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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고전으로 이해하는 정치사상, 고대편] 5강, 칼리클레스-우월한 자가 권력을 차지하는 것이 정의롭다
[고전으로 이해하는 정치사상, 고대편] 5강(5/19), 칼리클레스 - 우월한 자가 권력을 차지하는 것이 정의롭다
강의 5주차 수업이 진행된 5월 19일 아침에는 대통령의 대국민 담화가 있었다. 김만권선생님은 오늘 담화에서 대통령이 세월호 선장의 사법처리에 관한 언급에 대해 삼권분립이 제대로 이루어지고 있는지 의심스럽다고 평하셨다. 미국의 경우, 뉴욕대 법학대 학장이 시민불복종 운동으로 체포된 사람들을 기소해서는 안 된다고 주장한 바 있는데, 행정부에 대한 권리 침해의 소지가 있기 때문이라고 한다. 또 루소와 솔론의 견해를 소개하며, 법을 만드는 사람이 운용까지 해서는 안 된다고도 말씀하셨다. '법의 정신'에서 입법, 운용, 판단의 사이클을 통해 서로를 견제하는 삼권분립의 기초를 제공한 몽테스키외가 당시 가장 두려워했던 것은 입법자들이었으나, 오늘날에는 행정부가 가장 두려운 대상이 되었다. 이어서 헌법재판소에 대한 이야기도 하셨는데, 독일의 경우 헌법재판소는 입법기구에 가까운 기능을 갖고 있으며, 한스 켈젠은 "본질적으로 이 기구는 입법 기구이다" 라고 규정한 바 있다. 헌법재판소는 이론적으로 공적 이성으로서 사법부보다 더 높은 지위를 갖는데, 우리나라의 경우 헌법재판소와 대법원이 비등한 위치를 갖고 있으며, '누가 헌법의 수호자인가'를 두고 서로 충돌하는 경향이 있었다. 과연 대통령이 헌법의 수호자로서 역할을 수행할 수 있을까? 미국의 경우 대법원장이 헌법의 수호자로서의 역할을 수행하는데, 기본적으로 미국 대법원장은 종신 임기를 갖는다. 그런 점에서 오늘 대통령의 발언은 공적 이성으로서의 위치를 두고 발생한 혼란의 답습이라고 할 수 있다고 선생님은 평했다. 담화에서 언급된 기구의 개편과정도 얼마나 의견을 잘 수렴하여 추진하느냐에 달려 있을 것이며, 권력을 쥐는 사람이 얼마나 공적 정신을 갖고 있느냐, 즉 정치엘리트들의 정신이 어떠느냐에 달려 있다. 정리하자면, 권력분립의 문제가 우리사회에 제대로 정착이 안 되었다고 할 수 있겠다. 특히 입법부가 제대로 운영이 안 되고 있을 뿐만 아니라 사법부 또한 행정부의 영향으로부터 자유롭지 못하며, 특히 각 부처 수장들이 행정부 요직에 진출하고자 하는 모습을 공공연하게 보이는 것은 개탄스러운 일이라고 말씀하셨다. 법률상으로도 무죄추정의 원칙이 존재함에도, 이미 세월호 선원들을 행정부 수장으로서 범죄자로 규정해 온 대통령의 발언들을 지켜본 나로서는 공감이 되었고 착찹한 기분이 들었다.
지난 시간에는 글라우콘과 트라시마코스의 정의관을 살펴보았다. 오늘 살펴 본 칼리클레스 또한 힘이 곧 정의라는 견해의 연장선에 있다. "정의는 이득이 있기에 지켜지는 것이다"라는 주장보다 더ㅡ그것이 올바르기 때문이 아니라ㅡ나아간 것으로, 강한 자, 똑똑한 자가 권력을 차지하는 것이 정의로운 것이며, 그것이 자연의 섭리이기 때문이라는 견해이다. 칼리클레스의 정의관은 당시 그리스에서 가장 일반적인 정의관이었다.
칼리클레스는 플라톤의 '고르기아스' 라는 대화편에 등장하는 인물이다. 고르기아스의 집에 머물고 있던 칼리클레스는 고르기아스의 동의를 받아 소크라테스를 초대하였다. 소크라테스는 고르기아스의 연설을 칭찬하면서 무엇이 정의로운지 판단하는, 철학에 기반을 둔 수사가 올바른 것이며, 이것이 없으면 그저 아첨에 불과하다고 말했다. 이에 폴로스가 반발하자 칼리클레스는 옳음은, 즉 정의는 도덕성을 판단하는 철학과는 아무 상관이 없다고 주장하였다. 이때 언급된 유명한 관용구가 "Might makes right", 즉 "힘이 정의이다" 였다.
