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집의 인문학 2강 한국 근현대 주거의 존재방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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8월 30일부터 가을학기 강좌 [집의 인문학 : 아파트 공화국에서 다시 집을 생각한다] 강좌가 시작되었습니다.
이번 강좌는 단순히 자산증식의 수단으로서의 집이 아닌 사람과 사람의 삶이 엮이는 공간으로서 집의 의미를 재발견하고 주택정책과 가족의 의미까지 보다 폭넓게 바라볼 수 있는 기회를 제공하기 위해 마련되었습니다. 강좌소개 보기>>
2강의 강의정리 후기는 자원활동가 이현정 님이 작성해 주셨습니다.
산업혁명 없이 발달한 도시주택 변천사
집의 인문학 2강, ‘한국 근현대 주거의 존재방식’ 후기
2011 참여연대 느티나무 아카데미 가을강좌 ‘집의 인문학’은 작년부터 기획되었다고 한다. 의, 식, 주. 입고, 먹고, 거처하고. 사람이 살아가는 데 있어서 꼭 필요한 것들이다. 이 중에서 주, 즉 집은 대한민국에서 ‘자산증식’의 수단으로 인식되는 경향이 여전하게 강하다. “주거문화, 부동산 문화를 변화시키는 씨앗이 되면 좋겠다”는 느티나무의 바람에 100% 동의하며 집의 인문학 강좌를 소개한다. 2강은 경기대 건축대학원 안창모 교수께서 맡아주셨다.
대한민국에 노동자 주택이 없는 이유
도시주거와 근대도시는 어떤 차이가 있을까? 도시주거는 ‘도시에 있는 주택’이다. 시간과 상관이 없다. 근대 이전에는 어느 지역이라도 역사 중심이 될 수 있었다. 그런데 근대는 도시중심 역사이다. 그 이전 주거와 다르다. 산업혁명은 공업화→자본축적→도시화를 거쳤다. 도시에 노동자가 밀집하면서 주택 문제 해결을 위해 건물이 높아졌다. 유럽의 일반 모습이다.
우리는 산업혁명 없이 근대를 맞이했다. 그것도 식민지로. 유럽의 근대주택은 노동자의 주택이다. 노동력 확보를 위해 싸고 빠르게 공급했다. 우리나라는 산업화 없는 근대화 속에 근대주거가 등장했다. 일제시대에 식민 지배를 하는 일본 사람을 위한 집합주택이 나타났다. 집합주택은 조선정부가 소유한 땅 중 빈 용지에 지었다. 도시변화의 시작으로, 우리나라 근대주거의 중요한 특징 중 하나이다. 집합주택은 도시 한복판에 존재했고, 중상 이상의 질을 가졌다.
성저십리로 서울 이해하기
한양(서울)은 도성과 성저십리(城底十里)까지를 이른다. 성저, 성 아래, 십리는 약 4km. 한강부터 성곽까지의 거리가 약 4km였다. 성저십리에는 사람이 별로 살지 않았다. 그런데 왜? 서울에 포함시켰을까? 성저십리 내에서는 묘를 쓸 수 없었고 나무를 베지 못하게 했다. 오늘날 그린벨트 개념이다. 다만, 왕의 묘는 성저십리에 쓸 수 있었다. 그린벨트는 사회주의 국가의 도시계획인데 조선시대에 이런 것이 있었다. 나무는 강원도나 충청도에서 베 한강 동쪽에서 수송했다. 조선시대에 서울을 이해하는 관건은 도성이고 근대시기 서울을 이해하는 관건은 성저십리의 도시화이다.
▲ 성저십리 안에서는 묘를 쓸 수 없고, 나무도 벨 수 없었다. 사진출처=www.rekor.or.kr
식민지 아래에서도 도시화는 이뤄졌다. 하층민은 도성 바깥 구릉 위에 몰려 살았다. 1920년대에 굉장히 많아졌다. 초등학교 다닐 때 공동묘지 전설이 있지 않았나? 근거 없는 얘기는 아니다. 당시 교육 같은 최소한의 행정서비스를 위해 시역을 확대했다. 초등학교 부지가 공동묘지였다. 1920~30년대에 이장이 많았다. 서울 동북쪽은 한인 주거지였다. 신설동, 제기동, 용두동 등으로 평지였고 가난한 곳이었다. 서울 남서쪽은 일본인 주거지였다. 후암동, 흑석동, 상도동, 대방동, 영등포 등으로 산지였다. 돈이 되는 루트였다. 일본은 상인이나 농사짓는 사람이 평지에 산다. 한남동은 1930년대 일본인 최고의 주거지였다. 민족에 따라 주거지가 명확하게 나뉘었다.
