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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문학으로 읽는 중남미 역사와문화] 1강, 체 게바라의 홀쭉한 배낭
[인문학교] 문학으로 읽는 중남미 문화와 역사, 1강(10/31)
구광렬지음 | 실천문학사
너에게 묻는다
1.
강의를 맡아주신 분은 구광렬. 대학에서 강의를 하고 있기도 하지만 사실 그는, 시인이다. 한국어로 쓰기도 하지만 주로 스페인어로 시를 쓰는, 그리고 그 스페인어 시를 스스로 한국어로 번역도 하는, 아주 특이한 사람이다. 이토록 특이한 분이 참여연대 느티나무홀에서 강의를 했다. 그것도 맨발로...
2.
첫 강의는 ‘체게바라의 홀쭉한 배낭’을 읽고 모이는 자리.
체게바라가 볼리비아 정부군에게 사살 당할 당시 소지하고 있었다는 배낭 안에서 발견된 초록노트 그리고 그 안에 필사된 69편의 시들에 대한 이야기가 이 책의 주요 내용이다. 그 69편의 시는 총 4명의 시인들 작품이었다. 칠레 출신의 파블로 네루다, 페루의 세사르 바예호, 쿠바의 니콜라스 기옌, 스페인의 레온 펠리뻬. 책의 중간 중간 그들의 시가 실려 있어 체게바라가 게릴라전을 펼치던 전장에서 어둠을 밝혀가며 읽고 필사했던 시들을 함께 감상할 수 있던 시간이었다.
체게바라가 웬만한 월드스타 못지않게 유명한 탓도 있고 전에 평전을 읽었던 기억도 있고 해서 책의 내용이 새삼스럽진 않았지만 문학과 혁명의 그 이상하리만큼 끈끈한 관계에 대해서 생각해 볼 수 있는 계기가 된 듯하다. 아니, 그저 상상을 해 보는 거다. 하루하루 목숨을 걸고 싸우는 전장에서 배낭에 시집을 넣고 다니는 마음이란 어떤 걸까. 피곤한 육신을 누이고 쉬게 하는 그 짧은 휴식의 순간에 시 한편을 노트에 베껴 적는 마음이란 대체 무엇인가.
세계인들의 무한한 사랑을 받고 있긴 하지만 그에 못지않게 안티-체로 활동하고 있는 이들도 많은 모양이다. 그 중에서 책에 소개된 유명한 안티-체 인사는 아르헨티나 출신의 칼럼니스트 후안 호세 세브렐리. 그는 다각도에서 체를 비판하고 있다. 그중 한 대목,
“게바라주의는 마르크스주의 혹은 정통사회주의와 충돌하는 것이다. 체게바라는 자연스런 해방을 교조적 카리스마로, 인민동원을 개인적 소집 차원에서, 사회민주주의를 정치적 독재로, 빈자와 노동계급을 농부로, 객관적인 조건들을 주관적인 의지로, 오로지 선진사회에서만 가능한 사회주의를 가장 가난한 국가에서 실현시키려 했다.”
내용이 어려워 몇 번 반복해서 들여다보니, 결국 이 비판의 많은 부분이 체의 개인적인 매력과 카리스마에 대한 것들이라 가벼운 웃음이 났다. 인민동원을 개인적 소집 차원에서 이끌어냈다는 비난의 부분이 무척 우습다. 게릴라 시절 그가 지나가면 사람들이 농기구를 들고 그의 뒤를 따라나섰다고 하는데, 이렇게 치명적인 매력을 지닌 게 잘못이라고 지적하는 이 남자의 얼굴이 문득 궁금해졌다. 더욱 가관인 것은 객관적인 조건들을 주관적인 의지로 바꾸고 변화시키려 했다는 부분... 객관적인 조건들을 오로지 자신의 신념과 의지로 넘어서려 하는 게 게릴라들의 본분 아니던가, 그게 바로 혁명의 골자가 아니던가 말이다. 천식을 앓으면서도 평생 싸움의 현장을 누볐던 게바라의 착한 눈매에서, 고열에 시달리면서도 밀림 속을 몇 십일씩 걸어다니며 투쟁했던 호치민의 깡마른 살갗에서 우리가 발견할 수 있었던 건 그들의 지닌 그 강인한 의지와 정신력이 아니던가. 체를 향해 정치적 바보라 칭했다는 이 인사를 향해 더 이상 주저리주저리 떠드는 일은 여기서 그만 두는 게 오히려 체에 대한 예의가 아닐까 싶다.
문학과 혁명으로 체를 그려내는 책의 내용 때문인지 문득 요즘 읽고 있는 다른 책이 떠오른다. 책과 혁명에 관해 쓴 ‘잘라라, 기도하는 그 손을’이란 책이다. 책을 읽는다는 것, 책을 쓴다는 것은 책을 다르게 읽는다는 것과 책을 다르게 쓴다는 것이고 이 행위는 오로지 그 행위 자체로서도 이미 혁명임을 11-12세기에 걸쳐 일어났던 ‘중세해석자혁명’과 ‘루터의 대혁명’, 이 두 사건의 재조명을 통해 밝히고 있는 책이다.
어려운 논증의 과정을 거치지만, 거칠게 설명하자면 이런 거다. 신의 말씀의 왜곡되어 인간의 삶을 옭아매고 있던 중세에 루터가 한 일은 성경을 되풀이해서 읽는 행위, 오로지 그것 하나였다. 그 행위 하나를 통해 세상이 잘못되어 있다는 것을 깨닫는 것, 성경과 신의 말씀은 그런 것이 아니라는 것을 깨치는 과정, 그것은 진정한 혁명의 행위였음을... 그래서 책을 읽는다는 건 곧 혁명이며 그런 불가능한 책읽기를 우린 어렵더라도 읽어내야 한다는 것.
체게바라도 그랬던 게 아닐까. 시를 읽으며 그 시가 자신의 눈앞에서 목격하는 낮은 자들의 남루한 삶과 별개가 아니라는 것을 깨달았던 날들, 시를 읽으며 분노하고 눈물짓던 그 시간을 자신의 삶에서 지워버리지 않으려 발버둥치던 순간들. 그의 배낭에 들어있던 시집은 학문과 예술의 한 갈래로서가 아니라 그저 가지지 못한 자들, 너무나 쉽게 모든 걸 빼앗겨야 하는 이들의 삶 한 조각이었는지도 모른다.
3.
그러고 보니 시를 찾아 읽은 지도 아니 서점에서 시집을 사지 않은 지도 너무 오래되었다. 젊은 날 읽었던 그 많고 많은 시 중에서 오늘은 유독 안도현의 ‘너에게 묻는다’가 떠오른다.
너에게 묻는다
연탄재 함부로 차지 마라
너는 누구에게 한번이라도 뜨거운 사람이었느냐
결국 소설은, 시는, 문학은, 책은, 나에게 ‘묻는’ 놈들이다.
나의 부끄러움을 가리키며 말이다.
글 : 박현아 자원활동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