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스물다섯번째┃아름다운 청년 박우영, 그의 명랑대첩을 위하여!
인터뷰 · 글 : 박열음
아름다운 청년 박우영, 그의 명랑대첩을 위하여!
박우영씨를 알게 된 건 그의 그림이 먼저였다.
지난해 말 느티나무 서울 드로잉 4기 수강생들의 작품 전시회에서 유독 나의 눈길을 끌었던 그림 한 점.
가을빛으로 물든 어느 절 앞에 ‘함께 일하는 세상’이라 쓰인 피켓을 들고 서 있는 남자.
제목은 ‘함께일하는재단 노동조합’ 이었고 그 그림을 그린 이가 다름 아닌 박우영 씨였다.
낮은 지붕들, 오래된 골목길 풍경이 주를 이루는 작품들 속에 담담하게 자신의 목소리를 내고 있는 그의 그림이 인상 깊었고 문득 그림을 그린 이의 속내가 궁금해졌다.
그러던 차에 우영씨는 내가 회장을 맡고 있는 참여연대 그림 소모임 ‘그림자’의 신입 회원이 되었고 반가움과 호기심에 들뜬 마음으로 그를 만났다...
작품명 | 함께일하는 재단 노동조합
참여연대 느티나무하고 어떻게 인연을 맺게 되었는지 궁금해요
현재 직장에서 일하기 전에 워크캠프에서 간사로 일을 했었어요. 대부분의 비영리 단체 이미지가 더불어 잘살자 이런 거잖아요. 워크캠프에서 지구적으로 생각하고 지역에서 행동하자라는 슬로건 아래 참가자들에게 ‘세계 시민 교육’ 이런 걸 해주거든요. 저는 광고를 전공하다보니까 사실은 비영리 섹터에서 아는 게 없는 거에요. 청년들 앞에 나서서 이야기를 하는 입장인데 백그라운드가 없다보니까 책도 보고 이것저것 하다가 시민단체 강좌 많이 쫓아다니다보니 참여연대 강좌도 듣게 되었어요.
가장 인상 깊었던 강좌가 뭐에요?
이슬람 종교 관련된 것 하고 셰익스피어 비극이요. 민주주의 학교 관련 수업은 이것저것 많이 들었는데 복지 관련된 것도 듣고 시간이 허락하는 한 거의 다 들으려고 했던 거 같아요.
전 생활문화학교 열혈 수강생이지만 아직 민주주의학교 수업 경험은 전무예요. 서울 드로잉 수업은 어떤 계기로 듣게 되셨나요?
사실 작년이 저는 좀 개인적으로 힘들었어요. 워크캠프 일도 끝내고 새로운 일을 찾다가 잘 안 되었고 오래 사귀던 여자 친구와도 헤어지고 총체적 난국이었죠. 그래서 2012년은 뭔가 저에게는 좀 견뎌야 되는 해 같았어요. 다행히 일적인 면은 ‘함께일하는재단’ 에서 이어지긴 했는데 크게 막 고무가 되어서 활동가로서 일을 하겠다는 그런 정도는 아니었고 그동안의 트랙에서 크게 벗어나지 않는 일을 연명하는 정도였죠. 그 외에 충족해야 하는 일이 필요했던 거 같아요. 그래서 상반기에는 곡 쓰는 수업을 들었어요. 미디액트라고 하는 곳에서 아마추어증폭뮤직을 상반기에 했었고 그 때 수업을 같이 들었던 분 중에 어슬렁님이 있었어요. 사실 서울드로잉 수업은 진즉에 알고 있었는데, 그 수업을 듣고 변화를 느낀 사람에게 직접 만나서 들으니까 하반기에 해봐야지 하는 생각이 들었죠.
지난번 전시 때 봤던 그림도 그렇고, 우영씨가 일하는 곳에서 요즘 벌어지고 있는 일들이 궁금해요. 비영리 단체에 노조가 있다는 것도 신기한데, 조합원들과 돌아가며 1인 시위를 하고 있다고 들었어요.
