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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동아시아근현대사 Ⅱ – 과거 속의 냉전, 그러나 오지 않는 미래, 탈냉전] 1강
[동아시아 근현대사 II -과거속의 냉전, 그러나 오지 않는 미래, 탈냉전] 1강(9/2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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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연합국의
전후처리구상
전쟁초기에는 영, 미를 주축으로 하는 연합국이 독, 이, 일에 고전하였다.
1942년부터
전쟁 주도권이 연합국으로 넘어가고 몇 차례 국제 회담을 통해 전후 처리를 논의했다.
- 카이로
회담(1943)은 전후 구상을 시작하였다.
- 얄타
회담(1945)은 전후 처리를 구상하여 논의하였다. 카이로
회담이 있고 나서 2년 뒤이다.
- 포츠담
(1945)도 전후 처리를 구상하여 논의하였다.
2. 카이로
회담 (1943.11.12)
시기는 1943년 9월 이탈리아가
항복을 하고 난 직후이다.
참가를 한 나라는 미국, 영국, 중국이다.
- 미국이
중국을 끌어드리기 위해 중국을 데리고 다녔다.
●논의내용
- 일본의
무조건 항복 요구
- 일본의
식민지(한국)를 독립시키거나 반환하기로 결정
- 한국을
적절한 시기에 독립시킬 것 (한반도에 관한 전후 처리의 기본 방향이 ‘독립’으로 가닥을 잡았음을 밝힌 첫 문건)
논의 내용은 징체스가 루즈벨트에게 얘기를 하다가 루즈벨트 비서가 그 내용을 논의 내용으로 올렸다.
3. 얄타회담 (1945.02.11)
시기는 연합국의 승리가 확실시 됐을 때이다.
참가국은 미국, 영국, 소련이다.
미국과 소련은 유럽의 2차 대전 덕에 같은 배를 타게 되었다.
●논의
내용
- 독일을
미, 소, 프, 영의 4국이 분할 해 점령하기로 결정하였다.
- 소련의
대일 참전에 대한 비밀 협정 체결하였다.
비밀협정은 아무도 모른다고 한다.
4. 포츠담
회담 (1945.07.26)
독일 항복 후 회담이 진행됐다.
●논의
내용
- 독일에
대한 처리 문제, 일본에 대한 전쟁 수행 방침에 대해 얘기했다.
- 일본에
관한 연합국의 결정은 포츠담 선언으로 발표했다.
- 일본의
무조건 항복을 권고하였다.
Plus. 포츠담선언
1. 3대
연합국 (미국, 중국, 영국)은 수억 국민을 대표하여 협의한 결과, 일본에 대하여 지금의 전쟁을
종결할 기회를 줄 것에 의견이 일치하였다.
2. 미, 중, 격의 거대한 육, 해, 공군은 서방의 지원을 받아 전력을 크게 증강하여 일본에 대하여 최종적 타격을 가할 태세를 정비하였다.
5. 일본의
패전
- 연합국의
공습 강화와 본토에 상륙을 준비하였다.
- 일본의
저항이 지속되었다.
- 원자폭탄을
투하하고 소련의 참전을 결정하였다. (7월에 만들어서 8월에
원자폭탄을 투하하였다. 소련이 미국보다 더 우월하다는 것을 알리기 위해.)
- 일본이
무조건 항복을 하였다. (포츠담 선언 수용)
6. 전후
평화체제의 수립
정치: 국제연합(UN)을 창설하였다.
- 대서양
헌장(1941.08)
전후 국제연합 창설의 이념적 지표였다. (미, 영)
- 국제
평화와 안전 유지, 군비축소, 국제 교류와 협력 증진을 담당할
수 있는 평화기구가 국제연합이다.
경제: 국가 간 교류 확대
- 브레든
우즈 협정이 있었다.
- 국제
부흥 개발 은행(IBRD)과 국제통화기금(IMF)를 창설(1945)하였다.
- 관세
및 무역에 관한 일반 협정(GATT)을 만들었다. (1947)
- 미국 중심의 국제 경제 질서 확립하였다.
7. 국제
연합의 목적과 평화 유지
●국제연합(UN)
제1조(목적) 국제 평화와 안전을 유지한다. … 효과적인 집단 조치를 취하며 …
제42조(평화 유지) … 국제 평화와 안전을 유지하고 회복하는데 필요한 육, 해, 공군의 행동을 취할 수 있다.
- 첫
유엔군은 한국전쟁에 보내졌는데, 피해가 너무 많아 다음엔 보내지 않았다고 한다.
8. 미, 소의 동아시아 정책
- 미국의
동아시아 구상
- 전후 국제 질서는 영, 프의
영향력 쇠퇴로 미, 소 중심으로 재편되었다.
- 중국은 중국 국민당 중심으로 체제를 정비하였다.
1500명이 일본으로 전쟁하기로 하였지만 장제스가 공산당과 싸우기만 했다.
