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서른 세번째 '히스토리 트립'과의 인터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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호모아줌마데스의 좌충우돌 문화유산답사기
#1. 출발 하루 전
답사 일정이 적힌 문자메시지를 다시 한 번 확인한다.
‘2월 8일 오전 9시. 경교장 - 홍난파가옥 - 인왕산 둘레길 - 창의문 - 북악산 성곽길 - 성북동. 4시간 코스. 점심 먹고 끝남.’
4시간이란 말이지. 뭐, 그 정도야 가뿐하지. 문제는 날씨인데 올 들어 가장 춥다고 온갖 매체에서 떠들어대니 애초 계획을 수정할 수밖에. 감기 기운이 있는 막내 녀석은 빼고 큰 녀석만 합류하는 걸로 결정을 했다. 후폭풍이 거세다. 10살 난 막내는 뗑깡의 지존. 자기도 데리고 간다고 해놓고서 왜 약속을 안 지키냐고 난리다. 눈물과 콧물로 범벅이 된 녀석을 안고 침대에 눕긴 했으나, 우리 모두가 ‘잠자리’라고 부르는 그곳에서 난 그날 잠을 구경도 못했다. 에잇!
#2. 답사 당일 오전 8시
일요일 아침 8시 기상은 가혹하다. 전형적인 올빼미족인 난 좀비 코스프레하며 식구들 아침을 챙긴다. 나물 넣고 밥 넣고 들기름 몇 방울 넣고, 비빔밥 양푼 앞에 네 식구가 또르르 모여 앉았다. 4시간이나 걸으려면 에너지원이 필요할 터, 먹기 싫어도 위는 채워야 한다. 애들아, 한쪽 눈이라도 좀 뜨고 먹을래?
#3. 답사 당일 오전 9시
“엄마, 몇 시까지 올 껀데?”
“(일정표를 머릿속에 굴리며) 한 5시쯤? 아빠 말 잘 듣고 있어.”
서러운 표정의 둘째를 뒤로 하고 차에 올랐다. 역까지 배웅해준 남편 덕분에 전철을 타는 것까진 무사히 성공. 일요일 아침인데도 사람이 많네. 근데 배낭이 왜 이리도 무겁다냐? 책 한권, 간식 몇 가지, 딸아이와 함께 마실 물 2병뿐인데 어깨를 짓누르는 이것은 그저 삶의 무게란 말이냐? 이런저런 공상을 하다 보니 어느덧 내릴 역. 경교장에서 기다리고 있을 멤버들을 생각하며 지하철 계단을 단숨에 뛰어오른다. 그때 뒤쪽에서 들리는 다급한 외침.
“엄마! 같이 가!”
잊지 말자, 난 오늘 혼자가 아니다.
#4. 경교장 도착
경교장이 어딘지 택시기사아저씨도 모른다고 해서 그냥 강북삼성병원 앞에 내렸다. 장례식장을 끼고 돌아가니 떡 하니 눈앞에 경교장이 있다. 반가운 얼굴들을 보자 긴장이 살짝 풀린다. 시간을 보니 9시 40분. 그래, 이 정도면 괜찮다. 미리 늦을 거라고 양해를 구했으니.
이날 경교장에 모인 답사 모임 멤버들은 모두 7명. 등장인물들을 간단히 소개하고 가자.
김현우 : 현재 농협중앙회에서 국내산 농수산물 유통을 원활하게 하는 업무를 맡고 있음.
이른바 ‘가스통할배’ 사건 당시 이 사회에 대한 안타까움을 느껴 참여연대 회원으로 가입함.
이경숙 : 관세사 사무소에서 일함. 느티나무 강좌들을 너무 사랑해서 참여연대 회원으로 가입함.
느티나무에서 근현대사 강의를 들으며 역사에 대해 더 많이 알고 싶어져 답사모임에 참여.
김정기 : 제조업을 하고 있고 평소 역사에 관심이 많았음. 지인의 소개로 답사모임에 참여하게 됨.
모임 내에서 별명은 정구언니. 참고로 장동건 닮았다는 루머 아닌 루머가 있음.
김덕자 : 세무사 사무소에서 일함. ‘가스통할배’ 사건 땜에 참여연대 가입. 느티나무 강좌들을 들으며
역사 공부에 대한 호기심이 더 많이 생겨 답사모임에 참여.
박미경 : 직장인. 느티나무지기이자 엄청난 수의 느티나무 강좌를 듣는 열혈 수강생.
김영미 : 영국대사관에서 근무. 느티나무 강좌가 좋아서 참여연대 가입. 강좌에서 만난 이들과
잦은 술자리를 하며 답사모임을 시작하게 됨. 모임의 총무이자 규율부장.
박주련 : 초등학교 교사. 대선 끝나고 절망에 휩싸여 참여연대 가입. 느티나무의 근현대사 강의 수강.
학창시절 점으로만 배웠던 역사를 선으로 배우고 싶어 모임에 가입. 모임의 막내.
