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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고전으로 이해하는 정치사상-근대편] 5강, 계몽이란 무엇인가? 칸트, 푸코
[고전으로 이해하는 정치사상-근대편] 5강(12/09) 계몽이란 무엇인가? 칸트, 푸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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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임마누엘 칸트(1724~1804)
내가 여러 차례 또 오랜 시간 성찰하면 할수록 더욱 새롭고 더욱 높아지는 경탄과 경외심으로 나의 마음을 가득 채우는 두 가지가 있다. 이 두가지란, 내 머리 위에 있는 별이 빛나는 하늘과 내 마음 안에 있는 도덕 법칙이다. - 칸트의 묘비명에 새겨진 말
늦은 시간까지 겨울비가 그치지 않았던 월요일 저녁. 느티나무 강의실은 칸트와 푸코의 사상에 대해 배우고자 하는 학생들로 가득찼습니다. 김만권 선생님은 칸트의 묘비명에 새겨져 있다는 유명한 문장으로 강의를 시작했습니다. 칸트는 모든 도덕을 나의 내부로부터 비롯된다고 보았습니다. 이러한 칸트 도덕의 특이성을 ‘자기입법’이라고 표현하기도 합니다. 도덕원칙은 자기 자신이 세운다는 것입니다. 칸트의 도덕은 많은 사람들이 생각하는 (헤겔이 강조하는 인륜과 비슷한) 도덕과 다릅니다. 칸트가 말하는 도덕은 영어로 morals 로 표현되는데, 이는 개인이 세운 도덕원칙에 따른 행위를 의미합니다. 이런 점에서 칸트는 헤겔과 대비하여 형이상학적 도덕주의자로 불리기도 합니다.
칸트의 계몽에 관한 신념은 당대에 대한 비판적 태도로 이해되어 푸코를 비롯한 일부 후기 구조주의 철학과 데리다 등에 스며들었습니다. 프랑스 지식인 전통으로 이어진 것이지요. 또한, 도덕에 대한 그의 신념은 독일의 프랑크푸르트학파와 영미계열의 롤스주의자들이 이어받았다고 합니다. 전해듣기만 해도, 당대 철학에 미친 칸트의 영향력이 얼마나 강력했는지 느껴질 정도입니다.
<임마누엘 칸트 / 출처: wikipedia>
2.계몽이란 무엇인가?(1784년)
계몽주의를 어떤 학문적인 조류보다는 정치적인 철학 사조로 하나의 사회운동이라 이해하는 편이 낫습니다. 이성이 삶의 중심이 되어야 한다는 사회운동입니다. ‘계몽이란 무엇인가’를 발간하고 5년이 지나, 프랑스혁명이 일어납니다. 칸트는 자신이 진정으로 믿었던 계몽의 힘이 혁명으로 나타난 것에 만족했을까요? 그 답은 ‘아니다.’입니다. 칸트가 말하는 계몽이란 스스로 타자에게 이성적 숙고와 판단을 대신 부탁하는 미성숙에서 벗어나는 것입니다. 타자의 도움 없이 자기 자신이 이해한 것들을 사용할 수 있는 능력이 없는 것을 미성숙하다고 말합니다. 만약 이런 미성숙의 원인이 이해의 결핍이 아니라, 타자의 안내 없이 그것을 사용할 해결책과 용기의 결핍에서 온 것이라면, 미성숙은 자기책임이라는 것입니다. 다시말해, 사람들이 자신의 삶에 미성숙한 채로 남아있는 것은 게으름과 용기부족 때문입니다. 칸트는 이렇게 주문합니다.
Sapere aude!! (Dare to be wise!!)
