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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후기] 11/5 정치철학자 김만권과 함께 <인간의 조건> 한나 아렌트 읽기_첫 번째 강의) 1장. 인간의 조건
후기를 작성하기에 앞서, 이 후기는 ‘아, 나는 한국어를 잘 못하는 사람인가?’라는 회의를 느끼면서 <인간의 조건>을 읽은 사람이 썼다는 말씀 올립니다. 책을 읽고, 강의를 듣고, 이해한 만큼 이해한대로 적었습니다. 책과 강의를 제 이야기로 바꾸어 썼습니다. 바로 잡아야 하는 부분에 대한 의견주시면 감사하겠습니다.
‘정치철학자 김만권과 함께 <인간의 조건> 한나 아렌트 읽기’의 첫 강의 <1장. 인간의 조건>은 11월 5일 (월) 19시 ~ 21시 30분에 참여연대 2층 아름드리홀에서 열렸습니다. 한나 아렌트의 철학에 관해 소개하고 ‘왜 책이 어려운지’를 설명하며 강의를 시작했습니다.
아렌트의 이야기는 ‘독자가 보기에 일관성이 없어서’ 어렵다고 합니다. 앞의 이야기에서는 ‘~는 ~하다.’라고 말하고는 뒤의 이야기에서는 ‘~는 ~하지 않다.’라고 할 때가 있어서, 무슨 이야기를 하고자 하는지 이해하지 못할 때가 많다고 합니다.
(한국어인데도 이해를 못해서 자괴감을 느꼈는데, 다행스러웠습니다.^^)
‘한나 아렌트’라는 사람
아렌트는 좋은 설명을 하는 사람이라기보다는 좋은 질문을 제시하는 사람이라고 합니다. 그의 이야기를 분석하기보다는 그의 질문과 시각, 설득방식에 주목해야 한다고 합니다. 그리고 <인간의 조건>의 서문은 각 장을 충분히 읽은 후에 다시 읽는 것이 낫다고 합니다.
(이렇게 생각하는 게 정신건강에 좋다는 뜻으로 이해했습니다.)
아렌트는 독일에서 태어난 유태인으로 근대성의 병폐(전체주의, 정치의 상실)에 관한 연구로 이름을 알린 정치이론가입니다. 급진적 악을 다룬 <전체주의의 기원>을 내면서 유명해졌는데, <전체주의의 기원>은 <인간의 조건>, <혁명론>과 함께 아렌트의 주요 3부작으로 꼽힙니다. 이외에도 본인 철학의 개념을 다룬 <과거와 미래 사이>, -그나마(?)- 가장 쉽다고 알려진 <예루살렘의 아이히만: 악의 평범성에 대한 보고>가 있습니다.
<전체주의의 기원>에서 그가 이야기한 ‘악’에 대한 관점은 그의 스승인 야스퍼스가 ‘악을 그렇게 정말 크고 엄청난 것이라고 하면, 마치 그 악이 신처럼 보일 수 있다.’라고 비판했다고 합니다.
(‘내가 생각하는 사제관계와는 조금 다른, 학문적 동료인가?’라는 생각이 들었습니다.)
괴니히스베르크-칸트가 평생을 지낸-에서 태어난 아렌트는 마르부르크 대학교에서 하이데거의 지도를 받았으나, 하이델베르크로 옮겨 야스퍼스의 지도로 박사학위(사랑과 아우구스티누스, 1929)를 받습니다. 하지만, 유태인이라는 이유로 독일에서 교수 자격을 얻을 수는 없었습니다. 1933년에는 게슈타포에게 체포되었으나 –알려지지 않은 이유로- 곧 풀려났고, 프랑스에 머물던 1941년에는 나치수용소에 끌려가기도 했으나 탈출에 성공하여 미국으로 이주했습니다. 이러한 삶의 영향인지, 아렌트는 ‘삶을 둘러싼 구조보다 행위를 강조’했다고 합니다.
(나치로부터 두 번이나 탈출하다니 대단한 사람.)
<인간의 조건>과 그 배경
<인간의 조건>은 그 제목과 달리, 제한된 실존조건에서의 인간의 활동과 그 활동들의 관계에 관한 탐구이며, 그 관계의 문제가 인간 삶의 다른 방식을 만들어냄을 알리고 있는 내용으로, 인간의 조건에 대해 진지한 탐구를 다루고 있지는 않습니다.