멤버들의 면면을 보면 알겠지만, 이 답사 소모임은 느티나무에서 근현대사 강의를 들었던 수강생들이 중심이 되어 만들어졌다(그 중에서도 뒷풀이에 꼬박꼬박 참여했던 이들이 핵심멤버다). 오늘 답사에 참여하지 못한 이들까지 합치면 회원은 10명. 2012년에 모임을 시작해서 벌써 햇수로 4년째란다.
#5. 이건 암호인가요?
늦게 오는 바람에 경교장을 찬찬히 살펴볼 수 없었던 우리 모녀를 영미쌤이 챙긴다.
“이리 와봐. 여기 사진 보이지. 김구선생님 부인의 묘인데 묘비의 생몰년도 표시가 독특해.”
그러고 보니 숫자가 쓰여 있어야 할 자리에 한글 자음이 적혀있다. 이런 식으로,
ㄹㄴㄴㄴ해 ㄷ달 ㅊㅈ날 남. 대한민국 ㅂ해 ㄱ달 ㄱ날 죽음.
<김구 선생의 부인 최준례 여사의 묘 사진>
조선어학자 김두봉 선생의 솜씨다. 한글을 너무 사랑하고 아낀 나머지 숫자 대신 한글자모를 쓰셨단다. 그 표식을 두고 어리둥절 하느라 정작 김구선생 부인(최준례)의 삶에는 관심을 두지 못했다. 하긴 누구의 설명이 없더라도 그녀의 삶이 얼마나 고달픈 것이었는지는 짐작이 가는 바이다. 이 묘비 또한 타국에서 가난하게 죽어갔던 한 여인의 삶을 안타깝게 여긴 동포들이 한푼 두푼 모아 세웠다고.
근데 왜 이곳 이름이 ‘경교장’이지? ‘장’자가 한문으로 뭐야? 구경을 마친 멤버들 사이에서 질문들이 쏟아진다. 이즈음 꼭 등장하는 이가 있다. 정말 말 그대로 ‘모르는 게 없는’ 김현우쌤. 엄청난 역사적 지식으로 무장하고 늘 답사모임에서 안내자 역할을 맡는 ‘능력자.’ 근데, 그의 설명을 듣고 있다 보면 난 괜히 딴지를 걸고 싶어진다. 너무 많이 아니까 혹 이것도 알까 하고 엉뚱한 질문을 던져서 괴롭히고 싶어지는 것이다. 마치 총각선생님을 괴롭히던 10대 여고생으로 다시 돌아가는 느낌이랄까.
말썽꾸러기 여학생들의 눈이 초롱초롱 빛나는 가운데 현우쌤의 설명이 시작되었다.
“경교장이란 이름은 말이죠...”
#6. 두 개의 총알구멍
강북삼성병원에 위치한 경교장은 1939년 지어진 지하 1층, 지상 2층 건물로 김구 선생이 45년부터 안두희에게 암살당한 49년까지 임시정부의 집무실 겸 숙소로 사용한 곳이다. 그러나 우리의 관심은 온통 '경교장이란 이름이 어디서 왔느냐에 쏠려 있었다. 원래 ‘죽첨장’이었던 이름을 김구 선생이 직접 ‘경교장’이라 개명했다는데 그 이름은 근처에 있던 다리 ‘경교’에서 따온 것이라고, 현우쌤이 마치 어린애들 달래듯 설명해주셨다.
어째 열심히 듣지 않는 것 같은 큰 녀석에게 물었다.
“인영아 뭐가 제일 기억에 남아?”
“2층에서 본 유리창의 총구멍 두 개.”
응, 그렇구나. 김구 선생은 안두희가 쏜 총에 맞아 이 건물에서 돌아가셨다. 그 총알 자국이 건물 2층 유리창에 그대로 남아 있다. 세월의 때를 잔뜩 입은 유리창과 총알구멍 2개를 잠시 서서 바라보았다. 영하의 공기가 구멍을 통해 무서운 기세로 들이치고 있었다. 아이를 앞세우고 좁은 계단을 통해 다시 1층으로 내려오는데 자꾸만 부질없는 생각이 비집고 들었다. 김구가 죽지 않았다면, 내가 아는 우리의 역사는 얼마나 바뀔 것인가.
#7. 전혜린이 왜 경교장에 등장할까?
현우쌤의 이야기가 ‘역사의 그날’로 들어간다.
“안두희가 2층에서 김구를 쏴죽이고 아까 우리가 본 그 좁은 계단 있죠? 거기로 뛰어내려오다 경비병들에게 잡힙니다. 근데 희한하게 어떻게 알았는지 그때 헌병들이 들이닥쳐 안두희를 강제로 인계해가요. 그리고 경찰 신분이었던 전봉덕이란 인물이 곧바로 헌병사령관으로 임명돼 와서는 안두희를 조사합니다. 전혀 군대와는 상관없는 인물이 온 거죠. 사실 그때 헌병사령관으로 있던 인물은 일제강점기 당시 중국에서 활동했던 사람인데 김구도 중국 쪽과 인연이 깊었기 때문에 이런 관계를 염두에 두고 사령관을 교체한 거겠죠. 제가 재밌는 얘기 하나 해드릴까요? 바로 이 전봉덕의 딸이 전혜린입니다.”
