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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세계 종교의 이해Ⅱ] 5강, 동아시아의 불교
10월에 어울리지 않는 후텁지근한 날씨를 피해 많은 분들이 느티나무 그늘 아래 모였습니다. 오늘은 강의 시간이 채 되기도 전에 부원장님께서 반야심경으로 시작을 여시네요.
반야심경은 불교에서는 매우 중요한 경이라서 그리스도교들이 주기도문 외우듯이, 불자들은 반야심경을 거의 외운다고 합니다.
그렇지만 수강생 대부분은 불교를 잘 몰라서 배우러 온 사람들이지요. 해서 알아들을 수 없는 법어 반야심경 대신 시처럼 예쁘게 다듬어진 한글본 반야심경을 함께 음미해보는 시간을 가졌습니다.
저는 수행이 부족해서 그런가 좋은 말인 것은 알겠는데 제대로 이해가 닿지는 않았어요.
그러나 역시 오강남 교수님은 저 같은 속인들을 위해 강의안에 들어있지도 않은 반야심경에 대해 즉석에서 척척 풀이하십니다. 멋져요!
서양에서 불교에 대한 관심이 점점 커지고 있는데 그 중에서도 특히 선불교가 가장 큰 인기를 얻고 있다고 합니다.
선종이라고도 하는 선불교는 원래의 범어로는 명상이라는 뜻의 ‘dhyana[자나]’라고 합니다. 이것이 중국에 오면서 ‘찬나(禪那)’가 된 것이 우리나라에 와서 ‘선(禪)’으로 읽히게 되고, 일본에서 ‘젠[zen]’으로 읽게 되었습니다. 서양에서는 스즈키 다이세쯔로부터 처음 선불교를 전해 받았으므로 그 영향이 지금까지 이어져 Zen buddhism이라고 합니다.
한국불교는 융합하려는 노력을 통해 중국에서 갈라졌던 여러 종파들이 교와 선으로 통합되어 통불교라고도 합니다. 통불교인 한국불교에서는 교보다 선을 중시하여 ‘선주교종(선이 주고 교는 따른다)’, ‘사교입선(이론을 버리고 선에 든다)’이라고 말하기도 합니다.
선불교는 붓다의 제자였던 마하카샤파를 1조로 시작되었습니다. 붓다가 영취산에서 설법하던 중 연꽃을 들어 보이니 마하캬사파만이 뜻을 알고 웃었다고 합니다. 우리가 잘 아는 염화시중(꽃을 들어서 사람들에게 보였다.), 염화미소(꽃을 드니 마하카샤파가 웃었다.)가 여기서 나온 말이지요.
시간이 흘러 기원후 6세기경, 28조인 보디다르마가 인도를 떠나 중국으로 갔습니다. 이 보디다르마가 바로 우리가 아는 중국 선의 1조 ‘달마’이고, 여기서 ‘달마가 동쪽으로 간 까닭은?’이라는 화두가 생겨났습니다.
선의 가장 기본 가르침은 깨달음, 바로 각(覺) 또는 오(悟)입니다.
무엇을 깨닫는 것이냐고 한다면 바로 내 속에 불성이 있다는 것을 깨달아야 합니다. 오강남 교수님께서 도마복음에도 “네 속에 하느님을 깨달아라.”라는 비슷한 말이 있다고 말씀하시면서 그리스도교의 복음서에 대해 재밌는 비밀(?)을 알려주셨습니다. 기회가 된다면 다음에는 꼭 서양 종교에 대한 교수님의 강의를 들어보고 싶습니다.
다시 돌아와 선의 가르침에 의하면 내가 지금 힘든 것은 내 안에 부처님이 있는 걸 몰라서입니다. 이 상태를 무명, 법어로는 avidya, 영어로 ignorance라고 합니다.
교수님은 무명의 상태를 원숭이에 비유하여 말씀해주시네요. 아프리카에서는 코코넛에 작은 구멍을 내서 원숭이를 잡습니다. 코코넛 구멍에 손을 넣은 원숭이는 욕심을 버리지 못하고 손을 움켜쥐고 있다가 결국 팔이 빠지지 않아 잡아먹히고 맙니다.
