강좌후기 l 강좌 후기를 남겨주세요
민주주의 관점에서 바라본 핵발전과 핵폐기물 정책
시민의 눈으로 과학기술을 보다 2강
예술가란 어떤 존재일까요? 안일하고 지적인 사고를 하는 일에 게으른 인류가 다른 질문과는 달리 이 질문에는 말할 수 없이 끈질긴 태도를 보여왔습니다. <그런 건 하늘이 내려준 재능이야!> 어떤 예술가에게 감명을 받은 착실한 사람들은 이렇게 겸허하게 말합니다. 이들의 선량한 견해에 따르면 명랑하고 고상한 감명을 주려면 그 원천인 예술가도 틀림없이 명랑하고 고상할 것이라는 이야기지요. 그리하여 예술가의 이러한 재능이 극히 사악한, 극히 미심쩍은 <재능>일 수도 있다고 의심하는 사람은 아무도 없습니다.
위의 인용문은 토마스 만의 중편소설 <토니오 크뢰거>에서 주인공(토니오 크뢰거)이 ‘리자베타’에게 ‘예술가’에 대한 환상을 깨주는 구절 중 하나이다.
나는 이렇게 교육받았다. 초등학교-중학교-고등학교 지금의 대학원생에 이르기까지 그리고 한낱 사회학도의 길을 비스듬히 걷는 이 도중(道中)에 이르기까지도, 과학에 대한 일종의 진보적 미래지향적인 낭만성에, 마치 인용문에 표현된 듯한 예술적 재능인 것인 양. 그렇게 존중과 경의와 신뢰와 믿음으로 내 주변 생활세계를 구축해왔었다.
▲ 이영희 교수
‘선량한 견해들’이 모인 집단들은 분명 우리 모두의 번영과 안녕을 위해 지금도 열심히 살고 있다. 마치 전기 없이 못사는 똑같은 우리들의 모습처럼, 우리의 편의를 위해 우리 스스로가 과학적으로 해결할 수 없는 문제에 직면해 있다는 사실도 까맣게 잊은 체 정말 그렇게만, 선량하게만, 살아가야 하는 것인가?
핵 폐기물, 시민들의 삶에 중대한 영향을 미치고 사회적으로 논란과 갈등이 큰 국가전력정책의 결정은 우리의 선량한 믿음으로 지금까지 이뤄져 왔었다. 이것이 일종의 기술관료적 패러다임을 만들어냈다. 핵폐기물 관리는 전문가들에게 맡겨야 한다는 일종의 폐쇄적인 전문가주의를 양산해 내었고 국가 정책의 위험 평가 및 관리의 주류를 형성하고 있다.
2017년 한국 국토에 핵발전소 총수는 28기에 달하게 되는 고도의 풍요사회 속에서 핵폐기물의 양 또한 점점 증가할 것은 자명하다. 현재 경주 월성원전 인근 지역은 이에 대한 준비가 한창이다. 문제는 이러한 물질에 대한 안전을 그 누가 호언장담할 수 있을까? 이에 대한 전문가들은 적절한 데이터 기준수치를 들고 와서 지역 주민들에게 안전성에 대해 설득하지만 정작 피해를 입는 사람은 아마도 아닐 듯싶다.
우리나라 전력 정책의 비민주적 의사결정 구조에서는 시민들의 생활세계에 대한 고려가 전혀 없다. 이러한 과정에 대한 경고는 율리히 벡이 정의한 ‘위험사회’로의 이행이다. 이것은 후기 산업사회의 ‘위험’(핵폐기물)이 가지는 특징을 처리함에 있어 그 과정이 내재적인 대립과 모순으로 인해 계산불가능한 위험들에 직면하게 되고 이로 인해 불확실성으로 회귀한다는 점을 강조했다. 더 이상 산업사회의 제도(기술관료적 패러다임-폐쇄적 의사결정구조)들로써는 이러한 위험을 통제하지도, 이로부터 스스로를 보호하지도 못한다.
유명했다. 우리나라의 모험심(높은 위험추구경향)은. 일명 한국의 압축적 근대화는 전세계의 주목을 받았다. 그렇기에 우리나라의 풍토가 안전보다는 속도를, 내실보다는 외형을, 과정보다는 결과를 그리고 미래에 ‘부가될 비용’보다는 현재 시점에서의 ‘비용절약’을 더 중요한 덕목으로 근대화 과정을 보편화시켰다. 경 주 지자체에게 2005년, 중/저준위 방폐장 부지선정으로 3,000억+a의 보상액을 지급한 사례를 보면 이러한 모험심은 여전히 순항중이다.
