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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세계종교의 이해Ⅱ] 6강, 자이나교와 시크교, 동아시아의 종교.
힌두교 2강, 불교 3강을 지나 벌써 여섯 번째 강의에 이르렀습니다. 오늘은 공자의 말씀과 제자들과의 대화를 모은 논어 몇 구절로 시작해서 인도의 자이나교와 시크교, 동아시아 종교의 특징을 공부했습니다. 마지막으로 유교에 대해 진도의 절반 정도를 나가고 나니 두 시간 반이 꽉 차더군요.
오늘의 강의 후기는 강의 내용보다 강의를 들으며 제가 생각한바 위주로 적어나가려 합니다. 자세한 강의 내용이 궁금하신 분들은 오강남 교수님의 저서 <세계 종교 둘러보기>를 참고하세요. 그동안의 제 후기보다 잘 정리되어 있답니다. ^^
1. 인도의 종교, 자이나교와 시크교
자이나교와 시크교 파트에서는 ‘아힘사(불살생)’ 이야기를 하고 가겠습니다. 아힘사는 인도 대부분의 종교에서 이야기하는 가치입니다. 특히 자이나교는 코로 들어가는 벌레가 없도록 마스크를 쓰고, 밝혀 죽는 생명이 없도록 빗자루를 쓸며 길을 지나다니기도 할 만큼 아힘사를 철저하게 실천한다고 합니다. 일찍이 우리는 간디가 아힘사를 중시했다는 것, 슈바이처 박사가 생명 경외를 추구했다는 것을 배웠었죠. 둘 다 자이나교로부터 영향을 받은 것이라고 합니다.
그러나 인도 종교 중에서 유일하게 시크교만은 아힘사를 반드시 따를 필요가 없다고 말합니다. 인간은 신이 창조한 것 중에서 최고의 창조물이기 때문에 다른 동물들을 잡아먹을 수 있다는 것입니다. 저는 이 때 사회생태주의의 북친이 생각났습니다. 모든 생태주의자들이 동등한 생물권을 말할 때 북친 역시 ‘다른 생물들과 동등하게 보기에 인간은 너무 진화했다’고 말했거든요. 그러므로 북친은 인간이 환경을 파괴한 것에 대한 책임을 지고 다른 생물들을 돌볼 의무를 다해야 한다고 말하긴 합니다. 어쨌든 인간이 다른 생물들과 다를 바 없는 하나의 생명인가, 아니면 좀 더 특별한 의미를 갖는 창조물인가 하는 점이 불교에서도, 생태주의에서도 갈리네요. 답은 우리 각자의 판단에 맡기는 걸로 하겠습니다.
아힘사를 지켜야 하는가에 대해서도 사람마다, 종교마다, 주의마다 의견이 다릅니다. 인간이 생태계의 먹이사슬에서 유리한 위치를 차지하고 있기 때문에 살생은 불가피하다는 입장이 있을 수 있고, 그렇더라도 생명을 존중하고 아끼며 노력해야 한다는 입장도 있을 수 있습니다. 단지 제 나름대로는 아힘사가 옳지만 나의 덕이 부족하여 실천에 어려움이 있을 따름이라는 결론을 내렸습니다. 특히 요즘과 같이 비윤리적인 대량 살충·살육과 자연의 순환 고리에서 벗어난 공장형 축산업의 세상에서는 더욱 불필요한 살생을 경계해야 할 것 같아요. 교수님께서도 이에 대해서 꽤 시간을 들여 말씀해 주셨답니다.
2. 동아시아의 종교
동아시아는 예로부터 유불도, 또는 유불선이라 하여 서로 다른 종교들이 적대감 없이 공존했습니다. 1886년에 한국에 왔던 선교사 헐버트는 이렇게 말했죠.
“사회생활을 할 때는 유교인, 철학적 사색을 할 때는 불교인, 그리고 문제에 부딪혔을 때는 영혼숭배자(무속인)가 된다."
