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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동아시아 근대사 : 전쟁의 기억, 평화의 약속] 7강, 제 1차 세계대전은 동아시아 각국의 운명에 어떤 영향을 미쳤을까
[동아시아 근현대사 : 전쟁의 기억, 평화의 약속] 7강 (5/15) 제 1차 세계대전은 동아시아 각국의 운명에 어떤 영향을 미쳤을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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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제1차 세계대전과 ‘21개조 요구’
1) 제1차 세계대전에 참전한 일본
*1차 세계대전에 참전한 일본
-3국협상(영국-프랑스-러시아) 대 3국동맹(독일-오스트리아-이탈리아)이었다고 한다.
-1914년 07월 28일 오스트리아가 세르비아에 선전포고를 했다. 1918년 11월 11일 독일이 항복했다고 한다.
*일본의 참전
-개전 3일 만에 영국의 참전을 요청했다.
- 일본이 영일동맹을 근거로 참전 의사를 밝혔다고 한다.
- 영국의 참전 요청을 철회하고(일본이 중국과 남양군도를 넘본다고 의심을 했다) 미국 등을 견제했다고 한다.
- 일본은 미국, 프랑스, 러시아, 네덜란드, 중국의 외교사절에게 영토를 확장할 야심이 없다며 양해를 구하고 중국 앞바다와 싱가포르 방면까지만 전투구역을 제한하자는 영국의 요구를 수용했다고 한다.
- 일본의 독일에 대한 최후통첩은 중국과 일본의 해역 함정을 즉각 철수하고 자오저우만 조차지 중국을 반환하되 우선 일본에 인도를 하기만 하기로 했다고 한다.
- 일본은 1914년 08월 23일에 독일에 선전포고를 했다고 한다.
*일본 국내 반응
- 참전 주도 세력은 입헌동지회를 여당으로 하는 제2차 오쿠마 시게노부내각
- 참전 비판 세력은 야당인 입헌정우회의의 하라 다카시 등, 여당의 오자키 유키오 등, <도요케자이신보>(동양경제신문)는 일본의 참전과 칭다오 영유에 대해 반대하고 사회주의자는 대역사건(1910년 일본 천왕을 암살하려고 했다는 죄목으로 고토쿠 슈스이 등 26명의 사회주의자들이 사형당하거나 감옥에 갇힌 사건)이후 침묵
- 일본 국민은 삼국의 간섭으로 독일에 반감이 있어 참전을 지지하고 군수 경기 활성화를 기대하였고 실제로 일본경기는 부흥했다고 한다. (1914년 11억 엔의 채무국이 1920년 27억 엔 이상의 채권국이 되었다고 한다)
*동아시아와 제 1차 세계대전
- 제 1차 세계대전 초기 위안스카이 정부(베이징 정부)는 중립을 선언했다고 한다.
- 일본이 1914년 09월 산둥성을 침략하고 칭다오를 점령하여 독일 이권을 접수하고 독일령인 적도 이북의 섬들을 점령했다.
- 미국은 필리핀 통치에 위협을 느끼고 경계하였으며 영국의 자치령인 호주와 뉴질랜드의 위기감을 느꼈다.
- 일본의 전쟁터는 동아시아였다고 한다. 3국협상 측의 유럽 병력 파견 요청을 거부했다고 한다.
일본의 참전 목적은 동아시아의 독일 이권을 차지하고 만주와 내몽골의 권익을 확대하고 제국주의 열강으로서의 위상을 강화하는 것이었다고 한다.
2) 중국 침략의 교두보, ‘21개조 요구’
- 일본은 1915년 01월 산둥에서 일본군을 철수시키라는 베이징 정부의 요구를 거부했다고 한다.
-중국 주재 일본 공사 히오쿄키는 베이징 정부에 21개조로 된 요구서를 내놓는다. 이는 독일의 조자치를 중국에 반환하기 위해 막대한 군사비를 투자하여 참전했으니, 대가를 지불하라는 것이다.
