 것의 내용은 일반시민과 다름이 없다.
하지만 이 친구들은 분노만 하지 않고 잘못된 일을 함께 고쳐나가는 일에
자신의 청춘을 쏟고 있다.
(하지만 이 청춘들의 고민은 다른 여느 또래 청춘들의 고민과 다르지 않다.)
무엇보다 놀라운 건 이 활동가들이
하나 같이 자유로우면서도 예의바른, 다정한 청년들이라는 점이다.
다섯째, 일만 오천명의 회원들
대한민국에 참여연대에 회비를 내는 일만 오천명의 회원이 있다.
(일만 오천명 모두가 회비를 내는 건 아니라고 알고 있다).
회비를 내는 사정은 각각 다를 터이고
그 지지하는 이유도 다를 거라 생각한다.
하지만 일만 오천명의 마음이
이 나라가 좀더 바로 서서
우리 자손들에게 물려줄만한 체제를 만드는 것이라는 데선
한 마음이라 생각한다.
이런 맘을 가진 사람들과 함께 한다는 생각때문인지
나는 참여연대에서의 강의에 늘 보람을 느낀다.
그리고 때로 위로도 얻는다.
그리고 이번 참여연대 강의에 조금은 묘한 일이 벌어졌다.
내 강의를 들으셨던 분이 자기 아들의 손을 잡고 내 강의를 찾으셨고
내 강의를 들었던 아버지와 어머니의 권유로 강의를 찾아온 청년들도 제법 있다.
특히 이번 주 강의는 사실 내게 무척이나 의미 깊은 시간이었다.
차별하는 자들에 대한 분노에 사로잡혀 있던 나에게,
그들을 치유할 수 있는 건 분노가 아니라 좀더 긴 시간의 인내이고
우리가 믿고 있는 관용의 가치라고,
차별하는 자를 향한 배제는 결국 그들의 논리에 휘말리게 될 뿐이라고,
결국 이들을 치유할 수 있는 궁극적인 길은
민주적 가치를 강화하는 일이라고,
그래서 지금 내가 하는 일이 의미있는 일이라고
진심어린 토론을 통해 알려주셨다.
무엇이 정답인지는 모르겠다.
하지만 참여연대에 강의를 나가며 내가 배우고 있는 것 하나는
분노와 눈물의 치유책은 이성적인 태도와 자애로운 대처라는 것이다.
생각보다 긴 글이 되고 말았다.
하지만, 주위 사람들에게라도
참여연대에 대한 편견과 오해는 풀어주고 싶다.
물론 문제 없는 집단은 없다.
모두가 다 내부적 모순을 끌어 안고 있고
대외적으로 불필요한 행위를 하고 산다.
다만 그 모순의 간극을 줄이고
불필요한 행위를 줄이는 것은 끊임없이 해야 할 일이다.
참여연대를 만든 1세대들은 거의 모두 참여연대를 떠났다.
이제 참여연대를 만들고 있는 이들은 새로운 세대들이다.
그 새로운 세대들이 자신들만의 새로운 참여연대를 만들길 기대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