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서른 네번째┃이 남자, 웅소 씨의 사생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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인터뷰 · 글 : 박현아(백인보 기자단장)
이 남자, 웅소씨의 사생활
나 : 우리 인터뷰 언제 할까요?
그 : (내 눈을 슬그머니 피하며) 인터뷰요...?
나 : 응. 백인보 인터뷰하기로 했잖아요. 언제가 좋아요?
그 : 뭐 물어 보실 껀데요?
나 : 그야, 뭐, 느티나무 얘기랑 지금 옮겨간 시민참여팀 얘기랑... 웅소씨 연애 이야기?
그 : ...............
이 남자, 천웅소 간사를 만나 인터뷰한 것을 한 단어로 정리한다면 ‘부끄러움’이라고 해야 할까? 질문을 던지고 그의 대답을 듣는 내내 내 머릿속에 떠오른 건 서정주의 시 ‘자화상’에 나오는 한 대목이었다. ‘세상은 가도 가도 부끄럽기만 하더라.’ 근데 아무래도 그를 키운 건 팔 할이 바람 같지도 않거니와 아무것도 뉘우치지 않겠다던 시인의 다짐과 달리 그는 인생의 많은 것들을 되돌아보고 곱씹고 있는 중이었다.
자, 너무도 겸손하고 말수가 없으며 진중하기까지 한 사람과 인터뷰를 하면 그 글을 쓰는 사람의 심정이 어떨까 상상해보길 바라며, 이제 그와의 인터뷰를 시작한다.
시민참여팀 팀장의 하루
지난 3년간 아카데미 느티나무 간사로서의 업무를 마친 그는 최근 시민참여팀으로 부서를 옮겼다.
“2월 중순에 옮겼으니까 이제 곧 2달이 돼요. 예상했던 대로 시민참여팀은 일이 많고, 전임자가 없는 상태라 물어볼 수가 없으니 자료든 뭐든 찾아봐야 해서 그런 일에 시간이 많이 걸려요. 인사이동도 좀 늦게 나고 그래서 인수인계 시간이 부족했거든요.”
원래 시민참여팀 일이 많은 건가요, 아니면 요즘 크고 민감한 현안들이 많아서 그런 건가요?
“점차 일이 늘어가고 있는 추세예요. 참여연대 안에서 시민참여팀이라는 부서에 원하는 역할이 점점 늘어가고 있는 거죠. 카페만 해도 예전과 달리 규모면에서 확장되었고 청년사업도 방학에 인턴프로그램 정도만 운영하던 것을 부설기관 정도의 규모로 키워낼 계획이고 이래저래 일이 늘어난 거죠.”
지금 시민참여팀 상근자는 몇 명이죠?
“총 8명인데, 카페 2명, 아카데미 2명, 청년사업 1.5명 전담인원을 제외하면 저 포함해서 2.5명 정도라고 봐야죠.”
참여연대에 강의를 들으러 갈 때면 나는 쉬는 시간을 이용해 3층 사무실에 올라가곤 한다. 자주 볼 수 없으니 온 김에 아는 얼굴들에게 안부 인사를 건네기 위함이다. 시간은 대략 오후 8시쯤. 근데 그때마다 어김없이 그는 책상에 앉아 일을 하고 있었다. 그렇게 나마 얼굴을 볼 수 있어서 반갑기도 하고 한편으론 일에 치여 사는 것이 안쓰럽기도 해서 ‘팀장이 되더니 일이 너무 빡센 거 아니냐’고 농담을 던질 때마다 그는 멋쩍게 웃으며 아니라고만 했다. 하긴, 너스레를 떨며 ‘힘들어 죽겠어요’라고 하면 내가 아는 ‘천웅소’가 아니지...
시민참여팀으로 옮긴 이후 가장 달라진 점은 뭐예요?
“아무래도 팀장이다 보니 업무를 조정해야 하는 역할이 더 많이 늘었죠. 아카데미 업무는 고유의 영역들이 많아서 주로 그 틀 안에서만 이루어지데 비해, 시민참여팀은 독자적인 업무들도 있지만, 세월호도 그렇고 총회도 그렇고 많은 일들이 다른 부서들과 협의를 해서 진행해야 하는 경우가 많기 때문에 협의하고 조정하고 하는 업무가 늘어났어요.”
어느 부서가 더 본인 적성에 맞나요?
“아직 어느 쪽이 맞다고 얘기할 정도의 시간이 지나진 않아서요.”
시민참여팀 팀장으로 앞으로 해보고 싶은 일이 있다면요?