이에 관해서 선생님은 투키디데스의 '텔로폰네소스 전쟁사'에 수록된 멜로디언 다이얼로그에서 자세히 알 수 있는데, 아테네인들이 멜로스인들에게 항복을 권유하면서 한 말이 이를 정확히 표현한다고 하셨다. "정의는 평등한 자들 사이에서만 존재한다. 이는 자연의 질서 속에 있는 것이며 우리는 그것을 실행하고 있을 뿐이다.". 멜로스인들은 힘이 아니라 불명예를 두려워 해 맞서 싸웠고 결국 패배했다. 여기서 발견할 수 있는 사실은 이미 언급되었다시피 '옳고 그름이 정의의 일부분이다'라는 소크라테스의 설명이 당시에는 매우 낮선 개념이었던 것이다. 마키아벨리즘과 현재의 국제상황, 인도주의적 개입의 본질 또한 이러한 정의관을 나타내고 있으며 이는 이후 홉스와 프리드리히 니체로 이어진다.
칼리클레스와 논쟁을 벌이던 소크라테스는 잘못된 일을 하느니 잘못된 일로 고통받겠다고 주장했다. 우리는 고대철학에서 도덕의 핵심은 좋은 일을 하는 것이 아니라 나쁜 일을 하지 않는 것이라는 것을 상기할 필요가 있다. 소크라테스의 주장은 어떤 면에서 보자면 노예가 자유를 얻기 위해 싸우는 것, 예를 들어 스파르타쿠스의 반란의 정당성을 부인하는 것이라고 할 수 있으며, 칼리클레스는 그런 부분을 반박했던 것이다.
이어서 칼리클레스의 견해를 살펴보면 법은 인간 다수를 형성하는 약한 자들이 만들어낸 것에 불과하며, 더 나은 사람들이 못난 사람들보다, 강자들이 약자들보다 더 갖는 것은 옳은 일이다, 그리고 그것이 자연의 법이라는 것이다. 칼리클레스의 주장은 아테네의 민주정을 염두에 두고 있다. 민주정이야말로 약자들이 강자들을 제약할 수 있는 유일한 체제이며, 민주정은 진정한 강자들에게 불편한 체제이다. 그의 입장을 충실히 반영한다면 인민들이 법이나 관례를 만드는 것은 인간 다수를 형성하는 약한 자들이 만들어 낸 것에 불과한 것이다. 나아가 칼리클레스는 절제는 약자들의 덕이며, 강자들의 덕은 무절제라고 주장하였고, 강한 자의 사리 깊은 분별이란 자신의 우월감을 깨닫고 그 우월함을 자신의 욕구를 충족하기 위해 사용하는 것이라고 말했다.
여기서 트라시마코스와 칼리클레스의 강자를 비교하자면, 트라시마코스의 강자들은 이데올로기와 헤게모니로 통치하는 자들로, 법체계를 활용한다. 반명 칼리클레스의 강자는 우월한 임과 능력을 바탕으로 실질적으로 약자를 제압할 수 있는 자들로, 법체계를 무시한다. 선생님은 우리 사회가 직관적으로 트라시마코스식의 논리의 지배를 받고 있다고 볼 수 있으나, 그 바탕에는 칼리클레스의 논리가 있기에 작동할 수 있는 것이라고 말씀하셨다. 극단적인 사례로는 인간의 유전적 우월성에 기반을 둔 나치의 인종주의를 들 수 있으며, 이는 힘이 곧 정의라는 정의관이 극단으로 치닫은 결과였다. 또 다수결의 의의는 그에 반대하는 사람들을 숫자로 표현해준다는 것인데, 칼리클레스의 논리대로라면 이 숫자는 존재하지 않는 것이 된다고도 말씀하셨다. 그리고 승자가 모든것을 독식하는 오늘날의 시장논리 또한 이러한 사고에서 멀지 않은 것이다.