‘함께일하는재단’이라는 곳, 말 그대로 일자리를 창출하는 것이 주요 사업인 재단에서 일을 하는데 정작 이 곳 직원들의 60% 정도는 비정규직으로 일을 하고 있어요. 저도 1년 계약직이고요. 제가 입사 하고 나서 첫 출근을 했는데 노동조합총회 안내지가 엘리베이터 앞에 붙어있는 거예요. 아니, 어떻게 비영리단체에 노동조합이 있지? 하고 갸우뚱 하면서도 되게 반가웠어요. 그 전 직장에서 일할 때 저한테 교육받는 청년들에게 인권얘기하면서도 정작 저는 휴가 하나 쓸 때도 눈치를 보거나 그런 것들이 비일비재했거든요. 뭔가 좀 더 이해받고 싶어서 선택한 직업인데 오히려 그 직장 내부에서는 비상식적인 것들을 목도하다보니 그 전 단체에서는 마냥 서럽기만 했는데 이번 직장에서는 그래도 이걸 같이 풀어내려고 하는 직원들이 있다는 게 반가웠어요.
함께일하는재단은 1998년 IMF 당시 금모으기운동으로 모인 국민성금으로 만든 공익재단이다. 일자리 창출, 사회적 기업 지원이 재단의 주요 사업이다. 그런데 2010년 새로운 상임이사와 사무국장이 선출된 이래, 내부 직원들을 전부 비정규직으로 채용해왔단다. 재단의 이름과는 전혀 어울리지 않는 처사에 직원들이 노동조합을 만들었고 비정규직 직원이 계약 만료를 앞두었을 때 정규직 여부를 논의하는 인사위원회를 구성하자는 '단순하고 소박한' 요구를 하고 있는데 이사진과 사무국장 이하 사측은 그러한 상식적인 요구도 들어주지 않고 있다고 한다.
저도 그렇고 노조 내에서도 이런 걸 해본 사람이 별로 없어요. 광고학과 다닐 때 운동권 총학생회가 학내에서 행사하면 돌아서 지나다녔어요. 여기 비영리 쪽 와서 강정마을도 알게 되고 지리산 케이블카 반대 지지해주고 하는 것들은 공공적으로 약자의 입장에 서주는 것이었는데 제가 갖고 있는 문제를 이렇게 드러내 본 건 처음이에요. 아침마다 출근길에 1인 시위 30분씩 하고 수요일 점심시간마다 1시간씩 조합원들하고 집회하고 있는데 1인 시위는 현재 50회 넘게 했어요. 저희 이사장님이 송월주 스님이시고 영화사라는 절에 계세요. 그래서 이 분이랑 대화를 하고 싶은데 안 만나주니까 저희가 일요일에 영화사 앞에 찾아갔어요. 그 앞에서 노조 위원장님이 1인 시위를 했거든요. 그 광경을 보다가 짠하기도 하고 그 때가 한창 서울드로잉 수업 들을 때였거든요. 이걸 그려야겠다는 생각이 들었어요. 나름대로는 이걸 전시하면 사람들이 좀 더 관심을 가져 주지 않을까 하는 것도 있었고 엽서를 만들어서 같이 할 수 있는 꺼리가 있지 않을까 했죠. 수업에 몇 번 참여하면서 그림 그리는 수준은 스스로 만족을 했으니 그 다음 활동으로, 제 그림으로 할 수 있는 것들을 찾았던 거죠.
우영님 말처럼, 비영리 단체 활동가들에게 무조건적인 희생을 요구하는 조직이 많아요. 야근도 밥 먹듯이 하고 주말도 없고. 그런데 또 하소연 할 곳은 없어요. 네가 좋아서하는 일 아니냐 이렇게 나오면 할 말이 없는 거예요. 전에는 비상식적인 처우에 대해서 절망만 했다면, 노조에 가입하면서 조금씩 자신의 문제에 초점을 맞추게 된 거네요. 함께 일하는 재단 내에서는 어떤 일을 하세요?
국제협력팀에서 아시아에 있는 사회적 기업의 성장에 필요한 지원을 해주고 있어요. 지난 여름에 했던 게 아시아 사회적 기업가포럼이었는데 전주한옥마을에서 행사 진행을 했었죠. 행사 마치면서 그 역할은 이제 다 끝났기 때문에 지금 새로운 역할을 정립해야하는데 그전에 정규직으로 일할 때는 당연히 내년에 여기서 일하는 것이고 작년에 했던 것을 발전시켜서 해야겠다 하는 생각이 있다 보니까 겨울에 쉴 때는 관련 책도 많이 보고 강의도 많이 듣고 했는데 지금은 롤 자체를 새로 정립하기도 그렇고 계약이 새로 될지 안 될지 불안한 상황이니까 좀 혼란스러웠어요. 연말에. 그래서 지리산을 갔다 왔죠.
