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두번째┃엔지오도 한심하더라
느지막이 배달되어 온 이번 주치 시사IN을 뒤척이다 건진 말, 사르트르가 그랬단다 ‘타인은 지옥이다’라고... 맞아 맞아 고개까지 주억거리며 심하게 긍정하다가도 금세 생각은 뒤집힌다. 나도 누군가에겐 타인이다. 아니 이 세상에 나를 빼고 남는 68억의 인구 전체에게... 난 지옥이다.
오래 다닐 생각은 없었다
배헌엽씨도 그래서였을까? 누군가의 지옥으로 더는 남기 싫었던 것일까? 인터뷰 중 그에게서 삼성전자라는 이름마저 뻑적지근한 회사를 그만두었다는 말을 들었을 때, 나 같이 무한 평범함을 최고의 덕목으로 여기고 사는 사람에겐 그것은 하나의 ‘사고’였다. 아니 그 좋은 델 왜...
- 처음부터 오래 다닐 생각은 없었다. 유학에 필요한 돈만 모이면 그만 둘 생각이었는데... 알다시피 삼성에서 일하는 건 힘들다. 개인 시간 갖는 것도 무척 어렵다. 나도 내 책상 옆에 항상 침낭을 두고 살았다. 같은 개발실에 근무하는 사람들 중 서울대 나오고 카이스트 나온 사람들, 유학 다녀와 박사까지 단 사람들까지도 그런 좋은 데 왜 나왔나 할 정도의 삶을 살아가고 있었다. 유학 갈 생각이 점점 사라졌다. 물론 회사를 그만 둔 건 복합적인 이유 때문이지만... 어쨌든 ‘착하게’ 살고 싶었다.
불신이면 지옥이다. 삼성이라는 천국을 믿지 못하는 그 자신의 불신이 만들어낸 지옥. 그 속에서 애초 계획했던 유학이라는 목표도 잃고 그렇게 별 생각이 없이 살았다고 했다. 일단 자신이 딛고 서 있는 그 바닥이 더럽고 추하다는 생각이 들자 점점 지옥의 뜨거움이 숨구멍을 죄었으리라... 근데 삼성이 지옥이긴 한가보다. 착하게 살고 싶어 나왔다니 말이다.
그러나 그도 한때 그 지옥을 지탱했던 일원이었음을... 그래서 그는 더욱 부끄럽다.
- 사실, 입사하기 전부터 삼성이 못된 짓을 많이 한다는 걸 몰랐던 건 아니다. 알고도 내 자신을 위해서, 돈을 위해서 들어간 거다. 한참 퇴사를 고민할 때 쯤, 김용철 변호사 사건이 터졌다. 삼성에다 돈을 벌어다 주는 것이 한없이 부끄러웠다. 그들과 손발 맞춰가며 공범 노릇하는 것을 더 이상은 감당할 수 없었다.
길담서원에서 배헌엽님
부끄러움 말고도 그에게 삼성은 분노가 되어 남아있는 듯하다. 인터뷰를 위해 찻집으로 옮기던 중 우리는 한 시각장애 여성과 마주쳤다. 난 그 옆을 지키는 시각장애인 안내견의 순한 눈매에 시선을 뺏겼었는데 그는 그 안내견의 등을 감싸고 있던, 안내견임을 알리는 작은 천조각 위에 새겨진 삼성이라는 로고를 기어이 발견해내고는 분노했다.
그런 그의 분노를 이해 못하는 건 아니지만, 앞으로 그가 살아가야 하는 길이 녹록치 않겠다는 걱정이 앞선다. 대한민국에서 삼성과 마주치지 않고 살아간다는 건 중국산 물건 없이 살아가는 것처럼이나 불가능한 일일 것이므로... 지금도 그는 삼성에게서 피해 입은 사람들의 기사들을 아무렇지 않게 볼 수 없다고 했다. 기사를 보다 보면 눈물이 난다고도 했다. 생각보다 그의 상처가 깊다.
