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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인물과사건으로보는한국근현대사] 3강(4.18) 절친에서 제거대상 1호로 : 김옥균과 민영익
김옥균과 민영익 - 절친에서 제거대상 1호로
저는 학교에서는 휴강이 되면 마냥 좋아하던 학생이었는데요, 4월 2째주 수업이 휴강되었다는 말은 참으로 섭섭하였습니다. 그런데 다행히도 교수님이 쾌차하고 계셔서 지난주에는 유익하고 재미있는 수업을 이어나갈 수 있었네요. 공부도 중요하지만 우리 모두 건강하게 꽃피는 봄을 환영할 수 있었으면 좋겠습니다. *^^*
그럼 지난 수업을 한 번 정리해 볼까요?
민영익은 민승호의 양자로 들어가면서 명성왕후의 총애를 받았고, 18세에 과거에 급제하여 요직을 맡는 등 민씨 척족의 새로운 간판으로 등장하였습니다. 또한 민영익은 고종이 진행하고 있었던 친정체제의 핵심인물로써 동도서기론을 기반으로 한 다양한 활동들을 하게 됩니다. 김옥균도 21살에 장원에 급제하며 안동 김씨의 청년스타로써 민영익의 집에는 자주 드나드는 8명의 학사들 중 한명이기도 하였습니다.
민영익은 주요 외교업무의 책임을 지고 있었는데요, 가장 대표적인 일은 보빙사를 꾸려 미국을 방문한 것이었습니다. 이것은 김옥균의 추천으로 이루어진 일이라고 합니다. 이때까지만 해도 둘은 절친한 동지였습니다. 인식과 정책이 수구, 친청사대적이지 않았음에도 불구하고 이 둘은 왜 갈라서게 되었을까요?
청에 대한 생각과 입장의 차이가 둘을 갈라놓는 가장 큰 계기가 되었습니다.
민영익은 미국에 대해 굉장히 호의적이었고, 러시아를 이용하여 청을 견제할 수 있을 것 이라고 생각하며 점진적인 방향으로 개화를 추진하였습니다. 일본은 믿을 만하지 못하다고 생각하였습니다. 반면 김옥균은 청의 개입에 대해 일본이 많은 도움을 줄 것으로 생각하였고, 청으로부터의 독립을 하는데 민영익이 도움이 되지 못하다고 생각하게 된 것입니다.
이러한 상황 속에서 갑오개혁이 발생했고, 민영익의 척족들은 급진개화파에 의해 살해당하고, 급진개화파는 일본으로 망명하게 됩니다. 결국 둘 다 근대화 역사에 중요한 역할을 하지 못하게 된 것입니다.
만약 둘이 힘을 합쳐 개화를 이끌었다면 조선말기의 모습이 달라지지 않았을까? 라는 생각을 해봅니다.
특히 지난 주 수업에서는 학교에서 빡빡하게 공부를 할 때에는 듣지 못했던 뒷이야기(?)들을 듣는 것 같아재미있었는데요, 명왕성을 발견한 퍼시벌로웰이라는 사람이 보빙사의 일행이었고 고종의 사진을 최초로 찍어주었다는 말은 ☆까지 치며 들었답니다.
아래에는 교수님께서 말씀하신 참고자료들을 링크하였습니다.
- 문화콘텐츠닷컴 : http://www.culturecontent.com/main.do
- 선택!역사를갈랐다(서울신문연재) : http://www.seoul.co.kr/news/newsView.php?id=20120910021001
이번 주에는 수업내용과 관련하여 느낀 점이나 배운 점들을 함께 나누는 시간을 많이 가졌으면 좋겠습니다.
그럼 수업시간에 뵐께요. :-)
지난 주 1박2일 출장이 있어서 ㅠ 못 들은 게 너무나 아쉬워요.
이렇게 정리해 주셔서 정말 감사합니다아~~~~~*^____^*