“아직 그런 계획이 서진 않았는데, 이전보다 한발 더 발전된 시민참여팀으로 만들고 싶은 욕심은 있죠. 총회 같은 것도 이전보다 더 많은 회원들이 참여할 수 있는 행사가 되었으면 좋겠고. 참여연대의 어느 부서든 마찬가지지만 사업이나 행사가 끝나면 평가가 이루어지는데 그 평가들이 다음번엔 제대로 반영될 수 있게 하고 싶어요. 실수가 있었다면 다음번엔 반복하지 않도록 하고. 제 생각엔 이런 과정들 자체가 참여연대가 가진 장점이라고 생각해요. 무언가 새로운 일을 벌이는 것도 중요하지만 반복되는 업무들 안에서 그전보다 한 걸음 더 성장하는 것, 그런 노력들도 무척 중요하죠. 그래서 일을 진행할 때마다 작년, 재작년의 평가자료들을 확인해보고 그런 것들이 반영될 수 있게 노력하는 거죠.”
시민참여팀 팀장으로 옮기고 치뤘던 가장 큰 행사가 총회였는데 어땠어요?
“총회랑 ‘지역회원 만남의 날’, 이게 가장 큰 업무였죠. 나름 만족스러워요. 이번 총회에 테이블토크 형식을 도입했는데, 느티나무에 있을 땐 이런 형식이 일반적인 것이었는데 총회에 도입한 건 처음이라 나름 새로운 시도였고 또 성과도 있었다고 생각해요. 그전엔 주로 극장식 자리배열의 형태라 회원들과의 의사소통이 쉽지 않았거든요. 그래서 이번엔 둥근 테이블에 둘러앉을 수 있게 하고 또 회원들 간의 소통을 위해 3-40분이라는 시간을 따로 배정해서 서로 얼굴도 마주 보고 이야기도 나눌 수 있게 한 거죠. 요즘 추세도 예전과는 달리 적극적, 참여적 회원들이 많아지고 있어서 앞으로 행사나 업무를 추진하는 과정에서 이런 변화를 적극적으로 반영해야 한다는 생각도 들어요.”
세월호 1주년 때문에도 정신이 없겠어요.
“참여연대 건물 외벽에 걸린 거대한 노란 리본은, 주관은 운영기획팀에서 한 거구요. 저희 팀에서 하는 건 세월호 관련 전시(박재동 화백이 그린 세월호 때 희생된 아이들의 일러스트)랑 서촌 근처 가게들과 협력해서 세월호 관련 포스터, 노란리본, 뱃지 등을 가게 내에 비치하기로 했어요. 이런 취지에 공감하고 동참하기로 한 가게가 60군데 쯤 돼요. 또 세월호 관련 북콘서트도 열릴 예정이구요, 세월호 관련 행진도 할 거예요.”
그는 긍정도 부정도 안 했지만 아무래도 팀장이 되더니 일이 빡세진 건 사실인 듯했다. 가끔 만나서 대화를 나눌 때도 그는 속으로 일 생각을 하는 건지 내 말에 집중을 못하는 눈치였다. 지금 무슨 생각을 하냐고 핀잔도 줘봤지만 다 부질없는 짓이었다. 짧은 대답을 하는 둥 마는 둥 하다 이내 컴퓨터 화면으로 눈을 옮기는 그를 바라보며 하릴없이 자리를 떴던 날도 있었다. 팀장이 되었으니 한턱내라고 하자 팀장이라고 직급수당이 있는 것도 아니란다. 그러나 그 무엇보다 그가 나랑 놀아줄 시간이 줄어들었다는 게, 나는 무척 불만스럽다(물론 전에도 나랑 많이 놀아줬다는 얘긴 아니다).
느티나무를 기억하다
느티나무에서 거의 3년이란 시간을 보냈어요. 어땠나요?
“느티나무로 오기 전엔 민생팀에서 1년 6개월, 노동팀에 2년 6개월 있었어요. 그러다 갑작스럽게 느티나무에 오게 되었죠. 3년... 너무 좋았어요. 다시 올 수 없는 기회라고 생각해요. 많은 간사들이 경험해 볼 수 있는 업무가 아니기도 하고 좋은 동료들이랑 손발 맞춰서 3년간 잘 해온 것이 너무 다행이라는 생각도 들고, 암튼 너무 좋았어요.”
뭐가 좋았어요?
“아카데미에서 하는 일들은 현안에 막 쫓기며 하는 일이 아니어서 심리적 압박감이 없어요. 그렇다고 업무가 적은 건 아닌데 참여연대 대부분의 부서들이 비판과 감시가 주요 업무이기 때문에 그 과정에서 받는 스트레스가 많거든요. 아카데미는 그런 스트레스 없이 일할 수 있어서 좋았죠. 그리고 무엇보다 강사 선생님들, 수강생들, 다양한 사람들을 만날 수 있는 점도 좋았구요. 특히 다른 여타의 시민교육 기관과는 달리 아카데미가 표방하는 정신이 있는데 그게 저랑 잘 맞아서 더욱 좋았던 것 같아요.”