어찌됐든 그 후 1-2년 정도 하고 싶은 거 하며 놀았다니, 그에게 이런 어지러운 감정들을 정리할 시간이 있어서 그나마 다행이다.
- 전라도 쪽 배낭여행도 다니고(경북 김천이 고향인지라), 백두대간 종주도 혼자 했다. 내 손으로 조립한 자전거 타고 80일 동안 일본여행도 다녀왔다.
NGO도 한심하더라
이렇게 노는 것 또한 범인들의 수준을 단박에 뛰어넘는 이 분의 다음 목표는 무엇일까 아니 궁금할 수 없다.
- 삼성에 있을 때부터 NGO에 관심이 많았다. 아름다운 재단에서 일하고 싶었다. 그래서 희망제작소에서 하는 ‘모금전문가 학교’도 다녔다.
왜 꼭 집어 아름다운 재단일까?
- 가장 믿을 수 있는 곳 중 하나다. 회계와 관련된 것들을 모두 공개하지 않나. 사실 우리나라 많은 NGO들이 그런 면에서 투명하지 않다고 본다. 하는 일 없이 수천만원 씩 돈만 벌어가는 단체들도 많다. 모금전문가 학교에서 같이 공부하던 사람들 중에 NGO에서 일하는 분들도 많았는데, 솔직히 그분들 모두에게 실망했다. 그분들은 회원들이 낸 회비로 백 만원 가까이 하는 수강비를 내고 온 사람들이다. 그런데 열심히 하지 않았다.
NGO도 한심하더라.... 참으로 지옥을 다녀오신 분다운 발언이다. 이제 세상을 바라보는 날카로운 그의 눈에 지옥은 도처에 있다. 비슷한 경험이 있는 난 얼른 공감하며 맞장구쳤다. NGO라고 무턱대고 믿을 수는 없지요....
- 모금전문가 학교에 강사로 왔던 분에게서 같이 일을 해 보자는 제의를 받았다. 그래서 지금은 그분과 같이 단체 혹은 사회적 기업을 만들려 하고 있다. 아직 정해진 것은 없지만 내가 하고 싶은 일을 하고 있다는 것, 그것 하나만은 확실하다.
관심의 확장. 사회, 세상, 환경
이쯤에서 착하게 사는 게 꼭 NGO일 필요는 없지 않나하는 의문이 든다. 지옥 문을 나오는 것으로 부족하여 곧장 천국으로 직행하려는 성급한 욕심은 아닌가하는 못된 의심이 든다. 그만큼 삼성과 NGO 사이의 갭은 크니까...
- 어렸을 때부터 집 짓는데 관심이 많았다. 근데 내가 사는 집을 지으려면 당연히 친환경적인 집을 생각하게 된다. 친환경적인 집에 대한 생각은 자연스럽게 친환경인 삶으로 연결이 된다. 삼성 다니면서 건강을 해친 것도 있고 해서 여러모로 친환경적인 삶에 관심이 많았다. 그리고 나의 유일한 취미가 자전거인데 이게 결국 또 환경문제와 만난다. 그렇게 세상에, 이 사회에 관심을 가지게 된 거다....
결국 사람이 사는 ‘집’에 관심을 두었다가 그 안에 들어가 살 ‘사람’으로 관심이 옮아간 형국이다. 그렇게 사람에게 관심을 두다보면 시선은 세상으로까지 자연스럽게 넓어지는 게 살아가는 이치인가보다. 나도 아이를 낳고 이 세상 모든 근심을 모조리 내 것으로 만들었으니까 말이다.
