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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인문정치와 현대사, 그리고 주체> 5강
드디어 마지막 5강입니다! 마지막 강의는 "6월 항쟁, 다수가 만든 민주주의의 성공과 역설"이라는 제목으로 이영제 선생님께서 강의해 주셨습니다.
평소처럼 후기는 -하다체로 작성할게요 :)
6월 항쟁은 우리에게 무엇인가
6월 항쟁의 주체들은 동시대인들로, 6월 항쟁은 좀 더 우리와 관련된 이야기이다. 그러나 그것이 어떠한 의미를 갖는지, 6월 항쟁이 민주주의를 만들었다는데 그것이 무엇인지는 아직 모호하다. 6월 항쟁이 국가 기념일로 지정된 것은 불과 5년 전 일이고 20주년 행사에도 6월 항쟁 유가족은 참여를 거부한 일이 있었다. 6월항쟁의 성격또한 불분명하다. 6.10항쟁 혹은 87년 6월 항쟁이라고도 불리며 '항쟁'에 해당하는 부분은 contention, struggle, uprising, democratic movement 등으로 다양하게 불린다. 이중 가장 보편적인 말은 민주화운동에 해당하는 democratic movement이다. 이번 강의는 6월항쟁이 우리에게 남긴 것이 무엇인가에 대한 강의였다.
민주화 요구의 분출과 억압(85년 2.12 총선~86년 말)
독재 정권하에 있으면서도 민주화에 대한 국민들의 열망은 조금씩 분출해 나왔다. 이 열망은 신한민주당(신민당)에 대한 지지로 조금씩 표출되었다. 이들은 직선제 개헌을 내세웠으며, 85년 2.12총선에서 276석 중 67석을 획득해 제 2정당의 위치를 갖게 되었다. YS와 DJ의 합으로 신민당과 민한당이 결합함으로써 신민당 중심으로 야권통합이 이루어졌으며 이들은 의석 103석을 획득하였다. 이에 따라 개헌은 민정당이 마음대로 할 수 없게 되었고 형식적으로나마 야당의 동의를 거쳐야 하게 되었다. 이제는 장외(제도 밖) 뿐 아니라 국회 안에서도 민주화에 대한 요구, 특히 직선제에 대한 요구가 이루어지게 된 것이다.
학생운동또한 조직력이 더욱 높아져 학원 자율화를 주장하던 학생운동은 점차 정치 민주화에 문제의식을 두었고, 점차 정치화, 급진화 되었다. 이에 대응하여 정부는 학원안정법을 제정하였으나 이 조치에 대해 범야권 및 민주화 세력의 저항또한 상당하여 결국 법안은 철회된다. 이렇게 직선제 개헌 요구가 높아졌음에도 86년 전두환 대통령은 올림픽의 성공적 개최 이후, 즉 89년 이후로 개헌논의를 미룬다고 발표하였으며, 민주화 세력은 이에 반발하였다. 신민당과 민추협, 학생운동을 진행한 학생들은 개헌추진본부를 결성하고 개헌 추진 서명운동에 돌입하였으며 천주교 등 종교계와 여성, 문화, 학계 등의 시국선언도 잇따랐다.
정부의 억압에도 활발했던 야당과 재야세력, 학생들의 민주화 요구는 점차 분열된다. 신민당 개헌추진위원회 현판식은 국민, 민통련, 학생운동세력 등 다양한 세력이 참여한 가운데 잘 발족이 되었으나 대학가의 반미, 전방입소 거부투쟁과 이재호, 김세진 분신사건에 대해 민국련(신민당과 민통련 간 연락기구)은 소수 학생들의 반미 논리와 과격시위에 대한 비판서명을 발표하고 민통련은 민국련을 탈퇴함으로써 한 목소리를 냈던 야당과 재야세력은 분리가 된다. 이런 가운데 4월 30일 영수회담에서 이민우 총재의 "좌익 학생을 다스려야 하며 급진세력과 단절해야 한다"는 발언에 재야 민주화 운동세력과 야당과의 갈등은 더욱 심화되었다.