무명의 우리들도 이와 크게 다르지 않으며 여기서 벗어나는 것이 바로 자유입니다. 무명에서 벗어나 자유를 얻는 것은 많은 종교들이 중요하게 생각하는 포인트입니다. 신체의 자유나 내 마음대로 무엇을 할 수 있다는 자유가 아니라 내 안의 부처를 깨달음으로써 얻는 자유인 것이죠.
전 이상하게도 여기서 갑자기 노래 ‘마법의 성’의 ‘자유롭게 저 하늘을 날아가도’라는 구절이 떠올랐습니다. 무명에서 벗어나면 이 노래처럼 구름을 뚫고 하늘로 날아올라 자유를 만끽할 수 있을 것만 같지 않나요? 그런데도 막상 내가 가지고 있는 것들을 놓아야 한다고 생각하니 결코 쉽지 않을 것 같습니다. 돈도 사랑도 명예도, 지금의 이 안락도 계속 쥐고 있고 싶습니다. 원숭이를 비웃을 일이 아니네요.
그렇다면 대체 ‘어떻게’ 깨달아서 자유로워질 수 있는 걸까요? 선불교는 그 방법으로 사물을 여여(如如), 여실(如實)하게, 곧 있는 그대로 볼 줄 알아야 한다고 가르칩니다. 불언지교(不言之敎), 깨달음은 말로 되는 것이 아니며 불립문자, 교외별전, 직지인심, 견성성불 등을 통해 마음으로 다스려야 하는 것입니다. 이 대목 역시나 힌두교를 떠올리게끔 하는군요. 심층종교들이 보편적으로 말하고자 하는 것들이 비슷하기 때문에 어쩔 수 없는 것 같습니다.
개인적으로는 달을 가리키는 손가락에 깨달음에 대한 가르침을 담은 것이 인상적이었습니다. 달이 깨달음이고, 손가락이 깨달음에 이르는 수단이라면, 손가락도 물론 중요하지만 그 손가락이 달을 가려서는 안 되고, 우리들도 손가락이 아닌 달을 보려 해야 한다는 것입니다. 이러한 생각은 살불살조(殺佛殺組)로 이어집니다. ‘내 깨달음에 조사가 방해되면 그 조사를 죽여라. 내 깨달음에 부처가 방해되면 부처도 죽여라. 죽어 마땅하다.’라는 겁니다. 아무리 부처라 할지라도 내 깨달음에 도움을 주지 않고, 방해만 된다면 성이 아닌 속으로 분류됩니다. 교수님께서는 ‘예수를 죽여라’라는 가르침은 기독교에서는 어림도 없을 거라고 말씀하시네요. 그렇죠, 바로 그래서 불교가 참 매력이 있습니다. ^^
선의 깨달음에 대해서는 서양의 철학자, 심리학자들이 다양한 견해를 내놓고 있는데 그 중 켄 윌버의 해석이 흥미롭습니다. 켄 윌버는 우리의 의식을 미이분법적 의식(pre personal consciousness), 이분법적 의식(personal consciousness), 초이분법적 의식(trans personal consciousness)으로 나눕니다. 미이분법적 의식은 에덴동산에서 아담과 하와가 선악과를 먹기 이전, 자의식이 없던 상태와 같은 것이라고 볼 수 있습니다. 교수님은 6~70년대의 히피들이 이 단계에 있었던 거라고 하셨습니다. 자신들은 이성을 초월했다고 생각했지만 실은 이성을 포기한 것이나 다름없다는 것입니다. 보통의 우리들은 이분법적 의식으로 살아갑니다. 부끄러움과 모자람을 알고, 그것을 극복하는 과정에서 역사를 만듭니다. 마지막으로 초이분법적 의식이 있는데 이것이 바로 깨달음을 통해 넘어갈 수 있는 단계입니다. 이성을 초월하는 종교의 영역이죠.
선불교에 이어 우리나라, 일본, 티벳, 서양의 불교에 대한 이야기가 펼쳐졌습니다.
