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참여사회-회원인터뷰┃이 폐허廢墟를 응시하라
이 폐허廢墟를 응시하라
고경일 회원
글 박현아
사진 Nina Ahn
“지금도 꺼벙이 머리에 왜 구멍이 났는지 생생히 기억한다니까요. 하루는 꺼벙이가…….”
컴퓨터를 켜고 검색창에 ‘꺼벙이 머리 구멍 이유’라고 쳤다. 확인결과 그의 말은 사실이었다. 사연인즉, 꺼벙이 엄마가 꺼벙이한테 머리를 자르고 오라고 오백 원을 주었다. 꺼벙이는 이발소까지 가는 도중에 과자도 사먹고 하드도 사먹고 딱지도 산다. 이발소 앞에 도착해보니 남은 돈은 달랑 50원. 그래도 머리는 잘라야겠기에 이발사 아저씨에게 50원을 내밀었다. 그러자 아저씨는 꺼벙이 머리에 50짜리 동전을 대고 그 크기만큼만 머리를 잘라주었다는, 웃픈 이야기이다.
그때나 지금이나 ‘잘 생기고 똑똑하고 힘 있는 사람’들이 주인공인 세상에서 명랑함만으로 버텨내야하는 꺼벙이. 다수이면서도 늘 약자인 우리들의 슬픈 초상화 앞에 세상이 붙여준 이름 ‘명랑만화.’ 그리고 꺼벙이와 명랑만화를 보고도 웃을 수 없는 잔인한 봄…….
고경일의 풍경내비
시국이 하수상하니 인터뷰 일정도 꼬인다. 처음엔 일본군 위안부 할머니들의 수요집회가 열리는 일본대사관 근처에서 보자던 그가 인터뷰 당일 아침 급하게 장소를 변경했다. 시청광장에서 걸개그림을 그리고 있는 중이니 거기서 인터뷰를 하자고. 그림을 그리면서 인터뷰를 하시겠다구요? 아, 나는 오늘 또 한명의 자유로운 영혼을 만나러 간다.
“만화요? 어렸을 때부터 그렸죠, 하라는 공부는 안하고. 아버지도 그림을 하고 싶어 하셨고, 저희가 삼형제인데 모두 미술 공부를 했어요. 그래서 집안이 망했죠, 하하하.”
그의 직업은 풍자화가. 대학에서 학생들도 가르치고 한겨레신문에 ‘고경일의 풍경내비’를 연재하고 있는 카투니스트이기도 하다. 한국에서는 미술교육을, 일본에 가서는 만화를 배웠다. 만화 공부를 하러 일본에 간다고 했을 때 주위에서 미친놈이란 소리도 많이 들었단다.
“대학 때 학보사에서 시사만화를 그렸어요. 만화가 무척 유효한 것일 수도 있겠다는 생각은 그때 들었던 것 같아요. 사람들이 모이는 곳마다 걸리곤 했던 걸개그림들, 민중미술이라 불리는 것들이 전 좀 힘들고 불편했거든요. 대머리에 오줌 싸고 성조기 찢고, 아무튼 그 당시 그림들은 거칠었어요. 그 그림들을 볼 때마다 아무 감흥도 안 느껴지고, 이건 그저 선전선동일 뿐이잖아, 이런 생각들을 많이 했죠. 그럴 바엔 차라리 만화가 더 낫다, 만화가 더 많은 감동과 메시지를 줄 수 있다. 그래서 시사만화 쪽에 관심을 두기 시작했죠.”
이 자유로운 영혼의 소유자는 일본에서 공부할 때도 끊이지 않고 사고(?)를 쳤다. 일본 극우단체 ‘새로운 역사교과서를 만드는 모임’이 TV토론 프로그램에 나와서 일본군위안부 문제를 너무도 당당하게 부정하는 걸 보고는 시쳇말로 뚜껑이 열려버린 것이다. 그는 곧바로 그 문제를 정면으로 다룬 그림들을 그려 전시회를 열었다. 전시회에 몰려든 인파는 또 다시 엄청난 사회적 파장을 일으켰다. 팩스가 끊길 정도로 협박장이 날라들었고, 우익단체는 손수 만든 장갑차를 끌고 왔으며 급기야 경찰까지 출동했다.