아렌트는 이 책을 Vita Activa(=활동적인 삶) 혹은 Amor Mundi(Love of the world)라 불러주길 원했는데, 이는 이 책이 인간의 조건을 탐구하는 책이 아니었기 때문입니다.
(제목을 믿고 ‘인간의 조건’이 언제 나오는지 찾으면서 읽으면, 끝까지 그 내용은 찾을 수 없다. 제목이 낚시(?)다.)
아렌트는 인간의 조건을 탐구하기보다는 다양한 인간의 조건 중 인간이 현실적으로 존재할 수 있는 생명, 세계성, 다원성이라는 세 가지 조건을 이미 전제하고 그에 따른 활동의 본질이 무엇인지 탐구하고 있습니다. 이 기본적인 조건 세 가지는 이에 따른 활동 세 가지로 연결되는데 ‘노동, 작업, 행위’입니다. 원래 이 활동은 ‘행위>작업>노동’의 위계가 있었는데, 근대에 이르러 위계가 뒤집히면서 혼란이 일어났습니다.
인간이 삶을 사는 데 주어진 세 가지 조건은 그 자체가 곧 제약을 의미합니다. 인간의 조건은 인간의 본성과 다르고, 또한 그 조건에 따른 인간 활동(행위, 작업, 노동)과 –활동을 해내는- 능력의 합이 인간의 본성을 구성하는 것도 아닙니다. 덧붙이면, 근대의 전체주의는 여기에서 말하는 인간(유대인)의 본성(=자발성)을 급진적 악(=수용소)을 통해 깨뜨려버립니다.
(이해한대로, 이해한 만큼 적어서 이렇습니다...)
활동적 삶과 인간의 조건
활동적 삶은 ‘노동, 작업, 행위’라는 세 가지 근본활동을 담고 있습니다. 이 활동은 인간이 사는 데 주어진 기본조건(생명, 세계성, 다원성)에 따르는 것입니다.
각 활동에 관해 살펴보면,
노동은 인간 신체의 생물학적 과정에 상응하는 활동입니다. 인간이 먹고 사는 것은 일을 해서 얻는 것에 달려있습니다. 노동이 이루어질 수 있는 근본조건은 생명 그 자체입니다.
(‘노동은 생명 때문에 하는 것이다.’라고 이해했습니다. 노동을 정글의 법칙에 나오는 물고기 잡기로 읽었습니다.)
작업은 인간실존의 비자연적인 것에 상응하는 활동입니다. 작업을 통해 자연환경과 구별되는 인간이 만든(natural이 아닌 artificial) 인공적인 것(제도, 법률, 국가 등)이 만들어집니다. 이것은 개인의 생명보다 오래 살아남습니다. 작업의 인간조건은 세계성입니다.
(‘작업은 인간이 만든 메시지(?)다.’라고 이해했습니다. 작업을 베토벤의 월광 소나타로 읽었습니다.)
행위는 사물이나 물질 없이 인간 사이에 직접적으로 수행하는 활동입니다. 행위의 인간조건은 다원성입니다. “우리가 알기에 가장 정치적이었던 로마인의 언어에서 ‘살다’는 ‘사람들 사이에 존재하다’는 말, ‘죽다’는 ‘더 이상 사람들 사이에 존재하지 않는다’는 말과 동의어로 사용된다.”
(‘행위는 정치활동이다.’라고 이해했습니다. 행위를 창당(?)으로 읽기로 했습니다.)
“세 가지의 활동과 상응하는 조건 모두 인간 실존의 가장 일반적인 조건, 탄생성과 사멸성과 밀접하게 연관되어 있다... 이방인으로서 세상에 태어나는 새로운 손님의 항상적인 유입을 위해 세계를 마련하고 보존하는 그리고 이 유입을 예견하고 생각해야 하는 과제를 갖는 한, 노동과 작업은 탄생성에 그 뿌리를 두고 있다.”
(대한민국에 태어나는 아이를 위해서, 기존 사회구성원은 분유 값과 기저귀 값, 교육비를 벌고(=노동), 아이가 잘 자랄 수 있도록 다양한 제도와 정책을 만듭니다(=작업).)
“세 가지 행위 중에서 행위는 탄성성의 조건과 가장 밀접한 관계를 가진다.”
“출생에 내재하는 새로운 시작은 새로 오는 자가 어떤 것을 새로이 시작할 수 있는 능력을 가질 때만 생각할 수 있다.”