- 21개조 요구
(1) 제 1호 독일 조자치인 산둥 지역에서 일본의 권익 확보를 보장할 것 등 4개조
(2) 제 2호 남만주와 동부 내몽골에서 일본의 특수한 지위를 더욱 강화시킬 것 등 7개조
(3) 제 3호 중국 주요 기업에 대한 일본의 참여를 보장할 것 등 2개조
(4) 제 4호 중국 연안의 항만, 도서를 타국에 양도 대여하지 않을 것 1개조
(5) 제 5호 정치, 군사, 재정 부문에서 일본인 고문을 초빙하고 중국의 치안 우지에 일본이 참여할 수 있도록 하며, 일본이 무기를 공급하도록 하거나 혹은 중일 합작으로 무기공장을 건설할 것 등 7개조
이는 일본의 대한제국 침략과정과 흡사하며 중국의 주권을 심각하게 침해하는 내용이라고 한다.
*21개조 요구에 대한 반응
- 중국의 반일민족주의 운동이 일어났다. 일본상품 불매운동과 구국저축운동, 도쿄유학생 반대운동이 일어났다고 한다.
- 중국인의 조선인 공격이 있었다고 한다. 만주침략의 앞잡이라는 이유 때문이라고 한다. 1916년 만주이주 조선인이 감소 했다고 한다. 그리고 이는 21개조 요구가 한국에도 영향을 미쳤다는 것을 뜻한다고 한다.
- 서구열강에 대해서는 미국, 영국, 러시아 등의 거부 반응이 있었다고 하고 특히 5호에 강하게 반대했다고 한다.
*중국의 21개조 요구 수용
- 일본은 제1호를 뺀 채 최후통첩
- 1915년 05월 09일 베이징 정부는 굴복하고 이는 일본의 국치일이 되었다고 한다.
- 위안스카이는 1916년 01월에 군주제를 부활했지만 곧 포기하고 병사했다고 한다. 돤치루이가 베이징 정부 실권을 장악했다고 한다.
1916년의 중국 국어 교과서에 ‘국치’라는 말이 처음 등장하며, 이때부터 일본을 죽도록 미워하게 됐다고 한다.
3) 중국을 둘러 싼 열강의 각축
*중국을 둘러 싼 서구열강의 갈들 구도
- 영국은 일본이 적국인 독일, 오스트리아와 경제관계를 지속하자 일부 일본 상품에 대해 수입을 제한했다고 한다.
- 미국은 21개조 요구에 대해 러시아, 영국, 프랑스까지 끌어들여 반대하고 중국에서 열강 사이에 통상의 기회균등을 투구하면서 중국의 영토와 행정주권을 보장하도록 요구하고 조차지와 세력 범위를 중국에 요구하지 않는 대신 발 빠르게 중화민국을 승인하고 차관에 제공하였으며, 미국계 은행을 설립하였다. 이때부터 중국은 미국을 우호적으로 인식했다.
- 러시아는 21개조 요구에 불만이 있었지만 일본과의 관계를 고려해 표시하지 않았고, 일본으로부터 무기와 군수품을 수입하고 있었다. 일본이 만주에 있는 러시아의 권익을 위협할 가능성이 있기 때문이다. 중국에 대한 영국, 미국 독일의 세력 강화를 견제하기 위해서도 일본과의 관계 악화는 곤란하였고 일본도 중국시장에 진출한 미국을 견제하기 위해 러시아와의 협력이 필요해 1916년 제 4차 러일협약이 체결되었다고 한다.
*종전 직전의 합종연횡
- 일본은 영국에 자신이 점령한 옛 독일령 중 적도 이북은 일본이, 적도 이남은 영국이 위임통치 하자고 제안했다.
- 영국은 파리강화회의에서 일본을 지지하기로 약속한다.
- 프랑스와 러시아도 일본의 제안에 동의했으나 일본과의 외교단절을 요구하고 일본은 이를 받아들였다.
- 미국은 1917년 04월 참전을 하고 유럽전쟁몰두를 위해 일본과 타협하였고, 일본 역시 중국에서 특권을 유지하기 위해서는 미국과의 타협이 유리하다고 판단했다.