비정규직이 비정규직 문제를 논한다는 거 자체가 참 힘들어요. 재계약 여부에 분명 영향이 있잖아요.
실제로 그랬어요. 2010년도에 입사한 분들 계약 만료 시점이 2012년 하반기부터 계속 도래했거든요. 그런데 확실히 노조활동 하신 분은 재계약이 안 되고 조합원이 아닌 분들은 재계약이 됐어요. 사측도 기민하게 움직이기 때문에 그것이 이유라고 하지는 않고 근태, 지각 몇 번 했으니까 이 사람은 안 돼 이런 식으로 하는데 사실은 노조 가입 여부가 크죠.
현재 직장에서 전공을 살리는 직무는 아니라고 하셨는데 광고학 전공 선택은 어떤 이유였나요?
한창 학과 선택할 때 사실 뭐하고 싶은지 잘 몰랐어요. 그런데 광고는 TV에서 늘상 보잖아요. 보통 그 정도 관심에서 많이 선택을 하거든요. 되게 창의적이고 재밌는 발상하고 그런 게 재밌어 보이니까 저도 그래서 선택했어요. 군대 제대하고 나서부터 공모전도 많이 나가고 인턴도 해봤는데 결국 대학생활 끝에 깨달은 건 내가 이걸 직업으로 하면 행복하지 않겠구나 하는 어떻게 보면 광고를 나름 해보다가 마지막에 얻은 결론은 그거였어요. 재능도 좀 필요하고 생각을 아주 특이하게 할 필요는 없지만 살아온 궤적이 다 빤하잖아요. 저도 그냥 고만고만한 아이였던 거 같아요. 또 다른 한 편으로는 이 분야가 되게 경쟁적인 거예요. 내가 이 경쟁 속에서 버텨낼 수 있을까 하는 부분? 학생일 때는 공모전 떨어져도 괜찮았는데 인턴을 하면서 보니까 내가 원하는 클라이언트 일만 하는 게 아니라 보험광고를 하라고 하면 내가 전혀 모르는 분야라도 보험사가 원하는 방향으로 해줘야 하잖아요.
졸업 전에 가장 크게 도전했던 게 삼성의 CSR에 대해서 국민들에게 잘 전달하는 게 주제였어요. 그런데 조금만 조사해보면 알잖아요. 삼성이 사회공헌을 많이 하는데도 사람들이 왜 싫어하는지. 이걸 우회해서 설득해야 하는데 제 속에서 동의가 잘 안되니까 제대로 된 결과물이 안 나왔어요. 당시에는 그런 이유라고 생각을 못 했는데 나중에 돌이켜보니까 저 스스로 완전히 동의나 납득이 되지 않으면 결과물이 잘 안 나온다는 걸 깨달았어요. 그게 광고인으로서만 보면 솔직히 꽝이잖아요. 어떤 주제를 던져도 클라이언트가 원하는 대로 해줘야 하는 건데. 그런 와중에 알랭 드 보통 책 중에 ‘불안’이라는 책을 보면서 나를 불안하게 만드는 것들에 대해서 다시 좀 봤던 거 같아요. 마케팅에서 얘기하는 게, 뭐든지 다 될 수 있다 너에게 달렸다. 네가 이걸 택하면 넌 이만큼 벌 수 있어 이런 것들의 반복 속에서 살았구나 싶고 제가 막 쟁취하려고 했던 것들을 조금은 놓을 수 있었던 거 같아요. 자의든 타의든. 그래서 단순히 기획하는 일이 좋은 거면 NGO나 이런 단체도 나쁘지 않겠다, 이 생각이 들 때 쯤 워크캠프에서 공고가 떴고 지원하게 됐어요.
그 때 면접 볼 때 그런 느낌을 처음 받았어요. 박우영씨는 여기에 왜 지원을 했나요? 라는 질문을 던지고 나서 보통 제 얘기를 안 들어요. 서류 들춰보거나 귓등으로 듣거나 그게 다 느껴지잖아요. 나도 현실적인 대답만 하고 책 안 잡힐 궁리만 하고 그랬는데 거기에서 한 팀장님이 계셨는데 제 이야기를 들어준다는 느낌을 받았어요. 저도 어럽쇼? 하면서 보통은 자기방어 하느라고 제 얘기를 다 안하는데 그 때는 제 이야기를 다 했어요. 그것들이 잘 이어져서 합격이 됐죠. 사실 면접 때 제 얘기 들어주셨던 팀장님이 저희 팀 팀장님이셨거든요. 그 분이 대안학교 교사 출신이셔서 저를 직원이라기보다 한 명의 성장해야 되는 주체로 봐주셨어요. 그래서 그런 가치에 대해서 많이 얘기하시고 민주주의 학교 수업 같은 것도 팀장님 따라서 많이 다녔죠. 지금 돌아봐도 그 2년 반에서 3년의 시간이 인성을 키우는 데 도움이 많이 됐어요. 워크캠프에는 해마다 기수가 있는데 제가 참가자들에게 교육을 해주기 위해서 스스로 공부를 하다보니까 확실히 가장 많이 배우고 수혜를 받은 건 저였어요.