“무서웠냐구요? 아뇨, 오히려 유학생 한명의 행동에 이렇게 까지 반응하는 일본이 신기하기만 했어요. 일본은 늘 자기네 나라가 민주주의라고 말하잖아요. 그럼 표현의 자유라는 게 있는 거 아니에요? 근데 희한하게도 일본은 그런 것들을 그리려는 사람들이 전혀 없어요.”
그는 쫄지 않았다. 유학생 처지라 신분이 불안하다는 생각도 안 했다. 추방 따위는 생각해본 적도 없었다. 어쩌면 그는 용감한 게 아니라 순진한 것인지도 모른다. ‘민주주의는 표현의 자유를 보장한다’는 명제에 대한 철썩 같은 믿음. 그 순수한 신념이 그를 이토록 자유로운 영혼으로 살게 하는지도 모른다.
네, 저는 ‘만화’를 그립니다
“이 물감 좀 여기 플라스틱 통에 짜주실래요?”
질문지를 들고 있다가 엉겁결에 물감을 건네받았다. 이거 잘 안 짜지네요, 이 만큼이면 되나요? 아, 어디까지 질문했더라, 본인에게 영향을 준 만화가가 있다면요?
“(한창 작업 중인 흰 천의 여백을 가리키며) 여러분! 남은 공간들은 나비로 다 메워주세요.”
인터뷰 내내 흰 천을 떠나지 않는 그의 시선. 야외에서 하는 많은 작업들 때문에 검게 그을린 그의 얼굴. 그리고 그 검은 피부 위에 똑 하고 떨어져버린 노란 물감 한 방울…….
“영향주신 분들 많죠. 박재동 선생님의 경우는 시사만화이면서도 굉장히 유머러스한 장치들이 그림 곳곳에 녹아 있어요. 말풍선 안에 여태껏 없었던 다양한 표현들을 시도하셨고 또 미술적 요소들을 만화 안에 구현해내셨죠. 이희재 선생님은 스토리 만화가이신데, ‘간판스타’, ‘현상금을 따 먹는 사나이’ 같은 거 보면 시나리오도 극적으로 잘 짜여 있고 그림도 훌륭하고, 만화연출의 정석이라고 할 만한 작품들이죠. 그러면서도 사회고발적인 부분들까지도 함께 담아낼 줄 아는, 우리나라 최초이자 최고의 리얼리스트로 꼽을 수 있는 분입니다.”
다른 나라는 모르겠지만 한국에선 여전히 ‘만화’하면 저급한 어떤 것으로 취급받잖아요?
“맞아요. 만화는 저급함을 넘어 아예 예술이 아닌 것으로 치부되죠. 근데 미술이든 만화든 모두 시각이미지를 활용하는 것들이잖아요. 중요한 건 장르 구분이 아니라 사람들에게 어떤 감동을 주느냐, 어떤 내용을 담느냐 인데 한국은 형식에 너무 매달리는 경향이 있어요. 제가 걸개그림을 그린다고 하면 미술 분야에서 일하는 사람들이 뭐라고 하는지 아세요? ‘네가 그리는 거 그거 만화냐?’이래요. ‘만화’라는 단어 안에 이미 온갖 편견이 담겨 있는 거죠.”
조사코의 ‘팔레스타인’, 아트 슈피겔만의 ‘쥐’, 마르잔 사트라피의 ‘페르세폴리스’. 몇 년 전, 난 이 책들을 찾기 위해 동네 도서관들을 미친 듯이 뒤졌다. 각각 팔레스타인 문제, 홀로코스트, 이란혁명 등 인류의 역사에서 가장 묵직한 주제들을 다루면서도 쉬운 이해와 깊은 감동을 담고 있어 세계적으로 인정받는 작품들이다. 근데 아는가? 이 작품들이 모두 ‘만화’라는 거.