조선시대까지의 우리나라 불교 역사에 대해서는 고등학교 때 국사 공부를 하면서 자세히 외워서 기억이 나는데 근대 불교에 대해서는 오강남 교수님으로부터 처음 들었습니다. 억불정책의 조선에서 일제시대로 넘어가면서 우리나라 불교는 일본의 영향을 받게 되었습니다. 스님들도 더 이상 괄시받지 않았고, 절도 사대문 안으로 들어올 수 있게 되었는데 가장 중요한 것은 대처승이 많아졌다는 점입니다. 일본의 불교는 거의 다 대처승이어서 지금까지도 절을 아들에게 세습하는 경우가 많다고 합니다. 그런데 문제는 해방 이후 비구승만 남고 대처승들은 다 나가라는 명령이 떨어졌다는 데 있습니다. 당시에는 대처승이 수천 명이었고 비구승은 불과 수백 명 정도가 있을 뿐이어서 소수가 다수를 밀어내기 위해선 외부의 힘이 필요했습니다. 결국 조폭들이 동원되었죠. 지금도 그 때 조폭들이 불교계에 개입했던 영향이 남아있어 과거 청산은 우리나라 불교의 중요한 과제 중 하나입니다.
일본 불교 중에서는 료부신토 같은 재밌는 이야기들이 많았지만 니치렌슈가 기억에 남습니다. 니치렌슈는 매우 국수주의적이고 민족주의적인 성격의 불교로 일본을 대일본이라고 부르거나 욱일승천기를 그린 것도 니치렌슈에서 나왔습니다. 아름다운 종교의 가르침을 계승하는 과정에서 보수적이고 배타적인 성향을 띠게 된 다른 종교들이 생각나며 씁쓸한 기분이 들었네요.
티벳 불교는 토속 종교와 어우러지면서 독특한 모습을 갖게 되었습니다. 밀교의 특징을 가졌다고 말해지는데요, 주술을 강조하며 주문을 많이 외웁니다. 특히 우리나라 드라마를 통해 유행어가 되기도 했던 ‘옴마니 반메흠(Om mani padme hum)’이 가장 많이 외워집니다. 티벳 불교에는 큰 학파가 두 개 있는데 이름이 참 귀엽습니다. 노란모자 학파와 빨간모자 학파입니다. 이 중 다수를 차지하는 노란모자 학파의 지도자가 우리가 잘 아는 달라이 라마입니다. 달라이 라마의 뜻이 ‘큰 바다 같은 스승’이라는 것을 아셨나요? 학파 이름도 그렇지만 정치적·종교적 지도자 달라이 라마의 이름에 바다가 담겨있다니 티벳 불교는 꽤 감각적인 듯합니다.^^
서양 불교는 elite buddhism, white buddhism, new buddhism이라고도 부릅니다. 기복적이거나 의례를 중시하기보다는 참선을 중시하고, 현재 불교의 가장 큰 문제이기도 한 남녀 차별 대신 남녀평등을 지향합니다. 또한 종파주의 대신 연합주의, 종교적 고립 대신 종교 간의 대화를 추구하여 몇몇 학자나 스님들은 서양불교를 역수입해 배워야 한다고 보기도 한답니다.
강의의 마지막 30분은 둘씩 짝을 지어 세계 종교의 이해를 수강하며 변화한 점이나 느낀 점 등을 자유롭게 이야기하고, 상대방의 이야기를 서로 발표해주는 시간을 가졌습니다.
강의 후 카페통인에서 두 번째 뒷풀이를 함께했습니다. 수강생 중 한 분이 가져오신 와인이 어찌나 맛있던지 저는 제 안의 부처를 깨닫는 것에는 실패했지만 와인의 매력을 깨달았네요! 성함을 까먹었는데 정말 감사합니다.
이번에는 아무래도 강의를 몇 번 듣고 나서인지 첫 뒷풀이 때와 달리 어색함이 풀린 채 이야기가 오갔습니다. 서로 궁금한 점이나 생각한 점들을 이리저리 나누다 보니 다들 시간 가는 줄 모르고 있다가 나중에 시계 보고 깜짝 놀라서 일어났죠. 강의도 강의이지만 이렇게 서로 대화를 나누면서 배우는 점도 많은 것 같습니다.
밤이 깊어가는 만큼 종교에 대한 이해도 깊어갑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