2년 동안 푹 빠져서 일하던 곳을 그만두고 함께 일하는 재단에서 일 하게 된 계기는 뭐에요?
워크캠프라는 단체가 물론 초기에는 안 그랬겠지만 여기도 ‘국제’ 자가 붙다 보니까 이게 점점 애들 스펙, 학부모들이 남들하고 차별화시키기 위해서 보내는 하나의 사교육 시장이 되는 거에요. 그쪽에 치우쳐서 사업들을 많이 했고 저희 팀은 그래도 이건 아니다 하는 입장이어서 내부 갈등이 있다가 결국엔 팀 전체가 다 나왔죠. 멋있게 다 같이 때려친 건 아니고 구조조정 한답시고 와해하고 그런 물밑작업이 있어서 한 명씩 나오다가 결국은 저까지 다 나왔어요. 원래 직장에서 2년 정도 다니면 내가 여기 아니면 못 할 거 같아? 그런 의기충천한 대리급의 어떤 그런 게 있잖아요. 저도 그랬어요. 기간은 짧았지만 사업을 외국에서 받아오거나 두 나라 단체 찾아서 애들 파견해서 포럼도 해보고 그런 국제 청년 청소년 교류 분야에서 해 볼 수 있는 것들은 농밀하게 경험을 해본 거 같아요. 그래서 이 경험이면 어디서 뭔들 못 하겠어 하면서도 약간 규모가 있는 곳에서 시스템을 경험해 보고 싶더라고요. 또 결혼이라는 걸 전혀 생각 안 한 시점도 아니니까 일하는 방향은 엉뚱하지 않으면서 기성세대에게 이해받을 수 있을만한 타협점을 찾았죠. 근데 그게 생각보다 잘 안 됐어요. 함께일하는재단에서 발걸음이 이어졌고 사실 지난 1년 동안 재단에서 진짜 그냥 견뎠던 거 같아요. 고용이 불안정한 이유도 있었고, 막상 올해를 맞이하면서는 고민을 많이 했죠. 앞으로 스스로의 동기부여를 어떻게 해야 하나. 그래서 어제 하루 종일 방구석에서 혼자 워크샵을 했어요. 책장에 있는 책을 보다가 그동안 저한테 어떤 식으로든 영향을 줬던 책을 꺼내봤죠.
그가 아이패드에 저장해 둔 방구석 워크샵 내용을 찬찬히 들여다보고 있자니 짧지 않은 시간 국제협력, 비영리 분야에서 일하며 쌓아 왔던 그간의 내공이 느껴졌다. 자기가 가진 가치와 능력으로 세상을 더 좋은 방향으로 바꾸고 싶어 하는 건강하고 따뜻한 마음 씀씀이도. 인성에 영향을 줬다는 책들은 내가 좋아하는 책들과 참 많이 겹쳤다. 가운데 줄에 당당히 자리 잡은 만화책들(슬램덩크, 원피스 등등)을 보며 슬몃 웃음도 나왔다. 아, 이 순수하고 명랑한 청년 같으니! 혼자만 보기에 아까운 그의 미션과 비전을 살짝 공개한다.
미션 : 나에게 주어진 삶을 감정에 진솔하게 살아내며 의지가 있는 사람들과 명랑한 성장을 도모한다.
비전 : 퍼실리테이션을 위한 세상의 다양한 이론과 도구, 기술을 학습하고 사회를 위해 활용한다. 선의가 모인 그룹과 구성원의 평화로운 성장을 촉진한다. 더 많은 사람들이 소외된 생명과의 관계성을 인지하도록 영감과 경험을 제공한다.