기억에 남는 게 있다면요?
“아카데미에 와서 듣고 배운 것 중에 ‘질문의 중요성’이라는 게 있는데 그게 가슴에 깊이 새겨졌어요. 평소 우린 정답을 찾기 위해 혈안이 되어 있는데 그보다 더 중요한 것은 질문을 던지는 것이라는 거, 제겐 큰 깨달음이었죠. 이게 한번 머리에 박히니까 글이나 사람을 대할 때도 이 차원에서 다시 한 번 생각하게 되는 것 같아요. 앞으로 다른 업무를 하게 되거나 혹은 살아가는 데 있어 삶의 이정표가 될 것 같아요.”
답을 구하기 위해선 먼저 제대로 된 질문을 던져야 한다. 답보다 질문에 집중하는 훈련이 안된 사회에선 어려운 일이다. 그리고 무엇보다 사안 자체가 복잡할 때는 제대로 된 질문을 던지는 것 자체가 무척 어렵다.
‘문제의 원인을 규명하기를 좋아하는 사람은 인과관계의 환원론에 빠지기 쉽다. 단일 원인을 주장하고 주적을 규탄, 타도하기 보다는 문제가 전개되는 맥락에 대해 사유할 때, 문제가 구성되는 과정에 개입할 때, 다른 상상력을 가질 때, 저항의 지점을 발견할 수 있다.’
정희진, 『페미니즘의 도전』
나도 최근에 프랑스 언론사 ‘샤를리 엡도’ 테러 사건을 보며 비슷한 고민을 한 적이 있다. 전세계의 언론이 이 사건을 표현의 자유 혹은 타종교에 대한 이해와 관용의 문제로만 몰아가는 걸 보자니 마음이 편치 않았다. 문제의 구도를 언론의 자유와 테러 혹은 기독교와 이슬람, 이런 식으로만 잡을 때 우리가 놓치게 되는 것들에 대한 폭넓은 사유가 있어야 할 터인데, 가령 이런 식의 구도는 누구의 시각인가? 기독교와 이슬람의 종교·문화적 권력관계는 과연 평등한가? 등등..............
근데 나는 누구? 여긴 어디?(백인보만 썼다 하면 나는 왜 자꾸 샛길로 빠지는 건지에 대한 진지한 물음이 필요할 것 같다. ㅠ ㅠ )
느티나무에서 지내는 동안 아쉬웠던 것도 있죠?
“이렇게 좋은 강의들을 좀 더 많은 사람들이 함께 들으면 좋을 텐데. 때론 홍보부족으로 사람들이 모이지 않고 그래서 폐강될 때는 속도 많이 상하고 그랬죠.”
기회가 된다면 다시 느티나무에 와서 일하고 싶은 생각이 있나요?
“그렇죠.”
그때 혹시 해보고 싶은 일이 있어요?
“지금도 느티나무 차원에서 노력을 하고 있긴 한데 본 강의의 앞과 후에 시간을 따로 배분해서, 앞부분에는 수강생들의 소개라든가 서로 알아가는 시간, 강의에 대해 거는 기대 등을 서로 나누고 강의가 끝나고 난후엔 질의응답을 하거나 간단한 뒷풀이를 하잖아요. 이 앞뒤 시간들에 더 많은 공을 들이고 싶어요. 그리고 현재의 업무는 강의 ‘진행’에 초점이 맞춰져 있는데 홍보에 좀 더 투자를 하고 싶고, 가능하면 강의가 끝난 후에도 강의와 관련된 자료들, 교안이라든지 강의후기, 수강생들이 했던 질문 등을 가지고 더 다양한 작업을 해보고 싶어요. 강의 후에도 더 많은 논의들이 이뤄지고 또 그런 과정을 통해 더 많은 사람들이 아카데미로 유입이 되는 그런 작업을 해 보고 싶은 거죠. 지금은 아무래도 강의가 끝나면 모든 게 끝나버리는 느낌이 있어서, 그런 게 너무 아쉽거든요.”
내가 더 늙기 전에 그가 느티나무로 돌아와야 할 텐데... 쩝.
웅소씨의 사생활
이제 웅소씨 사생활 얘기 좀 해볼까요? 평소 옆에서 지켜보니 부인 사랑이 남달라요.
나 : 연애 얘기 좀 해 주세요.
그 : .............
나 : 부인이 첫사랑인가요?
그 : 아니요.
나 : 둘이 어떻게 만났나요?
그 : ..................
나 : 그럼 대학교 때 학생운동하면서 알게 된 건가요?
그 : (고개만 가볍게 끄덕인다)
나 : 그럼 프로포즈는 어떻게 했어요?
그 : 뭐, 얘기할 만한 스토리는 없는데...
