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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뒤집어보는 종교 전쟁 평화] 1강, 종교와 국가폭력 (1편+2편)
[뒤집어 보는 종교, 전쟁, 평화] 1강(7/15) 종교와 국가폭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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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강의 중인 박노자 교수 (사진=아카데미느티나무)
지루한 장마비가 잦아들고, 강렬한 여름 햇빛이 간간히 비추었던 월요일, 참여연대 지하 1층 세미나실은 40여 명의 사람들도 꽉 들어찼습니다. 바로 박노자 교수님의 ‘뒤집어 보는 종교, 전쟁, 평화’ 첫 강좌가 있던 날이었기 때문입니다. 박노자님이 아카데미느티나무에서 여름 특강을 한지도 올해로 벌써 세 번째라고 합니다. 주은경님께서 간단히 강의소개를 해주신 후에, 많은 분들이 고대하시던 박 교수님의 강의가 본격적으로 시작되었습니다.
1. ‘평화’가 발명되기 전까지
박노자 교수님은 10여 년 전에 있었던 불교계의 종단갈등에 대한 신문사설 이야기로 강의를 열었습니다. 그 당시, 여러 신문에서 ‘본래의 수행정신으로 돌아가라, 자비로 돌아가라’는 메시지로 불교계에 일침을 가했습니다. 이렇듯, ‘종교는 평화지향적 또는 비폭력적이어야 한다’는 인식이 우리 사회에 지배적인 듯합니다. 그러나 종교가 평화, 비폭력과 연결된 것은 근대에 들어서부터라고 합니다. 마치 ‘민족’이라는 개념이 근대에 나타난 것처럼 말입니다. 교수님에 따르면, 그러한 인식은 1960년대 후반, 미국내 종교단체들이 베트남전쟁에 반대하기 시작하면서 나타났다고 합니다.
그 이전까지만 해도, 동서양을 막론하고, 여러 가지 인간들이 겪는 갈등상황을 전쟁으로 해결하는 것이 당연지사였다고 합니다. 전근대 유럽 역사에서 전쟁이 없는 시기는 평화시대가 아니라, 그저 전쟁을 준비하는 시기라고 봐도 지나치지 않을 정도입니다. 17세기를 배경으로 한 ‘삼총사’ 이야기에서도 정당한 결투의 결과로 적을 살해하는 것에 주인공들은 양심의 가책을 느끼지 않습니다. 1795년 엠마누엘 칸트가 ‘영구평화론’에서 ‘평화’라는 개념을 소개하기 전까지 전쟁과 살해에 대해 느끼는 죄의식은 현대 인류의 그것과 매우 달랐던 것으로 추측해봅니다.
2. 고대 종교와 폭력
종교의 시작은 매우 끔찍했다고 합니다. 대부분의 유라시아 문화권에서 발견되는 순장풍습, 로마의 검투사, 갑골문과 켈트족 주술에서 나타난 점치는 방법까지 모두 인신제사를 전제로 하고 있습니다. 도대체 초기 인류의 종교는 왜 이렇게 폭력적이었을까요? 르네 지라드라는 학자는 인신제사를 통해 내부결속, 소속감을 확인하기 위한 목적이었다고 설명하고 있습니다. 또 맑스레닌주의 유물사관에 따르면, 자연에 대한 인간의 공포로부터 비롯된 원시종교는 사냥대상인 동물(신)을 죽인 댓가로서 인간을 잡아 신에게 바친다는 일종의 폭력적인 거래로서 그 원인을 설명하고 있습니다. 다시말해, 폭력은 인간과 신 사이의 거래방식면서, 인간들이 상상한 신들 자체도 매우 폭력적이었다. 호머의 ‘일리야드’나 고대 북유럽의 오딘 신화 등을 보면 알 수 있습니다.