핵심가치 :
연민 - 궁휼히 여기는 마음
의지 - 열정을 올바른 방향으로 유지할 나침반
명랑 - 꼰대가 되지 않을 유쾌함
창작 - 모든 일은 예술의 경지로 디자인
거창한 건 아니지만 이기적으로 하려고 많이 노력했어요. 요즘 웹툰 미생을 3일 만에 다 봤는데 거기서 ‘전체 그림을 볼 수 있어야 작은 시련을 견딜 수 있다’ 그게 되게 와 닿는 거예요. 그러니까 그전에 사회적 기업 만들려다가 제대로 안 되었던 거나 재단 오면서 이렇게 된 것들이 다 인생의 한 과정인데 큰 그림 없이 마음만 좋아가지고 하다보니까 실망도 많이 했던 거 같고 어떻게 비영리에서 이럴 수 있어? 하면서 되게 순진한 이런 것도 있고. 그래서 나름의 뭔가가 필요하겠구나 하면서 저도 되게 간절해져서 휴일에 방구석에서 밥해먹으면서 생각했던 거예요.
1인시위 중인 박우영님
1인 시위 할 때 어떤 생각이 들어요? 저도 집회 참여해 본 적은 있지만 군중들 속에 묻어가는 것도 아니고 우리가 강정이나, 쌍용차 문제 제기하는 거랑은 많이 다를 거 같아요.
자신의 감정에 솔직하기가 참 어렵구나 하는 생각을 많이 했어요. 딱 아침 30분인데도 108배하는 것처럼 스스로 생각이 정리 되는 거 같아요. 사람들이 힐끔힐끔 보고 지나가는데 직장에서 자기가 목소리를 제대로 내거나 스스로 타당할 만큼 만족하면서 과연 몇 명이나 일할까? 같은 직장 내에서도 사람들 지나가면 같이 했으면 좋겠다는 마음도 있고 또 여전히 내가 함으로써 나도 신입직원이고 비정규직이지만 저 사람에게 혹시나 어? 쟤도 저런 거 하네 그런 쪽으로 저 사람이 느껴지는 게 있겠지 그런 생각도 했어요. 그렇다고 해서 대놓고 야! 봐! 이런 건 아닌데. 그냥 그 몫을 해내는 거잖아요. 사실 회사 앞에서 아침에 하는 건 크게 부담이 없는데 일요일에 저희 이사장님 계시는 절 앞에서 할 땐 되게 짠하게 봤던 거 같아요. 사실 이 때 처음 간 건데 다들 긴장을 했거든요. 절에 어깨들도 많은 거 같은데 맞으면 어떡하지? 처음엔 이사장님이 안 계신 줄 알았어요. 그런데 청소하는 아저씨가 저희들 보시더니 안에 있으니까 들어가서 만나보라는 거예요. 여기 이렇게 서 있는 걸 안에서 보고 있겠구나 하는 상황이 묘하게 짠했어요. 위원장님 혼자 정장 입고 와서 서있고 저는 그냥 따라왔지만 뭐라도 하고 싶었어요. 그래도 그 때 그림을 배울 때였으니까 이걸 어떻게든 그려보고 싶다는 생각이 들어서 1인 시위 하는 모습을 사진으로 찍어서 집에 와서 그림을 그렸죠. 노조에서 신기해했어요. 어떻게 보면 노조위원장이나 집행부를 하시는 분들은 경험이 있거든요. 학생운동이든 뭐든 그런데 나머지 사람들은 경험이 없어요. 기존 노조가 주는 문화적 거부감이나 쟁의, 투쟁 이런 단어 저도 아직 낯설거든요. 그래서 집행부도 그걸 경계하는데 본인들도 그런 운동 외에 달리 경험이 없기 때문에 결국 그걸 하게 되고 한편으론 좀 더 세련되고 명랑한 것들을 했으면 좋겠다고 오더를 내려요. 그런데 이쪽은 사실 전혀 안 해봤기 때문에 창의력이 딸리는 것도 있거든요. 그래서 기존의 방식을 답습하기도 하고 그런데 거기서 제가어떻게 보면 생각 안하는 차원을 들이밀다 보니까 좋아하시더라고요. 그래서 빨리 2탄을 그려야 돼요 지금.
제가 회사 다닐 때 저희 노조 위원장하고 면담을 했을 때 그런 당부를 했어요. 집행부가 너무 칙칙하다. 예쁜 여자를 뽑아야 된다. 이래서 참여율이 저조한 거다. 그런 얘기를 우스갯소리로 했었어요. 제일 안타까웠던 게 그 노조위원장이 피피티를 되게 못 만들어요. 조합원들 내부교육 할 때 굴림체로 하얀색 바탕에 텍스트만 쭉 올리는 거예요. 너무 답답해서 피피티를 이렇게 못 만들면 안 된다. 요즘 애들은 이런 거에 마음이 안 움직인다. 아이폰 광고처럼 해야 된다.