집합주택 1세대는 관사주택이다. 일제 관료를 위한 주택이다. 2세대는 행랑식 주택이다. 1910~20년대 빈민 한인들의 주거부족 문제가 심각해지자 이들에게 공급된 주택이다. 3세대 부영주택은 경성부에서 공급했다. 4세대는 영단주택으로 전시체제 아래에서 형성된 첫 노동자용 집합주택이다. 이때는 일본이 중일전쟁을 일으키며 대륙 침략을 본격화 한 시기다. 한반도는 북쪽을 중심으로 병참기지화 됐다. 남쪽은 유일하게 영등포에 군수산업이 있었다. 군수산업 안정화를 위해 군수업체에서 일하는 노동자에게 집합주택인 영단주택을 공급했다.
연립한옥은 일제강점기 도시한옥의 대표 특징이다. 한옥은 온돌 방식의 난방 때문에 고층화가 어렵다. 온돌은 2층 공간까지 불을 가두지 못하기 때문이다. 도시빈민은 땅에 붙어 있는 움막에 살았다. 이를 토막이라고 한다. 토막은 하꼬방, 판자촌으로 이어진다. 토막민을 시 바깥으로 쫓아내고 그곳에서 정착을 유도했다. 해방 이후 판자촌이 철거됐다. 아파트는 저소득층 서민을 위한 2~3층의 목조 주택이었다. 지금의 아파트 개념은 ‘맨션’이다.
한옥만 남향 사랑?
한옥은 근대 도시주택인가? 한옥은 근대 도시주택과 속성이 다르다. 근대화를 겪은 사회는 공공기관이 임대주택을 공급했다. 우리는 1980년대 말까지 주택의 공공 공급 개념이 없었다. 북촌은 지방지주가 서울로 공부하러 가는 자식을 위해 지어졌다. 사무직이나 지주의 자식들이 북촌 한옥에 거주했다. 1910년대부터 집 장사가 있었다. 한옥을 단순화시키고 개량시켜 팔았다. 개량한옥(도시한옥)이라고 불렀다. 근대기 건축가들은 자기를 계몽가로 여겼지만 집 장사들은 사회요구를 받아들였다. 건축가들이 설계한 집은 잘 팔리지 않았다.
문화주택에서 ‘문화’란 위생을 뜻한다. 위생을 책임지는 것이 이슈였다. 사람의 건강을 책임진다는 건데 자본가가 건강한 노동력 확보를 위해 필요했다. 문화주택은 부의 상징이기도 했다. 조선일보 만평을 보면 돈을 빌려 문화주택을 지은 것을 비꼬는 내용도 있었다.
▲ 1930년 1월 12일 조선일보 만평 ‘여성선전시대가 오면(2)’. 왼쪽에서 두 번째 다리를 보면, “나는 문화주택만 지어주는 이면 일흔 살도 괜찮아요.”라고 쓰여 있다. 당시 문화주택을 향한 열망이 어느 정도인지 가늠할 수 있다. 사진출처=todayhumor.co.kr
한옥은 남향 선호사상으로 지어진 주택인가? 당시 한옥은 중산층 이하의 사람들이 사는 비위생적인 주택이었다. 위생주택을 대안으로 내놓았는데, 아이들 방을 남쪽에 두었다. 아이들을 보호대상으로 여기기 시작한 것이다. 부엌, 화장실을 개량하고 위생주택을 권유했다. 남향을 선호했다면 안방 위치가 달라졌을 것이다. 냉장고가 없던 시대라 가족 삶을 위해 중요한 부엌은 동북쪽에 있었다. 안방은 가장 나쁜 위치에 있어도 상관하지 않았다. 안동 하회마을에 가면 종갓집에도 남향이 아닌 집이 많다. 서양도 남향을 선호했다. 남향집은 비싸서 노동자들에게 선택권이 없었다. 20세기 초 위생 개념이 들어와 ‘남향’이 좋다는 교육이 이뤄지면서 남향이 선호되었다. 우리나라만 남향을 선호한다고 보기 어렵다. 우리만의 독특한 특징은 아니다.