연애 이야기가 나오자 어떤 질문에도 수줍은 웃음으로만 대응하는 그. 별수 없이 협박이란 카드를 꺼낸다. 근데 우리가 지금까지 한 얘기만 나가면 인터뷰가 무척 지루하고 재미없을 거라는 건 아시죠? 그러거나 말거나 그는 여전히 묵비권 행사 중이다. 휴~~~ 속 시원하게 얘기 좀 해보아요!!!! 그 순간, 그의 입에서 무서운 한 마디가 튀어나왔다.
“그건 제 사생활인데.....”
더 이상 찔러봐도 암 소용없겠다 싶은 순간, 그가 미안했는지 환하게 웃으며 이런다.
“우진이 얘기할까요?”
하하하. 우진이 얘기는 사생활이 아니던가요?
단언컨대, 그동안 백인보를 진행하며 그처럼 비협조적인 사람은 없었다. 그렇다고 이 글이 뭐 참여연대 보고서도 아니고 느티나무이야기와 시민참여팀 이야기만 할 수는 없지 않은가? 하여, 여기 그의 사생활을 폭로(?)하는 한편의 기사를 통째로 인용한다.
<예민한 임산부의 수족이 되어준 웅소씨>
안녕? 나의 웅소씨! 이제는 우진이 아빠가 더 어울리는 것 같기도 하다.
차분하면서도 친절한 웅소씨는 생긴 것부터도 내 이상형이었지만 결혼하고 나서도 늘 한결같은 그 모습 때문에 지금도 내 이상형이란 거 알아? 늘 한결같다는 표현에는 결혼하고 5년이 지난 지금까지도 아내에게 방귀를 트지 않는 그 배려(?), 내외(?)도 포함되어 있어. 호호.
그런 당신을 꼭 닮았으면 하는 우리 아기의 첫돌이 눈앞이구나. 우리 아기의 첫돌은 사실 남들보다 조금은 더 우리에게 감개무량한 일이야, 그치? 누구나 맘만 먹으면 쉽게 아기를 낳는다고 자만하면서 둘만의 시간을 오래 가진 후, 우리가 원하는 아기가 건강하게 태어나기까지 쉽지 않은 일들을 감내해야 했었잖아. 초기에는 유산기로 다니던 회사를 그만 두어야했고, 중기부터는 고위험군 임산부가 되어 우리 아기가 태어난 10월까지 6개월을 누워 지냈다. 지인들은 다 아는 사실이지만 참 어렵게 아기를 낳은 사람이 되었어, 나는.
6개월 간 누워있는 나를 보는 당신, 회사 일에다가 가사 일을 도맡아 꾸려야 했던 당신은 어땠겠어? 하루 종일 사무실에서 시달리다가 집에 들어오면 설거지며 빨래며 청소를 해야 했고, 늘 조산의 위협으로 신경이 예민해 있던 아내의 수족이 되어 아내의 밥을 차려주고 아내의 머리를 감기고 아내의 잔심부름 하나하나를 해줘야 했었으니 말이야. 혼자 있는 아내가 안쓰러워 친구들과 술 한 번 마시지 못하고, 회식이 있는 날에도 맘 편히 술 한 잔 기울이지 못했었지. 사무실에 앉아있을 때도 갑자기 아내가 병원에 입원할 일이 또 생기지는 않았을까 노심초사 했고, 또 어쩔 수 없이 입원을 한 아내가 밤중에 화장실을 가야하면 피곤에 지쳐 다크서클이 턱까지 내려온 얼굴을 비벼가며 링거를 들고 따라다녀야 했지. 그런 당신은 그 힘든 상황에서도 나에게 “내가 왜 너 때문에 이런 고생을 해야 하느냐?”라고 원망 섞인 말을 하기는커녕 늘 내게 힘을 주고자 노력했었어.
그렇게 어렵게 아기를 낳고 나는 산후풍으로 또 심한 고생을 했어. 6개월 동안 조금도 걷지 않았던 내가 갑자기 아기 낳고 모유수유를 하겠다고 쪼그려 앉고, 아기를 내리고 들고 하면서 무리하게 근육을 사용하다보니 나중에는 밤에 아프다고 엉엉 울고 그랬잖아. 그래도 여전히 당신은 나를 탓하지 않고 자신이 뭘 해 줄 수 있을까 찾는 사람이었어. 수유 후면 늘 아기를 트림 시키고 아기 삶는 빨래도 다 해줬고, 아기띠는 항상 당신이 매고, 내가 힘들다고 조금이라도 투정부려도 회사일로 힘든 자신을 앞세우지 않고 아기 이유식부터 목욕까지 늘 도와주잖아. 그러면서도 내게 “나도 너무 힘들어”라고 화낸 적이 없어. 아, 한 번 정도 있나보다. 하하. 그래도 그 정도면 정말 당신 괜찮은 남편이야.