이러한 갈등이 폭발했던 것이 5.3 인천사건이다. 5.월 3일 인천 개헌 추진위 결성대회에서 재야 민주화 운동 세력이 직선제 개헌을 요구하면서도 신민당을 비판하며 격렬한 시위를 전개한 것이 이 사건이다. 야당과 재야 세력은 갈라서게 되었고, 국회에서는 여야 만장일치로 개헌특위가 발족하였으나 여당은 의원내각제를, 야당은 대통령 직선제를 요구하여 의견 불일치로 개헌특위는 유명무실화되었다. 이러한 상황에서 학생운동은 계속 이어지고 있었고, 개헌특위가 제 역할을 하지 못하자 야당은 다시 장외로 나와 투쟁을 진행하였다. 12월 24일에는 "선 민주화 후 내각제 협상을 할 수 있다"는 '이민우 구상'이 발표되었고, 이에 반발한 김대중, 김영삼은 통일민주당을 결성하였다.
6월 항쟁의 전개
박종철 고문치사 사건으로 개헌 열망은 더욱 광범위 하게 퍼져나갔다. 박종철 군 추도대회가 열리면서 '고 박종철 군 국민 추도회 준비 위원회'와 같은 전국적 조직이 형성되었고 운동방식에 대한 고민도 나타났다. 2.7대회와 3.3대회와 같은 민주화 대행진도 전개되었다. 정부는 이에 대해 민추협과 전국 105개 대학 압수 수색을 시행하였고 재야 인사 7백 여명을 가택 연금하였으며, 5만 병력을 동원하여 검문, 검색하였다. 아울러 전두환 대통령은 "개헌논의를 유보하고 현행 헌법으로 정부를 이양하며, 대통령 선거를 연내에 실시한다"는 4.13 호헌조치를 발표하였다. 이는 제도 내, 외에서 민주화 논의 및 개헌논의를 더 이상 허하지 않겠다는 것이다. 명동 성당에서 5.18 광주항쟁 희생자 추모 미사에서 박종철 군의 고문 치사사건이 조작되었다고 폭로함에 따라 <박종철 고문 살인 은폐 조작 규탄 범국민 대회 준비위원회>가 결성되고 6월 10일 규탄대회가 진행될 것이 결정되었다. 5월 27일 <민주 헌법 쟁취 국민 운동 본부(국본)> 발대식이 거행되었고, 야당을 참여하도록 할 것인가 말 것인가에 대한 갑론을박이 이어졌으나 야당까지 포함하기로 결정함으로써 모든 민주화 세력이 연합되게 되었다.
6월 10일을 앞두고 정부는 검문과 가택연금을 벌이고, 6.10대회장으로 예정되어 있던 성공회대성당을 원천 봉쇠한다. 6월 9일 이한열 군의 최루탄 피격 사진이 국내외 언론에 보도됨에 따라 6월 항쟁의 불씨는 더욱 촉발되었다. 6.10대회에는 전국 22개 지역 30여만명이 참여하였으며, 밤늦게까지 시위를 전개하던 "일부 학생과 시민 8백 명 가량"은 명동성당에서 농성을 시작하였다. 이 명동성당 농성 참여자들은 온건 노선과 반대 축에 서 있던 사람들로 항쟁을 지속시키는 징검다리 역할을 하였다. 시민들의 지지 방문이 이어졌으며, 근처 일반 회사원 '넥타이 부대'가 점심시간, 퇴근 시간을 이용하여 부담없이 참여할 수 있는 계기를 마련하였다. 시위 참여 방법은 다양하고 간단한 것들도 많았다. 6시에 손수건을 들고 흔든다든가, 9시 '땡전뉴스'가 시작할 때 불을 끄는 것 등도 포함되었다. 2만여 명이 시위에 참여하였으나 이후 군투입 빌미가 될 거라는 우려에 해산한다. 지역에서는 시위가 확대되었다.
6월 18일 최루탄 추방대회가 열렸다. 국본은 군 투입설이 유포되는 가운데 국민대회 개최를 강행해야 한다고 주장하는 세력과 여야 영수회담 진행 경과를 보고 신중할 것을 제안하는 세력으로 나뉘어 졌다. 24일 영수회담에서 "거둔 게 없다"고 평가됨에 따라 26일 국민평화대행진에는 무려 150만명이 참여하였다. 이에 대응하여 노태우 민정당대표위원은 직선제 개헌, 김대중 사면 복권 등을 담은 6.29선언을 발표하고 전두환 대통령은 수용하나 항쟁 시위는 불법으로 간주한다고 밝힌다. 이후 김대중, 김영삼, 재야세력, 학생운동 등 민주화 세력은 분열하였다.
