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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카자와 신이치, 세미나 후기
<나카자와 신이치, 세미나 후기>
느티나무와의 인연은 김융희 선생님의 ‘신화로 만나는 삶의 이야기’에서 시작되었다. 이것저것 찾아 듣기 좋아하는 친구 덕분에 강의를 듣기 시작했지만, 정작 친구는 일이 바빠져 혼자서 열중하게 되었다. 단 여섯 번의 강의였지만, 듣는 내내 때론 소박하고 아기자기한 숲속을 걷는 것 같기도 했고, 때론 심해의 파도 속에서 실컷 헤엄치다 불현 듯 솟구쳐 우주의 흩뿌려진 별 속으로 퐁당 빠진 것도 같았다. 이승과 저승을 마음대로 오가는 신묘한 무당 같은 선생님의 홀림에 강의 내용은 머리가 아닌 오히려 가슴 속에 남아 알 수 없게 꿈틀거렸다. 어쩌면 영화라는 한 분야의 일에 지나치게 매몰되어 있어서, 밖을 볼 여유가 없었던 내 상태 때문에 더 즐겁고 신났는지도 모르겠다. 하지만 그 강의는 내게 앞으로 어떻게 삶을 살아야 하는지, 그동안 해왔던 수많은 질문들에 색다른 해답을 제시해줄 단초가 될 것 같았다. 이런 나이고 보니, 선생님께 많은 자극을 준 학자가 쓴, 게다가 한 권을 읽으면 자연히 다음 권을 읽게 될 거라 예언한, 나카자와 신이치의 카이에 소바주 시리즈에 자연스레 호기심이 생겼다. 대학 때 이후에는 해 보지 않았던 세미나에 어느 정도 적응할 수 있을까, 주저도 되었지만 세미나 속으로, 그리고 같이 공부할 사람들 속으로 조심스럽게 발을 들여 놓아 보았다. 하긴, 그 시리즈가 자그마치 다섯 권이나 되니 홀로 하는 것보다는 같이 하는데서 오는 강제성을 은근히 원했던 것도 있다.
난 항상 이런 질문을 하곤 했었다. 내가 쏟아 부은 사랑은 어디서 꽃을 피울까? 여기서 사랑은 이성간일 수도 있고, 일을 할 때 대가를 바라지 않고 순전하게 쏟아 부은 열정일 수도 있고, 낯선 타인의 불쌍한 처지에 측은지심을 느껴 조건 없이 베푼 온정일 수도 있다. 그렇지만 그렇게 한 없이 쏟아 붓고 나면 어느 순간 칭찬이나 대가를 원하기 마련이다. 그것이 물질적이든 정신적이든 말이다. 인간은 신이 아니기에 열정을 한 없이 쏟아 붓다 보면, 지치고 억울하고 서러워지고 외로워지곤 한다. 이러한 대답 없는 무정한 세상이 지속 되었을 때, 어떠한 응답을 들을 수 없을 때, 자연스러운 반응은 퉤, 침을 뱉으면서 이기적인 인간으로의 복수하듯 돌변하는 것일 듯하다. 하지만 그 내면은 그 황량함 때문에 불행해진다. 그리고 이것은 그 사람이 속한 한 사회의 공기가 탁해지는 순간이기도 하다. 게다가 요즘 사회는 대가 없는 열정을 발휘하고 싶어 하는 마음 자체도 비웃음의 대상이 되는 곳이기도 하고, 열정을 쏟는 일을 할 수 있기는커녕 일한 만큼의 대가도 못 받는 곳이기도 하다. 그냥 채우지 못 한 헛헛한 마음 한편을 부여잡고, 노동에서 소외된 채, 돈을 버는 데에만 생명을 소비한다. 그러니까 단순하게, 행복한 인간들이 너무 적다. 섣부른 일반화였으면 좋겠지만, 자꾸 그런 공기가 느껴진다. 편안히 안온하게 숨 쉴 수 있는 공간이 없다. 그것은 사회 속에서 규칙적으로 출퇴근 하는 직장인이든, 집에서 삶을 꾸려가는 주부이든, 일거리가 없어 헤매는 백수이든 그리고 나처럼 꿈을 한 번 이뤄보겠다고 노력하는 영화인에게도 마찬가지인 듯하다.