당신에게 난 나를 사랑하느냐고 매일 묻지만 당신은 말보다 더 큰 사랑을 행동으로 묵묵히 확인시켜주고 있었다는 사실을 영화의 한 장면처럼 종종 깨닫게 된다. 참 좋은 당신, 참 괜찮은 당신, 모든 남자가 당신을 ‘적’이라고 해도 그런 ‘적’이 되는 건 세상을 더욱 살만하게 하는 것이라 오히려 자랑스럽네. 내 마지막 사랑이자 내 최고의 인덕, 당신을 만난 걸 감사하며 내일도 오늘처럼 사랑해. 당신의 아내, 김은종
-2012.10.12. 한겨레신문
기사를 전부 옮길 생각은 아니었다. 중간 중간 편집해야지, 하며 읽다가 내가 그에 관한 인터뷰 글을 이보다 더 잘 쓸 수 있을까 하는 생각에 전부 싣기로 했다. 이 글은 한 아내가 자신의 남편에 관해 쓴 글이다. 그러나 내게는 한 ‘사람’에 대한 글로만 읽힌다. ‘말보다 행동으로 묵묵히 확인시켜주는’ 사람. 내가 3년 동안 보아온 그의 모습도 그랬다.
(근데 인터뷰에서는 말보다 행동, 그러면 안 된단 말이쥐... ㅋ ㅋ )
참 좋은 남편이지만 부인한테 미안한 것도 있을 듯 한데요?
“아무래도 아이 낳고 그러다 보면 여자들은 경력 단절이 오잖아요. 제 생각엔 아내가 저보다 더 사상적(?)으로도 훌륭하고 일도 잘 한다고 생각하는데 취업이 쉽지 않아요. 출산과 육아를 거치면서 경력이 단절되는 것 때문에 개인의 능력과 의지와는 전혀 상관없이 사회적으로 저평가되는 거죠. 한때는 시민단체에서 일하고 싶어 했는데 나이도 있고 그러니까 잘 안 되더라구요.”
시민단체 쪽에 아는 사람들도 있고 할 텐데 빽 좀 써보시지 그러셨어요?
“제가 또 그런 건 잘 못해서...”
맞아요. 길이 아니면 가는 사람이 아니죠, 웅소씬^^.
붕어빵? 천웅소 주니어?
이제 우리 웅소씨의 진짜 사생활, 우진이 얘기해요. 그러자 연애 이야기에 불편해하던 그의 표정이 한결 밝아진다. 그런 그를 보고 있자니, 참말로 웃음만 나온다.
이제 5살이 된 천우진 군. 생긴 건 누가 봐도 아빠랑 국화빵인데, 성격은 누구 닮았어요? 저번에 보니까 장난도 잘 치고 개구쟁이던데.
“아내 닮았어요. 개구쟁이기도 하지만 착해요.”
아내와의 러브스토리엔 입 뻥긋도 안 하던 철벽같은 남자가 자식 얘기가 나오자 은근 자랑질이다. 우진이가 어떤 아이로 크길 바라요?
“일단은 건강했으면 좋겠어요. 아내가 우진이를 임신하고 있었을 때 조산의 위험성이 있어서 많이 고생을 했었는데 그때도 아이가 아프면 어쩌나 하는 걱정을 많이 했거든요. 그래서 그 무엇보다 아이가 건강하게 자라주는 게 가장 큰 바람이죠. 본인이 하고 싶은 거 했으면 좋겠고 착하고 바르게 자라주었으면 좋겠어요.”
이 사이좋기만 한 아빠와 아들 사이에 훼방을 좀 놓아 볼까나? 우진이가 나중에 ‘깨어있는 시민’이 아니면 어떻게 할래요? 사회문제에도 관심 없고 자신만 아는 아이로 크면요?
“그러면 잘 얘기해야죠.”
얘기해도 안 들으면요? 너무 단답형으로 얘기하면 이렇게 괴롭힘을 당하는 겁니다. ㅎㅎ
“(고민 끝에) 아무래도 크게 엇나갈 것 같진 않은데요.”
그렇겠죠. ^^; 누구 아들인데요. 그럼, 자신을 꼭 닮은 아이를 보는 기분은?
“저는 사실 닮았는지 잘 모르겠어요.”
엥? 붕어빵인데? 주위사람들이 닮았다고 많이들 얘기할 텐데, 그땐 기분이 어때요?
대답 없이 빙긋이 웃기만 하는 이 남자. 정말이지 최악의 인터뷰이이십니다. 대답 쫌 길게 하셔요! 계속 이렇게 비협조적으로 나오면 말이죠... 바른생활 사나이라 협박할 게 없구나. 끙~
아이를 키우면서 가장 기쁠 땐 언제예요?
