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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민주주의를 향한 역사] 2강, 자치: 서학의 정착, 동학의 탄생 그리고 공동체
[민주주의를 향한 역사: 근대로의 희망 여정] 2강(1/20), 자치: 서학의 정착, 동학의 탄생 그리고 공동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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서학은 천주교, 동학은 토착종교. 둘 다 조선 말기에 민중의 공감에 힘입어 널리 전파되었고 극심한 박해와 탄압의 역사가 있었음. 우리가 고등학교 근현대사 수업을 통해 알고 있는 정보는 대부분 여기까지다. 종교는 종교일 뿐 사회변화와 무관하다는 인식은 작년 말 천주교정의구현사제단 시국선언에 쏟아진 비난에서 여실히 드러났다. 권력이 마음만 먹으면 누구나 공격할 수 있는 아주 위험한 말, “중립성을 지켜라!” 그러나 그 종교도 역사의 도도한 흐름에서 이탈하여 오로지 자기 길만을 가지는 않는다. 신분 해방이 대세였지만 권력이 개혁을 시도하지 않을 때, 평등의 욕망을 수용하고 이를 분출할 기회를 제공한 것이 바로 서학이고 동학이었다. 그리고 일제가 권력을 잡고 전제를 선포하자, 토착종교는 대안공동체로서 식민지 권력의 바깥에서 조선인 자치 권력을 생산하고 꾸려나가는 저력을 발휘했다.
서학의 정착
서학은 17세기 초에 <천주실의>와 같은 한역서학서를 통해 학문으로 처음 들어왔다. 사료를 통해 초기의 서학은 하느님을 중국의 ‘상제’로 해석하고 유교윤리를 거부하지 않는 등 동아시아 문화에 맞게 현지화 된 형태였던 것을 알 수 있다. 그러나 1790년대에 예수회의 입장이 그 나라 실정을 고려치 않고 원칙대로 선교하자고 바뀌면서 충돌이 시작되었다. 천주교가 박해받은 이유는 유교 의례와 신분질서를 파괴한다는 데에 있었다. 신앙이 가져오는 문화적 변화는 권력뿐만 아니라 당대 사회에서도 받아들이기 어려운 것이었다. 조상숭배와 제사를 우상숭배라 배격하고 전혀 지금과 차이 없는 결혼관에 따라 부부간 동정서약을 하는 광경은 어마어마한 문화적 충격이었다.
천주교인이 되는 것 자체가 유교적 통치 체제의 기반을 침식하는 잠재적 저항인 시대였다. 지식인들이 박해 중에 죽어나감에 따라, 그리고 수평적 우애와 보편적 인간관에 힘입어 천주교는 평민화 되어갔다. 박해를 피해 산골로 은신한 신자들이 건설한 교우촌은 신앙공동체이자 생활공동체였다. 늘 떠돌아다니며 빈궁에 허덕였던 이들은 옹기장수가 되는 일이 많았다고 한다. 박해를 받아 공동체가 흩어졌을 때 사람을 찾기도 쉽고 옮겨 다니는 상황에서 생계를 유지할 수 있었기 때문이다. 일각에선 박해 받은 양반들이 상인이 되면서 신분제 해체에도 간접적인 영향을 끼쳤다고 분석하기도 한다.
동학의 탄생
서학은 조선에 들어와 정착했고, 동학은 토착 종교로서 탄생했다. 1860년 최제우가 동학을 창도하고 2대 교주 최시형이 본격적으로 포교를 시작하고 교세를 확장했다. 유교에서의 천(天)이 왕권의 통치 근원이라면 동학의 천은 모든 사람이 몸에 모신 한울님이다. 각 개인은 한울님을 모신 존재이고 존엄성, 즉 개인으로서의 권리가 있으니 사람을 대하기를 하늘처럼 하라는 뜻이다. 하느님 아래 모두가 평등하다는 서학보다 한발 앞서간 진보 사상인 셈이다. 또한 동학은 생활도덕운동으로서 바르게 살기를 강조하며 민중의 삶에 자연스럽게 녹아들어갔다. 동학 공동체 규범은 새로운 삶을 꿈꾸고 변화를 지향하지만 기존 삶의 방식에서는 크게 벗어나지 않았다. 굉장히 유교적이었던 ‘통유문’과 사람에 대한 존중감의 극치를 보여주는 ‘십무천’을 나란히 놓고 보면 어렵잖게 알 수 있는 사실이다.