“헐!” 이 한마디를 제외하고 난, 그리고 아무 말도 할 수 없었다. 문득 그녀의 천재성과 삶에 대한 우수어린 열정과 자살로 갈무리된 그녀의 짧은 생애에 대한 어지러운 생각들이 먼발치에서 스쳐갔을 뿐.
“또 하나, 전혜린의 남편도 굉장히 유명한 사람이에요. 김철수라고, 우리나라 원로 헌법학자로서...”아, 현우쌤은 대체 어디까지 알고 있는 걸까?
#8. 경교장을 떠나며
많은 이야기를 들었으나 많이 기억하지는 못한 채로 경교장을 나섰다. 밖은 영하 12도. 바람이 거세게 불고 있으니 체감온도는 영하 20도쯤 될 꺼야, 얼마나 추울까, 이런 날씨에 답사라니 미친 짓이지. 나는 대체 왜 이곳에 왔을까.
“인영아, 모자 단단히 써.”
아이의 옷매무새를 살핀 다음, 나도 옷에 달린 모자란 모자는 다 챙겨서 썼다. 안감에 털이 박힌 후드티 모자를 먼저 쓰고 그 위로 오리털 점퍼의 모자까지 쓰니 완벽무장. 일단 귀와 머리 쪽은 방어가 되겠군. 그러나 이 단단한 대비가 불러올 참극(?)이 있었으니, 그 이야기는 차차 하기로 하고. 경교장을 나서기 전, 너무 추운 날씨를 감안해 오늘 계획했던 답사일정을 반으로 줄이기로 의견일치를 보았다.
“야호! 신난다. 당연히 그래야지요.” 답사모임 새내기답게 패기에 넘친 나의 발언이 이어지고, 난 한결 가벼워진 발걸음으로 경교장을 나섰다.
#7. 기상청 옛터
경교장을 떠나 작은 언덕길을 따라 잠시 걸으면 기상청 옛터가 나온다. 일제강점기에 이곳으로 신축이전하며 ‘경성측후소’라 불렸던 곳.
<기상청 옛터 사진>
“지금 기상청은 보라매공원 옆으로 이전했지만 여전히 이곳이 기후관측의 중심이 되고 있어요. 언론에서 말하는 개화 시기라는 것도 이곳의 꽃이 피는 시기를 말하는 거구요.”
안뜰에 갖가지 나무들이 심어져있다. 이름 하여 ‘계절관측표준목.’ 이 나무들에 꽃이 피어야 서울의 개화가 공식적으로 인정된다고. 갑자기 현우쌤이 질문을 던진다.
“그럼 개화는 그렇고 한강이 얼었다고 할 때는 어디가 얼어야 할까요?”
누군가 빠른 눈치와 번뜩이는 총기로 답을 맞혔다. 여기서 가장 가까운 한강다리가 한강대교라고. 아, 그렇구나. 그러고 보니 난 참 모르는 게 많구나.
“당시 이곳 직원들이 말을 타고 가서 얼음이 얼었는지 확인해야 했을 테니 당연히 가장 가까운 곳이 기준점이 되었겠죠. 그럼 정확히 한강대교의 어디가 얼어야 한강이 얼었다고 말할까요?”
그런 것도 있나? 기준점이 있어야하긴 할 테지만 한강대교 근처 아무 곳이나 얼면 되는 거 아닌가, 이러고 혼자 투덜대고 있는데 참으로 디테일한 설명이 이어진다.
“한강대교의 두 번째와 네 번째 교각 사이의 물이 얼어야 합니다. 그것도 상류쪽 물이 얼어야 하지요.”
멤버들이 다음 답사장소로 걸음을 옮긴다. 아는 것은 일천하기 그지없으나 입 하나만은 늘 팔팔한 나는, 그 뒤를 쫓으며, 쉴 새 없이 입을 놀린다.
“정말요? 진짜? 두 번째와 네 번째 교각 사이라구요? 와 그런 걸 다 어떻게 알고 계신 거예요? 인터넷에 가서 찾아봐야지. 정말 맞는 얘기예요?”
빈 수레가 요란하다는 말은, 진리다.
#8. 행복한 마음, ‘딜쿠샤1923’
매서운 바람 때문에 일행들의 뒤꽁무니에 숨다시피 하며 걸었다. 이런 날엔 방구석에 있어도 춥다는 소리가 나올 텐데, 이게 뭐하는 짓이냐고, 나는 투덜댔고, 몇 걸음 걷다 또 투덜댔으며, 일정이 마칠 때까지 끊임없이 투덜댔다.
일행은 잠시 홍난파 가옥 앞에 머물렀다가 다시 주택가의 좁은 골목 안으로 들어섰다. 그렇게 또 바람을 맞으며 얼마쯤 걷다보니 요상하게 생긴 건물이 하나 나왔다. 서양식으로 지어진 붉은색 벽돌집이라 주변의 집들 사이에서 단연 돋보였다.