각성이 필요하다. 우리의 행위는 사회적 행위의 일부에 소속된다면 마찬가지로 우리가 추구하는 모든 것들 속에 의도하지 않은 결과들이 작동할 수 있다. 우리는 비록 전문가는 아니지만 생활세계의 피해를 그 누구보다도 앞서 먼저 당하는 입장에 속한 일반시민이다. 위험의식은 이러한 위험의 가능성에 대해서 ‘비경험’, 혹은 ‘비전문성’으로 새롭게 구성될 필요가 있다. 유대관계의 중심에 불안, 공포가 존재하게 되면 자연스럽게 연결되는 생명에 기반한 공동성을 추구할 수 있다. 비록 아직까지도 우리들은 ‘과학적 합리성’(새로운 전문가집단)에 다시금 호소하는 역설이 성립될 수도 있지만 심사숙고하는 시민의식! 이것 하나로 뭉쳐진다면 이러한 문제가 지금, 당장 여기에 직면한다 했을 때도 슬기롭게 대처할 수 있는 연대를 꿈꿀 수 있지 않을까.
더 이상 과학기술은 천부적인 예술적 재능은 아니다.
예술가란 어떤 존재일까요? 안일하고 지적인 사고를 하는 일에 게으른 인류가 다른 질문과는 달리 이 질문에는 말할 수 없이 끈질긴 태도를 보여왔습니다. <그런 건 하늘이 내려준 재능이야!> 어떤 예술가에게 감명을 받은 착실한 사람들은 이렇게 겸허하게 말합니다. 이들의 선량한 견해에 따르면 명랑하고 고상한 감명을 주려면 그 원천인 예술가도 틀림없이 명랑하고 고상할 것이라는 이야기지요. 그리하여 예술가의 이러한 재능이 극히 사악한, 극히 미심쩍은 <재능>일 수도 있다고 의심하는 사람은 아무도 없습니다.
위의 인용문은 토마스 만의 중편소설 <토니오 크뢰거>에서 주인공(토니오 크뢰거)이 ‘리자베타’에게 ‘예술가’에 대한 환상을 깨주는 구절 중 하나이다.
나는 이렇게 교육받았다. 초등학교-중학교-고등학교 지금의 대학원생에 이르기까지 그리고 한낱 사회학도의 길을 비스듬히 걷는 이 도중(道中)에 이르기까지도, 과학에 대한 일종의 진보적 미래지향적인 낭만성에, 마치 인용문에 표현된 듯한 예술적 재능인 것인 양. 그렇게 존중과 경의와 신뢰와 믿음으로 내 주변 생활세계를 구축해왔었다.
▲ 이영희 교수
핵 폐기물, 시민들의 삶에 중대한 영향을 미치고 사회적으로 논란과 갈등이 큰 국가전력정책의 결정은 우리의 선량한 믿음으로 지금까지 이뤄져 왔었다. 이것이 일종의 기술관료적 패러다임을 만들어냈다. 핵폐기물 관리는 전문가들에게 맡겨야 한다는 일종의 폐쇄적인 전문가주의를 양산해 내었고 국가 정책의 위험 평가 및 관리의 주류를 형성하고 있다.
2017년 한국 국토에 핵발전소 총수는 28기에 달하게 되는 고도의 풍요사회 속에서 핵폐기물의 양 또한 점점 증가할 것은 자명하다. 현재 경주 월성원전 인근 지역은 이에 대한 준비가 한창이다. 문제는 이러한 물질에 대한 안전을 그 누가 호언장담할 수 있을까? 이에 대한 전문가들은 적절한 데이터 기준수치를 들고 와서 지역 주민들에게 안전성에 대해 설득하지만 정작 피해를 입는 사람은 아마도 아닐 듯싶다.
우리나라 전력 정책의 비민주적 의사결정 구조에서는 시민들의 생활세계에 대한 고려가 전혀 없다. 이러한 과정에 대한 경고는 율리히 벡이 정의한 ‘위험사회’로의 이행이다. 이것은 후기 산업사회의 ‘위험’(핵폐기물)이 가지는 특징을 처리함에 있어 그 과정이 내재적인 대립과 모순으로 인해 계산불가능한 위험들에 직면하게 되고 이로 인해 불확실성으로 회귀한다는 점을 강조했다. 더 이상 산업사회의 제도(기술관료적 패러다임-폐쇄적 의사결정구조)들로써는 이러한 위험을 통제하지도, 이로부터 스스로를 보호하지도 못한다.