- 랜싱-이시이 협정에서 미국은 중국에서의 일본 특수권익을, 일본은 중국의 독립과 문호를 개방, 기회균등을 하겠다고 했다.
*중국의 참전과 베이징 정부의 친일화
- 중국의 참전을 돤치루이 정권이 1917년 08월 일본의 압력에 굴복하고 미국의 참전에 힘을 보태 협상국의 지지를 얻어내고자 독일과 오스트리아에 선전초고를 하면서 시작됐다고 한다.
- 니시하라 차관은 일본이 1억 4,500만엔의 차관을 제공하고 베이징 정부에 대한 미국의 영향력 확대를 저지하기 위한 조치라고 하며 사실상 정치자금을 주었다고 한다.
- 쑨원의 관둥정부는 중화민국(미군에 의해서 쓰였다고 한다) 임시 약법을 준수하는 호법운동을 전개하며 1917년 08월 수립되었다고 한다.
*일본 중심의 동아시아 질서 구축
- 일본은 열강과 권익을 교차 인정하는 방법으로 중국에서의 특수 권익을 인정 받는데 성공했다.
- 성공 비결은 일본이 동아시아 이외의 지역에서 지금의 제국주의 질서를 위협할 의사가 전혀 없음을 분명히 밝혔기 때문이라고 한다.
- 제1차 세계 대전을 거치면서 동아시아에서의 열강의 대립과 갈등은 일본을 주축으로 정정하고 모든 협상의 결과는 일본의 입지를 강화하는 방향으로 전개되었다고 한다.
- 제1차 세계대전의 양상은 유럽의 무력전과 동아시아의 미국, 중국, 일본, 영국, 러시아 간의 외교전이라 한다.
4)승전국의 이해관계를 조정한 파리강화회의
*파리강화회의(1919-1920)
- 제1차 세계 대전의 전후 처리 목적 때문에 시작되었다.
- 러시아를 배제한 채(러시아 혁명 때문) 독일 등 패전국에게 거대한 보상금을 부과하기로 하였다.
- 승전국의 패전국 식민지 분배로 독일 영토를 축소하고 동유럽에 8개 공화국을 수립했다고 한다.
- 국제 연맹 창설 합의를 봤다.
- 베르사유체제는 열상의 국제 협조주의의 산물이라고 한다.
Plus++
- 회의는 1919년 06월에 끝났다고 한다.
- 2.8독립선언, 3.1운동, 5.4운동과 관계가 있다.
*파리강화회의의 동아시아적 쟁점 : 산둥성문제
- 일본은 미국, 영국, 프랑스, 이탈리아와 함께 모든 회의에 참석하는 최고 이사회의 일원이었고 적도 이북의 옛 독일령에 대한 위임통치권과 돤치루이 정권과 체결한 산둥밀약 (일명 파일공동방적군사협정)을 근거로 독일이 산둥성에서 갖고 있던 권익 확보를 위한 외교전을 했다고 한다.
- 중국의 대표단은 21개조 요구를 강압해서 체결했으므로 일본의 요구는 무효이고, 산둥성에 대한 독일의 권익도 마땅히 중국이 회수해야 한다고 주장했다 한다.
- 일본은 비밀협약과 협정을 통해 서구열상 지지를 확보한 상태이고, 미국 역시 국제연맹의 성립에 일본의 찬성이 필요하며 일본 의견을 지지했으나 자국은 윌슨과 국외의 사이가 좋지 않아, 국제 연맹에 가입하지 못했다고 한다.
2. 제1차 세계대전 종결 후 동아시아 질서의 재편 : 워싱턴 체제
1) 1919, 동아시아를 휩쓴 반제국주의의 물결
*3.1운동
- 도쿄조선인 유학생이 2.8 독립선언을 했다.
- 1919년 03월 01일 천도교, 기독교, 불교계 등 종교계와 학생대표 독립선언을 발표했다.