동학공동체는 다양한 유형으로 분화되었고 저마다 의미와 역할이 달랐다. 먼저 영적 생활 공동체였던 접주제와 자율적 사회 운동 조직이었던 포제가 있다. 전자는 인맥에 따라 형성되었으며 후자는 인맥보다는 지역적 관련성을 강조하였다. 조직 내에서는 반상, 남녀노소, 양천, 빈부구분이 없었다. 이재민이 발생하면 도왔고 가난한 자에겐 밥을 주었다. “비록 문벌이 천하고 미미하더라도 두령 될 자격이 있으면 두령이 되는 것이다.”(최시형) 집강소는 한때 뉴라이트 학자들에 의해 허구라는 논란에 휘말리기도 한 기관이다. 교과서에서 폐정개혁안을 빼라는 뉴라이트의 요구에 대해 이날 수업에서는 “역사적 맥락 없이 폐정 개혁안 하나만 보고 있다.”라는 비판이 있었다. 마지막으로 도소는 군정과 민정 양 기능을 동시에 수행하는 농민군의 개혁 사령부로서 동학농민전쟁기 등장한 최초의 자율적 민중조직이었다. 종교적 자유를 갈망하는 자각 인민이 각 지역을 연계하는 종교 조직을 가동하여 국가권력에 대항하던 자율적 공간으로서 이후 자발적 결사체가 도시 중심으로 전국적으로 출현하는 계기가 되었다.
(주: 2006년, 뉴라이트 인사인 유영익 연세대 석좌교수는 계간 <시대정신> 대담에서 현행 역사교과서의 동학농민운동에 관한 서술에 심각한 문제가 있다고 말했다. 동학농민군이 집강소를 통해 실현하려고 했다는 12조 폐정개혁안이 오지영의 1940년 작 <역사소설 동학사>에만 실려있는 '믿을 수 없는 사료'라는 것이다. 이에 대해 동학농민운동사를 전공한 원광대 박맹수 교수는 <역사소설 동학사>는 픽션이 아닌 회고록 성격의 글이고, 동학농민운동 당시 이미 27개 조항의 요구안이 있었고 오지영은 12개조로 그것을 재정리한 것이라며 유 교수의 의견을 정면 반박했다. 12조 토지균분 조항에 오지영 개인의 의견이 반영됐을 수 있으나, "12개조 자체가 허구라는 비판은 무리"라는 반론이다. - 연합뉴스 "동학농민군 '12개조 폐정개혁안'은 허구" 논란..", 2006-05-29)
일제 치하 ‘대안’의 자치공동체: 천도교와 상제교의 경우
1905년 손병희가 창도한 천도교는 1910년 신도 수 100만의 최대 종교로 성장하였다. 탈권력에서 자치권력으로 전환한 자치공동체로서 3.1운동을 주도하고 1920년대 혁신, 즉 민주화운동을 지향했다. 1924년 김연국은 상제교 본부를 중심으로 계룡산 신도안에서 교인들이 자급자족적인 삶이 가능한 탈정치화된 종교 중심지를 건설하였다. 일제 당국은 천도교의 교주는 왕이고 중앙총부는 정부형태를 모방한 유민구락부(遊民俱樂部. 俱樂部: club의 일본식 음역어)라 비난하였다. 지난 시간에 배웠던 형평운동을 비롯한 모든 형태의 사회운동이 용납되지 않던 시대였다. 식민권력이 볼 때는 모두 독립운동이고 저항이기에 극심하게 탄압하였고 천도교와 상제교도 예외는 아니었다.
국가, 자치. 강의가 끝난 후에도 머릿속을 맴도는 두 개의 질문
종교가 근대화되는 과정에서 평등을 내세운 종교가 등장하는 것은 조선에서만 일어난 일이 아니다. 1851년 배상제교가 중국에서 일으킨 태평천국의 난은 동학농민운동과 매우 유사한 모습으로 전개되었고, 유럽에서도 평등주의적 공유제를 실현하려는 천년왕국운동이 종교개혁시대에 일어났다. ‘하늘 아래 새로운 것이 없다.’는 말이 적어도 역사에서는 진리임을 보여주는 사례가 아닐 수 없다. 수업이 끝나갈 즈음 국가 ‘밖’의 자치를 추구했던 두 사회를 비교분석하는 표가 눈앞에 펼쳐졌다. 선생님은 북미 인디언 사회와 조선의 토착 종교 공동체. 국가와 권력에 대항하였고 무수한 박해에 시달렸던 19세기의 두 사회를 이야기하며 질문 두 개를 우리에게 던지셨고, 그 질문들은 뇌리에 박혀 오랫동안 사라지지 않았다. 국가는 자치를 파괴하는 존재인가? 국가와 사회의 관계는 무엇인가?
+ 더하기 몇가지 질문들
- 숨을 멎게 하는 흥미진진한 강의였습니다^^ 동학, 최시형 그리고 유토피아 대안 공동체와 관련한 추천도서가 궁금합니다!
- 1) 마테오리치가 천주실의를 펴낸 해가 1603년이면 중국 명 왕조대입니다. 명을 숭상하던 조선이 천주교를 승인하지 않은 다른 이유가 있겠지요? 2) Americad의 마야, 잉카 제국 멸망을 보면, Apa'on 성직자들도 현진의 이교도를 사람이 아닌 동물로 취급하는 사례를 보이는데, 조선에 온 서구 신부들은 어떠했나요?
- 천도교와 증산교의 관계를 구체적으로 알고 싶습니다.
글 : 자원활동가 박유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