“매순간 성장하는 걸 바라보는 게 기쁨이죠. 처음으로 아빠라고 불렀을 때, 처음으로 걸었을 때, 그리곤 요즘엔 막 생각하는 것도 눈에 보이고. 그런 순간순간들이 다 기쁨이죠. 얼마 전 어린이집에서 선생님이 적어 보내주신 수첩을 보았는데, 식사시간에 옆에 있던 아이가 의도하지 않게 옆에 있던 우진이를 팔로 툭 쳐서 우진이가 숟가락을 떨어뜨렸데요. 그 친구가 ‘우진아 미안해’ 그러자 우진이가 ‘아니야 내가 더 미안해’ 그랬다고. 그 모습을 보고 선생님이 엄청 칭찬을 하시더라구요.”
아, 바른생활 사나이 주니어 탄생! 우진아, 커서 아빠처럼 잔소리꾼이 되진 않을 꺼지? ㅎㅎ
아이를 낳길 잘했다는 생각이 드나요?
“그럼요. 일 때문에 늦게 끝날 땐 엄마랑 같이 정류장에 나와 절 기다릴 때도 있고 가끔 날씨가 좋은 날은 아이랑 아내가 사무실 근처로 오는 날도 있는데 그럴 땐 퇴근하고 셋이 같이 저녁도 먹고 맥주도 한 잔 하고...”
손을 뻗으면 단란함이 손바닥 가득 묻을 것 같은 세 식구의 모습. 이 소박한 풍경이야말로 그가 어릴 적부터 품어온 꿈이었다. 취직하고 결혼해서 아이 낳고 단란한 가정을 꾸리는 것이 장래희망이었던 남자. 너무 평범한가? 그러나 우린 지금 이 평범의 무게가 얼마나 무겁고 가치 있는 것인지를 하루하루 뼈저리게 느끼는 세상에 살고 있지 않은가. 아침에 대문을 나선 아이를 저녁에 다시 집으로 돌려보내주지 못하는 세상이라면, 나는 이제 더 이상 그 무엇도 꿈 꿀 수 없을 것 같다.
그의 자화상
어린 시절엔 어떤 아이였나요?
“반장 부반장 꾸준히 하고, 그렇게 내성적이기만 한 아인 아니었어요. 대학교 졸업하고 많이 착해졌죠. 대학시절 총학생회장을 했었는데 그때 그 일이 끝나고 마음을 다잡았어요. 그전보다 더 겸손해졌다고 해야 하나. 학생회 일 하면서 저 스스로도 비운동권 친구들의 의견을 소홀히 한 경향이 있었거든요. 그러면 안 되겠구나 하는 반성도 하게 되었고 또 운동권 내에도 자신들의 주장을 절대 굽히지 않는 그런 사람들을 보며 여러 생각을 했죠. 여러 정파에 속한 사람들 하고 교류도 하고 대화도 나누고 그랬는데 그럼에도 지금 돌이켜보면 당시 제 시야가 무척 협소했다는 반성이 들어요.”
총학 선거에 나갈 만큼 강단이 있었나 봐요?
“뜻한 바가 있었죠. 대중과 호흡하지 못하는 학생운동권에 대한 나름의 문제의식 때문이었어요.”
겉으로는 말 수도 적고 내성적으로 보여도 안으로 엄청난 에너지가 끊는 그다.
“학생운동하면서 느낀 바가 많아요. 저희 땐 학생운동이 동력을 잃어가던 때라 선배들도 운동하다가 군대 갔다 오면 그만 두는 경우가 무척 많았어요. 졸업하고 취직하면 대부분 일상 속에 안주하는 모습이었구요. 그걸 보면서 나는 저러면 안 되겠다 생각했죠.”
비판과 다짐 속에 그가 졸업 후 선택한 길은 진보정당이었다.
“대학 졸업 후 민주노동당에서 1년 정도 일했어요. 성북구위원회에서 일했는데, 진보정당이라 좋기도 하고 생활밀착형 운동을 할 수 있다는 게 무척 마음에 들었죠. 서민들의 삶과 직결된 정책들도 만들어낼 수 있고. 근데 민주노동당이 너무 여러 정파들이 모여 만든 정당이다 보니 정파에 속하지 않는 사람들은 조직 내에서 성장하기가 쉽지 않은 구조더라구요. 저같이 아무 정파에도 속하지 않은 사람에겐 비전이 없는 거죠.”
그러면서 조용한 목소리로, 마치 생각에 잠긴 듯이 이야기를 이어간다.
“학생회 일도 그렇고 모든 일이 그렇긴 한데 항상 문제를 둘러싼 환경들은 다양한 요소들로 이루어지잖아요. 조직을 책임지는 자리에 있다 보면 그 안에서 어쨌거나 결정을 내려하고 그러다보면 그 결정으로 인해 피해를 받거나 상처를 받는 사람들이 생기게 마련이잖아요. 그렇다고 그런 것들 때문에 아무것도 안 할 수는 없는 거고. 근데 지금도 그때의 상황들을 떠올리면 아쉬운 것들이 많고, 당시의 일들을 머릿속으로 되풀이해서 생각하곤 해요. 그때 내가 그렇게 안 했다면 무엇을 할 수 있었을까...”