6월 항쟁과 중산층
"부르주아 없이 민주주의도 없다"는 베링턴 무어의 말과 같이 민주화 이행에서 중산층의 태도는 민주화의 양과 질에 관련된다. 중산층개념은 모호한 면이 많아 개념 규정조차 쉽지 않다. 당시 서울대 사회과학 연구소에서 제시한 것은 20-60평 대 아파드 거주자였는데 이에 따르면 무주택자는 제외하게 된다. 강의는 중산층을 계급적으로 보기보다는 "운동권이 아닌 세력들", 즉 소극적 지지자들로 보았다. 중산층은 처음 신민당을 통해 제도 안 에서 소극적으로 분노를 표출하다가 점차 적극적으로 민주화 열망을 지지하고, 민주화 운동에 참여하게 되었다. 이들의 변모는 6월 항쟁에서 다수 형성의 계기가 되었다. 이들 일반 시민, 비조직화 된 대중, 그리고 특히 넥타이 부대는 당시 민주 세력에 대해 "빨갱이"라 칭하던 반공 이데올로기를 무력화하는 것이었다.
이런 차원에서 언급되었던 것이 노동자 대투쟁이었다. 뜬금없이 들릴 수도 있겠지만 6월 항쟁과 시기적으로 함께 했던 (그리고 생산직 노동자도 6월 항쟁의 주체였다.) 노동자 대투쟁은 "노동 삼권의 완전 보장"을 주장하며 민주주의의 확산을 꾀했다. 이런 점에서 6월 항쟁과 연관되어 말할 수 있겠다.
6월 항쟁과 다수
6월 항쟁의 주체는 야권, 재야세력, 학생운동세력, 노동자들, 가정 주부들, 자영업자들이 공통적으로 민주화를 요구한다는 점에서 동일한 집단이다. 즉 "최대 다수 연합"을 형성하였다. 그러나 동시에 이들 '다수'라는 점이 조건이면서 한계이기도 하다는 평가를 내릴 수 있다. '민주화 세력'으로 한 덩어리로 인식되나, 이들이 원하는 민주주의의 양과 질은 상이하며 그런 점에서 이들은 다수의 소수집단으로 다시 나뉠 수 있기 때문이다. 6월 항쟁의 주체로서 다수는 각자의 머릿속에 있는 민주주의 간 차이는 인정되지 않았다.
6월 항쟁은 분명 민주주의의 커다란 성과인 것은 사실이나 이러한 아쉬움이 "6월 항쟁에서 실질적으로 얻은 것은 직선제 뿐"이라는 평가가 나오기도 한다. 직접 참여는 이따금씩 이루어지며 국민들은 "선거때만 자유롭다"는 것이다. 87년 체제 이후 항쟁의 주체들은 모두 흩어지고 지금의 민주주의는 이중 압력을 받는다. 하나는 민주주의가 너무 방만하다는 입장으로 주로 보수측에서 나오는 의견이고, 또 다른 하나는 민주주의가 너무 적다는 의견으로 소수자 문제 및 사회복지를 중시하는 입장이다. 연합된 다수는 사라지고 민주주의 간의 줄세우기가 지금 사회의 자화상이다.
