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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후기] 대체불가능한 시간 - 미술학교 인체드로잉 /황호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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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만의 선을 찾아가는 시간 ⓒ참여연대>
그러니까 이 수업, “인체드로잉”에 참여하고자 작정했던 이유가 있었을 터인데, 그것부터 시작 하려고 했는데, 나의 기억력은 간장 종지에 똑 떨어진 간장 한 방울과 같음에 틀림없다. 그 이유라는 것은 오간 데 없다. 봄이 왔다고 하기엔 아직 추울 때 시작했던 것 같다. 그리고 조금 덜 더운 여름이 왔을 때 수업이 끝났다. 그래, 오랜 시간이 지났으니 당연히 기억에 없지, 라고 둘러대고 나면 위로가 될는지. 늘 빠른 세월이 서러웠는데 이리 고마운 날이 올 줄 이전에 미처 몰랐다.
그래도 거슬러 올라가보자. 분명 기억하는 것이 있을 게다. 일단, 첫 수업은 빠졌었다. 한달 전에 잡아 놓은 선약이 첫 수업과 겹쳤기 때문이다. 두 번째 수업에서 무엇을 배우고 나는 무엇을 했는지 그 또한 잊었다. 아마 인체를 그렸을 것이다. 그러나 교실에 들어가자마자 누군가 차려 놓은 간식에 허기졌던 뱃속이 안심했던 것은 단단히 기억하고 있다. 세 번째 수업도 갔었다. 여전히 다양한 간식과 나의 포식은 빠지지 않았었다. 그리고 인체를 그렸을 것이다. 꾸역꾸역 빠지지 않고 출석했다. 간혹 내가 먹으러 가는 것인가 라는 생각에 매우 행복했던, 순간이라 하기엔 매번 그랬다. 그러나 어김없이 인체도 그렸다.
<그림그리기전 다함께 당 충전 ⓒ참여연대>
서로의 그림을 보며 동기들과 조금씩 익숙해져 갔다. 그러나 남의 그림을 보고 어떻게 말해야 할지 몰랐다. 선이 어떻다 하는데 무슨 소린지 알아 들을 수 없었다. 다른 사람의 그림에서 내 것 과 다른 점을 찾아내었다. 그리고 그것에 대해 말하면 그것이 칭찬이었고 나는 그것이 진심으로 부러웠다. 선생님께서는 한 명 한 명에게 이런저런 말씀을 해주셨다. 때론 또박또박 어쩔 땐 역시 어리둥절스런 말씀을 해주셨다. 마음속 느낌과 손맛은 멀고 멀었다. 앗! 그리고 우리 모두의 생애에 첫 누드 크로키. 벗은 누군가를 본다는 것은 둘째고 유난히 짧은 5분과 7분에 놀라지 않을 수 없었다. 모델이 맞춰 둔 알람 소리에 여기 저기 아스라히 퍼지는 한숨과 서둘러 종이를 넘기는 바스락거리는 소리들이 문득 그립다. 그리고 서로 모델을 서 줬었다. 다른 사람을 뚫어져라 보고 또 보았던 수많은 10분들. 가슴이 미어지게 짧은 시간들이고 내 맘과 머리엔 앞에 선 사람만 오롯이 있었던 시간들이었다.
개인적으로 가장 큰 재미는 전시의 준비였다. 뭐 대단하다고 벽에 걸어두고 보고 보여주는가 싶지만 나의 무엇이 벽에 걸린다는 것 자체로 뿌듯했다. 먼저 간단한 회의 자리에서 각자 일을 맡았다. 누구는 포스터를 그리고, 누구는 라벨을 만들고 누구는 액자를 사고 또 누구는 시장을 봤다. 벽에 우리가 그린 그림을 걸고 각자의 그림에 솔솔 묻어 나는 동료들의 색깔과 선을 칭찬했다. 그리고 마지막 간식을 진실로 배가 터지도록 무지막지하게 먹었다.
우리 그림은 1주일 동안 오가는 사람들 앞에 나름 자랑스럽게 걸려 있었다. 전시 마지막 날 우리는 같이 모여 우리 작품을 거두었다. 이번엔 몇몇이 모여 간식이 아닌 저녁을 먹었다.
괴상한 자리였다. 이런 저런 얘기를 하다 뜬금없이 사랑이란 말이 오갔다. 남에게 지지 않을 만큼 삶에 볶이고 치이면서 사랑 따위 감상이야 이젠 먼 단어가 될 법한 나이들이었다. 대한민국 아줌마들의 명예를 걸고 사랑 말고 우다다 쏟아 놓을 소제는 무궁무진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어쩌다 이런 유치찬란한 단어가 튀어져 나왔는지 역시 기억에 없다. 그리고 우리의 낯선 사랑 타령의 마지막은 한 분이 지금 읽고 있는 책에서 보셨다는 문구로 마무리 되었다. "그 또는 그녀를 사랑하는 것은 그 또는 그녀가 대체 불가능하기 때문"이란다. 대체 불가능한 사람이라니. 어머나 설레어라. 참으로 오랜만에 내 심장이 두근거렸다.
<액자설치, 조명 조정, 음식 준비 등 전시의 시작부터 끝까지 모두가 함께했다 ⓒ참여연대>
취미를 한 답시고 약 1년 반 동안 토요일을 화실에서 보냈다. 개인적으로 사람을 그리기가 제일 어려웠다. 눈, 코, 입, 팔, 다리만 그리면 됐다 싶지만 그 사이사이 뭐가 많아서 골치가 아팠다. 끌어 모을 수 있는 모든 집중력을 쏟아 부어도 보는 것과 그린 것은 하늘과 땅의 차이보다 깊고 넓었다. 나아가 똑같은 사람은 세상에 없다. 한 명 잘 그려냈다고 하늘을 펄펄 날았던 내 자신감은 다른 사람을 그리다가 땅속으로 여러 번이나 곤두박질 치곤 했다.
그렇게 다르다. 얼굴이, 몸이, 사람이 다르다. 똑 같은 대상을 그려도 첫번째 그림과 두번째 그림이 다르다. 나에게 그린다는 것은 무엇인지 몰랐고 알고 싶었었다. 나와, 다른 사람과, 그 시간과, 그림이 세상에 하나 뿐인 귀하고 소중하여 대체 불가능하다는 것을 나도 모르게 알아가기 때문에 그리고 있지 않았어나 싶다. 금요일 저녁마다 모여 앉은 우리가 생각난다. 간장 한 방울 같은 기억력 때문에 아직도 얼굴과 이름의 짝이 희미 하다. 그럼에도 다른 목소리와 손으로 오로지 "내"가 되었던 거기 그 수업에서 우리는 엄마도, 선생님도, 딸도 아닌 대체 불가능한 스스로였다. 아름다웠다. “인체드로잉”이 그랬다.
<대체 불가능한 세상에 하나뿐인 작품들 ⓒ참여연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