통인카페에서 이루어진 인터뷰여서 그런지 녹음파일 안에는 다양한 소리가 담겨있었다. 커피내리는 기계소리, 찻잔 헹구는 소리, 바닥에 티스푼이 떨어지는 소리, 마침 밖으로 담배를 피우시러 나가시는 이태호 처장님이 누군가에게 말을 건네는 소리 그리고 질문을 건네는 내 목소리도. 그 모든 소리 중에서 정작 담고자 했던 그의 목소리는 제일 작게 들렸다. 마치 내가 아니라 자신에게 얘기를 건네듯, 그는 자신만이 물을 수 있는 질문들을 스스로에게 묻고 있었다.
내생은 비밀?
참여연대에서 일한 지도 8년차에 접어드는데, 미래에 대한 고민도 많죠??
“그렇죠. 어쩔 땐 시골로 내려갈까 하는 생각도 하고. 협동사무처장들이 하는 업무들을 보고 있으면 내가 참여연대에서 계속 일한다면 언젠가 나도 저 일들을 해야 할 텐데, 처장들이나 선임 팀장들은 일단 업무강도도 세고 또 내가 그 역할을 제대로 해낼 수 있을까 걱정도 되구요. 또 다른 면으로는 대도시에서의 삶에 대한 회의도 있어요. 대학 때 생각해보면 제일 재밌었을 때가 농촌연대활동 갔을 때였거든요. 자연과 함께 하는 삶에 대한 동경도 있지만 도시집중화에 대한 회의와 중앙집권적인 시민운동에 대한 고민도 있는 게 사실이구요. 구체적으로 귀농하겠다, 귀촌하겠다 이런 계획이 있는 건 아니지만... 아무튼 고민이 많아요.”
참여연대에서 8년이면... 휴~ 상상만 해도 힘에 부친다.
“참여연대는 비판과 감시가 중요 업무인데 그런 업무들이 주는 피폐함이 있어요. 하지만 이런 일이 세상에 꼭 필요하니까 누군가는 이런 일을 맡아주어야 하잖아요. 근데 에너지 소모가 많은 일이라는 건 확실해요. 활동가들이 번아웃되는 게 너무 이해가 가요. 결국 이것에 대해 결정하고 판단하는 것 또한 나의 몫인 거죠. 그렇긴 한데...”
그의 머릿속이 그 어느 때보다 복잡해 보인다. 향후의 계획을 가지고도 고민이 깊은 그에게 내생에 대한 질문까지 던졌다. 다시 태어나면 그때도 시민단체에서 일할 거예요?
“만일 전생에 대한 자각이 있다면 다른 일을 해보고 싶을 것 같아요. 그런 자각이 없다면 아마도 이번 생과 비슷한 생을 살고 있지 않을까요?”
그럼 이전 생에 대한 자각이 있는 걸로 치고, 내생엔 뭘 하고 싶어요?
“있긴 있는데... 비밀이에요^^.”
진짜 너무 한다 ㅠ ㅠ.
내생은 없을지도 모르니, 지금 이 인생에서 꼭 이루고 싶은 게 있다면요?
“예전엔 일 때문에 부모들이 가정을 소홀히 하던 시절이 있었잖아요. 이젠 그런 시절은 지난 것 같고, 내가 하고자 하는 일과 가정 두 가지 모두를 균형 있게 끌고 나갈 수 있는 거, 이젠 일을 위해 가정을 희생할 수 있는 시대는 아니니까요. 전부터 이런 생각을 했었는데 아이 낳고서 더 강해졌죠.”
균형 이야기가 나와서 말인데 여가시간에 뭐 해요? 아빠로서 간사로서 너무 바빠서 정작 자신만을 위한 시간은 없나요?
“취미가 딱히 있는 건 아녜요. 혼자 있는 시간도 없구요. 지금 현재는 집하고 사무실밖엔 없는 것 같아요. 집에 가서 아이랑 함께 놀고 나면 일도 해야 하고 가끔 부모님이나 처갓집 어른들도 찾아봬야 하고. 주말에도 사무실에 나와야 하는 경우도 많은데 그럴 땐 우진이랑 함께 할 수 있는 행사면 데리고 나오기도 하고.”
참여연대 간사들의 삶이 대부분 이런 식일 것이다. 회원이 10만쯤 되면 간사들의 업무량을 확 줄여줄 수 있으려나...
제가 준비해온 질문은 여기까지입니다. 혹시 하고 싶은 얘기가 더 있으신가요?