저도 이쪽에 비영리 쪽 강의를 많이 들어서 알잖아요. 좋은 얘기 하니까 진정성도 있고 감동도 있는데 옆에 슬라이드를 보면 아, 정말 저건 아닌데 어떻게 해주고 싶은 거예요. 광고전공 했으니까. 그런 생각을 하다가 이거 안 되겠다 나라도 해야겠다, 그래서 작년에 직장 확정되기 전에 뭐라도 내가 활동가는 아니지만 내가 할 수 있는 걸 해야겠다, 그래서 아마추어PT 증폭기라는 4회 워크샵을 짜가지고 열린사회은평시민회에 하자고 제안해서 그 때 시작으로 일년 동안 틈틈이 한 세 팀 정도 진행 했어요. 나름 블로그도 만들고 거기에 신청 접수도 하고 적극적으로 홍보한 건 아닌데 월드비전 내부적으로 듣는 사람이 생겼다 이러면 가고 근데 정말 필요한 교육이에요. 사진만 잘 써도 확 다른데.
(워크샵 정보 : http://spongetree.com/60160715215)
새해 소망은 뭐에요? 지극히 개인적인 거.
전시회 하고 싶어요. 개인전.
하세요. 진짜. 저희 카페에서 하셔도 되는데. 무료 대관이에요.^^ 전시회 유치해 보니까 그런 게 좋아요. 작가들이랑 되게 친해지더라고요. 아무래도 자기 전시를 하고 있으니까 한 번 더 오게 되고.
대학교 때 밴드부 하면서 그 때부터 기타는 10년을 넘게 해왔는데 여전히 콤플렉스가 있어요. 영어랑 똑같은 거 같아요. 어디선가 나보다 잘하는 사람들이 듣고 있을 거 같은. 되게 자기만족이 떨어진다고 해야 되나? 서울드로잉 두 번째 수업 때 한옥마을 가서 눈앞에 있는 거랑 똑같이 그리려고 했어요. 그런데 스케치북 채우다보니까 어느 순간 공간이 부족해져서 왜곡을 할 수 밖에 없었는데 그게 더 재밌는 거예요. 건물을 있는 그대로 안하고 살짝 틀어서 하는 게. 아 똑같이 하지 않아도 되는 구나 깨닫고 나서 청파동 가서 건물을 그리는데 이 때 부터 되게 재밌었어요. 일부러 왜곡도 해보고 내가 이걸 똑같이 안 그리고 선을 정말 되는대로 쭉쭉 그어도 이걸 사람들이 전봇대로 봐주고 슈퍼로 봐주는. 내가 그리는 선을 오롯이 담아내는 그런 포용력이 음악에 비해 크다는 것 때문에 재밌어요. 음악은 쭉 잘하다가 한번 삐끗하면 그게 그냥 다 실패고 거슬리잖아요. 그런데 그림은 선하나 삐끗하고 색이 번져도 나중에 그게 과정으로 연결이 되고 여기에 담기잖아요. 그런 게 좋았어요.
그림자 멤버들하고 우영님 엽서를 다같이 봤는데 다들 아이디어가 너무 좋다고. 어설프게 알면 모르느니만 못 하다 이런 얘기도 하고. 저희 엄마는 배웠음에도 이런 느낌을 너무 가지고 싶은데 가질 수 없다 이런 얘기도 하시고. 오히려 너무 배운 게 독이 될 때가 있잖아요. 아, 그리고 우영님 그림에는 특유의 색감이 있어요. 노란색이 많이 들어가서 맑고 밝고 따뜻하고. 그림이 약간 어안렌즈로 보는 거 같은 그런 느낌 들어서 재밌어요.
그래도 저는 좋은 포지션에 좋은 스승을 잘 만나서 잘 배웠던 거 같아요. 이쪽 일이라는 게 어떻게 보면 급여라는 부분을 포기하고 왔잖아요. 스스로 동기부여 되어서 완충이 되어야 하는데 그래야 소셜 워커가 되고 헌신해서 일을 하는데 조직 돌아가는 꼴을 보니까 부조리한 것도 많고 되게 겉으로는 선을 추구하면서 장삿속 챙기고 그런 것 때문에 진절머리 나고 실망하거나 아니면 그래 뭐 별 수 있겠어 하면서 편승이 돼요. 밖으로는 대학생들 모아놓고 우리는 세계 평화를 위해서 제3세계 인권을 위해서 활동한다 하면서 정작 안으로는 자기 팀원이 휴가 쓴다고 하면 왜 이렇게 쓰냐고 그 사람 인권인데 말이죠.