나가며
이번 강의 또한 흥미로웠다. 6.10민주 항쟁에서 막연하게 '민주화 세력'으로 단일하게 생각했던 존재들을 야당/재야세력/학생운동세력 등으로 나누어 본 것 또한 유익하였다. 다수가 차이에 대한 인식 없이 연합함으로써 누군가에게는 불충분한 민주주의가 주어졌다는 것이 6월 항쟁의 한계라는 지적 또한 생각해보지 못했던 것이었다. 그러나 이는 6월 항쟁의 한계라기보다는 민주주의 자체의 한계, 그리고 연대의 한계라는 생각이 들었다. 연대의 경우, 상이한 소수집단이 흩어져 있으면 각기 원하는 목표가 달성되지 않으므로 공동의 목표를 창출하여 서로 힘을 합하는 것이라 생각하는데, 이 과정에서 각자의 차이는 물론 염두에 두어야 하나 어느정도 유보될 수밖에 없다고 생각한다. 각자의 차이를 공동의 목표만큼이나 중시하면서 연대하는 것은 거의 불가능하다고 생각한다. 이는 6.10항쟁 뿐 아니라 다른 연대, 혹은 혁명에도 해당한다고 생각한다. 분명 6.10항쟁에서 "직선제만 얻었다"는 평가는 '6월 항쟁=민주주의의 완성'이라는 일반적 생각에 대한 아쉬움의 표현에는 적합할 수 있으나, 평가의 측면에서는 무리가 있다고 생각된다. 6월 항쟁에서 얻은 직선제와 '87년 체제'가 그 때에는 유보될 수밖에 없었던 '차이'에 대한 공론화 및 개선의 초석이 되었음은 분명하기 때문이다.
아울러 6월 항쟁이 "'선거때만 자유로운'인민을 만들었다"는 지적은 6월 항쟁의 한계로 다루기보다는 민주주의 혹은 대의민주주의의 한계로 다루는 것이 더 적합하다는 생각이 들었다. 선거 이외에 시민의 참여가 제대로 이루어지기 힘든 것은 대의민주주의가 태생적으로 갖고 있는 한계라는 생각이다. 나는 오히려 6월 항쟁은 우리에게 '자랑스러운 기억'을 가져다 주었고 이러한 자신감을 토대로 이후 점차 시민의식이 향상하고 있어 대의민주주의가 보완될 여지가 증대하고 있다고 생각한다. 물론, 현재 시민참여가 미흡한 것은 사실이나, 이는 민주화자체가 이루어진 것이 얼마 되지 않기 때문이라 생각한다. 한편, 현재 민주주의에 대한 개념 정의가 서로 다르며, 6월 항쟁 이후 정치적 민주주의는 공평하게 분배되었으나 다른 영역까지 침투된 것은 아니라는 것에 대해 중요한 지적이라는 생각이 들었다. 어떤 민주주의를 만들어 갈 것인지 끊임없는 진통을 겪을 것이다. 그 과정에서 중요한 것은 각 주체의 합리적인 시민의식이라는 생각이 든다.
종강소감
이번 강의를 끝으로 <인문정치와 현대사, 그리고 주체> 총 5강이 끝났습니다. 모두들 날도 더운데 오시느라 수고 많으셨습니다. 1층 카페 통인을 꽉 채워주셔서 마음도 따뜻했어요. (더불어 후기를 늦게 올려 죄송합니다.)
<인문 정치와 현대사, 그리고 주체>는 다섯 분의 선생님께서 다섯 개의 다른 사건에 대해 이야기를 해주신 거라 강의마다 미묘한 차이가 있었습니다. 그러나 공통적인 주제의식이 꿰뚫고 있다는 생각이 들었습니다. 2008년 촛불 시위때 저는 "이 많은 사람이 어디서 온 걸까"라는 생각을 한 적이 있습니다. 정말 그 많은 사람은 어디서 온 걸까요. 이러한 '사건'들, 강의에서 다루어진 3.1운동, 8.15해방, 전태일과 광주대단지 사건, 5.18 광주항쟁, 87년 6월 항쟁의 주체들은 역사의 전면에 나오지 않는 사람들이었습니다. 이들은 정치적, 경제 사회적으로 활동해 지금으로 따지면 네이버에 이름을 치면 인물 검색으로 나올 사람들이 아니라 대다수 이름없는 사람들이었습니다. 그런 사람들이 모여 근현대사에서 각기 전환기적 사건을 만들었다는 것은 놀랍기도 하고 흥미롭습니다. 앞으로 나올 '주체'는 어떤 자들일지, 그들이 추구할 가치는 어떤 것일지 궁금합니다. 이는 미래의 어느시점에 틱 던져지는 것이 아니라 지금의 문제의식에서 비롯되겠지요. 그리고 미래에 부끄럽지 않을 가치를 오늘 추구해가며 살았으면 좋겠습니다. :)
자원활동가 김수진