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교과서를 통해 본 한국근현대사 1강
지난 7일 참여연대 아카데미 느티나무에 서 진행된 '교과서로 읽는 한국 근현대사' 강좌의 첫 번째 강의 '동아시아 질서 재편으로 본 3·1운동'을 요약 소개합니다. 이날 강의는 춘천교육대학교 사회과교육과 교수 김정인 교수(한중일 공동교과서 <미래를 여는 역사> 집필위원)가 진행했습니다. 다음 강의는 '무단, 문화, 민족말살 : 식민 통치 변신의 이해'를 주제로 김정인 교수가 이어서 진행할 예정입니다.
김정인 춘천교육대학교 사회과교육과 교수
동아시아 질서 재편으로 본 3·1운동
교과서에 기재된 3·1운동을 살펴보면 다음과 같다.
1918년 제 1차 세계대전의 종전이 가까워지는 가운데 미국의 윌슨 대통령이 제창한 민족 자결주의는 식민지, 반식민지의 민족들을 크게 고무시켰다. 그러나 강대국들의 반대로 민족자결주의는 패전국 독일의 영토에만 적용하고, 독일의 식민지는 위임통치 방식으로 승전국들이 다시 지배하는 것으로 결론이 났다. 하지만 많은 약소민족들은 민족자결주의에 희망을 걸고 있었고, 그 가운데 한국 민족이 가장 먼저 이를 배경으로 대규모 봉기를 감행하여 세계를 놀라게 하였다. 그것이 바로 3·1운동이었다.
제 1차 세계대전, 동아시아 패권 장악을 위한 전쟁
20세기 초 유럽은 삼국협상(영국-프랑스-러시아)세력과 삼국동맹(독일-오스트리아-이탈리아)세력으로 나뉘어 식민지를 둘러싸고 갈등했다. 양측은 발칸반도에서 정면충돌했으며, 마침내 1914년 7월 28일 오스트리아가 세르비아에 선전포고하면서 제 1차 세계대전은 시작되었다.
1차 세계대전이 발발하자, 일본은 일본의 국제적 위상을 높일 수 있는 기회가 왔다고 생각했다. 일본 여론도 대체적으로 참전을 지지했다. 참전에 따른 경기 활성화와 이로 인한 경제 성장을 기대했기 때문이다. 실제로 러일 전쟁 이후 만성적인 경기침체에 시달리던 일본은 1차 세계대전이 일어나면서 유럽 각국의 아시아 무역이 두절되자, 이를 대신하며 유례없는 번영기를 맞는다.
어떻게든 전쟁에 참여하고 싶었던 일본은 1902년 체결된 영일동맹을 기반으로 동맹국으로서 운명을 함께 한다는 구실을 내세워 독일에 선전포고를 한다. 일본은 독일과 싸웠지만, 전장을 동아시아 밖으로 확대하지 않았다. 일본의 참전 목적은 동아시아에서 독일 세력을 축출하고 패권을 장악하여 제국주의 열강 대열에 합류하는 것이었다.
중국은 일본과 달리 중립을 선언했다. 하지만 나라의 힘이 약하면, 중립선언은 제 힘을 발휘하지 못하는 법이다. 일본은 중국의 중립정책을 무시하며 제일 먼저 침략을 감행한다. 1914년 9월 일본 육국은 당시 독일의 조차지인 칭따오를 점령하고 산둥성 내 독일의 이권을 접수한다. 1915년 일본은 중국에게 독일의 조차지를 중국에 반환하기 위해 막대한 군사비를 투자하여 참전했으니, 그에 대한 대가를 지불해야 한다며 5개항 21개조로 된 요구서를 내밀었다.
'21개조 요구'의 골자는 첫째, 독일 조차지인 산둥 지역에서 일본의 권익 확보를 보장할 것, 둘째, 남만주와 내몽골에서 일본의 특수한 지위를 더욱 강화시킬 것, 셋째, 중국 주요 기업에 대한 일본의 참여를 보장할 것, 넷째, 정치,군사,재정 부문에서 일본인 고문을 초빙할 것, 다섯째, 중국의 치안 유지에 일본이 참여할 수 있도록 할 것 등이었다.