근데 NGO을 꿈꾸는 분이 안 그래도 바쁘실 텐데 무슨 강의는 그렇게 고시 준비하듯 듣는 건지...(배헌엽씨는 이번 가을 참여연대 아카데미 강좌만도 무려 7개를 신청하셨다)
- 사실, 퇴사 전에 아름다운 재단에 지원했다가 떨어진 적이 있다. 그때부터 스스로 인문학적 기반이 부실한 것 아닌가 하는 회의가 들었다. 그동안 해왔던 일을 버리고 새롭게 살아보려 하니까 이런 방면으로 너무 부족하다는 느낌... 공부를 해야겠다는 생각이 들었다.
공과대 출신임에 묘한 콤플렉스를 가지고 있는 듯한 그와 인문학적 기반에 대해 한참 수다를 떨었다. 그가 읽고 있는 책도 궁금했다. 그의 배낭에서 나온 것은 요즘 대세인 ‘정의란 무엇인가’와 <느티나무 백인보> 제1편의 주인공이었던 안동권씨가 경영하는 출판사에서 나온 ‘팔레스타인에 물들다’였다.
근데.. 엉? 책들을 들추다보니 책갈피처럼 보이는 녀석이 어째 좀 묘하다. 팔보채? 잡채밥?
- 늘 냉장고에 붙여만 두고... 어차피 쓰지도 않을 건데.. 책갈피로 만들었다.
중국집 홍보용 메뉴판이다. 그걸 책갈피로 만들었다. 환경을 생각한다는 그의 말이 빈말이 아니었음을... 일회용품 사용량을 줄이기 위해 늘 자신의 컵과 수저를 들고 다니는 그다. 그렇게 그의 마음 씀씀이는 그가 즐겨 입는 한복을 닮아 마냥 곱다.
‘팔레스타인에 물들다’를 읽으며 팔레스타인의 현실에 무척 분개했다는 그의 말에 중국집 특제 책갈피를 손에 든 나도 함께 흥분한다. 열기 속에서 얘기는 끝을 모르고 흘러가고... 팔보채와 잡채밥을 다시 정의와 팔레스타인의 품으로 돌려놓으면서 마무리하는 자리.
나지막한 목소리로 자신의 이야기들을 들려주었던 그의 진지한 모습이 오래도록 잔상으로 남는다. 그리고 집으로 돌아가는 그의 뒷모습에서 난...
어쩔 · 수 · 없이 · 다시 ‘사람만이 희망이다’라는 글귀를 발견한다.
┃Epilogue
세상에 대해 알아간다는 건 점점 더 분개할 일이 많아진다는 것과 같다. 가슴 아픈 사연이 나오는 TV채널을 두 눈 질끈 감고 일부러 돌려버린 경험 한두 번 없는 사람이 어디 있을까... 나 스스로 그런 피눈물 나는 현실에 냉담해 질 수 있는 거리를 확보하기 위하여, 나 스스로 그런 사람들에게서 철저한 타인이 되기 위해 말이다. 사람에게서 관심을 거두는 그 순간 난 타인이 되고 그렇게 지옥이 된다.
그는 이 사실을 온몸으로 깨치고 있는 중이다. 자신이 이 세상의 만인에게 타인으로 남는 한 그는 다시 지옥의 일부분으로 되돌아 갈 수밖에 없다는 사실을... 그와 얘기한 한 시간 남짓의 기억은 내게 ‘우리가 서로 철저하게 타인일 수는 없다’라는 깨달음으로 남았다. 그의 많은 얘기들을 들었고 그의 많은 감정들에 공감했으며...
"회사에 있을 때는 아무 희망도 없었다.... 인간답게 살고 싶었다."라고 말 할 때 그 목소리에 담긴 진정성을 기억하는 한 그는 나에게 완전무결한 타인으로 남지 않을 것이다. 부디 그도 나의 많은 것들을 기억하여 나를 그의 타인으로 만들지 않기를 ... 내가 그의 또 다른 지옥이 되지 않기를 바란다.
헌엽님 오랜만에 뵈니 반갑네요.. 요샌 트윗도 뜸하시고..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