액티브하게 자기 일로서 해야 되는 사람들이 이 분야에 많이 있어줘야 방향을 잡고 가는데 점점 관료적으로 되고 조직이 클수록 더 그래요. 특히나 ‘국제‘ 들어가면 코알라들이 엄청 많아요. 저희가 자주 쓰는 표현인데 그냥 국제가 주는 허상, 스케일이 있잖아요. 영어를 쓴다는 만족감? 물론 어떤 동기에서든 그래도 여길 찾아와 준다는 게 고마운 거지만 왔으면 좀 변화가 되거나 몰랐으면 깨달으면 되는데 그렇지 않은 경우는 안타깝죠. 대학생들도 비슷해요. 젊었을 때 한 때 이런 거에 관심 좀 가졌었지, 하지만 난 여전히 삼성에 가고 싶어 물론 그 직장을 나쁘게 평가할 수는 없지만 왜 그걸 하고 싶은지에 대한 것은 이런 활동을 했던 전적과 상당히 대척이 돼요. 사회구성원으로 살아가는 데 있어서 이 때 같이 얘기했던 걸 잊지 않고 재밌는 것들 같이 만들어 가면 좋겠는데 그냥 젊었을 때의 한 스테이지로 끝내버리니 아쉽죠.
제가 한동안 대학교, 고등학교 동창들을 좀 안 만났어요. 남자들이 어설프게 사회물이 들면 약간의 허세가 있잖아요. 난 정말 오랜만에 시간 내서 얘가 어떤 고민을 하고 사는지 궁금했는데 다 그냥 주변 잡는 얘기만 하다가 결국 마지막엔 그런 술집을 가자느니 그러더라고요. 어, 난 이게 아닌데 하면서 안 나가게 된 지 3년 정도 됐어요. 워낙 사람 많이 모이는 걸 안 좋아하기도 하고 친구들도 조금씩 느끼는 거 같아요. 우영이는 어떻게 살까 궁금해 하기도 하고 실제로 정말 제가 무슨 일을 하는지 모르겠어서 물어보는 애도 있고. 그래서 내가 생각하는 대로 오롯이 살아내는 것도 어쨌든 하나의 운동일 수 있겠구나, 그런 생각도 좀 해요. 삶으로서 보여주는 것들 있잖아요. 그림 그려서 페이스북에 올리는 일도 살아가는 과정을 보여주는 수단이고요.
퇴사 할 때 노조에서 제가 왜 그만두는지 안다고 하는 거예요. 회사 내에서 꽤 오랫동안 부당한 인사발령 건이 많았어요. 근데 열음씨가 당한 것도 아닌데 왜 그러냐고 하기에 제가 여기에 남아서 그런 일을 한 팀장님을 계속 모시고 일 할 수도 없고 그렇다고 내부적으로 그 분의 힘이 되어드리고 계속 싸울 용기가 나질 않는다고 했어요. 비겁한 거죠. 또 한편으로는 한 집안의 가장이거나, 아이들의 엄마였다면 차마 그럴 수 없었겠죠. 저는 결혼도 안했고 비빌 언덕이 있으니까 어쨌든 그만 둘 수 있었다고 생각하거든요. 그런데 그런 분들한테 팔자 좋은 소리처럼 들릴 수도 있고 철모르는 어린 것이 괜한 의협심에 불타서 저런다 그렇게 비춰질 수도 있고요. 그래서 퇴사한 이후에 더 잘 살아야겠다는 생각을 많이 해요. 다른 사람들에게 아, 이런 삶도 있구나 보여주고 싶기도 하고. 그런 의미에서 우영씨가 지금 하고 있는 일들이 대단하게 느껴져요. 내부개혁이라는 게 참 어렵잖아요.
진정성이라는 게 그렇더라고요. 내가 옳다고 생각하는 일들을 꾸준히 하다보면 언젠가는 정말 그렇게 봐 주기도 하는 거 같아요.
