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시민정치와 시민불복종 4강 -비폭력은 시민불복종의 본질인가 (6/4)
세 여자가 있다. 나이는 40대에서 60대 초반까지다. 우리나라에선 한참 아이들을 키우거나 맞벌이를 하며 몸과 마음이 지쳐있을 때쯤이다. 하지만 이 세여자들은 유럽인이다. 남들을 만나면 직장이 힘들다거나 자식들이 어느대학에 들어갔다거나 하는 말은 하지 않는다. 직업에 대해 물어보면 ‘논다’고 말한다. 노는건 좋은데, 놀러다니는 장소가 남들과는 좀 다른 것 같다.
세명 중 한명인 엔지는 얼마 전 강정마을에서 활동하다가 강제출국을 당했다. 강정마을에 쳐져있는 울타리를 뜯고, 보트를 타고 해군기지 공사장안으로 진입을 시도하는 등 군인이 미워할 짓(?)을 많이 해서다. 업무집행방해죄로 강제출국된거니까, 정말 미운짓을 해서 쫓겨난거 맞다. 그런데 그녀를 포함한 이세명은 한국에서뿐 아니라 영국에서도 몇 번씩 체포되었다. 96년도 인도네시아가 동티모르와 전쟁을 벌일 때, 영국기지에 몰래 침입해 전투기를 부수었고, 98년에는 핵잠수함에 들어가서 조종실을 부수고 그 안에서 파티를 하다가 잡혔다. 둘다 현장에서 잡혔는데, 우리나라에서는 총맞을지도 모르는 이 위험천만한 상황을 겪고도 살아남아서는 법원에서 당당하게 ‘무죄’판결을 받았다.
무죄판결을 받은 이유는 둘다 국가의 행위가 불법의 여지가 있기 때문이었다. 전투기를 부술 당시 인도네시아는 동티모르를 점령하기위한 점령전을 벌이고 있었고 수많은 학살을 자행했다. 수출한 무기는 그 전쟁에 쓰일 게 뻔했고, 점령을 위한 일반인의 학살은 불법이다. 핵무기 또한 오랜 시간동안 많은 사람들에게 안좋은 영향을 줄 수 있으므로 불법이라고 국제재판을 통해 입증됬다. 둘다 국가가 불법의 여지가 있는 사례들이고, 시민이 국가의 불법을 막는 건 의무이므로, 그들은 무죄를 받았다.(심지어 96년에는 판사가 ‘더 많이 부술수록’무죄근거가 강해진다고 말했다고 한다)
▲ 영국인 평화활동가 엔지 젤터(61)가 제주 해군기지 공사현장 철조망을 자르는 장면. 이 일로 인해 엔지 젤터는 출국 명령을 받았다. ⓒ조성봉(독립영화감독) |
폭력은 뭐고, 비폭력은 뭐냐
일을 벌인 그녀에게 많은 언론/정치인들은 비난을 퍼부었다. 폭력적인 불법행위라는 이유에서였다. 그런데, 폭력이라는 말이 대체 무엇인가? 강연을 해주신 이대훈님(호칭이 싫다셔서..)은 강연당시 지금 강연을 듣는 것 만으로도 누군가에게 폭력을 저지를수 있다고 말했다. 불을 키기 위해서 사용하는 전기는 후손의 삶을 담보로 한다. 우리가 아무데나 구겨넣는 종이를 만들기 위해 원시림이 파괴된다. 원시림의 훼손으로 그곳이 삶의 터전이었던 누군가는 굉장히 고통스러운 삶을 살게 된다. 영국이 무기를 팔아서 돈을 벌고, 덕분에 많은 영국시민들의 삶이 나아지는 반면 무기로 인해 불행해지는 사람들의 삶은? 우리는 우리가 알지 못하는 사이에 다른 사람의 불행을 밟고 행복해질 수 있다. 망치를 들고 살상무기를 부수는 것만이 폭력이라고 말할수 있나? 세상은 폭력과 비폭력으로 말끔하게 나눠질수 없는 게 대부분이다.
또 사회가 운영되기 위해서 불가피하게 필요한 권력관계는 항상 폭력적일 수 있다. 평화적인 체제라고 인식되는 자유 민주주의도 마찬가지다. 다수의 의견이 받아들여진다면 소수의 의견은 무시당하기 마련이다. 그들에게 민주주의라는 제도 자체가 폭력적일 수 있다.
벤야민은 국가의 법 발달은 특정 폭력 억제를 위한 보편폭력의 독점이라고 했다. 시대나 체제가 바뀔 때마다 새로운 법이 제정되고 그 법으로 국가는 폭력을 사용하여 폭력을 통제한다. 법은 개인이 저지르는 폭력을 막기 위해 만들어 진 것이다. 하지만 개인보다 국가가 저지르는 폭력이 더 무지막지하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개인이 저지르는 폭력은 용서되지 않는 중죄고, 국가가 저지르는 폭력은 당연하다는 듯이 넘어가는 현실.
해결하지 못한 문제
벤야민은 신적폭력을 이야기하며 ‘정당화 할 수 있는 폭력’을 이야기 한다. 신적폭력(=시원적폭력)은 최종심판과 개벽을 위한 폭력으로, 체제가 바뀔 때 일어난다. 과거의 체제를 바꾸기 위해서는 산발적이고 조그만 폭력으로는 안된다. 때문에 불가피하게 과거의 시기를 과격하게 부수고 파괴하는 과정이 필요하다. 4.19나 프랑스혁명을 예로 들 수 있다. 그 시기에는 많은 사람들이 공동의 인식상태를 가지고 뚜렷한 적을 부순다.
흔히 반란과 혁명은 한끗차이라고 한다. 혁명들은 대부분 당시에는 반란으로 간주되어 기득권에게 억압당한다. 하지만 몇십년이 지나고 역사는 그들을 혁명가들로 규정한다. 반란도 마찬가지다. 그당시에는 혁명이라고 외치며 성공했더라도 결국은 자신의 사익을 위해 무고한 사람들을 죽인 예들이 얼마나 많았던가. 우리나라역사만봐도 숱하게 있어왔다. 이렇게 역사가 평가할 수밖에 없는 사건들을 어떻게 '시원적 폭력이다, 아니다'라고 규정할수 있을까. 그것 역시 역사에 맡겨야만 할까?
또 아직 풀리지 않은 문제가 있다. 국가가 명백한 불법을 저질렀을 때 과연 시민의 잘못은 없는걸까. 불법을 저지르는 권력자들은 대부분 대의민주주의를 통해 뽑은 사람들인데. 그들이 하는 일을 응원하겠다며 투표로 그들을 선발한 것 아닌가. 시민의 잘못은 분명히 있고, 그렇다면 그들은 이 체제에 문제가 생기는데 각자 한 몫을 담당한 거나 마찬가지다. 그런데 그들을 죽이거나 해를 입히는 것을 정당화 할 수 있을까.
강의는 끝났다. 의문은 여전히 남아있지만, 그래도 분명한게 있다. 최소한 우리사회에서 일어나는 ‘폭력적이라고 불려지는’저항들은 국가의 더 큰 폭력에 맞선 작은 힘이다. 강정마을, 쌍용차.. 시민들이 맞으면서 가만히 있어야할 의무는 없다.
글 : 신동은 수강생 (자원활동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