이처럼 힘을 추구하는, 트라시마코스, 글라우콘, 칼리클레스가 주장한 고대 그리스의 일반적 정의론에 맞서 소크라테스는 새로운 정 의관을 내세운다. 옳고 그름에 대한 지식에서 나오는 철학을 바탕으로 한 정의, 즉 도덕을 추구하는 정의론이다. 그는 무지야말로 모든 부정의의 근원이며 전문가란 올바른 지식을 가진 사람이라고 말했다. 문제는 제대로 지식을 갖추지 못한 사람들이 제대로 된 지식을 갖춘 척 행동할 때 발생한다. 지식을 갖추는 것은 자신이 무지함을 인정하는 데서 출발하는데, 소크라테스는 자신이 다른 이들보다 현명한 단 한 가지 이유는 자신이 스스로 무지하다는 것을 알고 있다는 데 있다고도 말했다. 나아가 진정한 지식인이란 아는 것을 실천하는 사람이며 소크라테스는 사형을 받아들임으로서 몸소 이를 보여준 바 있다. 진정한 강자를 만드는 것은 힘이 아니라 참된 지식이라고 그는 강조했으며, 진정한 지도자는 나라와 시민들의 물리적 욕구에 봉사하는 자들이 아니며, 훌륭한 시민들, 성숙한 시민들을 만드는 것이라고 그는 주장했는데, 페리클레스가 그 비판의 대상이다. 페리클레스에게 시민들이 사형선고를 내린 것은 성숙한 시민을 길러내는 데 실패했기 때문이다. 칼리클레스는 소크라테스가 그런 자세를 취한다면 필히 '강자들'에게 죽임을 당할 수도 있다고 위협조로 말했지만, 소크라테스는 폭력이 진실을 바꾸지는 못하며, 살인하는 자들이 악한 자이고 죽임을 당하는 자는 훌륭한 자라는 사실이 바뀌지는 않는다고 응수한다.
여기서 선생님이 오늘날은 조작 등으로 인하여 걱정스럽게도 소크라테스의 테제가 무너지고 있다고 잠시 말씀하셨다. 소크라테스는 자신의 죽음을 예견한 듯 나아가 쾌락을 목적으로 살아가는 사람들이 훌륭한 것을 목적으로 삼는 변론을 들을 리는 없다고 쓸쓸히 말했지만, 칼리클레스가 평범한 이들과 함께하는 지도자가 될 것을 당부한다. 진정으로 평범한 사람들을 이해하고 닮아가야만 그들을 이해하고 받아들이는 연설도 할 수 있다고 말한 것이다. 오늘 아침에 있었던 담화에서 사람들이 대통령의 눈물에 공감하지 못하는 것은 누구의 잘못인가에 대해 생각해 볼 필요가 있으며 플라톤은 그들을 닮아가서는 안 된다고 주장하였다. 칼리클레스를 마무리하시면서 선생님은, 이해와 설득은 지도자로서 정의와 절제를 생각하고 행동할때만 가능하며, 돈이 아니라 정의로 하는 것이라고 말씀하셨다. 마음을 열고 들으려고 노력했지만 오늘의 눈물은 진심으로 다가오지 않았다. 누구의 잘못일까?
이어서 강의에서는 플라톤의 정의에 대한 소개가 이루어졌다. 플라톤의 '국가'에서 소크라테스와 아데이만토스는 훌륭한 나라란 각자의 성향에 맞게 수립된 나라라는 데 동의하였다. 그 세 성향으로 소크라테스는 지혜, 용기, 절제를 제시하였다. 지혜는 국가의 수호자즉 지도자들이, 용기는 국가를 무력으로 지키는 군인들이, 절제는 모두에게, 그러나 특히 노동자에게ㅡ지배를 받는 쪽에서 전제해야 지배-피비재 관계가 성립할 수 있기 때문에ㅡ있어야 하는 것들이다. 이를 포괄하는 것이 바로 올바름, 곧 정의이다. 즉 올바른 사람이란 세 덕목을 모두 갖춘 사람이라고 할 수 있다.
지혜란 분별이 있음인데, 분별은 일종의 앎이고 무지에 기대지 않기에 지혜로운 것이다. 아데이만토스는 그것을 지도자 즉 수호자가 갖추어야 하는 것이라고 응답했고 소크라테스는 지혜를 가진 사람이 제일 적을 것이며, 나라가 지혜로울 수 있는 것은 지도자가 지혜롭기 때문이라고 보았다. 용기란 '두려워할 것을 두려워하는 것'으로 일단은 국가를 위해 전쟁터로 나갈 수 있는 군인들이 가져야 할 것으로 제시되었으나 곧 법과 그 영향의 '위반을 두려워하는 것', 소신에 대한 보전을 뜻하는 것으로 풀이되었다. 즉 시스템의 수호가 진짜 용기이며 무력을 가진 자들이 바르고 준법적인 소신을 보전하는 것이다. 절제에 대해서는 무절제한 욕구가 공정한 지배자들의 지혜에 의해 제압당해야 한다고 언급되었는데, 한결 나은 쪽과 급한 쪽 사이에 어느 쪽이 지배해야 할 것인가에 대한 합의라고 언급이 되었다. 정리하자면, 각자가 자기에게 맞는 일을 하는 것이 올바름이며, 이는 한편으로는 엘리트주의 혹은 계급주의라는 한계를 내포하기도 한다. 이는 다음 주에 배울 철인통치와 연결되는 부분이라고 미리 예고하시면서 선생님은 강의를 마무리하셨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