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세계를 짓는 기예 (엄기호 선생님) 4강 후기
나는 평생을 여자로서 살아왔다. 하지만 오늘 강의를 들으면서, 정말 그러한지에 대해 다시 생각해보게 되었다. ‘남성성’이라는 것이 근대의 산물인 것처럼, 오늘날의 ‘여성성’ 또한 마찬가지라는 생각이 들었기 때문이다. 근대 이후의 남성성의 이미지는 성인, 자유인, 의지대로 살아가는 사람 등으로 재현되며, 무엇보다 힘을 타자(대상)에게 가하는 존재라는 점에서 여성의 이미지와 확연히 구별된다. 남성들은 도덕적 감성을 가지고 사회와 공익을 위해 희생할 수 있는 사람들이고, 그렇기 때문에 시민권과 자유 또한 당연하게 주어지는 것이었다. 그러나 이 남성의 범주에 들지 못한 사람들은 마찬가지의 이유로 배척과 차별을 받아들여야 했다. 그들은 여성, 장애인, 동성애자, 그리고 (유대인으로 대표되는)이방인들이었다. 특히 이방인들은 가장 오랜 기간 동안 혹독한 차별을 견뎌내야 했는데, ‘뿌리’, ‘땅’이 없는 민족은 정치공동체를 가질 수 없고, 그렇기 때문에 언제든 국가를 배반할 수 있다는 통념이 그 주된 이유였다.
남성성을 이야기할 때 나 자신에 대한 성찰을 피해갈 수 없는 이유가 여기에 있다. 생물학적으로는 여자이지만 남성적 가치들을 내면화한 나는 결코 완전한 여성성을 대표할 수 없는 것이다. 따라서 남성성에 대한 문제는 우리 모두가 함께 고민해야 하는 주제이고, 어느 성별 집단에 대한 맹목적 비난이나 조롱으로 이어져서는 안 되는 것이다. 그러나 한국사회에 분명히 존재하는 성별 간 위계구조가 문제화되어야 한다는 점은 여전히 중요한데, 이는 견고한 동성사회집단에 대한 문제제기이기도 하다. 기쁨을 주고받는 관계가 연인관계를 제외하고는 동성관계에서밖에 없는 Homo-erotic한 문화, 그리고 남자는 남자끼리, 여자는 여자끼리만 어울리는 Homo-social한 문화가 만연한 한국 사회 전반의 비공식영역은 동성집단화 되어 있다. 지혜의 전승이 일어나는 비공식영역에서의 경험이 차별적으로 행해지면서 성별 차이는 실질적 능력과 기회의 차이로 이어진다. 엄기호 선생님은 한국에서 동성 간의 성적 관계가 금기시 되는 이유는 이러한 동성집단 중심의 연대가 위기를 맞이할 가능성이 농후하기 때문이라고 보았는데, 나는 이를 거꾸로 되짚어 ‘동성애에 개방된 사회일수록 동성집단의 엄격한 분리가 옅어질 것이다’라고 해석해보았다.
엄기호 선생님은 또한 ‘비장미’를 잃어버린 일베의 남학생들의 대화를 관찰함으로써 오늘날 청년들에게 ‘무기 없는 아들들’이라는 이름을 붙인 배경을 설명하였다. 부친을 살해함으로써 이룩했던 청년세대들의 정당성, 그리고 정치적 진보가 오늘날에도 가능한 것인가? 사회에 대한 주도권을 젊은 세대들로부터 빼앗기거나 그들에게 스스로 넘겨지는 아버지의 역할을 지금의 아버지 세대(386세대)는 이행하고 있는가? 베트남전 참가와 해외노동자 파견 뿐 아니라 국내에서도 열악한 공장에서 모진 노동을 감내해야 했던 ‘태극기 세대’들은 어쩌면 한국 역사상 최초로 아버지의 역할을 다 했던 세대일 것이고, 5.18 이후 87년 6월 항쟁으로 이들을 물러나게 한 현재의 아버지 세대는 일종의 ‘살부(殺父)’를 행했다고 볼 수 있을 것이다. 그러나 문제는 그들이 아직까지도 건재하다는 것이며, 정치적 정당성과 경제적 능력, 사회적 지위, 수적 강세 모두를 손안에 쥐고 있다는 사실인 것이다.
한국의 청년인구는 기득권을 가진 부모님의 자식들과 그렇지 못한 부모님의 자식들로 분화되어 있다. 물론 그 스펙트럼은 다양하겠지만, 굳이 ‘살부(殺父)’를 행해야겠다는 필요성을 느끼는 청년들의 목소리는 이전보다 작을 수밖에 없다. 세월호 참사와 잇따른 사회적 재난들 이후, 자신들의 생존과 안녕을 요구하는 목소리는 분명 높아졌다. 그러나 그 목소리가 과연 청년의 언어와 서사로 만들어질 수 있을 것인지에 대해서는 아직 의문이다. 청년들에게는 좀 더 많은 공통의 공간과 시간과 경험, 그리고 이것들의 총체인 사회가 필요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