<홍난파 가옥> <딜쿠샤 - 앨버트의 집 사진>
“앨버트 테일러의 집입니다. 그의 부친이 한국에 금광개발업자로 있었고 그 또한 UPA(UPI의 전신)의 한국 특파원으로 서울에 거주했어요. 1923년에 세워졌고 1942년 본국으로 추방을 당하기 전까지 부부가 거주했던 곳이죠. 그는 3.1. 운동에 대한 기사를 힘들게 외부세계에 알린 언론인입니다. 그리고 이 때문에 서대문형무소에서 감옥살이를 하기도 했죠. 결국 나중엔 추방을 당해 고국으로 돌아갔는데 한국을 너무 사랑한 나머지 죽고 나면 한국에 묻어달라는 유언을 남겼습니다. 실제로 그의 유해는 현재 양화진 외국인 묘소에 안장되어 있습니다.”
낯선 이국땅에 가족들과 함께 머물 새집을 지으며 그는 ‘DILKUSHA(딜쿠샤) 1923’라는 이름을 달았다. 힌두어로 ‘행복한 마음’이라는 뜻의 딜쿠샤. 아직도 그 희망의 글귀가 새겨진 건물 초석이 집과 함께 생생히 자리를 지키고 있다. 그러나 행복한 마음의 집 앞에 서서 난 별로 행복하지 않았다. 전적으로 추위 탓이었다. 아무 생각 없이 운동화를 신고 온 큰 녀석이 발이 시리다고 투덜대고 있었다. 그럼, 엄마 부츠랑 바꿔 신자. 신발을 바꿔주었더니 이젠 손이 시리단다. 옆에 있던 미경쌤이 자신의 장갑을 녀석에게 벗어주었다. 여러 사람에게 우리 모녀가 민폐라는 생각이 들어 우울했다.
희망과 행복의 궁전을 세운 부부는 그러나 자신들의 행복에만 눈이 먼 삶을 살지는 않았다. 그리고 그 삶의 댓가는 감옥행과 강제추방이었다. ‘행복한 마음’ 하나만을 덩그러니 남긴 채 떠나야했던 이들. 그리고 이들에게 죽음 이후에야 영원한 안식의 거처를 허락한 이방인의 나라.
앨버트 부부가 살았던 그 집에는 지금도 사람들이 살고 있다. 집의 겉모습은 당시와 비슷할지 모르나 내부는 살림을 살아야 하니 이래저래 많이 고쳐졌을 것이다. 딜쿠샤 앞에서 우리 일행은 잠시 문화재 보호에 관한 짧은 이야기들을 나누다가 발길을 돌렸다.
#9. 73년생 소띠들의 극명한 체력 차이
이 집과 앨버트에 관한 더 자세하고 생생한 기록은 영미쌤이 답사 이후 자료들을 찾아 정리해서 페이스북에 올렸다. 그녀는 이 집에 관한 것 말고도 이날 답사코스에 있었던 주요한 내용들을 모두 정리해 올렸는데, 이 모든 작업을 답사가 끝난 그날 바로 했단다. 허탈하다. 그녀와 동갑내기인 난 그날 집에 가서 퉁퉁 부은 다리를 잡고 침대에 쓰러져서는 도통 일어날 줄 몰랐는데, 그녀는 그러고도 기운이 남아 답사를 정리하는 여러 편의 글을 쓰다니.
그녀가 올린 자료엔 앨버트 부부가 새로운 터전에 집을 지으며 품었던 희망과 행복에 대한 바람이 오롯이 담겨있다. 그리고 무엇보다 자신의 첫아이가 태어난 날 일어난 3.1.운동과 관련한 일화가 생생히 기록되어 있다. 추운 골목에서 만났던 빨간 벽돌집 앞에서보다 따뜻한 방안에서 그 글들을 읽는 동안 난 앨버트 부부에 대해 좀 더 오래 생각했다. 그리고 무엇보다 동갑내기 두 여인의 극명한 체력 차이에 대해서도 깊이 생각했다. 체력의 차이가 세상에 대한 태도의 차이를 낳는다. 등산에 대해 별 생각이 없던 내가 이날 이후 등산이라면 이를 갈게 된 것도 모두 체력 탓이다.
#10. 옥덩이 슈퍼와 데이비드 베컴
딜쿠샤를 떠나 인왕산둘레길을 향해 걸음을 옮기고 있을 때쯤 답사모임 멤버의 막내 주련쌤에게 전화가 왔다. 개인적인 사정 때문에 함께 출발하지 못해서 중간에 합류하기 위한 전화였다. 어디서 만나면 좋을까 물으니 현우쌤이 “옥덩이 슈퍼 앞으로 오라고 하세요!” 한다.
인왕산둘레길이 코앞이라 그런지 길의 경사도가 점점 가팔라지고 있었다. 말을 하지 않아도 입에선 숨소리가 거칠어지고 바람은 여전히 매섭고 황사로 공기는 탁하기만 하고. 이 엄청난 재난 앞에서 운동화 코끝만 바라보며 걷던 내게도 일행들의 대화가 들렸다.
