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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시민이 짓는 새로운 민주주의라는 전망] 1강
시민이 짓는 새로운 민주주의라는 전망
2016.03.17 (목) 김만권 선생님
2014년 4월 17일에 열려고 했던 강의. 그러나, 바로 전 날 세월호 사건이 터져 열 수 없었다던 강의. 세월호 2주기가 얼마 남지 않은 시점에서 한 아이의 아빠가 된 만권쌤에게 묵혀 뒀던 이야기를 꺼내 들을 수 있는 7주가 시작됐다. 언제나 그랬듯이, 강의는 한 편의 시를 읽는 것으로 시작이 됐다. 김용택 시인의 그 여자네 집을 읽으며 ‘마치 그 집이 민주주의의 집 같았다’며 강의 제목인 ‘시민이 짓는 새로운 민주주의’를 시에서 영감을 받으셨다고 한다.
강의는 안철수 현상에 대한 이야기로 시작됐다. 자고로 민주주의라는 사회에서는 시민이 적극적인 정치 참여가 필연적으로 결부되어야 하기 마련이지만 지금의 시민들은 선거철에만 반짝하고 동원되고 있다. 이런 현상에 대해 셸던 월린은 ‘도망자 민주주의’라고 얘기했다. 이 도망자 민주주의가 야기하는 문제는 대의 민주주의에서 대표자들조차 국민 또는 시민의 요구에 반응하지 않기 시작한다는 것이다. 이 도망자 민주주의에서 우리는 그들을 심판할 수 있는 선거일에만 자유로운 시민이 된다.
이렇게 제도권 정치 안에서 시민들에게 반응하지 않는 정치인들을 보며 신물을 느낀 대중들은 정당이라는 기반 없이 정치를 하던 안철수에 대한 기대를 걸었다. (그리고 그는 이후 ‘새정치’라는 이름이 무색하게 ‘안철수의 정치’로 기대를 무너뜨리기도 했다) 그러나 이 기대는 그만큼 정당 민주주의에서 청중 민주주의로 한 발 퇴보했다는 것을 반증한다. 제도권 안 정치인이 더 이상 시민에게 반응하지 않으니 정당보다 인물이 더 중요한 요인으로 자리잡게 되면서 특정 정당을 지지하는 집단이 투표하는 것이 아닌 한 인물에 대해 개인이 투표하는 경향이 커진 것이다. 인물의 이미지, 인물이 제기하는 쟁점들만을 비추는 미디어를 통해 주권자는 수동적으로 반응하게 된다. 이러한 청중 민주주의를 해소하기 위해서는 정당 민주주의와 시민 민주주의가 함께 어우러져야 할 것이다.
청중이 되어버린, 더 이상 적극적으로 정치를 들여다보지 않으며 이따금 자극적인 주제가 내던져질 때 냄비처럼 뜨겁게 달궈졌다 식어버리는 시민들. 우리는 ‘시민’이 대안이라고 얘기할 수 있을까? 그러다 언젠가 ‘시민’이라는 단어에 대해 누군가는 엘리트의 단어같은 느낌에 이질감이 든다는 말을 했더랬다. 그럼 대체 ‘시민’이라는 단어의 의미는 무엇이며, 누구를 뜻하는 단어고, ‘국민’과, ‘인민’과는 어떻게 다를까?
첫 번째로 ‘국민’이다. 이는 나라를 이루는 사람들이라는 뜻으로 일본 근대화 시기에 ‘people’을 ‘국민’으로 번역하기 시작하며 우리나라에선 국민학교 등 통상적으로 쓰이는 단어가 되었다(사실은 인민으로 번역하는 것이 옳다). 그리고 한 가지. 많은 사람들이 산업화 국가를 만든 것은 시장과 자본주의라고 생각하지만, 산업화 시기의 국가(commonwealth) 목적인 ‘공통의 부’를 만들기 위해서는 각자의 이익을 추구하기 바빠 분열된 개인을 모으는 것이 우선이었다. 그러니 ‘국민’이라는 단어는 민족국가의 형성, 그리고 산업화의 시작과 밀접하게 맞물려 있을 수밖에 없었다.
