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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동아시아 근현대사] 3강, 청일전쟁은 동아시아 전통 질서를 어떻게 해체했을까
[동아시아 근현대사 : 전쟁의 기억, 평화의 약속] 3강(4/17), 청일전쟁은 동아시아 전통 질서를 어떻게 해체했을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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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867년 우리는 일본에 의한 개항을 했고, 1882년 청나라의 알선으로 미국과 조약을 체결했다고 한다. 인도에 있던 영국 외교관이 말하길 ‘세상에서 조선처럼 스스로 독립국이자 속국이라고 주장하는 나라는 없다. 또한 양쪽의 성격과 관련된 증거도 분명히 제시할 수 있는 정치상 가장 불규칙한 상태의 나라도 아마도 그 사례를 찾아 볼 수 없을 것이다.’라고 하였다. 우리는 청나라와 책봉조공체제를 이어왔고 독립국인 것이 맞다. 하지만 다른나라의 입장에서 보면 그것은 이해할 수 없는 것이다. 그래서 조선의 운명은 청나라의 속국이자, 자주적인 나라이고 그것을 불편해 하지 않는 것이다.
1882년 일본에 의한 적대감으로 임오군란이 일어났다. 그들은 별기군 창설에 따른 구식군인의 불만이 폭발하여, 일본인 교관을 살해하고 궁궐과 일본 공사관을 습격하였다고 한다. 결국 제물포 조약을 맺게 되고 일본의 군대 파견, 사과와 배상을 하게 된다. 또 청나라는 3천명의 군대를 주둔하고, 외교고문 묄렌도르프를 파견 하였다고 한다.
1884년 청불전쟁이 발발하고, 청나라의 군인들이 철수를 하게 된다. 중국이 베트남을 2000년 동안 책봉조공체제에 속해 있었는데 프랑스에게 지면서 책봉조공체제도 철수하게 되어, 중국이 조선에게 더욱 집착하게 된다. 김옥균이 일본의 지원을 받아 궁궐을 점령하고 정권을 장악했지만 청나라가 와서 제제를 하여 결국 수포로 돌아갔다. 그 이후 청나라는 내정간섭을 굉장히 심하게 했다고 한다. 심지어는 외교외교 보낼 때 허락을 받아야 한다고 했다. 하지만 우리는 그것을 불편해 하지 않고 잘 받아들였다고 한다.
1885년 톈진조약에서 리훙장과 이토 히로부미가 대면을 했다고 한다. 청일 양군이 철수하기로 하였고, 그 뒤 파병을 하게 되면 사전에 통보를 해주기로 하였다. 이것은 조선을 배제한 청일간의 조약체결이었다고 한다. 또 하나의 톈진조약은 청나라가 프랑스의 베트남 보호권을 승인하는 것이라고 한다.
청나라는 조선의 내정과 외교간섭을 강화하여, 묄렌도르프 대신, 위안스카이를 파견하였다고 한다. 고종은 러시아를 끌어 들여 견제하려다가 실패하게 된다. 또 고종은 친미, 반청의식이 있었다고 미국의 자료에 쓰여 있다고 한다.
청나라와 일본은 10년 동안 군사력 증강을 위해 소리 없는 전쟁을 했다고 한다. 청나라는 해군군사력 증강에 많은 노력을 하고, 1885년 해군아문을 설립하고 1888년 북양함대를 편성 했다고 한다. 반면 일본은 국방비에 예산을 31%씩이나 투자하여 징병제를 강화하고, 해군 병력과 군함을 증강시켰다고 한다. 그리고 1894년 즈음에는 청나라와 일본의 군사력과 무역이 대등해졌다고 한다.
1885년 오오사카 사건은 자유민권운동 좌파가 의용군을 결성하여 조선으로 건너가 조선을 독립시키고 내정개혁을 시도하려다가 발각된 사건이라고 한다.
19세기 조선은 농민항쟁의 시대라고 할 만큼 정말 많았다고 한다. 그들은 4대 행동강령을 만들었다고 한다. 그것을 살펴보면 그들은 사람의 도리, 나라의 도리 그리고 외세의 영향까지 썼다고 한다.
1884년 김옥균은 일본으로 망명을 갔는데 일본정부의 푸대접을 받고, 고종이 끈질긴 암살 시도를 받았다고 한다. 그리고 최초의 프랑스 유학생인 세련된 홍종우가 자객으로가 김옥균의 암살을 하려고 한다. 1894년 3월 리훙장을 만난다는 이유를 대며 상하이로 유인해 암살을 했다고 한다.