이는 일본의 대한제국 침략과 지배 과정을 연상시킬 정도로 중국의 주권을 심각하게 침해하는 내용들이었다. 이를 모두 받아들인다면 중국 역시 대한제국처럼 일본의 식민지로 전락하는 수순을 밟게 될지도 모를 일이었다. 또 일본은 위안스카이가 정권에서 물러난 후 실권을 장악한 돤치루이에게 1917년부터 1918년까지 1억 4,500만 엔의 차관을 제공했다. 이는 철도 건설 등 경제적 명분으로 제공되었지만, 실제로는 돤치루이를 옭아매기 위한 수단이자 정치적 군사자금에 지나지 않았다.
동아시아, 특히 중국을 둘러싼 대립구도는 일본 대 영국·미국을 주축으로 전개되었다. 일본의 21개조 요구에 대해 서구열강은 거세게 반발했다. 미국은 각국 간에 평등하게 누리고 있는 중국에서의 특권을 침해하는 중·일간의 어떤 협정도 승인할 수 없다는 반응을 보였으나 결국, 미국은 중국에서의 일본의 특수 권익, 일본은 필리핀에서의 미국의 권익을 각각 인정하는 랜싱-이시이 협정을 체결한다.
러시아는 21개조에 불만을 갖고 있었지만 일본과의 관계 악화는 꺼렸다. 러시아는 일본으로부터 무기와 군수품을 수입하는 처지인데다가 일본이 극동 방향에서 공격할 가능성을 배제할 수 없었기 때문이다. 또 중국에서 영국과 미국, 독일의 세력 경화를 견제하기 위해서도 일본과의 관계악화는 좋지 않았다. 일본 역시 중국 시장에 본격적으로 진출한 미국을 견제하기 위해서 러시아와의 동맹이 필요했다.
동아시아를 무대로 한 열강의 각축전은 종전이 가까워질수록 치열해 진다. 일본은 영국에게 자신이 점령한 구독일령 중 적도 이북은 일본이, 이남은 영국이 위임통치할 것을 제안한다. 이에 영국은 파리강화회의에서 일본을 지지할 것을 약속한다.
이렇듯 일본은 열강의 권익을 교차 인정하는 방법으로 이익을 취한다. 그 목표는 중국에서 특권을 유지하기 위함이었다. 서구 열강과의 협정을 통해 일본은 중국에 대한 특수 권익을 확실히 인정받는다.
조선도 일본의 식민지로 전락했다. 일본이 식민지 조선에 설치한 조선총독부는 식민 통치의 총 본산이었다. 조선총독부는 행정 조직은 물론 헌병 경찰과 군대 등을 동원하여 조선인의 정치활동을 철저히 금지시켰다. 정치,사회단체는 대부분 해산되었고, 언론과 저술 활동은 거의 불가능했다. 무단통치가 계속되는 동안 공개적인 민족운동도 불가능했다. 그러므로 국내에서의 민족운동은 대부분 비밀결사 형태로 전개되었다.
한편, 일본은 1917년 러시아 혁명이 성공하자 다음해 5월 러시아에 대한 공동방위를 명목으로 중국 정부에 비밀리에 '중일공동방적협정'을 체결할 것을 요구했다. 이는 일본과 중국 군대가 극동 지역에서 공동으로 작전을 수행하며, 이를 위해 일본은 중국 군대 안에 연락원을 두는 동시에 중국 영내에 군사기지를 공동으로 건설해 사용한다는 내용을 담고 있었다. 중국으로서는 굴욕적인 요구가 아닐 수 없었다.
이러한 과정을 거치면서 중국은 한 때 동아시아 근대화의 선두주자로서 선망과 질시의 대상이던 일본이 자신들의 주권을 위협하는 가장 위험한 패권국가라는 사실을 분명히 깨닫게 되었다.
3.1 운동은 윌슨의 민족자결주의의 영향을 받았다?
1917년 3월 러시아 혁명에서 혁명정부를 수립한 레닌은 각 민족의 자결권을 인정해야 한다고 선언했다. 이는 전후 평화질서의 기초로 자리 잡는다. 미국의 윌슨 대통령은 파리강화회의를 통해 민족자결주의를 역설했다. 바야흐로 '민족자결'의 시대가 도래한 것이다.
당시 유럽의 정치 관행에서 보자면, 유럽의 양쪽 날개에서 주장된 민족자결주의는 대단히 진보적이며 도전적인 것이었다. 윌슨과 레닌의 민족자결주의는 용어의 동일성으로 인하여 내용의 차이가 드러나지 않았다. 하지만 윌슨의 민족자결주의는 유럽 지역과 패전국에 국한시키려 한 반면, 레닌은 모든 식민지 독립을 주장했다.