“옥덩이 슈퍼요? 이름이 그게 뭐야? 크흐흐흐.” 나의 이 한마디에 난리가 났다.
“옥덩이?” “옥동자?” “아니, 옥경이래잖아.”
“난 옥덩이로 들었는데?” “아이구, 모자 좀 벗어봐.”
아참, 내 모자...
“듣는 거만 문제가 아니야. 입이 얼어서 사람들의 발음이 정확하지 않아.”
누군가 날카로운 지적을 했다. 그 소리에 우린 모두 입을 움직여 ‘옥경이’를 발음하기 시작했다. “옥굥이.” “옥겅이.” “옥견이.” 모두의 입이 얼었다. 푸하하하.
사실 나의 저하된 청각기능이 불러온 사태는 이번이 처음이 아니었다. 그 서막은 경교장에서 이미 열리고 있었나니, 현우쌤이 한창 ‘백범’ 김구 얘기를 하는데 거기다 대고 두터운 모자 두 개를 겹으로 쓴 난 늠름한 얼굴로 일행을 향해 말했다.
“베컴 얘긴 갑자기 왜 하시는 거래요?”
그때 일행들이 터뜨렸던 폭소의 의미는... 아마도 동정이었을 것이다. 어쨌든 난, 정말이지, 백범 김구와 데이비드 베컴을 동시에 떠올릴 날이 올 줄은 몰랐다.
#11. 오! 신이시여! 나의 무릎을 굽어 살펴 주소서! - 인왕산 둘레길 코스
분명 답사 일정에 인왕산 둘레길이라고 떡하니 써 있는데도 난 왜 등산을 하게 되리란 걸 전혀 예상하지 못한 걸까? 아마 인왕산의 ‘산’자보다 둘레길의 ‘길’자에 더 혹했었나 보다. 산이 아니라 길을 걷는 거라고, 길은 모름지기 평평한 거라고, 이렇게 쉽게 생각했던 거겠지.
돌이켜보면 쉽게 생각했기에 올 수 있었던 답사였다. 만약, 내가 걷게 될 그 가파른 산길에 대한 자세한 정보가 미리 주어졌다면 베컴도 옥덩이도 순대도 모두 나 없이 잘들 살았을 것이다. (그랬다면 좋았을 것을. 오, 내 다리에 박힌 알들이여!)
<인왕산 둘레길 코스> <인왕산 둘레길 사진> <인왕산 정상에서 찍은 ‘히스토리 트립’ 멤버들의 단체 사진>
인왕산 둘레길 코스에 대해선 지금도 별 할 말이 없다. 저 멀리 꿈속처럼 보이는 인왕산 정상을 향해 가파른 길을 꾸역꾸역 올라가며 내가 내뱉었던 좋지 않은 언어들(심지어 어린 자식이 옆에 있음에도 이성을 잃고 바른말 고운말을 사용하지 못 하였습니다 ㅠㅠ)과 중간에 일행들과 나누어 먹었던 꿀맛 같던 간식과 인왕산 정상에서 경찰들 몰래 청와대를 배경으로 찍은 사진 한 장과 내려오는 내내 말썽이던 나의 성치 않은 무릎 말고는. 이렇게 일방적으로 써도 될지 살짝 걱정이 되지만 답사를 마치고 내가 얻은 가장 큰 교훈은 앞으로 등산은 다신 하지 말자, 이거였다. (죄송합니다, 멤버 여러분들^^;)
어쨌거나, 인왕산은 앞으로 영원히 내가 두 다리로 올랐던 유일한 산으로 남을 것이다.
#12. 깐깐한 윤동주
원래 계획대로라면 인왕산 둘레길에 이어 창의문 - 북악산 성곽길 - 성북동까지 가야했으나 여러 이유로 우리의 여정은 인왕산둘레길 끝자락에 있는 윤동주문학관에서 마무리되었다. 생전 첨 해보는 산행이 우리 모녀에게 무리는 무리였다 보다. 이제는 큰 녀석까지 엉뚱한 소리를 한다.
“엄마, 그러니까 저게 점심을 먹을 식당인거지?” 인영아, 배가 많이 고픈가 보구나. 저건 운동주문학관이란다. 부디 정신을 차리렴.
<윤동주문학관 사진>
답사에 처음으로 동행을 하며 내가 일행들에게 끼쳤던 민폐는 실로 다양한데, 청각기능의 상실 다음으로 가장 컸던 건 남다른 무식의 깊이였다. 윤동주가 신사참배를 거부했다는 이야기를 듣고는,
“신사는 일본에만 있었던 게 아닌가요? 우리나라에도 신사가 있었단 말이에요?”
일행들의 눈길이 한곳으로 쏠렸다. 엥? 그것도 몰라? 죄송합니다, 무식해서.