이어 두 번째로 ‘인민’이다. ‘people’이라는 단어는 너무나 일상적인데, ‘인민’이라는 단어는 꽤나 낯설다. 아무래도 북쪽 사람들의 단어라는 인식이 있어서일게다. 그렇다면 ‘people’, 즉 인민이라는 단어를 일상적으로 쓰는 미국은 좌파국가일까? (이 말에 수강생들이 웃음을 터뜨렸다) ‘national people’이라는 단어가 없는 것처럼, 인민은 그 자체로 민주주의 국가에서 정치적 주권을 가진 사람을 의미하는 단어이다. 앞서 민족국가의 형성 및 산업화와 맞물린 개념인 ‘국민’의 성격을 떨쳐낸 것으로 보면 된다.
마지막으로 ‘시민’이다. 해외에 나가 서로의 국적에 대해 물을 때. 많은 이들이 ‘nationality’란 단어가 아닌 ‘citizenship’이라는 단어를 쓴다. ‘nationality’는 민주주의 국가에서 본인의 권리가 있든지 없든지 그 국적 자체를 물어보는 단어지만 ‘citizenship’은 정치적 참여권리가 완전히 보장되는 것, 즉 당연하게도 네가 사는 곳은 그래야 한다는 것을 보여주는 단어이기 때문이다. 고로 안정적인 민주주의를 이룬 곳에서는 ‘국민’보다 ‘시민’이라는 단어에서 ‘people’의 속성이 더 잘 드러난다고 볼 수 있다.
‘시민’은 고대 아테네에서 탄생한 개념이다. 도시를 나누던 성벽 안에서는 인간이 아닌 법이 통치하는 곳을 뜻했다. ‘법으로 지배받는 사회에서 나쁜 법을 개선할 수 있을 때 진짜 법의 지배를 받는 것’이라고 끝까지 얘기하는 용기를 가졌던 소크라테스는 아이러니하게도 철학하는 삶과 정치참여의 삶이 서로 상응하지 않는다는 이유로 처형되고 만다. 이런 그리스의 전통을 로마의 공화국이 이어받았지만 아테네의 민주주의와 로마의 공화주의의 차이점은 민주주의가 반드시 ‘법의 지배’를 요구하지 않았다는 점이다.
마셜은 시민권을 세 가지 범주로 나누어 이야기했다. 첫 번째로, 지금 우리가 잃어버린 것 같은 시민적 시민권이 있다. 시민적 시민권은 자유주의 사상의 핵심적 가치를 담은 인신의 자유, 사상과 양심의 자유, 의사 표현과 언론의 자유, 재산 획득의 자유를 말한다. 두 번째로 정치적 시민권은 1인 1표의 보통선거권을, 마지막으로 사회적 시민권은 인간적 삶을 보장받는 복지와 분배의 내용을 받는 권리를 얘기한다. 받아야 하는 권리에서 우리가 요구하지 않는 권리로 바뀌고 있기도 하다. 언제 우리가 국가에게 그런 것들을 받았냐는 듯이.
서로 양립할 수 없는 가치를 가진 사람들끼리 공존하는 곳이 바로 ‘사회’의 정의라고 한다. 그렇다면 우리는 서로의 가치를 두고 매일을 싸울 수밖에 없음에도 무너진 민주주의의 잔해만 가득한 이 땅에서 어떤 민주주의를 함께 지어나가야 하는 것일까?
‘시민으로의 당신은, 단순한 투표 이외의 수단 말고도 어떻게 그 부분이 되고 어떻게 당신을 표현하는지 알 필요가 있다’라고 얘기한 미국의 첫 여성 대법관 샌드라 데이 오코너의 말마따나 이를 아는 시민들이 이 시대의 대안이 될 수 있을까. 아니, 되어야 한다. 앞으로 7주 동안의 강의가 이를 증명해줄 수 있는 강의가 되었으면 좋겠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