잠깐 삼천포로 빠지자면 역시 비교종교학이 중요한 학문이네요. 헐버트가 종교들이 갈라져 싸우던 서양에서 자라난 외부인이기 때문에 동양 종교에 대한 이러한 관찰이 가능했을 겁니다. 전 대한민국 사람인데도 헐버트의 말을 듣고 나니 ‘아 그렇구나!’하는 생각이 들었거든요.
전통적으로 조화를 이루던 동양인의 종교관은 서양의 종교관에 익숙해진 현대의 우리들에게 경종을 울립니다. 저번 강의 때 제 옆에 앉으셨던 분의 말씀이 기억나네요. ‘종교의 믿음에 매몰되지는 않지만 각 종교마다 우리보다 먼저 삶을 겪고 고민을 했던 위대한 성인들의 가르침이 있어 그 지혜들을 쏙쏙 뽑아내면 내 인생에 좋은 지침이 된다.’
믿음이 꼭 하나여야 할 필요는 없지 않습니까? 세계 종교 강의를 들으니 모든 종교들이 훌륭한 가르침을 가지고 있고, 배울 점들이 있습니다. 동의할 수 없는 부분이 있다 해도 전체를 배척할 필요는 없습니다. 예를 들어 자이나교의 천의파는 하늘의 옷을 입었다는 의미로 나체로 다닙니다. 저는 오히려 여기서는 참 낭만적이라고 생각했는데 천의파에서는 여자는 유혹자일 뿐 해탈에 이를 수 없다고 믿는다고 해서 실망스럽더라고요. 그렇다고 ‘천의파 나쁘다!’가 아니라 천의파에서 배울 점도 있지만 당시의 인도에서는 그렇게 생각할 수도 있었을 거라고 받아들이는 게 옳은 것이겠죠.
동아시아의 종교들이 공통적으로 뿌리박고 있는 몇 가지 개념 중 하나인 음양도 동양의 조화로운 종교관을 잘 드러내줍니다. 음양은 우주가 음과 양의 상관관계로 이루어졌다는 믿음입니다. 우리도 잘 알다시피 음은 여성, 차가움, 어둠, 습함, 부드러움 등을 대표하는 원리이고 양은 남성, 더움, 밝음, 건조함, 강함 등을 대표하는 원리입니다. 언뜻 이분법적 사고가 아닌가 싶어도 음양의 원리는 두 가지가 상호작용하여 세상을 이룬다고 보는 조화로운 사고의 산물입니다.
<그림 1>음양의 상징물. 흑과 백이 균형잡힌 모습으로 어우러져 있다.
3. 공자가 창시한 유교
공자는 겸손하게도 술이부작(옛날부터 내려오던 것을 그대로 전수할 뿐 새롭게 창작한 것은 없다)이라 했지만 그는 분명 유교의 창조적 전수자입니다. 우리들에게도 유명한 다음 글귀는 그의 삶을 집약하고 있다고 해요.
내가 열다섯에 학문에 뜻을 두고(지학), 삼십에 일어서고(립), 사십에 흔들림이 없어지고(불혹), 오십에 하늘의 뜻을 알게 되고(지천명), 육십에 하늘의 뜻을 쉽게 따를 수 있게 되고(이순), 칠십에 하고 싶은 바를 해도 올바름에서 벗어나지 않게 되었다(종심소욕불유구). -<논어> 2장 4절
누구나 다음과 이런 생각을 해본 적이 있지 않을까 싶어요. ‘왜 나는 이런 세상에 태어난 것일까.’ ‘이 세상의 근원은 어디일까.’ ‘가끔씩 괜찮고, 종종 힘들어야 하는 내 삶의 의미는 무엇인가.’ ‘이럴 거면 대체 누가 나에게 생명을 준 건가.’ ‘도대체 나 같은 인생이 있는 이유가 있긴 한가.’ 어릴 적 농담 삼아 생일축하 노래를 개사해서 부르던 <왜 태어났니> 노래(가사: 왜 태어났니 왜 태어났니 인구도 많은데 왜 태어났니)가 단지 재밌게만은 들리지 않는 순간이 있는 것이죠.