그런데 나카자와 신이치 세미나를 하면서 나 자신, 그리고 나와 연결된 사회, 그리고 피폐해지는 지구를 함께 고민하는 사람들을 만날 수 있어서 기뻤다. 혼자서 책을 읽고 이런저런 고민하기도 좋아하고, 마음 맞는 친구들과 삶의 다양한 문제에 진지하게 이야기를 하곤 했지만, 한 발자국 떨어진 조금은 낯선 사람들과 삶의 문제에 대해 터놓고 얘기하는 경험은 묘한 희열을 주었다. 그러니까 음, 덜 외로웠다. 그냥 나뿐만 아니라 그 밖의 참으로 많은 사람들이 같은 문제로 고민하고 있다는 위안을 주었다. 그래서 사실 세미나를 하는 매 순간이 즐거웠다. 나카자와 신이치는 할 말이 너무 많은 우리에게 말을 터트리게 해주는 좋은 촉매가 되었고, 그도 우리와 같은 고민을 하고 있었다. 게다가 그는 기존에 볼 수 없었던 전혀 색다른 각도로 현대 사회의 문제점을 짚어내고 있었는데 그것이 굉장히 흥미진진했다.
세미나는 나카자와 신이치의 다섯 권으로 구성된 카이에 소바주 시리즈 중, 세 권을 읽는 것으로 기획되었다. 2권 <곰에서 왕으로>, 3권 <사랑과 경제의 로고스>, 5권 <대칭성 인류학>이 그것이다. 1권인 <신화 인류 최고의 철학>은 ‘신화로 만나는 삶의 이야기’ 강의에서 다뤄졌던 내용이었고, 4권인 <신의 발명>은 세미나 일정상 제외 되었다. 하지만 나는 이번 기회에 다섯 권을 다 읽어보자는 기특한 결심 하에 미리 1권부터 읽기 시작하는 성실함을 발휘했다. 하하. 여기서 카이에 소바주의 뜻은 야생적 사고의 산책이라는 뜻이다. 지금은 합리적인 사고의 지나친 강조로 오염되어 거의 드러나지 않지만, 현생 인류인 호모 사피엔스가 나타났을 당시, 우리 인류에게 기본적으로 장착된 대칭성을 중시하는 야생적 사고를 살펴보자는 뜻이다. 여기서 ‘대칭성’은 나카자와 신이치의 책에서 핵심 중의 핵심 단어다.
우선 1권 <신화, 인류 최고의 철학>에서는, 신화는 인류에게 가장 오래된 철학임을 강조한다. 신화는 동물과 인간이 결혼한다는 둥, 인간과 동물이 친구처럼 이야기를 한다는 둥 언뜻 비합리적인 인상을 주지만, 그 내면에 담긴 뜻을 파헤쳐 보면 인간사의 부조리를 해결하기 위해 이성을 가동한 철저한 사고의 힘에 의해 탄생된 이야기라고 말한다. 태초에 인간과 동물이 친구였으며, 마음만 먹으면 서로를 넘나들었던 시대에 대한 이야기를 들려주면서, 이 지구상에서 인간은 특권을 가진 생물이 아님을 은근히 알려준다든지, 그저 한 여자의 신분상승이 내용의 모두인 줄 알았던 신데렐라 이야기의 근원을 따져가면서, 거기서 함의하고 있는 것은 천시되고 있는 자연과 동물 그리고 사회에 열등하다고 치부되고 있는 사람들을 중개자로 삼아 우리가 잊고 있었던 것을 회복하고 삶의 균형을 이루고자 하는 내용이 담겨 있음을 알려준다. 그리고 이 삶의 균형 회복이란 화두는 대칭성이라는 단어로 그 다음 권들에 연달아 다뤄진다.
