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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국근현대사Ⅱ] 8강, 진주 외공리 산 속에 묻힌 사람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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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0.18일에 있었던 한국근현대사 II 강좌 후기입니다. 늦은 후기 죄송합니다 ^^;
들어가며
오늘 강의는 이선생님께서 지방출장 다녀오신 관계로 조금 늦게 시작되었습니다.(그래봐야 5분정도 늦으셨습니다^^;) 눈에 띌 정도로 지난 시간보다 훨씬 많은 분들이 아카데미에 나와주셨습니다. 세어보니 대충 25분 오셨는데 남성은 저와 자원활동가 선생님 포함 여섯 명이었습니다. 다음 학기 역사 강좌에는 많은 남성분들이 관심 가져주시길 기대합니다..
오늘은 지난 시간 다루지 못한 토지개혁 부분을 마무리하고 남북전쟁(6.25)과 관련한 쟁점들을 이야기 나눠보았습니다.
위안부의 그림자
흔히들 ‘위안부 문제’ 하면 일제 강점기 시절 일본군에 강제로 동원된 위안부 여성들을 떠올리실 겁니다. 그러나 6.25 시절 한국군에서 기생촌을 운영하였는데 이 때 위안부에 동원되었던 여성들이 다시 동원되었다고 합니다. 그리고 베트남 전쟁 시기 현지 여성들을 중심으로 우리 군대에 위안부와 유사한 형태의 조직이 있었다고 합니다. 어쩌면 위안부 문제는 과거에 벌어진 일제의 만행이 아니라 오늘날 우리를 포함한 전세계에서 자행되고 있는 문제일지도 모릅니다.
출처 : http://www.koreahealthlog.com/719
북한사(史)?
그동안 우리는 한반도 3.8선 이남의 역사를 우리 대한민국의 역사로 배웠습니다. 국사책은 8.15 해방 이후부터 한반도 남쪽에서 벌어진 사건들을 중심으로 근현대사를 기술하고 있습니다. 공식적으로 북한사는 우리 대한민국의 역사로 인정받지 못합니다. 뉴라이트 계열 학자들 뿐 아니라 대부분 북한사를 알지 못하며 부정합니다.
하지만 우리가 생각해볼 문제가 있습니다. 우리 헌법은 우리 영토를 한반도와 그 부속도서로 한다고 되어 있습니다. 우리 헌법을 따른다면 8.15 해방부터 지금까지의 북한 역사는 어떻게 해석해야 할까요?
북한의 역사와 관련된 논쟁은 세 가지 정도로 말할 수 있습니다.
1. 앞서 설명한 바와 같이 우리나라에서 북한사를 어떻게 자리매김해야 할까요?
2. 남한에 진주한 미군은 해방군이고 소련군은 점령군일까요?
당시 미군은 직접통치를 하고 소련군은 간접통치를 했다고 합니다. 미군의 역할은 근현대사를 통해 잘 알고 있지만 소련군의 경우에는 잘 알지 못합니다. 당시 북측에 진주한 소련군의 입장은 “조선의 새로운 국가는 조선인이 건설하는 것이다.” 였다고 합니다. 대신 정치위원회 설립 시 소련이 강제로 민족주의자와 공산주의자를 1:1 비율로 구성했다고 합니다. 상대적으로 소수였던 공산주의자에게 유리한 조건인 것입니다.
3. 사회주의 혁명인가?
당시 북측에서는 조선노동당 창건을 전후한 1949년 8월부터 10월 사이의 사건들을 사회주의 혁명이라 하지 않고 인민민주주의 혁명으로 불렀다 합니다. 당시 레닌, 스탈린 등이 주장한 ‘사회주의 혁명’ 은 일반적으로 다음의 네 가지 조건을 갖춰야 했습니다. 첫째, 노동자와 농민이 연합한 정권, 둘째, 사유재산 불인정, 셋째, 상공업을 허용하지 않을 것, 넷째, 토지개혁이 이루어져야 합니다. 하지만 그 당시 북측은 토지개혁만 실시했기 때문에 사회주의 혁명이라 부르지 않았던 것입니다. 1970년대 이후 사회주의 혁명으로 규정한 것이 오늘날까지 이어져왔다고 합니다.
북한의 토지개혁
북한의 역사는 우리 학교에서 다루지 않으며 일반 대중이 접하기 어렵습니다. 특히 북한의 토지개혁은 북한 정권 수립 시기와 맞물려 있기에 우리들은 그 내막을 잘 알지 못합니다.
몰수대상은 일본인의 토지와 일본의 국유지, 친일파와 지주들의 토지였습니다. 지주들의 경우 5정보(1정보: 3천평)이상을 소유한 지주들의 토지를 전부 몰수했습니다. 법령 시행 전까지 기부하면 상관없기 때문에 지주들이 5정보가 안될 정도로만 남기고 다 기부하여 토지 강탈을 면했다고 합니다. 실제로 농사짓는 농민들만 분배대상이었으며 토지개혁에 대한 저항은 미미했고 상당수의 지주들이 월남했다고 합니다.
당시 종교단체의 토지도 몰수했기 때문에 종교적인 기반이 약화되었다고 합니다. 특히 특정 종교나 마을 지도자를 중심으로 잘 운영되던 마을 공동체가 토지개혁을 둘러싸고 계급 간 갈등으로 비화하는 경우가 많았다고 합니다.
한국전쟁? 남북전쟁?
1950년에 발발한 남측과 북측의 전쟁을 우리들은 6.25, 혹은 6.25사변, 한국전쟁으로 말합니다. 우리는 한국전쟁으로 통일했고, 북측은 조선 전쟁이라 부른다고 합니다. 민족의 비극인 한국전쟁에 대해 생각해볼 점들이 있다고 합니다.