“ 이러한 새로운 시작으로서의 행위의 요소, 즉 탄생성의 요소는 모든 인간활동에 내재한다.”
(...)
활동적 삶이란?
“아리스토텔레스는 인간이 생계에서 벗어난, 더 나아가 도구를 만드는 삶과 탐욕적 살멩서 벗어난, 세 가지 삶의 방식을 제시한다.”
1) 아름다운 것이 주어진대로 소비되는 육체적 쾌락을 향유하는 삶 (개인의 영역)
2) 폴리스에서 탁월함을 발휘하며 정체(정치?)에 관여하는 삶 (=행위하는 삶)
3) 영원한 것의 탐구와 관조에 바쳐지는 철학적 삶 (플라톤 이후 최고로 치는 삶)
(‘먹고 살기 충분한 사람들의 생각인가?’라는 생각이 들었습니다.)
활동적 삶은 중세철학에서 아리스토텔레서의 ‘정치적 삶’의 표준적 번역어로 아우구스티누스에게서 나타납니다. 다만, 아리스토텔레스의 ‘정치적 삶’은 명백한 행위를 강조하는 정치적 인간사의 영역만을 지시합니다.
노동과 작업은 자율적이고 참된 인간 삶의 방식인 비오스(bios)를 구성하기에 충분한 품위를 갖지 못하는 것으로 여겨졌다고 합니다. 필요와 욕구에 구속되어, 자유롭지 못했기 때문입니다.
(당시 부지런히 움직이는 몸-노예의 역할-에 대한 경멸...(=사유할 수 없는 삶))
폴리스의 삶은 자유롭게 선택한 정치적 조직의 형식을 가리켰는데, 고대 도시국가가 몰락하면서 활동적 삶이라는 용어는 그것의 특별한 정치적 의미를 상실하고 모든 종류의 세상사로의 참여를 의미하게 되었다고 합니다(노동, 작업도 활동적 삶이라는 용어에 담김). 그러나 작업과 노동이 인간활동의 위계에서 부상하여 정치적 삶과 동일한 존엄성을 가진다는 뜻은 아닙니다.(위계는 ‘행위>작업>노동’ 순)
활동적 삶의 경쟁자: 관조적 삶
“행위를 포함한 모든 다른 활동보다 관조가 단연코 우월하다.”
플라톤, “폴리스의 삶을 완전히 이상적으로 재조직하는 것은 철학자의 탁월한 통찰에 지도받아야 하는 동시에 그것은 철학자의 삶의 방식을 가능하게 하는 것 이외에 어떤 다른 목적도 갖지 않아야 한다.”
(무언가 대단한 선민의식 같다고 느꼈습니다.)
아렌트, “전통적 위계에서 관조에 지나친 무게를 두는 것이, ‘활동적 삶’ 그 자체 내의 구별과 명료성을 흐릿하게 하며, 겉보기와는 달리 이 조건(활동적 삶)은 근대의 ‘전통과의 단절’에도 불구하고, 그리고 마르크스와 니체의 종국적인 전통 위계질서의 전복에도 불구하고, 본질적으로 변하지 않았다는 사실이다.”(‘행위>작업>노동’이라는 위계는 여전하다.)
“내가 활동적 삶이라는 용어를 쓸 때, 이 활동 모두의 근저에 놓여있는 관심은 관조적 삶이라는 하나의 포괄적 원리를 지향하는 관심과 동일하지 않으며, 동시에 이 활동적 삶이 관조적 삶보다 우월하거나 열등하지도 않음을 전제한다.”
영원성과 불멸성
불멸성
생물학적으로 사멸하는 인간은 자신의 이름을 후세에 남겨 불멸하고자 하고 이런 일은 기억되는 역사를 만드는 행위를 통해서 가능합니다. 활동적 삶에서 행위가 중요한 이유입니다.
(어떤 유명 만화에 “사람이 언제 죽는다고 생각하나? 사람들에게서 잊혀질 때다.”라는 명대사가 있다고 하는데, 그 내용이 떠올랐습니다.)
영원성
관조적 삶은 사유하는 인간으로서 영원한 것, 바로 진리와 함께하는 삶입니다. 플라톤은 이 영원성이 폴리스를 지배했던 원리를 대체할, 더 높은 원리의 근원이라고 보았습니다. 아렌트는 이것에 관심이 없던 것이고요.
정리 : 이남수 자원활동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