2권 <곰에서 왕으로>은 911 테러로 시작한다. 911 테러의 근본 원인은 현대문명의 비대칭성에서 비롯된다고 단언한다. 즉, 이슬람 문명을 야만적이라 천시했던 미국, 극심한 빈부를 유발하는 자본주의, 첨예한 종교 대립, 그리고 광우병이나 구제역으로 인한 동물의 무차별 살처분 등, 이 모든 것이 바로 야만의 징표이며, 현대문명 자체가 ‘야만적이다’라고 선언한다. 그렇다면 이 ‘야만’은 어떻게 우리 세계 내부에 고정되었는가를 고찰해 보겠다는 매우 흥미 있는 문제제기로 이 책은 시작된다. 그리고 나카자와 신이치는 그 이유는 바로 대칭성의 상실에 있다고 본다. 그런데 내가 대칭성에 관해서 2권에서 가장 흥미롭게 읽었던 신화는 다음이다. 한 남자가 염소 사냥을 떠났다 캠프로 돌아오는 길에 한 아름다운 여자를 만난다. 그 여자는 자신을 따라오면 훌륭한 사냥꾼이 되게 해 주겠다고 유혹한다. 남자는 여자에 홀려 어느 커다란 동굴에 들어가게 되고, 그곳에는 많은 남녀 야생 염소가 있다. 하지만 그들은 사람과 다름없는 생김새였다. 즉, 야생 염소는 우리와 다를 것이 없고, 단지 염소 털가죽을 걸치면 염소가 될 뿐이라는 뜻이다. 때마침 염소들은 발정기였다. 그래서 우리들의 남자주인공은 여자의 권유로 염소 가죽을 뒤집어쓰고 발정기의 축제에 합류해 많은 여자들과 관계를 갖는다. 그 여자들은 그의 자식을 낳게 된다. 어느 날, 때가 되었고, 남자는 아내가 된 여자의 안내로 다시 인간 세상으로 돌아가게 된다. 그녀는 남자의 사냥 무기를 내어주면서, 이제 모든 암염소들과 새끼 염소들은 당신의 가족이니 죽여서는 안 된다고 당부한다. 하지만 처남에 해당하는 숫염소는 쏴도 된다고 말한다. 그들은 정말로 죽은 것이 아니라 단지 집으로 되돌아가는 것이기 때문이라고 설명해 준다. 이후에 남자는 많은 사냥을 했지만 숫염소만 죽였다고 한다. 그는 아마도 숫염소의 시신에서 고기를 떼어낸 후 곱게 묻어줬을 것이다. 죽은 염소는 바로 그의 처남이니까. 난, 이 이야기를 읽으면서 지난 몇 년 동안 무수히 일어났던 동물들의 살처분이 생각났고 그것이 나에게는 일종의 트라우마처럼 작용했다는 것, 그리고 그 트라우마는 동물인 나에겐 가족의 죽음과 맞먹기 때문이라는 것을 알게 되었다. 그리고 살처분을 자행해야 하는 현대 문명의 야만성에 대한 슬픔 때문이었다는 것을 알게 되었다. 여기, 2권에서 이야기 하고 있는 것은, 옛날 우리 조상들은 곰과 인간을 위와 같이 동등하게 보았다는 것, 그래서 여름에는 곰을 실컷 사냥하며 자신의 삶을 연명했지만, 겨울에는 인간이 오히려 곰에게 먹히는 식인의 제의를 치름으로써 자신이 자행한 살생에 대한 대가를 치러 대칭성을 회복했다는 내용이다. 하지만 어느 순간, 겨울 제의에 내재된 식인의 힘을 인간에게 부여하는 사건이 일어나고, 그 과정에서 무소불위의 왕이 탄생되었다고 한다. 이제 식인 행위는 제의 현장에서가 아닌 일상공간에서, 살아있는 권력인 왕이 살아있는 사람에게 휘두르는 차가운 검이 되었다. 그럼으로써 인간에게 대칭성에 대해 각인시켰던 겨울 제의는 사라지고, 동물이나 인간도 자신의 필요에 의해 이용할 수 있는 대상으로 보는 ‘야만’ 즉 국가가 탄생했다고 나카자와 신이치는 말한다.