3. 기축시대와 중세의 종교들
인간의 생산능력 향상되고, 자연에 대한 공포가 점차 줄어들면서 종교에서는 착한 폭력(정당한 폭력)과 나쁜 폭력을 나누기 시작했습니다. 좋은 폭력은 찬양하고, 나쁜 폭력은 금지하는 것입니다. 종교의 가르침은 여전히 평화와는 거리가 멀었습니다. 기축시기에 체계화된 종교 중 대표적으로 유대교를 살펴보겠습니다. 유대교의 십계명에서 ‘살인하지말라’고 번역된 원어 ‘레차흐’는 본래 ‘암살하지 말라, 사사로이 사살하지 말라’는 뜻이라고 합니다. 모세가 이집트인을 살해했던 것과 같은 의로운 살인, 신이 허락한 폭력, 하나님이 지시한 폭력은 전혀 문제될 것이 없었지요. 신명기에서는 야훼신이 유대민족에게 제노사이드를 구체적으로 지시하기까지 합니다. 당시 힌두교, 티벳불교도 마찬가지 또 예수나 붓다의 행적에서도 여전히 근대적 의미의 평화주의, 평화운동과는 큰 차이가 있다고 합니다.
중세에 들어서 폭력에 대한 종교의 태도는 기독교, 불교가 매우 유사하게 발전하였다. 이름하여 ‘의전론’입니다. 특별히 토마스 아퀴나스의 ‘신학대전’에서는 정당한 전쟁의 요건으로 정당한 이유, 정당한 주체, 정당한 의사를 강조하면서, 국가 차원에서의 이교도와의 전쟁을 합리화하는데 큰 역할을 하였다고 합니다.
4. 근대 기독교의 평화주의와 군목제도
15세기 이후, 평민(소상업자) 위주의 교회는 귀족의 폭력에 대한 저항으로서 평화주의를 띠게 됩니다. 재세례파, 모라비안, 퀘이커 등과 같은 민중교파들이 등장하면서 전쟁의 합당성에 의문을 던지기 시작한 것이지요. 박노자 교수님은 평화(주의)는 ‘근대’가 만들어지는 과정에서 발생한 일이라고 재차 강조하였습니다. 특별히 밑으로부터, 민중으로부터의 종교가 그나마 폭력성을 덜어내는데 도움이 되었다는 것이지요. 1796년 군목제가 시작되면서 살인하게 되는 군인들의 양심을 달래주는 종교인들이 등장합니다. 죄의식을 덜어주고, 내세의 축복을 보장하면서 일종의 정신무장을 시켜주는 것입니다. 미국 남북전쟁 때는 심지어 같은 교파 신부가 상대진영에서 활동하면서 군인들을 위로해주었다니 군목제도라는 것이 모순덩어리인 것 같습니다.
이와 동시에 제도종교의 바깥에서 계몽주의 사상가들이 평화개념을 만들어냅니다. 센피아르 신부, 루소, 칸트로 이어지는 ‘평화’의 계보는 근대에 확실히 뿌리내리게 됩니다. 박노자 교수님은 칸트의 영구평화론은 ‘혁명적 민주주의’였다고 전해주었습니다. ‘모든 나라들이 진정한 민주공화국이 될 때, 다수는 전쟁을 반대할 것이다. 그러면 평화로운 세상이 올 것이다’라는 발상입니다. 칸트 이후로, ‘가능성으로서의 평화’에 대한 이야기가 꽃피우고, 각 지역에서 평화협회가 발족되는 등등 평화운동이 시작되는 것입니다. 즉, 평화운동은 제도교회와 별도로 시작되었으며, 평화운동이 제도교회에 미미한 영향을 끼쳤다고 할 수 있습니다. 결코 종교 스스로 평화주의를 시작하교 발전시킨 것이 아니었습니다.
△ 질의응답시간의 참여자들 (사진=아카데미느티나무)
5. 베트남 전쟁 이전까지
짧은 휴식시간을 보내고, 박노자 교수님은 다시 목소리를 높여 강의를 이어갔습니다. 그리고 앞으로 이야기를 나누어 볼 20세기는 아주 끔찍한 시기였다고 강조하였습니다. 예를 들어, 유럽과 미국의 주류 교회들은 세계대전과 한국전쟁 참전을 적극 지지하며 군목과 군신부들은 파견했는데, 이는 대다수의 종교인들이 전쟁 반대에 대한 감수성을 거의 가지고 있지 못했다는 것이지요. 물론 2차 세계대전 당시, 독일 안에서는 파시스트 군대에 군목을 파견하는 ‘협력하는 교회’, 이와 다른 길을 가는 본 회퍼 목사의 ‘고백하는 교회’의 저항운동도 있었으나 이마저도 근대적 의미의 평화주의와 다소 차이가 있었다고 합니다.