우선 전쟁이 6월25일에 일어났는지의 문제입니다. 이선생님 말씀에 따르면1950년 6월 25일 전에도 38선을 중심으로 소규모 전투가 빈번하게 있었다고 합니다.
그 다음은 한국전쟁 혹은 남북전쟁이라 불리는 이 전쟁을 누가 시작한 것으로 볼 것인지의 문제입니다. 이 전쟁은 국제전으로 확대되었으며 총 21개 국가가 참여했습니다. 정확히 말하면 우리 남측을 도와준 16개국과 남북, 그리고 중국, 소련, 일본 도합 21개 국가입니다. 전쟁 전 이승만 대통령은 북진통일을 주장했고 김정일 또한 남진통일을 주장했다고 합니다. 49년 당시에도 소규모 전투가 빈번했다고 합니다.
전쟁의 시작을 6.25로 보는 것이 문제 있다고 이선생님께서는 말씀하셨는데, 이 대목에서 저는 약간의 의문이 들었습니다. 비록 6.25 전에 소규모 전투가 계속되었다 해도, 만일 북측에서 6.25일에 맞춰 대대적으로 탱크와 무기를 준비하여 한꺼번에 밀고 내려왔다면 그때부터를 전면적인 전쟁으로 볼 수 있지 않을까요? 오늘날 연평도 사건과 같은 북측의 여러 군사적 시도들을 도발이라고 하지 전쟁이라고 말하지는 않습니다. 전투의 양상이 점점 확대되어 시작 시기를 가늠하기 어려운 경우는 있을지 몰라도, 대규모 군대를 동원해 전면적으로 밀고 내려왔다면 그때부터를 전쟁의 시작으로 봐도 무방하지 않을까요?
이 땅에 전쟁이 남기고 간 깊은 상처들
하지만 전쟁을 이데올로기적인 시각이 아닌 다른 측면에서 바라보면 우리가 그동안 보지 못한 참상들이 드러나는 것 같습니다.
진주 외공리에서 600여구의 유골이 머리에 총탄자국이 난 채로 발견되었습니다. 당시 유골의 의복에 달린 명찰로 경기도의 모 상고 학생도 포함된 것을 확인하였습니다. 대부분은 부녀자였다고 합니다. 한국전쟁 당시 누가 이들을 정확히 언제 죽였고, 이들이 왜 죽었는지 지금도 밝혀지지 않았다고 합니다. 이러한 한국전쟁의 미해결 사건들이 많다고 합니다.
한국전쟁 초기 남한 정부에서는 평택 이남의 형무소에 있는 사상범을 모두 처형하라는 지시를 내렸다고 합니다. 보도연맹에 가입한 1500명이 처형되고 도합 3천여명이 처형된 사건이 보도연맹 사건입니다. 또한 전쟁 중에 많은 피난민들이 군인들에 의해 학살당했습니다.
한편 전쟁 초기 북측이 서울을 점령했을 때 잔류파 국회의원 중 54인의 국회의원이 전향했다고 합니다. 잔류파 국회의원들 중 김규식, 조소암과 같은 민족주의자는 자의로 남고 나머지는 한강다리가 폭파되어 못간 사람들도 있었습니다. 인민군의 공작도 있었지만 전향한 사람들은 공산당 지지성명을 했습니다.
반면에 일반 민중들은 살기위해 부역을 했습니다. 이들은 훗날 북진할 때 공산당에 협력했다는 이유로 처형되는 경우가 많았습니다. 부역 혐의로 민간인을 학살한 사건들이 오늘날 많이 밝혀졌는데, 고양시 금정굴에서는 1천여명의 민간인이 부역혐의로 굴 안에서 처형되었고 그 유골이 발굴되었습니다.
* 외공리 유골들. 출처 ; http://blog.ohmynews.com/malddug/
마치며
이선생님께서는 우리가 이데올로기적 시각에서 벗어나야 한다고 말씀하셨습니다. 이데올로기가 아닌 전쟁의 참상 그 자체를 놓고 일반 백성, 시민들의 입장에서 바라보았을 때 앞으로 나아갈 수 있는 것입니다. 그동안 우리는 이데올로기적인 입장에서 문제를 해결하고자 했기에 아직도 이 땅에 많은 이산가족들과 여러 피해자들이 고통 받고 있는지도 모르겠습니다. 여전히 왜 죽었는지도 모르는 수많은 유골들이 이 땅 어딘가에 묻혀있다는 생각을 하면 가슴이 아픕니다. 인간 생명에는 이데올로기가 없습니다. 진정한 역사는 이데올로기가 아닌 휴머니즘으로 쓰여야 하는 것이 아닐까요?
다음시간에는 답사가 예정되어 있습니다. 해방 직후에는 북촌이 정치적으로 중심지였다고 합니다. 여운형, 박헌영 등이 건국준비위원회로 활동하던 장소를 방문해 그들의 자취를 짚어보고 그 후에 박정희 대통령 시절과 관련된 청와대 주변의 여러 장소들을 둘러보는 코스로 예정되어 있습니다.
이날 강의 후에는 강의실에서 간단한 안주와 함께 맥주를 마시며 뒤풀이를 했습니다. 많은 참여자분들이 남으셔서 열띤 토론을 했는데, 여러모로 유익하고 즐거운 시간이었습니다. 언젠가는 강의실 밖에서도 이러한 자리가 마련될 수 있기를 기대하면서 10월 18일 강좌 후기를 마치고자 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