3권 <사랑과 경제의 로고스>는 2권이 왕의 탄생 과정을 다룬 것과 같은 시선으로 경제를 다룬다. 이 책은 사랑과 경제라는 이질적인 개념이 함께 있어야, 경제 현상의 본질을 말할 수 있다고 설명한다. 즉, 경제는 사랑의 표면을 덧씌우고 있을 뿐이며, 경제 현상을 움직이는 본질은 바로 인간의 욕망이기 때문에, 경제를 차가운 합리의 영역에만 둘 수 없다고 말한다. 즉, 이른바 비합리적인 영역인 인간의 욕망과 함께 다뤄야 한다는 것이다. 여기서도 재미있는 이야기가 나온다. 시가 나오야의 ‘어린 사환의 신’이란 단편 소설이다. 저울가게 점원인 가난한 센키치는 벼르던 초밥집에 가지만 갖고 있는 돈이 모자라 결국 초밥을 먹을 수 없게 된다. 그것을 안타깝게 지켜보던 국회의원 A는 사환이 일하는 저울가게에 들려 저울을 배달해 달라고 부탁하고 나서, 센키치를 데리고 나와 마음껏 초밥을 먹게 한 후, 돈을 지불하고 몰래 도망치듯 빠져나온다. 헌데, 그 후 국회의원 A는 오히려 묘한 기분에 휩싸이게 된다. 어떤 대가를 바라지 않고 순수하게 한 일이라 애써 치부하며 마음을 달랬지만, 뭔가 자신의 깜냥에 맞지 않는 일을 한 것이 아닌가 하는 알 수 없는 불편함을 느끼게 된 것이다. 게다가 센키치는 자신에게 초밥을 사주고 갑자기 사라진 손님을 신이라고 여기고, 자신에게 신이 다녀갔다고 생각하기에 이른다. 나카자와 신이치는 초밥을 사는 경제 행위에서 파생된 여러 가지 양상을 짚어준다. 초밥을 산 것은 ‘교환’에 불과하지만, 그 내밀한 면모를 좀 더 살펴보면, 국회의원 A는 센키치에게 ‘증여’를 한 것이고, 센키치는 국회의원 A의 행위를 마치 신이 다년간 ‘순수증여’로 해석하기에 이른다. 우리가 경제 행위를 등가를 원칙으로 한 ‘교환’으로 한정시키기 쉽지만, 사실 최초의 경제행위는 물건에 ‘마음’을 담아 선물하는 ‘증여’에서 시작된 것이며, ‘교환’이 그 후에 파생된 것이라고 설명한다. 그리고 ‘순수증여’는 물건의 가치가 증폭되는 좀 더 심도 있는 경제 현상이라고 덧붙인다. 이 논의를 바탕으로 어떻게 자본주의를 발전되었는지, 그리고 기독교는 자본주의를 어떻게 촉매 했는지에 대한 설명으로 이어진다. 라캉이나 삼위일체설 등을 가져와 자본주의의 탄생, 그리고 기독교와의 관계를 설명하는 등, 쉽지 않은 내용에 모두들 고전을 했지만, 하나씩 각자가 알고 있는 부분을 나눠가며 이야기를 한 끝에 어느 정도는 이해 할 수 있었다. 그리고 우리 각자의 경제 행위에 대해, 그리고 삶에서 일어난 증여와 교환에 대한 고민거리를 나누면서 또 다른 질문을 하곤 했다. 나 또한 점점 나이를 먹으면서, 교환의 고리에 쉽게 편입되었고, 마음을 나누는 증여에 대해서는 무감했다는 것을 새삼 깨닫곤 했다. 교환의 논리에만 매몰되지 않고, 좀 더 풍부하게 경제행위를 하려면 어떻게 할 것인지에 대한 질문을 하게 되었으며, 또한 일단 증여를 하기로 마음먹었으면, 내가 하는 행위가 증여임을 인지하고, 그 기쁨을 당당하게 느끼자는 생각도 하게 되었다.