조선이 병참기지화되면서 노동자들의 주택문제를 해결하기 위해 영단주택이 들어섰다. 문래동의 영단주택은 우리나라 최초의 노동자 주택이다. 1940년대 초 조선주택영단에서 지었다. 서양처럼 산업화로 인한 노동자용 주거단지가 출현한 것이다. 상도동, 대방동에도 있었다.
▲ 2010년 4월 25일 인터넷 한겨레신문을 보면 문래동에 남은 영단주택 500여 채의 흔적을 볼 수 있다. 재개발이 진행되지 않았다면 지금도 볼 수 있을 듯. 사진은 영단주택 골목. 사진출처=http://blog.daum.net/hojinbo/36
해방이 된 후에도 일제 강점기 표준 주택이 여전하게 영향을 미쳤다. 국민주택 현상공모 당선안을 보면 영단주택과 유사한 안이 많았다. 1960년대에는 퀀셋, 흙벽돌집 같은 실험주택이 있다. 미국이 흙으로 집을 지은 것을 보고 아프리카에서 쓰던 흙벽돌 만드는 기계를 가져왔지만 흙벽돌은 우리나라와 맞지 않았다. 그래서 흙벽돌 안에 화강석을 넣었다. 청량리 부흥주택이 흙벽돌로 지은 집인데, 현재도 남아있다.
▲ 미군이 임시 주둔하는 주거형태였던 퀀셋(quonset). 사진출처=runintosky.tistory.com/
1960년대 도시한옥은 1930년대 형식을 완전하게 갖췄다. 빠르게 공급됐다 사라졌다. 도시한옥 보존이냐 개발이냐는 갈등이 있었는데, 북촌은 4대문의 핵심이고 양반이 거주해 보존 필요성 공감대가 형성됐다. 그렇지만 보문동, 청량리 일대에 있는 도시한옥은 역사성이 없다는 이유로 보존되지 않았다. 아파트는 195~60년대에 공급이 시작돼 1970년대 보편화됐다. 1980~90년대 전형화를 거쳐 90년대 이후에는 공급이 정체됐다. 대신 주상복합이 등장했다. 마포아파트는 최초의 단지형 아파트이다. 원조를 받아 기름보일러와 엘리베이터를 설치하려고 했는데, 미국의 반대로 층수를 낮추고 연탄보일러를 사용했다.
▲ 국내 최초의 단지형 아파트, 마포아파트. 사진출처=podopodo.net/article/critics/detail.asp?seq=28
나는 세운상가를 ‘2차 세계대전의 사생아’라고 표현한다. 2차 세계대전이 일어나면서 도시도 공습 피해를 받았다. 소이탄 공격을 받아 불이 났을 때 도시로 번지는 것을 막으려고 빈 공간을 두었다. 그 중 한 곳이 종묘 앞에서 필동까지의 폭 50m,길이 1200m의 현 세운상가 지대였다. 서울이 폭격을 맞아 종로 일대에 화재가 나면 동대문까지 이어질 것으로 생각하고 소개도로를 만들었다. 소개도로를 유지하며 건물을 지은 것이 세운상가이다. 1970년대 초반까지는 성공했지만, 1980년 강남이 개발되면서 위상을 잃었다.
직장과 주거분리(직주분리)는 근대주거의 특징이다. 가내수공업이 죽고 대공장 삶이 이어졌기 때문이다. 도시로 사람들이 몰리면서 많은 문제가 발생했다. 소련은 직주근접 도시계획을 세웠다. 평양은 사회주의 국가의 도시계획이 완벽하게 구축된 곳이다. 소구역 단위로 이동량을 최소화 시켰다. 가장 이상적인 아이디어로 만들었지만 작동도 그런지는 모르겠다.
다세대 주택을 바라보는 관점이 일제시대의 건축가 모습 같다. 다세대 주택을 우습게 안다. 북촌의 도시한옥 교훈을 생각하면 좋겠다.
참고
① 문래동 영단주택 관련 기사 “70년 세월 빼곡히…‘영단주택’ 헐리나”
http://www.hani.co.kr/arti/society/area/417732.html
② 1960년대 마포아파트 이야기 보러가기 “1962년, 마포아파트 혹은 혁명 한국의 상징”
http://podopodo.net/article/critics/detail.asp?seq=28
③ 세운상가 역사를 좀 더 알고 싶다면 “도성길라잡이 세운상가 역사”
http://blog.daum.net/so_design/8177130
"2강은 경기대 건축대학원 안창모 교수 맡아주셨다."에서 '안창모 교수께서'라고 수정해주심 감사~