물론 처음에 윌슨도 자신의 민족자결주의를 패전국의 식민지 문제에만 적용되는 것으로 국한시키지 않았다. 그러나 베르사유 강화회담에서 해결 가능한 식민지 문제는 패전국의 식민지 문제였다. 그렇다면, 제 3세계에 반제국주의, 반식민지를 외치던 민중들은 이러한 사실을 몰랐던 것일까.
다음은 기미 독립선언의 서명자 오세창의 신문조서이다.
문 : 민족자결이란 것은 병합 또는 정복된 전 세계의 모든 나라를 포괄하는 것으로 생각했는가, 또는 직접 전란에 관계가 있는 나라에 국한되어 있는 것으로 생각했는가?
오세창 : 그것은 전란에 관계된 나라에 대해서는 실행되고 그 밖의 나라에 대해서는 곤란하다고 생각했다.
문 : 그런데 조선에서 민족자결의 취지에 의하여 독립선언을 발표하고 운동을 하게 된 것은 어떻게 된 일인가.
오세창 : 그것은 세상의 풍조를 생각하고 다른 사람이 주창하므로 가담했는데, 하나는 전 세계의 사람이 민족자결로 소요하고 있는데도 홀로 조선만이 침묵하기 있기보다 실행은 되지 않더라도 역사에 남기기 위하여 조선인도 민족자결의 의사가 있다는 것을 발표할 필요가 있다고 생각했기 때문이다.
미국에서 인도의 독립운동을 전개한 라이(Lajpat Lai)도 윌슨의 민족자결주의가 인도에 적용되지 않는 것을 알고 있었지만, 패전국뿐 아니라 전승국인 영국의 식민지 인도에도 적용되어야 한다는 주장을 하였다.
결론적으로 윌슨의 민족자결주의는 당시 전 세계에 불어 닥친 반제국주의 운동을 위한 구실이었다. 또 윌슨의 민족자결주의가 전 세계적으로 확산될 수 있었던 것은 3·1운동을 포함한 반식민지 민중의 독립운동 때문이었다.
윌슨은 즉각적이고 급진적인 식민지 해방에는 반대했지만, 식민지 '해방의 전도사'로 부각된 자신의 이미지를 수정하려는 노력도 하지 않았다. 민족자결주의를 통한 미국의 전후 국제질서 수립은 영국과 프랑스, 일본 등 승전국에게는 불편한 일이었다. 결국 1921년 개최된 워싱턴 회의에서 일본은 산둥 지방에 대한 이권을 중국에 양도하게 되고, 이 사건은 미국과 일본의 이해관계가 대립되고 있음을 알리는 신호탄이었다.
3·1운동은 왜 평화적인 만세시위로 전개 되었나
3.1운동을 준비한 세력은 독립 만세 운동의 방향을 세 가지로 정리하였다. 첫째, 국내외를 향한 독립 선언, 둘째, 파리 강화 회의, 일본과 미국에 대한 독립 청원, 셋째, 평화적인 만세시위. 왜 독립을 위한 '무장투쟁'을 선택하지 않았을까?
1919년 3월 1일 오후 2시 탑골공원에 모인 학생과 시민은 독립선언식을 가지고 만세운동을 시작한다. 오늘날 대중의 머리에 존재하는 3.1운동의 이미지는 장이 열린 시골마을에서 한복을 입은 여학우(유관순)가 태극기를 흔드는 모습이다. 그러나 당시 시위의 시작은 도심이었다. 도시에서 시작된 시위는 철도와 간선 도로를 따라 인근 도시와 농촌 지역으로 점차 확산되어 갔다. 3월 중순 전국 화된 시위는 두 달 간이나 지속되었다.
시위가 도시에서 촉발하고 농촌으로 번져가는 것은 새로운 경험이었다. 동학농민운동은 전라도, 충청도, 경상도, 강원도 등 중남부 지방의 농촌을 배경으로 확산되었었다. 3.1운동 이후 농촌은 더 이상 민족 운동과 민주화 운동의 중심공간으로써 그 역할을 다 하지 못하고, 대신 도시가 그 역할을 확고히 하게 된다. 1926년 6.10만세운동과 1929년의 광주학생운동도 도시를 배경으로 하는 민족운동이었다. 이처럼 근대화를 거치면서 시위 공간이 변화하는 도정에서 3.1운동은 전환기적 분기점에 해당한다.