유명했다. 우리나라의 모험심(높은 위험추구경향)은. 일명 한국의 압축적 근대화는 전세계의 주목을 받았다. 그렇기에 우리나라의 풍토가 안전보다는 속도를, 내실보다는 외형을, 과정보다는 결과를 그리고 미래에 ‘부가될 비용’보다는 현재 시점에서의 ‘비용절약’을 더 중요한 덕목으로 근대화 과정을 보편화시켰다. 경 주 지자체에게 2005년, 중/저준위 방폐장 부지선정으로 3,000억+a의 보상액을 지급한 사례를 보면 이러한 모험심은 여전히 순항중이다.
각성이 필요하다. 우리의 행위는 사회적 행위의 일부에 소속된다면 마찬가지로 우리가 추구하는 모든 것들 속에 의도하지 않은 결과들이 작동할 수 있다. 우리는 비록 전문가는 아니지만 생활세계의 피해를 그 누구보다도 앞서 먼저 당하는 입장에 속한 일반시민이다. 위험의식은 이러한 위험의 가능성에 대해서 ‘비경험’, 혹은 ‘비전문성’으로 새롭게 구성될 필요가 있다. 유대관계의 중심에 불안, 공포가 존재하게 되면 자연스럽게 연결되는 생명에 기반한 공동성을 추구할 수 있다. 비록 아직까지도 우리들은 ‘과학적 합리성’(새로운 전문가집단)에 다시금 호소하는 역설이 성립될 수도 있지만 심사숙고하는 시민의식! 이것 하나로 뭉쳐진다면 이러한 문제가 지금, 당장 여기에 직면한다 했을 때도 슬기롭게 대처할 수 있는 연대를 꿈꿀 수 있지 않을까.
더 이상 과학기술은 천부적인 예술적 재능은 아니다.
"시간이 흘러 과학이 더 발전하면 핵폐기물 처리방법도 안전한게 나오겠지~"라는 안일한 과학 낙관주의는 현실의 문제점을 극복하지 않고 다음 세대에 떠넘기는 식밖에 되지 않습니다.
정부와 더 많은 사람들의 정확한 현실 인식이 필요한 때입니다.
"과학"은 예술도 아니고, 신도 아니고, 인간도 아니고...맹신해야 할 어떤 대상이 아니라는 점을 학교에서부터 제대로 가르쳤으면 좋겠습니다.
"권위"도 마찬가지!
하지만 교칙과 선생님(웃어른)의 권위를 바탕으로 한 수직적 교육이 일반적인 우리 사회의 학교에서 과연 이런 내용이 잘 전달될 수 있을지도 문제겠네요..
그때 가장 인상 깊었던 구절 하나... '모두가 우려하는 핵발전소 사고는 확률적으로 일어날 가능성이 매우 낮다. 몇억분의 일.. 이정도면 거의 일어날 수 없는 것이라 해도 과언이 아니다.'
이 주장에 대한 반론이 무척 인상적이었습니다. '분모에 얼마나 큰 수가 들어가는가와 상관 없이 분자에 놓이게 되는 1이라는 수를 생각해 보자. 1이라는 숫자는 분모의 크기와는 상관 없이 이미 일어날 가능성을 내포하고 있다' 숫자에 포장되어 가려져 있던 추악한 진실을 발견하는 순간이었습니다. 확률이 낮다는 건 사실 아무 의미도 지니지 못한다는 것! 로또의 확률이 아무리 낮아도 1등은 꾸준히 나오니까요...
선진국에서는 핵발전이 너무 위험해 단계적으로 줄여나갈 계획들을 가지고 있다는 얘길 들은 적 있습니다. 같은 차원에서 대규모의 수력 발전 또한 인류와 생태계에 위험한 건 마찬가지라고 합니다. 책을 읽을 당시 대안으로 제시된 건 지역마다 전력규모에 맞는 소규모 수력발전이었는 데요... 그게 벌써 언제 얘긴지... 지금은 풍부한 상상력으로 더 나은 대안들이 졔시되고 있겠지요... 아! 이 수업 안 들은 게 무지 후회됩니다.
3강 강의에 내용을 다루었지요.
무렉마을 이야기가 무척 인상적이었습니다.
http://academy.peoplepower21.org/lecture_board/6825