- 시위가 도시에서 농촌으로 확산되어갔다. 북한지역의 80%가 3.1운동을 하며 시작되었고, 이남(남한)에서는 3월 망에서 4월초쯤 시작되었을 것이라고 한다. 3-5월 사이 1,500여 회의 시위에 200만 명 이상 참여를 했고, 해외 이주 조선인의 만세시위가 있었다. 대중적 자발성으로 전국화와 보상화가 되었다고 한다.
- 조선 총독부의 군대와 헌병경찰을 동원한 탄압이 있었다. (제암리 학살사건)
- 서구열강의 반응은 일본인의 잔인한 탄압을 보며 비판하였으나, 한국인이 열심히 싸운 것은 몰랐지만, 중국만 이를 보고 감동했다고 한다.
- 일본은 일부 종교인의 전동에 의한 ‘폭동’이고, 조선인을 ‘폭도’혹은 ‘범인’으로 매도했으며 일본인의 피해를 부풀려 보도했지만, 실제로 시위대에 의해 죽은 일본인 민간인이 없었다고 한다. 일본의 언론 중에서 한국의 진실을 알린 신문은 단 한 개도 없었다고 한다.
- 영향은 대한민국 임시정부 수립 등의 민족운동과 민중의 사회운동 활성화였다고 한다.
- 무단통치에서 문화통치로 바꾸어졌다고 한다. 군부 영향력 축소, 내각 책임강화, 헌병 경찰제도 에서 보통경찰제도로 개편, 한글신문 감행, 집회 결사의 자유부분인정, 내선 공학제를 실행했다고 한다.
*5.4운동
- 배경은 파리강화회의에서 산둥성의 일본 이권을 일본에 넘기도록 결정했다.
- 1919년 05월 04일 3,000여명의 학생들이 천안문 광장과 거리에서 시위를 하고 21개조 교섭 책임자 가운데 한 사람이자 산둥밀약의 책임자인 차오루린집에 불을 지르고 불 지른 23명의 학생들을 체포했다고 한다.
- ‘강화조약 조인을 거부하라.’, ‘밖으로 국권을 쟁취하고, 안으로 국적을 몰아내자.’, ‘반드시 산둥의 이권을 회수하자.’, ‘21개조 요구를 폐지하자.’, ‘일본상품을 배척하자.’
- 2개월에 걸쳐 22개 성과가 보이고 2,000여개의 도시로 파급되었다. 학생석방과 매국노 파면을 요구하는 시위가 확산되었고, 베이징정부는 검거와 탄압이 계속 되었다. 동맹휴학의 전국화가 되었고, 1,000여명의 학생을 체포했다. 상하이에선 (06.05) 6-7만명의 노동자와 상인이 파업과 철시를 하였다.
- 베이징 정부는 학생들을 석방시키고 06월 10일 차오루린등 친일파로 지목된 관료 세 명을 파면했다.
- 6월 16일 상하이에서 전국학생연합회가 결성되어 강화조약조인 거부운동이 일어났다고 한다.
- 06월 28일 파리강화회의 중국 대표단이 베르사유강화조약 조인을 거부했다.
- 5.4운동의 경험 속에 중국인은 중화민국의 국민으로서의 의식이 형성되었다고 한다.
*1919년 동아시아 민족운동의 의의
- 인도의 간디 불복종운동과 터키의 민족해방투쟁 등에 영향을 받았다.
- 3.1운동과 5.4운동의 공통점은 대중운동(민중, 대규모, 장기간)이었고, 민중의 부상과 민중운동의 활성화라고 한다.
- 3.1운동이 5.4 운동에 준 영향
- 중국인과 조선인의 연대는 3.1운동 당시 중국인 노동자가 만세시위에 동참했고, 만주 조선인 시위에 중국인이 지지해 줬으며 중국에 망명한 조선의 민족운동가와 유학생이 5.4운동에 참가했을 것이라고 한다.
- 자유주의자 요시노 사쿠조는 <조선 폭동 선후책>, <조선 언론의 자유>, <베이징 학생단의 행동을 매도하지 말라>등의 글을 통해 식민지 조선에서 무단통치 방식을 완화하고, 군벌정부의 지배에서 벗어난 중국국민과 연대할 것을 주장하며 합리적으로 통치하라고 했다.