무단통치는 조선인에게 권력도 여론도 허용하지 않았다. 때문에 3.1운동을 조직적으로 주도할 지도부가 존재하기 어려운 상황이었다. 특정한 지도부의 조직 없이도 3.1운동이 전국적으로 확산 될 수 있었던 것은 누구든 시위를 조직하고 참여하고자 했던 대중적 자발성 덕분이었다. 시민들은 남녀노소를 분물하고 태극기를 들고 만세를 외치며 시위를 이끌었다. 이런 사람들을 지칭하는 '만세꾼'이라는 단어도 생겨났다. 만세꾼은 시위가 전국적으로 확산되는데 기여했다.
2008년 광화문에 촛불을 든 여고생들이 등장했던 것처럼, 3·1운동도 탑골 공원에 태극기를 든 여학생들이 있었다. 시민들은 일본 순사가 시위에 참여한 여학우를 폭력적으로 진압하는 것을 보고 더욱 분노했다. 또 당시 인쇄기의 보급은 3.1운동의 촉매재로 작용한다. 각종 유인물과 신문 등의 인쇄매체는 간단한 구호에서부터 시위 계획, 각지의 운동 상황을 알리며 투쟁을 독려했다.
3.1운동은 독립이라는 목적 달성에 있어서 실패한 운동이라고 볼 수 있으나, 3.1운동의 경험은 주체적 시민의식과 운동의식을 깨닫는 계기가 되었다. 시위의 주체들은 전쟁으로 인해 나라를 잃은 것이 아닌, 강화도 조약이라는 외교정책의 실패로 일본의 식민지가 되었다고 판단했다. 그렇기 때문에 외교를 통한 식민지해방과, 이를 촉구하기 위한 평화적 시위를 진행했다. 또한 3·1운동은 도심에서 민중의 자발적 의지로 일어난 근대적 시위운동의 근원이라고 할 수 있다.
중국 5·4운동, 일본 제국주의 저항운동?
1차 세계대전이 연합국의 승리로 끝나자, 중국은 독일에게 빼앗긴 산둥성을 되찾고, 주권을 회복할 수 있는 기회라 생각했다. 그러나 1919년 4월 파리강화회의는 산둥성의 이권을 일본에게 넘길 것을 결의했다.
이에 5월 4일 약 3,000여 명의 학생들이 거리로 나와 '강화조약 조인을 거부하라', '반드시 산둥성의 이권을 회수하자', '21개조 요구를 폐지하자' 등의 구호를 외치며 시위를 전개했다. 베이징에서 시작된 동맹휴학은 곧 전국으로 확산되었다. 정부는 학생과 청년들을 대량으로 검거하면서 적극적인 탄압으로 응수했다. 약 1천여 명의 학생들이 체포되었고, 이 소식이 전해지자 시위는 더욱더 거세졌다. 마침내 6월 28일 파리강화회의에 파견된 중국대표단은 베르사유 조약에 대한 조인을 거부하는 결과를 만들어 낸다.
이처럼 5.4운동은 학생이 촉발하고 민중이 동참하여 강화 조약 조인 거부와 매국노 처벌이라는 주권자로서의 권리를 요구하며 결국 원하는 바를 얻어낸 소중한 역사적 경험이었다. 이 경험은 국민의식이 형성되면서 새로운 주체를 중심으로 국민국가를 수립하려는 운동으로 이어졌다.
동아시아적 역사 관점의 필요
우리를 포함한 동아시아 국가들은 과거부터 지금까지 서로 밀접하게 연관되어 있다. 더구나 현대에 들어서는 이 관계가 한층 더 강화되고 있다. 하지만 반면에 갈등의 요소도 포함하고 있다. 특히 한·중·일, 3국은 역사 논란을 겪고 있다.
그러나 우리의 <현대사>교과서에는 동아시아 국가들이 차지하는 비중이 적다. 대부분의 역사가 우리 시점, 일방적 시점에서 쓰이고 있다. 한쪽으로 치우진 역사 기술은 평면적인 역사관점을 심어주고 또 그것이 갖는 민족주의, 국가주의적 관점은 나아가 동아시아의 평화를 방해하고 갈등의 해소에 장애가 될 가능성이 크다. 세계사적, 동아시아적 흐름 속에서 우리의 역사를 이해했을 때 비로소 동아시아의 평화적 관계를 형성해 나아갈 수 있을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