청나라와 일본 양국이 조선에 출병해 5.31 농민군 전주성을 점령하고 조선정부의 청의 원병 요청을 결정하여 6월 3일에 위안스카이에게 공식 철병요청서를 제출했다고 한다. 6월 5일 일본은 공사관과 거류민 보호를 이유로 혼성1개 여단 6,000명을 출병하기로 결정하고 대본영을 설치한다. 야마가타 아리토모 수상이 이익선을 보호하기 위한 군비확장이라 하며, 주권선과 이익선을 주장한다. 일본은 전쟁준비를 하게 되고 6월 7일 청나라와 일본은 서로 군대를 보낸다는 통고를 하게 된다. 일본은 조선 정부의 철군요구를 거부하고 청나라에게 내정개혁 공동을 제한하지만, 청나라는 조선의 내정개혁은 자주성을 침해하는 것이라고 하고 톈진조약에 따라 일본에 철군을 요구한다. 하지만 일본은 내정개혁을 빌미로 철군을 거부하고 일본군을 용산으로 이동시키고, 조선정부에 청나라의 철병하라고 압박을 하겠다고 하고, 만약 그렇게 하지 못하면 일본이 청군을 직접 축출하겠다고 한다. 반면 조선은 청나라 군대와 일본군대가 철수를 하면 자주적으로 개혁을 하겠다고 한다. 7월 20일 일본은 조선에게 청국과의 종속 관례 파기를 요구하고, 7월 23일 일본군 제 5사단 혼성제9여단의 경복궁 기습점령과 서울을 장악하게 되는데 이것은 의도적 도발이라고 한다. 일본은 고종을 체포하여 내각을 교체하고 내정개혁을 하는데 조선정부가 계속 말을 듣지 않아 싸우기도 했다고 한다.
7월 25일 풍도 앞바다에서 청군함 9대가 일본에게 자랑을 하러 갔는데 일본군이 청군함을 격침하고, 7월 27일 성환에서 일본군이 청군을 공격하였다고 한다.
일본은 8월 1일 조선을 속국처럼 여기며 내정에 간섭하는 청나라와 싸워 조선의 독립을 보장한다며 선전포고를 한다. 9월에는 관군과 청군이 뭉쳐, 일본제1군과 싸우고, 황해해전에서 일본군이 승리해, 베이징을 향해 만주로 가 단기전을 하려고 하였으나, 중국은 나라가 크기 때문에 장기전이 되었다고 한다. 청나라의 리훙장은 피전론, 국가전, 지구전, 강화조약을 시도하였고, 일본군은 제 2군을 편성하여 랴오둥 반고를 공격하여, 다롄을 점령, 뤼순 점령을 하며 2만 명을 학살했다고 한다. 이로 인해 미국, 영국, 러시아의 개입이 시작되었다고 한다. 1895년 2월 일본의 웨이하이웨이(북양함대 기지)의 공격을 성공시키고 타이완이라도 차지하고자 펑후다오를 점령했다고 한다.
반면 조선에서는 전봉준이 재봉기를 하기로 결정하였다. 일본군은 러시아와의 접촉을 막기 위해 1개의 중대를 셋으로 나누어 동로군은 충주에서 강원도로, 중로군은 청주, 옥천, 보은, 금산으로, 서로군은 천안, 홍주, 공주로 가서 북상을 막았다고 한다. 우금치 전투는 스나이더 총과 화승총, 장과 칼의 전투이고, 일본군은 별로 죽지 않았다고 한다. 정부는 ‘종사가 보존되어 있고 임금도 탈이 없으니 오히려 소란을 야기하면 화를 입을 수 있다’고 하며 일본의 편을 들어 일본 군사작전에 편의를 제공하여, 일본군이 한국군을 남쪽으로 몰아 무조건 죽이는 동학군학살작전을 펼쳐, 3만명-5만명을 죽였다고 한다. 전투 중 사망한 사람은 1명, 질병과 부상으로 죽은 사람은 36이고, 이들은 야스쿠니 신사에 있다고 한다.
시모노세키 조약은 4월 17일에 체결되었고, 이토 히로부미가 조금 더 유리했다고 한다. 청나라는 당시 일본 예산의 4배인 2억을 배상하기로 약속하고, 타이완 주권을 이양하였다고 한다. 또 랴오둥 반도 할양을 했다고 전해진다. 조약의 1조는 ‘청국은 조선국이 완전무결한 독립 자주국임을 확인한다. 따라서 위의 자주 독립을 훼손할 청국에 대한 조선국의 공헌, 전례 (책봉조공체제)등은 앞으로 완전히 폐지한다.’라고 한다. 러시아, 프랑스, 독일의 간섭으로 일본은 랴오둥 반도를 6일만에 포기하게 되는데 랴오둥 반도를 포기하는 대신 은 3천만냥을 받았다고 한다. 일본인의 청일전쟁에 대한 기억은 야만에 대한 문명의 승리이고 정의의 전쟁이었다고 한다.
청일전쟁에서 일본이 이긴 이유는 이론의 대대적인 군비 증강과 청의 군사적 한계, 즉 청나라의 군사력은 정체되어 있었기 때문에 라고 한다. 또 일본의 위기의식과 경계심 때문이라고도 하고, 일본에 유리한 국제 정세 덕분이라고 하기도 한다.
청일전쟁이 일어나면서 일본은 대국의식이 생겨나고, 일본예산의 네 배인 배상금으로 금본위제를 실시하고, 군비증강, 중공업에 많은 투자를 하였다고 한다. 반면 청나라에서는 서구로부터 배상금을 갚기 위해 차관 도입과 이권을 침탈되었다고 하고, 지식인들의 충격이 크고, 입헌개혁파(캉유웨이)와 혁명파(쑨원)이 크게 부상하는 반면 제대로 외교관계를 맺지 못하는 리훙장 덕분에 양무파는 약해졌다고 한다. 또 청나라는 유미유동도 많았고, 베트남도 동유를 하였다고 한다. 조선에서는 1894년 갑오개혁이 일어나고, 1897년에는 청일전쟁의 영향으로 청나라로부터 독립하여 받아 대한제국을 수립하고 광무개혁을 하였다고 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