그때 그의 휴대폰에 문자가 왔다.
“잠시만요.”
문자를 보내기에 여념이 없는 그를 기다린다. 저 문자가 끝나면 그가 무언가를 얘기해주지 않을까 하는 생각을 하면서. 벌써 몇 분째 녹음파일에선 그의 대답도 나의 질문도 들리지 않는다. 카페의 소음만이 길게 이어지고 있었다.
내가 아는 그는
결국 인터뷰는 그렇게 끝났다. 그날 느티나무에서 강의를 들을 예정이었던 내게 그는 강의가 끝나면 맥주 한잔하며 다시 얘기를 나누자고 했다. 업무를 마치고 가장 늦게 술자리에 온 그는 맥주 몇 잔에 얼굴이 불콰해지더니 다른 이들의 이야기만 듣다가 좌중에 있던 사람들 중 가장 먼저 집으로 돌아갔다. 평소에 내가 봐왔던 모습 그대로였다. 인터뷰 내용을 보충하자던 우리의 계획은 그렇게 수포로 돌아갔다.
그리고 며칠 후, 그에게서 문자가 왔다. 자신이 생각해도 도저히 안 되겠던지 메일로 인터뷰 내용을 보충해 보내고 싶은데 괜찮겠냐는 문자였다. 뭐라도 보내만 주신다면야 감사하죠, 특히 사생활 쪽으로 부탁해요. ^^;
며칠 동안 녹음파일을 글로 옮기며 그의 메일을 기다렸다. 그러나 메일은 결국 오지 않았다. 하긴 처음부터 난 메일을 보내겠다는 그의 말을 믿지 않았다. 이유는 두 가지.
첫째, 일과 가정 둘을 챙기는 것도 그에겐 숨 가쁘게 벅차다. 만약 그에게 이 인터뷰를 위해 장문의 메일을 쓸 시간이 있다면 차라리 그 시간에 좀 쉬라고 권하고 싶다. ‘열심히 일한 당신, 떠나라!’
둘째, 자기 자신에 대해 누군가에게 이야기한다는 건 생각보다 어려운 일이다. 그것도 질문에 답하는 형식이 아니라 메일에다가 묻지도 않은 자신의 이야기를 쓴다고? 작은 일에도 쉽게 부끄러움을 타는 그에겐 너무 가혹한 일이다.
요즘 그를 볼 때마다 드는 생각은 하나다. 안쓰러움. 이건 뭐 쉴 틈이 없으니... 오로지 자신만을 위한 24시간이 주어진다면 뭘 하고 싶으냐는 질문에 그는 여행을 가고 싶다고 했다.
“산이나 그런데 가서 혼자 걸으면서 생각들을 정리할 시간이 있었으면 좋겠어요. 여행길에서 낯선 사람들을 만나보고도 싶기도 하구요. 늘 비슷한 일상을 살다보면 그 틀 안에서 만날 수 있는 사람들만 만나게 되니까, 그런 사람들 말고 전혀 다른 사람들을 만나보고 싶어요.”
근데 나는 이 대답 또한 온전히 믿지 않는다. 답을 할 때 그의 얼굴에 간절함 같은 게 보이지 않았다. 지금의 삶이 충분히 만족스럽기 때문일까? 아니면 혼자 떠나는 여행보다는 아내와 어린 아들과의 동행이 더 행복하기 때문일까? 이런 얘기를 하니 이 남자의 대답이 걸작이다.
“뭐, 그렇죠... (웃음) 저보다 아내가 더 여행을 좋아하거든요.”
아내에게서 전화가 오면 그의 휴대폰엔 ‘내 사랑 은종’이라고 뜬다. 우리 남편에게 내가 전화를 하면 신분증에 박힌 나의 이름 세 글자가 그대로 뜬다. 아, 이젠 나도 철이 들라나 보다. 예전 같으면 이런 사소한 것에도 배가 아팠을 텐데, 이젠 남들의 닭살 돋는 행각마저도 빙긋이 웃어넘길 수 있을 만큼 나도 넉넉히 나이를 먹었다.
세월이 더 흐르고 나면 그도 나처럼 좀 변했으면 좋겠다. 겸손한 그가 좋지만, 연애 이야기쯤은 부끄럼타지 않고 이야기해 줄 수 있을 정도로만 좀 뻔뻔해지면 좋겠다. 그래야 나도 ‘웅소씨의 사생활’이란 제목에 걸맞은, 내용이 충실한 인터뷰 기사를 쓸 수 있을 터이니 말이다. 쳇, 내생에 하고 싶은 일도 안 가르쳐주고 말이지...
너무도 겸손하고 말수가 없으며 진중하기까지 한 사람과 인터뷰를 하면 그 글을 쓰는 사람의 심정이 어떨지 지금쯤은 모든 사람들이 알 거라고, 나는 믿는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