4권 <신의 발명>은 세미나를 통해 이야기를 하지 못 해서 아쉬웠다. 홀로 4권을 읽으면서, 이해할 수 없는 부분이 생길 때마다, 새삼 같이 책을 읽고 이야기를 나눈 기쁨이 컸다는 것을 알게 되었다. 하지만 내용은 무척 흥미진진했다. 나카자와 신이치는 이 책에서 호모 사피엔스는 본래 초월성을 인지할 수밖에 없는 마음을 가지고 태어났다고 말한다. 즉, 신의 존재 여부 자체가 질문의 대상이 아니며, 인간은 이미 신을 탄생시킬 수 있는 마음의 인자를 가지고 있다는 말이다. 그래서 제목도 신의 발명이다. 그리고 인간에게 어떻게 유일신이 탄생했는지 그 행로를 더듬는다. 인간의 초월성에 대한 직관은 주로 스피리트라는 영적 존재의 활동으로 표현되곤 한다. 그런데 어느 날, 특별히 분화되지 않았던 스피리트에 어떠한 압력이 가해져 대칭성이 깨지면서, ‘내방신’과 ‘지고신’ 그리고 요괴나 도깨비 등의 ‘정체불명의 스피리트’로 분화 되었다고 했다. 여기서 ‘내방신’은 이승과 저승을 연결하며 우리가 상실한 대칭성을 찾는 역할을 하는 기괴한 이미지의 신이다. 하지만 ‘지고신’은 세상을 구분 짓는 언어를 관장함으로써 인간에게 규칙이나 법칙을 따르게 하는 신이다. 원래 공존했던 이 두 신 중, ‘지고신’이 다른 신의 존재를 거부하는 ‘유일신’으로 변모하면서, 인간에게 처음으로 절대적인 비대칭적 신이 출현하게 된다. 하지만 언어가 모든 것을 설명할 수 없음을 그 존재 자체로 상징하는 ‘내방신’과는 달리 ‘유일신’은 자신이 상징하는 초월성이 세상의 모든 것을 언어화할 수 있다는 자만심으로 세상을 재단하기 시작한다. 그리고 이러한 유일신의 영향이 현대 서구문명과 자본주의를 이룩하는데 지대한 영향을 끼쳤다는 것이다.
5권 <대칭성 인류학>은 우선 인간의 마음은 ‘대칭성’과 ‘비대칭성’의 두 존재 양식이 동시에 작용하는 복논리로 이루어져 있다고 본다. 즉, 수렵을 위해 야생 염소를 죽이는 ‘비대칭성’을 어느 정도 유지하면서도, 인간과 야생 염소간의 동질성을 회복하려는 ‘대칭성의 원리’를 지향한다는 것이다. 하지만 시간이 흐르면서 비대칭적인 ‘교환’의 원리가 강조되면서 이러한 복논리가 제대로 작동되지 않아, 심각한 불행과 위기를 초래했다는 것이다. 즉, 사랑, 기쁨, 우정 등과 같은 가치를 물건과 함께 주고받는 증여의 경제활동에 숫자라는 단일한 가치척도를 가진 화폐가 출현하고 잠식하면서, 교환의 논리가 패권을 장악하게 됐다는 것이다. 그래서 사회의 물질적인 부분이든 정신적인 부분이든 모두 교환의 원리로 움직이는 자본주의라는 ‘일(一)의 원리’가 출현하게 됐다. 이것은 신의 영역에서 일신교의 출현에서도 마찬가지다. 하지만 이러한 ‘일(一)의 원리’는 대칭성과 비대칭성의 복논리를 이루려는 인간의 마음을 억압했다. 즉 비대칭성만을 강조하게 된 것이다. 그래서 인간은 대칭성, 고차원성, 일체감 등 증여와 관련 있는 원리가 결여되는 현대 사회에 살아가게 되었고, 불행한 존재가 되었다는 것이다. 나카자와 신이치는 ‘비대칭성’이라는 ‘일(一)의 원리’에 질식되고 있는 현대인들에게 필요한 것은 원래 마음의 한 쌍이었던 ‘대칭성’을 회복하는 일이라고 한다. 그래서 그는 우리에게 ‘대칭성 인류학’을 제시하고 있다. 신화적 사고에 있는 대칭적 사고를 현대에 맞게 다듬어 새로운 사고 형태를 만들어야 한다는 것이다. 그래야만 우리는 다시 행복해질 수 있다고 말한다.