- 일본은 철저한 민주화와 비무장 조치를 하였지만 국공내전으로 망했다. (독일은 끝까지 했다.)
- 한국은 연합국이 공동으로 신탁통치를 실시하려고 하였다.
- 45년 12부터 46년 봄까지 신탁통치
반대운동을 하였다. 스탈린이 신탁통치 반대운동을 듣고 대화록을 공개해보니, 미국이 먼저 신탁통치를 주장했었다고 한다.
- 소련의
동아시아 구상
- 소련에 대해 우호적인 정권을 수립하는데 중점을 두었다.
- 한반도의 북위38도선 이북과 만주 지역
외에는 뚜렷한 거점 확보를 실패했다.
- 동아시아 질서를 주도적으로 이끌지 못했다.
- 미국의 권유로 중국 국민 정부와 중, 소 우호동맹 조약을 체결하였다.
9. 냉전과
동아시아
- 냉전체제의
형성
- 제2차 세계 대정
후 체제와 이념을 달리하는 미국과 소련을 중심으로 냉전체제가 형성되었다.
- 냉전과
동아시아
- 중국, 한반도, 베트남과 같이 분단국가가 출연하였다. 일본은 미국이 돌보아 주었다.
- 이념 갈등으로 인한 냉전과 과거사 문제의 중첩으로 동아시아 지역의 국제 질서는 긴장감이
고조 되었다. (유럽에서는 이념 갈등만 있었다.)
10. 냉전 (Cold War)
- 직접적인
무력을 사용하지 않고, 경제, 외교, 정보 등을 수단으로 전개된 국제적 대립이다. 직접적인 싸움을 의미하는
열전(Hot War)과 대립적으로 사용된다.
11. 분단
국가들의 출현
- 중국은
국, 공 내전이 발발했다.
- 주둔 일본군의 항복을 받기 위해 경쟁하였다.
- 공산당은 화북, 만주 일대에서 독자적으로
일본군 무장 해제를 하였다.
- 국민당은 미국의 지원으로 지배구역을 넓혀갔다. (장제스가
계속 평화협정을 깨서 전쟁이 일어남.)
- 독자적 군사력을 가지고 지배구역을 관할하는 두 당의 통합이 불가능 해서, 국, 공 내전이 발발해, 중화인민공화국과 중화민국으로 분단되었다.
- 한반도는
두 개의 정부가 탄생하였다.
- 북위 38도선을 경계로 남쪽은 미군이, 북쪽은 소련군이 진주하였다.
- 남한은 미 군정을 실시하였다.
- 군정청을 설치하고, 미군이 각 지역에 파견되었고, 각 도에 도지가사 2명이고, 서울시장도 2명이었다.
- 북한은 김일성을 수상으로 하는 조선 민주주의 인민 공화국을 선포(1948.09)하였다.
12. 한반도의
분단
● 한반도의
분단과정
- 해방 후 남과 북은 각각 미, 소에 의해 군정을 실시하고, 모스크바 3국 외무장관 회의에서 한국 독립을 위한 방안을 논의하고,
미, 소 공동위원회가 결렬되며 남과 북은 분단이 되었다. 한반도 문제를 유엔에 이관해 남북한 총선거를 경정하였지만 북의 거부
즉, 소련의 거부로 유엔 소총회의 결정에 따라
남한에서만 선거를 실시하게 되었다.
13. 분단
국가들의 출현
● 베트남
– 분단의 씨앗이 뿌려지다.
- 베트남
독립 동맹을 중심으로 하노이에서 호치민을 주 축으로 베트남 민주 공화국(1945.09)이 수립되었다.
- 중국 국민당과 영국군이 일본군의 무장 해제를 위해 북부와 남부에 진주하였고, 영국군이 통치권을 프랑스에 넘겨주고 철수하였다.
중국도 내전에 대비해 철수 하고 프랑스와 베트남 민주 공화국 사이에서 전쟁이 발발하였고
프랑스는 사이공에서 베트남국을 수립(1949.03)하였고, 북베트남에
대항하였다.
- 영국군이 프랑스 군에 통치권을 넘겨준 것은 이상하다.
- 원래 프랑스의 식민지였던 베트남을 일본이 쫓아내고,
영국이 들어오고 통치권을 프랑스에게 넘겼다.
14. 일본의
전후 처리
● 일본
– 평화 체제가 구축되다.
- 미국의
의도에 따라 전후 처리(미 군정 실시): 연합국군 총사령관
총사령부를 설치하였다.
- 신헌법을 제정하였다. 청황을
상징적 존재로 규정하고, 주권재민과 인권보호조항을 강화아혔다. 군사력
보유 금지도 제정하였다.
- 교육 기본법으로 민주시민을 육성하자고 주장하였다.
- 재벌 해체와 농지 개혁을 주장하였다.
- 공직에서 군국주의자를 추방하고 극동 국제 군사 재판으로 전범자를
처벌하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