너 스스로 이해한 것을 사용할 수 있는 용기를 가져라
흥미롭게도, 칸트는 미성숙을 해결하기 위한 계몽 - 정신 성숙은 집단적으로 진행될 때 실현가능하다고 주장합니다. 그래서 이성의 사적사용과 구별되는 이성의 공적사용을 강조하고 더불어 이를 위한 토대로서 자유의 필요성을 역설합니다. 이성의 공적 사용이란, 한 사람이 지식인으로서 독자 대중 앞에서 이성을 사용하는 경우를 말합니다. 인간이 이성을 위해 이성을 사용할 때, 이런 이성의 사용은 자유롭고 공적인 것이라는 이야기입니다. 이성의 보편적이고, 자유로운, 공적 사용이 겹쳐질 때 계몽이 존재합니다. 이 조건은 집단적 계몽에 필요한 조건으로 이해할 수 있지만, 반대로 왜 계몽이 집단적으로 오는가를 이해할 수 있는 근거가 됩니다. 이성의 사용은 나를 위해서만 쓰는 것이 아니고, 타인과의 공존을 위해서 사용하는 이성이기 때문이다.
이것은 마치 이성의 본질은 도덕적 측면에 있다고 강조하며, 상호이해, 의사소통을 위한 이성을 제시했던 하버마스의 도덕적 이성과 상통하는 듯합니다. 효율을 따지고, 자기 이익을 계산하는 도구적 이성과는 다른 것이지요. ‘과감하게 도덕적이 되어라. 남과 공존할 수 있는 길이고, 공동체 안에서 살 수 있는 길이다 싶으면 과감하게 행동하라.’라고 외치는 칸트의 목소리가 들립니다. 기존의 계몽은 과학화 내지 계산에 치중했다면, 칸트는 도덕에 중점을 두고 있습니다.
이러한 이성의 공적사용은 현실에서 어떻게 드러날까요? 칸트는 [계몽이란 무엇인가?]에서 공적사안에 대해서 지식인들이 글을 쓸 것을 주문합니다. 왜, 글쓰기일까요? 글쓰기가 자신의 직책을 떠나 공공사에 대해 객관적으로 사고할 수 있는 기회를 주기 때문입니다. 또, 글이 공개되면 그 일관성을 지키기 위해서 투쟁하게 된다. 이러한 글쓰기는 논의, 토론의 객관적인 기초가 된다. 따라서, 법과 지도자의 역할로서 이성의 공적사용이 항상 자유롭도록 노력하는 것을 강조합니다. 사상의 자유와 더불어 출판의 자유 모두를 보장해주는 것이지요.
실제로 공중에게 자유가 허용된다면 계몽은 거의 확실하게 이루어질 수 잇다. 거대한 대중의 지도자로 선출된 자들내에서도 그들 전체를 위해 사고하는 몇몇 사람들이 항상 있다. 미성숙의 굴레를 한번에 벗어버린 지도자들은 개인의 가치에 대해 합리적으로 존중하는 정신과 모든 인간이 그들 스스로 생각할 의무에 대해 존중하는 정신을 퍼뜨릴 것이기 때문이다.
3. 칸트의 문제점?
칸트는 어느 시기에 이르면 미성숙에서 벗어난 계몽된 지도자가 나올 것이고, 그 지도자가 합리성이 지배하는 권력을 구축해낼 것이라고 말하고 있습니다. 그때까지 지식인들이 해야할 일은 묵묵히 세상의 잘못된 일을 글을 쓰며 비판하는 것입니다. 그렇다면 출판의 자유, 혹은 시민의 자유가 제한될 때는 어떻게 해야 할까요? 칸트는 ‘모든 것을 자유롭게 하면, 오히려 떠드는 이가 없다.’ ‘억압되어야 자유의 소중함을 안다’는 식의 논리를 폅니다. 어둠의 시대의 자유는 더 빛난다는 이야기입니다. 인간에게 자유롭게 생각할 수 있는 시민적 자유가 주어졌을 때, 때로는 이런 자유가 인간이 생각하는 일에 장애가 되기도 한다고 봅니다. 이것은 민주주의 사회에서 시민의 자유가 넘쳐날 때, 오히려 시민은 공공사에 무관심하게 되는 현상이 일어난다는 토크빌의 지적과 유사합니다. 생각하는 일에 대한 억압이 강할수록 인간은 더욱더 생각하려는 의지를 강하게 키웁니다.