우영씨를 만난 건 사실 지난 달 중순이었다. 인터뷰 정리를 차일피일 미루는 사이, 함께일하는재단 노동조합의 1인 시위는 또 다른 형태의 투쟁으로 변화했다. 재단 1층의 주차장에 천막을 세우고 조합원이 돌아가며 24시간 농성을 하고 있다. 매주 수요일 밤에는 조합원과 그들을 지지하는 사람들과 함께 촛불문화제도 한다. 벌써 수많은 사람들이 찾아와 촛불을 들고 있고 뜻 있는 밴드들이 기타를 연주하고 노래도 부른다. 인터뷰를 마무리 짓지 못 한 부채감을 안고 처음 촛불문화제를 찾았을 때, 촛불에 반짝이는 많은 이들의 진심어린 눈빛을 보았다. 활동가들의 순수한 열정을 담보로 무조건적인 희생을 요구하는 비영리 분야의 첫 노동조합으로서, 너무나 상식적임에도 어쩌면 금기시 됐던 이야기들이 담담하게 그러나 절실하게 다가왔다. 농성 천막 한 구석에 우영씨의 아이디어로 만들어진 ‘명랑 노오트’가 있었다. 농성자들의 일기와 천막을 찾은 이들의 응원메세지가 빼곡한 작은 노트는 그 자체로 한 권의 시집이었다. 방문자들이 남기고 간 각양각색의 아바타들도 천막 천장에 매달려 농성자들을 지켜주고 있었다. 설 연휴동안 농성자들이 화장실을 이용하지 못하도록 자물쇠를 걸어버린 사측에게 조합원들은 비밀번호 맞추기 이벤트로 대응했다. 자물쇠에 4자리 숫자를 하나하나 대입하고 그 숫자들은 포스트잇에 그대로 적혀 굳게 잠긴 유리문을 알록달록 수놓았다. 꼰대들에 맞선 유쾌 발랄한 저항을 보며 오히려 내가 더 힘을 받았다.
작품명 | 명랑대첩
철탑위에 외롭게 올라가신 저 근로자도 처음에는 익숙치 않음 두려움이었겠죠. 상식을 찾아와서 비상식을 마주하는 현실 속에서 나의 목소리를 낸다는 일은 항상 두렵습니다. 그것을 이겨내는 힘은 '명랑함'이지 않을지. 문제가 끝나고 우리가 신명나게 한판 벌일 축제와 축배를 상상하는 힘이 앞으로 우리에게 필요한 힘이겠죠. 매일을 축제처럼 그리고 축배를 드는 그날까지 이 땅의 모든 소외된 사람들 함께 힘내기를 바라요.
(우영씨의 블로그 중에서)
설 연휴를 하루 앞두고 우영씨는 천막에서 철야농성을 이어갔다. 올해 들어 가장 추웠다는 그 밤, 천막을 지키며 그는 어떤 생각을 했을까.
잠들기 전에 침낭에 푹 들어가 천막 천장을 보니 사막이나 남극의 베이스캠프 같은 적막함이 있었어요. 사막이나 남극보다 어쩌면 더 삭막한 도시에서 농성하시는 분들이 다들 잠들기 전이 가장 고독하지 않을까하는 생각도 들고요.
이 땅에 비정규직이 존재하는 한, 누군가는 성당 종탑 위에서 어떤 이는 차가운 주차장 천막 안에서 앞으로도 이 적막하고 고독한 싸움을 계속 해야 한다. 그저 그들이 맞는 새벽이 너무 외롭지 않았으면 좋겠다. 우영씨 특유의 그 소년 같은 미소가 지켜질 수 있도록 아마 다음 주에도 나는 촛불을 함께 들 것이다.
아. 박우영님 작품... 정말 명랑하고 따스해요.
느티나무 기자단의 박열음씨의 공감 가득한 인터뷰, 잘 봤습니다. 수고하셨어요.
촛불... 같이 한번 들어볼까요.
드뎌,,,, 열음씨 데뷔작이 떴군요. 잘 읽었습니다. 고생많으셨구여...
개인적으로 우영씨를 알지는 못하지만, 많은 부분 공감하고 또 마음이 아픕니다.
추운날 고생한 만큼 좋은 결과가 있기를... 끝까지 '명랑' 잃지 마셔요^^
잘 읽었습니다. ^^
마지막 그림, 사람들이 앉은 곳 채색이 너무 좋네요. 언젠가 느티나무 언저리에서 뵙게 되겠지요?
박우영님의 그림과 얼굴이 잘 보입니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