그럴 때 공자의 저 말이 큰 위로가 될 수 있을 것 같습니다. 법륜스님이 ‘이미 태어난 것을 어쩌겠느냐, 왜 사는지를 찾기보다는 어떻게 살지를 고민하라’고 말씀하신 적이 있습니다. 일단 ‘어떻게’를 위해 노력하다 보면 어느 순간 공자처럼 흔들리지 않는 때가 있고, 하늘의 뜻을 알게 되고, 하고자 하는 바를 해도 그 뜻에 거슬리지 않는 날이 오는 거라고 생각해야겠습니다. 인생 길게 봐야죠!ㅎㅎ 중학교 도덕시간에 저 글귀를 배웠던 거 같은데 그 때는 뜻도 이해 못하고 그저 외우기만 했네요. 이제 보니 위대한 스승 공자의 70년 생이 모두 녹아있는 말인데 말입니다.
그 ‘어떻게’ 살 것인가에 대해서는 유교에서 수없이 많은 덕목들을 이야기합니다. 그 중에서도 교수님께서는 핵심적으로 정명(正名), 인(仁), 의(義), 충(忠)과 서(恕)를 꼽아주셨는데 저는 특히 ‘의’가 좋더라구요.
의는 이(利)와 대조를 이루는 덕목입니다. 보통 사람들이 나에게 이익이 되는가에 따라 판단한다면 군자는 ‘옳은 일인가?’를 묻는다고 합니다. 그러면 그것이 나에게 이롭든 아니든 실천한다는 것이죠.
‘군자는 의에 밝고 소인은 이에 밝다’
이 말이 근 며칠 동안 시시때때로 머릿속에 떠올랐다 사라졌다 또 다시 떠오르곤 했습니다. 내가 얼마나 그동안 이를 따지던 인간이었나 하는 한심함과 함께 앞으로는 ‘옮음’을 굳건히 따르리라 다짐했습니다. 마침 진로에 대한 것이나 미래에 대해 많이 혼란스러웠었는데 이제 좀 간단해진 것 같아요. 옳은지 아닌지를 따지는 일만 해도 머리가 복잡하니까 옳은 길을 갈까, 이득이 되는 길을 갈까 가지고는 고민하지 않으려 합니다.
정명(이름을 바르게 한다)은 주어진 이름에 맞도록 행동하라는 뜻입니다. 전 사실 여기에는 첫째, 이름 중에는 내가 택하지 않은 것도 있고, 둘째, 나의 여러 가지 이름들에 주어진 역할들이 충돌할 수도 있다고 생각하여 동의하지 않기로 했습니다. 이 걸 사회학적으로 이야기하면 전자는 귀속지위, 후자는 역할갈등 쯤 되겠네요. 사람 나고 이름났지, 이름나고 사람이 난 건 아니잖아요? 공자가 말하고자 한 것을 제가 오해한 걸지도 모르지만 공자는 당시 신분, 나이, 지위 등에 따른 서열이 엄격하던 시대에 맞추어서 큰 혼란이나 문제가 없길 바라며 이러한 가치를 말한 게 아닐까 합니다.
인도 참 좋은 가치인데요, 사람됨을 의미합니다. 사람됨에 대해서는 공자의 대답도 늘 바뀐다고 하고, 쉽게 정의내리기 힘들지만 직(直)과 예(禮)를 두 가지 요소로 설명하는 경우가 있습니다. 직은 솔직하게 남을 속이지 않고 마음을 거짓 없이 그대로 표현하는 것이고, 예는 그렇더라도 남에게 실례가 되지 않게끔 예의를 갖추는 것인데 이 둘을 균형 있게 유지해야 인입니다.
제가 이번 여름에 엄마와 크게 다투고 나서야 절실히도 깨달았던 것을 역시 수천 년 전부터 공자가 이야기하고 있었네요. 솔직한 것일 뿐이니까 괜찮을 거라는 생각에 속마음을 이야기한다 해도, 이해와 배려를 놓친 솔직함은 폭력에 가깝습니다.
다음 시간에는 맹자, 순자와 함께 유교를 마저 공부하고 노자, 장자가 있는 도교까지 알아볼 수 있는 기회가 될 것 같습니다. 그들의 인생은 우리에게 또 어떤 의미를 남기고 떠났을지 기대해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