문학관을 둘러보고 영상물을 상영한다는 지하로 발걸음을 옮겼다. 내려가 보니 그 지하공간이라는 게 참으로 특이했다. 예전 청운수도가압장의 물탱크 개조해서 만든 공간이라 그런지 어둡고 음습한 게 마치 지하 감옥에 들어온 기분이었다. 그곳에서 윤동주의 일생과 그의 대표적인 시 몇 편을 감상하고 밖으로 나왔다. 거의가 아는 사실들이라 별다른 감응은 없었는데 그의 성격을 설명하던 한 대목만은 지금도 기억에 남는다.
‘윤동주는 모자에 잡힌 작은 주름 하나도 참지 못하는 성격이었다.’
그랬구나. 착해 보이는 눈매에 희미한 미소를 띤, 누가 봐도 문학 소년처럼 보이는 그 얼굴 뒤에 그런 깐깐함이 있었구나. 그런 생각을 하며 외투 주머니에 손을 집어넣는데 무언가 차가운 것이 물컹하며 손에 잡혔다. 꺼내보니 삶은 계란 하나가 무참히 박살나 있었다. 아, 아까 인왕산에서 미경쌤이 먹으라며 나누어주었던 그 계란... 읔, 미치겠다. 주머니 안은 말할 것도 없고 내 손까지 노른자와 흰자의 뭉개진 파편들로 엉망이다. 비닐봉투에 으깨진 계란의 시체를 담고 휴지 한 장으로 손을 닦는다. 털털털, 끝.
난, 윤동주처럼 아름다운 시를 쓰지는 못하지만 웬만한 더러움은 잘 참아내니, 세상사, 따지고 보면 공평한 것들도 꽤 있다.
#13. 이것이 밥이다
윤동주문학관을 끝으로 답사 일정을 마무리하고 자하문길로 내려와 밥을 먹었다. 내가 시킨 메뉴는 조미료가 알맞게 들어가 더 맛나던 동태찌개. 추위와 고행의 등산길과 배고픔과 피로로 누더기가 된 육체를 따듯한 밥 한 그릇이 다시 넉넉히 데워준다. 배고프다고 툴툴대던 큰 녀석도 지 꺼 다 먹고 내 동태까지 슬쩍한다. 배가 불러오자 그제야 다른 이들의 얼굴이 눈에 들어왔다. 안과 밖의 기온차이 때문인지 일행들의 두 볼이 모두 붉게 달아올라 있었다. 모임의 막내 주련쌤이 큰 녀석에게 말을 건넨다.
“이름이 뭐야?”
“인영이요.”
“그럼 너 별명이 인형이겠구나.”
“네, 곰인형이라고 친구들이 그래요.”
“나도 옛날에 별명이 곰돌이 푸였는데.”
그녀의 별명을 듣고는 갑자기 이유가 궁금해진 내가 물었다.
“주련쌤 왜 별명이 순대였는데?”
따뜻한 바닥에 지친 다리를 누이고 밥까지 잘 챙겨먹었는데도 대체 뭐가 문제인 걸까? 이쯤 되면 일시적 장애라고 보기 어려울 듯하다고 자책하고 있는데 문득 식당 메뉴판에 적힌 순대국밥이란 글자가 눈에 띈다. 추위와 배고픔과 피로가 만나면 감각기관이 관장하는 곳에 새로운 세상이 열린다.
어쨌거나, 답사가 끝났다. 안도감이 따듯한 국물 한 숟갈처럼 온몸으로 펴졌다.
#14. 차 한 잔을 나누며
답사모임의 신입멤버로 참여하긴 했으나 사실 오늘은 인터뷰가 주목적이었다(안 그랬음, 진짜 안 왔을 겁니다, 흑). 참여연대 1층에 자리한 카페로 옮겨 차 한 잔씩을 앞에 놓고 이야기를 나누었다. 인터뷰 내용을 녹음해야 하는데 사람 수도 많고 목소리가 겹치면 안 되니까 한분씩 말씀해 주세요, 하고 부탁했다. 그러나 아무도 나의 말을 듣지 않는다. 2-3명이 함께 떠드는 건 예사고, 목소리만으로는 구분이 안 되니 말하기 전에 본인의 이름을 말해달라는 부탁도 그냥 무시당했다. 그러니까, 인터뷰가 엉망이었냐고?
인터뷰는 무사히 진행되었다. 준비해간 질문들도 모두 던졌고 성실한 답변들도 빠짐없이 들었다. 근데, 문제는 이미 답사 현장에 대해 쓴 양만으로도 인터뷰의 분량이 철철 넘치고 있다는 거다. 다 쓰진 못하더라도 답사모임의 분위기를 전달하긴 해야겠기에, 카페에서 우리가 나눈 인터뷰는 짧게 편집해서 올린다. ‘히스토리 트립’ 멤버들의 너그러운 양해를 바랄 뿐이다.
<2014년 10월 군산답사, 이영춘 가옥>
#15. 다소 긴, 인터뷰 요약
1. 멤버들이 이 모임에 참여하게 된 이유는 대부분 느티나무의 근현대사 강좌를 들은 이후 우리의 역사에 대해 더 알고 싶은 욕구가 발동해서이다.
