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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국경을 넘어 혁명의 불을 지펴라 - 국내외 ‘세계혁명’의 전사들] 2강
박노자 교수의 [국경을 넘어 혁명의 불을 지펴라 - 국내외 ‘세계혁명’의 전사들] 2강 (7/22)
2강 - 국제적 혁명연대에 생명을 바친 조선인들 이야기
-2강에서는 1910년 이후 해외에서 국제 연대에 힘쓴 조선의 혁명가들에 대해 강연.
[강의내용정리]
1910년 한일합병 이후 민족 운동가들의 해외 망명 가속화. 1920년대 이미 엄청난 디아스포라. 당시 민족주의자들은 중국현지인들과 협력, 혁명을 세계적, 민족적 문제로 본 사회주의, 아나키스트들은 원칙상 중국혁명과 조선혁명 분리하지 않았음.
-신규식(1880-1922)
공화주의 혁명가. 신채호 선생의 친척. 구한말 육사학교, 한성한어학교에서 교육받음. 중국통으로 연변에선 잘 알려진 인물이지만 한국에선 거의 알려지지 않은 인물.
신해혁명 직전 중국 망명. 손문 등 중국 공화주의자들과 친분. 1912년 상해에서 신아동제사(新亞同濟社) 조직, 중국 국민당으로부터 한국 독립운동 지지 획득하는데 큰 역할. 망명객 중국사회 편입도 도와줌.
1911년 일본에선 초기 사회주의 거의 사라진 시기. 중국 신해혁명은 아시아 최초 공화주의 혁명. 신규식은 아시아주의 입장에서 신해혁명 바라봄.
구한말 민족 운동가들(김규흥, 김진용 등) 신해혁명의 영향으로 공화주의에 열광.
-박은식(1859-1925)
폭력주의, 사회주의 지향. 중국 망명 이후 합작 잡지 <香江> 주간 맡아 원세개 독재 비판하다 정간 당하기도. 사민보(四民報)에 적극적 기고. 당시 중국 최고 지식인 康有爲와 교류.
1910년대 망명자 그룹은 대개 ‘복벽’ 즉 조선왕실의 부흥을 꾀했지만 신해혁명 후 대한광복회는 공화정 지향. 신해혁명의 영향으로 한국독립운동가 사이에 ‘만국’ 이상이 보편화.
복벽주의 극복, 국정 이상으로 공화주의 당연시. 1919년 3.1운동과 1917년 러시아 혁명, 그리고 중국, 일본의 공산당 창당(1921-1922)과 아나키즘 운동의 급속한 성장 등으로 한국 민족운동 급진화. 제1인터내셔널 코민테른 원칙 1국 1당. 러시아의 경우 아나키스트와 공산주의 1921년 결별.
-유자명
193,40년대 초반 대만 농림성에서 활동. 1950년대 중국인 호남농대 교수직. 중국 측 국제우호 인사, 조선민족, 중화민족 연대의 상징으로 생각. 소설가 巴金과 친교.
재중 한인 아나키스트들. - 유자명, 이을규, 이정규 등등
한국 아나키스트들 대부분은 반공주의자들.
공산주의 원칙상 一國一黨. 식민화 이전 국가 보유 식민지를 ‘국가’로 취급.(대만, 티베트 등은 제외) 1926년 조선공산당 코민테른 승인. 일국일당 원칙은 다민족 공산당을 의미, 당시 김일성이 활동한 항일연합군에는 중국인도 참여했음. 하지만 만주공산당 중국인 지주와 조선인 소작농으로 구성돼 민족 갈등 심해 계급투쟁이 자칫 민족투쟁으로 변모할 위험 있었음. 이런 분위기 속 조선공산주의자들이 중국 지주와 투쟁을 벌인 조선인 소비에트 결성으로 중국인 당 지도부 1932-35년 간 ‘민생단(친일조직) 스파이 색출’이란 명목으로 431명의 조선인 공산주의자들 숙청. 이 사건으로 김일성 공산주의 안에서의 ‘민족’ 고민, 후에 주체사상으로 발전되었을 것으로 봄.
-정율성(1914-1976, 부인 丁雪松 駐덴마크 대사 등 역임)
1933년 중국 망명. 1936년 한중 연합 전선을 통한 일제 타도를 목적으로 한 중국 공산당 계열 ‘조선민족해방동맹’ 가입. 상해음악원에서 러시아 망명자 그를로바 교수 지도 받음. 파리국립음악원 졸업한 선성해에게 영감 받음. 좌파 시인 공목의 협력(가사를 붙여줌)으로 중국 인민 작곡가. 중국 공산당이 가장 좋아한 작곡가 등극.1945-50년 북한에서 활동했지만 중국인과의 결혼 등이 문제되어 중국으로 돌아감.
정율성의 <중국인민해방군가> <연안송> 동영상으로 시청.
7시부터 8시 30분까지 강의.
이후 간략한 질의응답 후 다과회. 참가자 분들이 준비해 오신 샌드위치와 두유, 과일 맛있게 먹으며 자유롭게 담소.
[소소한 감상]
우리의 역사인데도 우리에게 알려지지 않은 우리 혁명가들이 존재한다는 사실이 조금은 슬펐음. 이념 논리에서 벗어난 온전한 우리 역사와 역사 속 인물들에 대한 객관적 수용의 날이 빨리 왔으면 싶었음.
한편으로는 우리 자신보다 더 우리 역사에 관심을 가지고 방치된 역사 속 인물들을 연구하는 박노자 교수의 모습이 고맙기도 하면서 씁쓸하기도한 야릇한 기분 들었음. 지나친 자국중심 역사관은 문제가 되겠지만 적어도 자기 역사를 제대로는 알아야 하지 않을까 싶었음.
1, 2강에서 생소한 인물들이 대거 등장해 개인적으로 강의가 편하지는 않았는데 사회과학 지식은 물론이고 역사 지식까지 얄팍한 데다 혁명이나 정치와 무관하게 살아와 더 그렇지 않았나 싶음.
반면 박노자 교수의 방대한 지식이나 열정은 놀라웠음.
다음 여름에도 강의가 있다니 기대하셔도 좋을 듯.