주류 종교계의 이런 행보와는 달리, 이 시기에 극소수의 주류종교인과 몇몇 종파에서 병역거부가 있었습니다. 퀘이커, 멘노나이트와 같은 평화교회는 병역거부를 신청하고 대체복무제를 얻어냈습니다. 벤 살몬이라는 천주교 병역거부자도 있었습니다만, 고된 옥살이로 폐렴에 걸려 요절했습니다. 대체로 이런 소수 종교인들은 전쟁불참에는 적극적이었으나 전쟁과의 투쟁에는 소극적이었다고 볼 수 있습니다. 오히려 미국 사회당 당수였던 유진 댑스는 전쟁에 반대한다는 이유로 10년형을 선고받았으며, 인간 이성에 대한 존중의 의미로서 전쟁을 반대했던 영국의 버트란트 러셀도 여러 고초를 겪는 등 비종교인들의 인도주의가 빛을 발했던 것 같습니다.
6. 종교 평화주의 발전이 가능한가?
본격적으로 전쟁반대론이 등장한 것은 베트남전쟁 시기였습니다. 전쟁반대를 외치는 급진주의자들의 사상과 운동에 종교인들이 편승하면서 주류 종교계에서도 전쟁반대의 목소리가 나오기 시작한 것이지요. 박노자 교수님은 교회 스스로 변화한 것이 아님을 재차 강조하였습니다. 먼저 세속적인 급진주의 세력이 평화운동을 시작했고, 이러한 밑으로부터의 압력이 있었기 때문에 70년대 이후로 주류 종교계가 평화를 외치게 된 것입니다. 불교로 개종하는 대부분의 서방 평신자들은 평화주의자였으며, 이들의 평화의식이 승려들에게 영향을 끼쳐 이제는 불교가 ‘평화종교’로 알려지게 되는 것이 비슷한 사례라고 할 수 있습니다.
교수님에 따르면, 종교 평화주의 전통을 이어가기 위해서는 종교와 국가가 대립각을 세워야 하는데, 주류 종교계에게는 매우 부담스러운 요구조건이라고 합니다. 남미, 아프리카 신자들의 의향을 반영하면서 서방국가의 이라크 전쟁에 반대의견을 표했던 요한바오로2세 교황의 경우를 살펴보겠습니다. 그는 이라크전쟁은 정당한 전쟁이 아니라고 규정하였으나, 교황청은 서방국가와의 갈등을 원치 않기 때문에 천주교 신도들에게 전쟁불참을 호소하지는 않았습니다. 기득권세력과 다수의 신자들의 눈치를 보는 이런 모순적-중간적인 입장은 종교 평화주의가 국가와의 갈등을 넘어서지 못하는 예가 되겠습니다.
결론은 종교를 믿는 신자들이 평화를 지향하는 것이 중요하다는 점입니다. 평신도들이 그들의 종교와, 나아가 세계를 바꾼다는 의미입니다. 박노자 교수님은 종교가 비제도종교적인 원인으로 평화지향적으로 바뀐 것, 즉 대중들의 힘을 강조하면서 오늘의 강의를 마쳤습니다. ‘한국 종교와 군사주의 유착의 역사와 현실’에 대해 공부하는 2강이 기다려집니다.
* 글: 자원활동가 이나단 / 편집 : 천웅소 간사
[한겨레] 환상을 먹고 자란 세계 평화의 우상 > http://bit.ly/18df4kN
지난 6일 78번째 생일 맞은14대 달라이 라마 텐진 갸초성인 반열에 올라 신성 얻고 노벨평화상까지 받았지만 그 바탕엔 미국의 중국 봉쇄와 지난한 ‘티베트 공작’이 숨어 있다 2001년 미국의 아프간 침공 뒤 “사상자 최소로 줄였다”고 감탄조의 코멘트를 날리더니 1998년 인도의 핵실험 때는 인도 정부를 오히려 옹호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