2. 모임 이름을 소개해 달라는 질문에 ‘히스토리 트립’이라고 답해놓고는 갑자기 모두 한꺼번에 대사들을 날리신다.
우리역사를 공부하는 모임인데 모임 이름이 영어인건 좀 그렇지 않느냐, 급하게 카페를 만드느라 그런 거다, 한글 이름이 좋겠다, 뭐가 좋을까?
이분들, 갑자기 인터뷰를 하다말고 모임의 이름을 짓고 계셨다. 제 의견은요, ‘역발상.’ 역사의 현장을 발로 찾아다니며 우리들이 맞이해야할 미래의 모습을 상상해보는 모임, 뭐, 이런 뜻인데... 아이구, 나까지 페이스가 말려선 안 돼지. 자자, 다시 인터뷰로 돌아가자구요, 여러분.^^
3. 모임의 구성원이 몇 명이냐는 질문에도 동시에 여러분들이 떠들다, 계산하다, 의견을 주고받다 난리를 친 끝에야, 10명으로 확정된 답이 나온다. 거기에 오늘 새로 합류한 최연소 회원 인영이까지 합치면 11명이라고 정정된 대답이 최종판. 근데, 말이죠, 인영이 엄마는 왜 계산에 넣지 않으시는 거죠? ^^;;
4. 모임은 정기적으로 한 달에 한번 답사를 감. 매번 현우쌤이 다 설명을 하는 건 아니고 그때마다 발제자를 정해서 미리 준비를 함. 올해는 연초에 모여 1년 치 답사계획을 모두 세워놓았음. 이 와중에 누군가 농담하듯 던진 한마디.
“한 달에 한번 모여서 답사를 가는데 혹 못 가게 되면 모여서 술이라도 마셔요.”
여행과 술로 빚어진 참으로 끈끈한 연대감이라 아니 할 수 없군요.
5. 그동안 답사를 다닌 곳
처음엔 서울근교(북촌, 서촌, 정동, 피맛골, 금정굴, 남산의 안기부 터 등)를 다녔는데 역사적으로 의미가 있는 곳을 찾아다니다 보니 가끔은 지방(군산, 제주도 등)에도 가게 됨. 임시정부와 관련한 유적들을 보러 중국 상해에도 갔다 왔음.
6. 인상 깊었던 곳
미경쌤 : 경복궁. 명성왕후가 시해 당한 후 시신을 불태웠다는 ‘녹산’에서 마음이 무척 아팠음.
녹산이라는 곳이 굉장히 후미진 곳에 있는데, 슬픈 역사가 그렇게 감춰지고 잊혀지는 것 같아서
그날의 기억이 오래 가슴에 남음.(실제로 지금도 아무런 표식이 없는 채로 남아있음)
정기쌤 : 고양에 있는 금정굴과 제주도. 답사를 다닐 때마다 느끼는 것이지만 이 땅에서 마주치게 되는
너무나 많은 억울한 죽음들 때문에 마음이 안 좋고 한편으로는 세상의 무서움에 겁이 나기도 함.
금정굴 또한 집 근처에 있는 데, 내가 사는 곳의 역사조차 모르고 살았구나 하고 반성을 하게 됨.
영미쌤 : 제주 4.3. 항쟁 유적지. 답사를 가기 전에도 여러 차례 제주를 다녀왔지만 그때는 주로 관광지로만 다녀서 아쉬움이 컸는데,
멤버들과 함께 다녀온 제주도 답사에서 역사적으로 의미가 있는 곳들을 많이 볼 수 있어서 무척 좋았음.
또 직장 근처에 중명전이 있는데(을사조약이 체결된 곳) 답사를 다녀오기 전까진 그 앞을 아무리 지나다녀도
그곳이 무슨 의미인지를 알지 못했음. 아마도 많은 사람들이 예전의 나와 같은 처지에 있지 않을까 생각함.
이 모임을 통해 역사에 대해 하나하나 배워가는 것이 너무 즐겁고 행복함.
덕자쌤 : 제주도. 다른 단체 사람들과 역사탐방을 위해 가기도 했었는데 ‘히스토리 트립’ 멤버들과 다녀온
제주여행이 더 특별하게 기억되는 건 현우쌤 때문. 현우쌤은 제주도 출신으로 그 아픈 역사에
희생된 분들의 후손이라 더 의미가 깊었음. 워낙에 아는 게 많은 분이 자신의 경험까지 얹어 들려주는 이야기라
생생하기도 하고 마음이 많이 아팠음.
#16. 답사모임에 참여한 이후
답사 모임에 참여하고 난 이후 변화가 있다면 무엇인지 물었다. 다양한 답변이 나왔다.
- 내가 살아가는 지역에 대한 관심이 높아졌다.
- 이젠 박물관에 가면 머무르는 시간이 훨씬 길어졌다.
- 뭐 하나를 보더라도 머릿속에 물음표를 달게 되었다.
- 오래된 건물이라도 볼라치면 여긴 어떤 얘기가 숨어있을까 생각하게 된다.
그중에서 가장 인상 깊었던 것은 이것.
