강좌후기 l 강좌 후기를 남겨주세요
한국근현대사 4강 - 갑신정변의 길을 따라 걷다 (4/28)
갑신정변은 1884년 음력 10월 17일 우정총국의 낙성을 기념하는 축하연을 틈타 김옥균, 박영효, 홍영식, 서재필 등 젊은 양반 관료들이 메이지 유신을 모델로 하여 일으킨 정변이다. 이들의 계획은 지금 풍문여고 자리인 안동별관에 화재를 일으켜 소동을 일으키고 전,후,좌,우 군영의 4영사를 죽이면서 시작되는 것이었으나 화재가 생각보다 쉽게 진압되자 민가에 불을 지르면서 거사를 시행하게 된다. 이때 축하연에 참석했던 민영익은 밖에 나갔다가 일본 무사에게 변을 당하였다. 그는 중상을 입었지만 다시 연회장으로 들어왔고 그 때 연회장에 있었던 독일공사 멜렌도로프는 그를 자신의 집에 옮기고 미국 의료 선교사 알렌의 치료를 받게 한다. 그는 몇 달 뒤 완쾌된다.
갑신정변군은 우정총국에서 창덕궁에 가기 전에 일본 공사관으로 향했다. 그 이유는 일본공사에게 자신들의 거사에 지원을 해줄 수 있는지에 대한 확답을 받기 위해서였다. 그 당시 갑신정변을 주도한 급진 개화파는 일본의 지원 없이는 움직이기가 힘들었기 때문이었다. 그 당시 일본 공사관은 예전 공사관이 임오군란 때 전소되었기 때문에 부마 박영효의 집을 쓰고 있는 상황이었다. 그 위치는 현재 인사동 안에 있는 경인 미술관 자리이다. 이곳에서 일본 공사에게 병력 지원에 대한 확약을 받은 갑신정변군은 비로소 창덕궁으로 향한다.
[인사동 안의 경인 미술관] [금호문] [대조전 :고종은 이 곳에서 잠을 자다가 정변군을 맞았다.]
갑신정변군은 금호문을 거쳐 숙장문, 합문으로 들어가 고종에게 청이 쳐들어 왔다는 거짓보고를 하고 자신들은 고종을 보호하기 위해 왔다고 한다. 고종은 철종의 부인인 왕대비, 효명세자의 부인인 조대비 등 왕실 식구들을 거닐고 금호문으로 빠져나가 정변군의 비호를 받아 경우궁으로 향한다.
개화파의 입장에서 경우궁은 창덕궁에 비해 규모가 작기 때문에 왕실 가족을 감시하기엔 훨씬 더 수월한 곳이었다. 그 당시 왕이 자리를 옮기면 신하들은 알현을 하게 되어있었는데 정변군은 경우궁에 고종에게 알현을 하러 온 신하들을 한 사람씩 죽였다.
그러나 경우궁은 생활공간이 아니라 순조의 생모 수빈 박씨의 사당으로 죽은 이의 혼을 모신 곳이었기에 생활하기에 매우 불편했다. 왕과 왕비는 계속해서 환궁을 요청했지만 개화파는 들어주지 않았다. 그러나 일본 공사는 개화파와 상의도 없이 이를 수용했고 왕과 왕비는 다시 창덕궁으로 돌아간다. 정변이 일어난 그 다음날 저녁이었다.
셋째 날, 창덕궁에서는 전투가 일어났다. 일본군과 청나라 군대와의 싸움이었다. 이 때 조선의 병사들은 우왕좌왕하다 청나라의 편에 서서 일본군과 싸웠다. 정변군이 일본으로부터 병력을 지원받았다고는 하지만 실상 이때 들어온 일본군은 300명이 채 되지 않는 숫자였다. 일본군은 수적인 열세를 극복하지 못하고 후퇴하고 이 때 고종, 홍영식, 박영교는 북관묘로, 왕비, 대왕대비, 세자는 북문으로 피신한다. 그리고 개화파 일행은 거사에 실패하고 일본으로 망명을 가게 된다.
급진 개화파들이 일본에게 도움을 요청했던 이유는 그들의 지지기반이 취약했기 때문이었다. 그런데 일본 정부가 정변 개입을 승인하지 않는다는 훈령을 받게 되자 정변군은 힘을 잃고 결국 정변은 실패하게 된다. 그러나 거사가 실패한 중요한 이유 중 하나는 그들이 백성들의 호응을 얻지 못했기 때문이었다. 백성들에게 갑신정변은 급진 개화파가 외세를 끌어 들여 국왕을 속이고 중신을 죽인 것으로 여겨졌다. 그만큼 개화파는 권력을 장악하는 것에 급급하여 백성들의 지지를 얻지 못했고 백성들은 그들에게 적대적인 반응을 보였다.
갑신정변은 3일 천하라고들 말한다. 급진 개화파들은 그들이 정변만 일으키면 조선이 근대 국가가 되는 양 무리하게 거사를 거행했지만 그들의 천하는 그들이 왕과 있었던 3일 밖에 지속되지 못했던 것이다. 치기어린 꿈이었다.
[2012봄 교과서 저자와 함께 읽는 한국근현대사 강좌 길동무]
참여연대 4강 답사는 개화파의 이루지 못한 개혁의 꿈을 좇아 우정총국에서 일본 공사관으로, 마지막으로 창덕궁에서 일정이 마무리 하였다. 주진오 교수님은 “내가 어떤 생각을 하는 것만이 중요한 것이 아니라 그것에 사람들의 공감을 얻으려는 노력이 없다면 소용이 없는 것이다”라고 말씀을 끝맺었다. 공감을 얻는 것의 중요성은 시공간을 뛰어넘어 여전히 우리에게 중요한 화두로 남아 있다는 생각이 들었다.
후기작성 | 최혜진