다섯 권의 책이 모두 내게 고스란히 기억되지는 못 할 것이다. 나카자와 신이치가 워낙 다양한 분야를 거침없이 다루기도 했고, 내가 가진 지식의 한계 때문이기도 하다. 하지만 나는 내내 살아가면서 불편했던 마음 한 자락의 정체를 알게 되었다. 그것은 이 글의 앞부분에서 했던 질문, ‘내가 쏟아 부은 사랑은 어디서 꽃을 피울까?’다. 어쩌면 예전에는 다소 처량한 어조로 이 질문을 했었을 지도 모르겠다. 하지만 그것은 대칭성, 고차원적 기쁨, 일체감을 느끼고자 하는 내 마음의 외침이었다는 것을 알았다. 그러니까 행복해지기 위한 일종의 마음 속 경보 같은 것이었다. 그 경보 덕분에 난 강의를 듣고, 책을 읽기 시작했다. 그리고 세미나를 하면서 그러한 경보는 나의 마음속뿐만 아니라 다른 사람들의 마음속에서도 울리고 있음을 알게 되었다. 우리는 세미나 하면서, 늘 이런 이야기를 했다. 이렇게 좋은 이야기를 많은 사람과 나누고 싶다. 정치인들이 이런 책을 읽어야 하는데... 그리고 늘 한숨 쉬면서 하는 질문, 어떻게 하면 우리를 둘러싼 만만치 않은 현실을 이 책에서 이야기하는 대칭성 회복된 세상으로 바꿀 수 있을까? 그리고 어떻게 내가 세상을 바꾸도록 실천할 수 있을까? 우리가 가진 손은 너무 작고, 하릴없이 마음만 아파온다. 특히, 같은 반 친구를 자살에서 구하지 못 해서 따라 자살했다는 중학생의 얘기를 나누며, 요즘 우리 사회는 타인을 위하는 대칭적 감수성이 발달한 사람마저 죽음으로 모는 잔혹한 곳이 아닌가, 괴로워하곤 했었다. 하지만 한 개인이 사회를 일시에 바꿀 수도 없는 것이고, 그것은 또 다른 파시즘을 불러올 위험이 있는 것이다. 늘 돌아오는 답은 지금 이 자리에서, 같은 고민을 나누면서 우선 내 삶과 내 주위를 위해 노력하는 것, 그리고 계속 공부하는 것, 그리고 타인의 아픔에 공감하는 감수성을 잃지 않는 것, 어찌 보면 너무 약하고, 어찌보면 너무 행하기 어려운 것이지만, 해답은 그곳에 있는 것 같다.
세미나를 함께한 모든 분에게 감사합니다. ^_^
‘내가 쏟아 부은 사랑은 어디서 꽃을 피울까?’
세미나를 할 때 제기하셨던 이 질문에 대해, 깊이 공감합니다.
"공부하면서, 이 질문을 통해 "대칭성, 고차원적 기쁨, 일체감을 느끼고자 하는 내 마음의 외침이었다는 것...
행복해지기 위한 일종의 마음 속 경보 같은 것...
훌륭한 후기 올려주셔서, 다시 한번 복습했네요. 고마워요.
네^_^ 감사합니다!
다음 세미나가 정말 기대됩니다!
'세미나를 하는 매 순간이 즐거웠다' 는 님의 글을 보며
논어에 나오는 '學而時習之不亦說乎'가 생각납니다.
두번의 결석에 대한 반성이 저절로 됩니다. 이렇게도 깨우치게 되는 군요 .
톡톡튀는 소리님, 올려주신 후기 감사해요!
네. 정말 그런 시간이었어요!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