칸트의 ‘문제점’이라고까지 말하는데 무리가 있겠습니다만, 칸트는 혁명으로는 계몽을 달성할 수 없다는 생각을 가지고 있었습니다. 그에 따르면, 공중은 계몽을 아주 서서히 달성할 수 잇을 뿐이고, 혁명은 생각하는 것에 있어 진정한 개혁과는 거리가 있습니다. 즉, 칸트는 계몽이 정신의 점진적 성숙이지 혁명을 의미하는 것이 아니라는 점을 말하고 있습니다. 그는 혁명이 할 수 있는 일은 물리적으로 존재하던 억압적인 권력을 대체하는 새로운 편견의 등장이며 새로운 속박일 뿐이라고 지적합니다. 칸트의 입장에서 보자면, 사회의 모든 문제는 대중이 생각하지 않을 때 생겨납니다. 진정으로 사회를 바꾸고자 할 때, 우리가 해야할 첫 번째 일은 대중이 생각하도록 만드는 일이며, 계몽이란 생각하는 대중을 형성하는 일이라는 의미입니다.
4. 푸코가 말하는 계몽이란?
칸트는 계몽을 인간성이 어떠한 권위에도 복종하지 않고 자신의 이성을 사용하게 될 순간으로 묘사합니다. 바로, 비판이 필요한 순간입니다. 무엇을 알 수 있는지 무엇을 행해야 하는지, 무엇을 바라야 하는지를 결정하기 위해서 이성을 정당하게 사용할 수 있는 조건을 정의해주는 것이 비판의 역할이기 때문이다. 정당하지 않은 이성의 사용은 허상을 따라 교조주의와 타율성을 불러일으킵니다. 반면 이성의 자율성이 보장되는 것은 이성의 원리 내에서 이성의 정당한 사용이 분명하게 정의될 때입니다. 이런 의미에서 비판은 계몽 속에서 성숙된 이성의 안내서이다. 뒤집어 말하면, 계몽이란 비판의 시대이다.
이러한 비판은 파괴를 위한 비판이 아니라, 현재 우리를 위해 존재합니다. 푸코에 따르면, 계몽은 어떤 교조적 요소에 충실하려는 것이 아닙니다. 그는 우리가 살아가고 있는 시대를 끝없이 비판하려는 철학적 에토스를 지속적으로 재활성화하는 일이 계몽이라고 주장합니다. 계몽의 관심은 어제도 미래도 아닌 우리가 살아가는 오늘 현재에 있다는 것으로, 우리가 살아가는 당대에 대한 비판적 태도를 끊임없이 견지하라는 뜻이겠지요. 나아가, 잘못된 지식이 생산하는 거짓된 권력을 비판하라는 것입니다. 이는 계보학을 통해 ‘유럽중심적인 사고’와 그 배후의 권력구조를 철저히 비판했던 그의 생애 연관이 깊습니다.
푸코는 우리가 미성숙의 상태에서 벗어나지 못한 시대를 살고 있다면, 우리 스스로 살아가고 있는 시대에 대한 비판적 의식을 결여한 것이라고 지적합니다. 그런 의미에서 미성숙한 시대는 동시대를 향해 질문하지 않는 우리 자신들의 책임입니다. 후기 구조주의자로 평가되는 푸코가 왜 비판을 강조했을까요? 진정한 저항의 가능성은 인간이 현재에 대한 비판적 태도를 견지하지 않는 한 생겨날 수 없다는데 그 이유가 있을 것입니다. 무비판적 태도가 구조에 대한 저항의 가능성을 없앨 뿐 아니라 때로는 억압조차 자율성이라 믿게 만든다고 우려했던 것은 아닐까요? 푸코는 우리가 진정 변화를 원한다면, 우리가 살아가는 시대에 대해 비판적 태도를 갖는 일에서부터 시작하라고 제안하고 있습니다.
글 : 자원활동가 이난단