- 3.1운동과 5.4운동으로 일본의 국제적 이미지를 실추하였고, 동아시아 질서 구상에 차질이 생겼다고 한다.
2) 새로운 동아시아 질서의 형성 : 워싱턴체제
*워싱턴 체제의 확립
- 첫 번째 개최이유는 파리강화회의의 동아시아 문제유보 때문이라 하는데 이는 중국의 비준거부, 미국 역시 조약안 비준 거부 때문이라고 한다.
- 두 번째 개최이유는 열강의 건함이 경쟁하기 때문이었다. 미국은 해군 주력을 태평양으로 집중시키기 위해 군함을 건조하고 일본은 미국 해군을 가상 적국으로 선정하고 ‘88함대’ 계획을 발표하였고, 영국은 미국 해군력을 따라잡기 위해 군함을 건조해 미국과 유럽에서 군비축소 여론이 등장했다고 한다.
- 워싱턴 회의가 1921년 11월부터 1922년 02월까지 진행되었다고 한다. 미국, 영국, 프랑스, 이탈리아, 중국, 벨기에, 네덜란드, 포르투갈, 일본 등이 참가했다고 한다.
- 4개국 조약은 미국, 영국 프랑스, 이탈리아 일본의 주력 함정의 보유 비율은 5(미국):5(영국):3(일본)으로 결정하였다고 한다.
- 9개국 조약은 중국의 주권과 독립을 존중하고 영토를 보전하며 중국에서 열강끼리 상업상의 우월권과 독점권을 부인하고 기회균등에 노력하도록 합의를 본 것이다. 하지만 베이징정부의 대표단이 요구하는 치외법권이 철폐되고, 관세 자주권을 회복하였고 조차지 반환 등의 수용을 거부하고 중국에 대한 열상의 제국주의적 이해를 근본적으로 부정하지도 않고 일본의 대륙 진출을 저지하기 위한 합의문이 있었지만 만주와 내몽골에서의 일본의 권익을 부인하지도 않았다고 한다.
- 첫 번째 결과는 워싱턴 체제 이후, 아시아, 태평양 지역에서의 열강 간 세력 다툼은 일시적으로 안정기를 찾았다고 한다.
- 두 번째 결과는 미국은 태평양에서의 현상을 유지하려고 하고, 베이징 정부의 주권을 존중했으며, 해군 군비 축소 등 애초 설정한 회의 목적을 달성 했다고 한다.
- 세 번째 결과는 열강은 직접적인 무력을 사용하지 않고도 공동으로 사이 좋게 중국을 지배했다고 한다. 중국은 열강 사이의 동아시아판 협조 외교체제 아래서 열강들의 하위에 놓인 종속적 존재였다고 한다.
*워싱턴 회의를 바라보는 3국인의 시선
-일본은 대미 협조 외교 노선이 부상하였고, 건함 경쟁으로 한 재정 부담으로 해군군축조약을 지지하였으며 다이쇼 데모크라시 분위기 속에서 협조 외교를 중시하는 정당의 힘이 군부보다 우위였다고 한다.
- 조선은 민족운동가 중 일보는 미국이 동아시아의 개조에 나섰으니, 일본이 이에 적극 호응하지 않으면 미일전쟁이 발생할 것이라 예측하며 한국의 독립을 청원하는 운동을 전개했으나 대부분은 파리 강화화의나 국제연맹에 대한 실망감으로 더 이상 기대하지 않았고, 실제 워싱턴 회의에서도 조선 문제는 거론조차 되지 않았다고 한다.
- 중국의 베이징 정보는 워싱턴회의에 참가하고 쑨원의 관둥정부는 배제했으며, 중국 공산당의 창당과 코민테른의 영향을 받아 제국주의 체제의 재편에 불과한 여론이 등장했다고 한다. 쑨원이 소련정부의 원조를 받아 제1차 국공 합작을 이루면서, ‘반 제국주의는 반 워싱턴 체제이다.’, ‘반 베이징 정부는 반군벌’이라는 구호를 내건 국민 혁명을 개시했다고 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