“답사를 다니며 아무리 듣고 배워도 또 새로운 게 나오고, 듣고 들어도 모르는 사실들이 끝도 한도 없이 나와요. 더 공부하고 더 배워야겠다는 생각이 저절로 들죠.”
맞는 말이다. 오늘 하루만도 난 얼마나 자주 나의 무식의 깊이에 대해 화들짝 놀랐던가. 멤버들끼리 마주보며 “우리 무식의 땅굴은 얼마나 깊은 것이냐?”하며 장탄식을 내뱉은 것도 여러 번이었다. 그러나 역사에 대한 지식보다 더 중요한 것은 직접 찾아가 내 눈으로 봤을 때 확인되는 ‘무엇’이 있다는 거다. 이미 머리로 아는 사실조차 직접 발로 찾아가 그 앞에 서면 감회는 달라진다. 유관순 누나라며 친근히 부르지만 그녀가 갇혔던 감옥에 직접 한번 들어가 보면 그녀가 얼마나 커다란 사람이었는지, 그녀가 지닌 강인함이 어떤 것이었는지가 등줄기로 서늘하게 전해져 오는 것이다. 그제야 몇 줄의 기록으로 암기해두었던 ‘역사’라는 이야기가 내 안에서 생생한 감각들로 살아난다.
현장이 지닌 힘이란 이런 것이다. 누군가의 삶이 어린 옛집, 혹은 나무 한그루 앞에 두발을 딛고 서면, 그제야 일상 속에 묻혀 사느라 희미해졌던 감각들이 깨어나고 그와 동시에 시간 속으로 사그라든 이들의 삶이, 나의 무지와 무관심으로 잊혀진 그들의 이야기가 ‘과거'라는 무덤을 비집고 나와 비로소 나와 같은 시공간 안에서 숨을 내쉬게 되는 것이다.
건조하게만 들렸던 ‘역사란 과거와 현재의 끊임없는 대화다’라는 E.H. Carr.의 이야기가 오늘따라 새삼스럽다.
#17. 귀가
카페의 너른 창 너머로 석양이 진다. 유난히 분주하고 별일이 많았던 일요일이 가고 있다. 인터뷰까지 무사히 마치고 큰 녀석과 나는 다른 일행들 보다 먼저 자리에서 일어섰다. 둘째 녀석이 목이 빠져라 기다리고 있을 걸 생각하니 자연스레 걸음이 빨라진다. 전철역을 향해 걸으며 큰 녀석에게 물었다. 다음에 또 올래? 녀석이 고개를 끄덕인다. 인왕산 정상을 향해 걸을 땐 불만이 가득했던 녀석이 지금은 다시 생각이 바뀐 모양이다.
녀석도 나처럼 오늘 많은 걸 새롭게 알게 되었을 것이다. 그리고 또 나처럼 시간이 가면 그중 대부분을 잊어버릴 것이다. 오늘 처음 들었던 역사의 한 페이지를 잊고, 수많은 이들의 이름을 잊고, 거리와 집들의 이름을 잊고... 시간 앞에서 기억은 그렇게 흠집이 나고 불완전해질 것이다. 아이의 피곤한 얼굴을 바라본다. 많이 잊어도, 그래서 무식의 땅굴을 깊이깊이 파낼지라도, 오늘 엄마의 커다란 부츠를 빌려 신고 불편하게 걸어 다녔던 그 걸음의 궤적은 녀석의 기억에 희미하게 남지 않을까. 그래서 훗날 역사란 현재와 과거의 대화라는 문장을 마주했을 때 무언가 녀석의 등을 툭하고 건들지는 않을까. ‘역사’에 대한 기억은 남지 않을 지라도 자신보다 한참이나 나이가 많은 엄마의 친구들과, 엄마가 내뱉었던 다량의 엉뚱한 헛소리들과 고된 산행 후 먹은 따듯한 밥 한 그릇과 피곤에 절어 집으로 돌아가던 전철 안의 풍경... 그 중 하나쯤은 기억해낼 수 있지 않을까.
#16. 다음은 목포입니다
‘히스토리 트립’이 기획하는 답사모임은 일반인들에게도 열려있다. 원한다면 누구나 함께 짧은 여행을 떠날 수 있는 것이다. 또 가끔은 느티나무와 함께 더 많은 수강생들을 초대하여 답사를 다녀올 계획도 가지고 있다.
다음 답사 일정은 3월에 있을 ‘목포’행이다. 거리도 있고 해서 이번엔 1박 2일의 여정으로 떠난다. 생각만 해도 긴장으로 어깨가 묵직해진다.
‘목포라... 1박을 해야 한다구? 거기다가 아이 둘을 데리고? 그럼 배낭을 몇 개나 싸야 되는 거야?’
아직 한 달이나 남은 여행을 생각하며 난 벌써부터 머릿속으로 세 모녀의 짐 보따리를 꾸린다. 잠옷, 머리끈, 수건, 로션... 머릿속의 짐가방이 소다 넣은 뽑기처럼 부풀어 오른다.
이번에도 별 생각 없이, 훌쩍 떠났다 와야겠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