“저는 제 정체성을 풍자화가라고 생각합니다. 근데 어떤 사안이나 사람에 대해서 풍자한다는 게 쉬운 일이 아녜요. 풍자만화는 날카로운 금속물질의 무기 같아서 누군가를 반드시 찔러야하는데 그러고 나면 제 맘도 결코 편치 않죠. 그래선지 그림을 그릴수록 어떤 뿌듯함 보다는 마음이 점점 무거워져요. 날카롭게 각을 세워서 비판하는 거 말고 그렇게 안 하면서도 내가 하고 싶은 얘길 전달할 수 있는, 그런 작가가 가장 위대한 풍자화가 아닐까 해요.”
어떤 만화 캐릭터를 가장 좋아하는지 묻자 그는 생각도 않고 바로 ‘꺼벙이’라고 답했다. 농담처럼 본인이 혹 꺼벙이랑 닮아서 그런 거 아니냐 하자 그럴지도 모르겠다며 시원스레 웃던 그. 아름다운 세상에 대한 순진무구한 믿음을 지닌 그가 그려내는 그림은 그래서 따뜻하기만 한가보다.
날아라, 나비들아
시청 앞 광장에 길게 놓인 하얀 천이 온통 나비들로 메워지고 있을 무렵, 한 무리의 일본인들이 등장했다. 국적이 다르고 언어가 다른 이들이 모여 함께 노란 나비를 그리는 풍경.
“이 그림은 오늘 오후에 있을 일본군위안부 할머니들의 수요집회 때 사용할 거예요. ‘평화헌법 9조를 지키는 사람들의 모임’이라는 일본의 시민단체에 속한 분들이 벌써 7년째 한국을 방문하고 계신데 오늘 그분들 하고 함께 수요집회에서 특별한 퍼포먼스를 하려고 기획한 걸개그림이죠.”
마침, 엄마 손을 잡고 지나던 여자아이가 그림 앞에서 멈춰 선다. “함께 할 수 있나요?” “네, 그럼요. 이 붓을 쓰세요.” 아이와 엄마가 그림 앞에 쭈그리고 앉는다. 아이의 손끝에서 노란 물감이 쏟아져 내린다. 한 마리의 나비가 그렇게 또 하얀 천 위에 보태진다.
“일반인들하고 함께 작업하고 완성한 그림들도 분명 하나의 예술 작품입니다. 생각과 느낌을 공유하는 사람들과 함께 작업하면 더 큰 에너지를 낼 수도 있구요. 이런 생각 때문에 4년 전부터 일반인들하고 함께 하는 작업들을 많이 해 오고 있어요. 그림을 그리면서 서로 소통하고 우리가 가진 것들을 나누고 있다는 느낌이 들 때 보람을 느끼죠. 그리고 제 그림 속에 담긴 뜻을 누군가 알아차려 줄 때도 기분이 좋구요. 얼마 전 세월호를 다룬 걸개그림 ‘만약에’를 시민과 함께 그렸는데, 지나가던 꼬마들이 다가와서 ‘저 형 누나들이 그림 속에서 환히 웃고 있는 게 너무 마음 아파요.’ 이러더군요. 아, 이 아이들이 가슴 아파하면서 그려갔던 그때 내 마음을 읽어주는구나 싶어 가슴이 뭉클했어요.”
시민들과 함께 그렸던 또 다른 작품 ‘영정 속에 핀 꽃’은 지금 안산 문화광장에 걸려 있다. 저녁이면 시민들이 그 그림 앞에 모여 세월호 희생자와 실종자들을 위해 추모제를 연다. 그가 평범한 사람들과 함께 그린 그림은 이렇게 다시 사람들 속으로 돌아간다.
“대학에 몸담고 있긴 하지만 일반인들을 대상으로 하는 미술 수업도 많이 했거든요. 그중에서도 참여연대가 정말 최고였죠. 세상에 대해 비슷한 고민을 가지고 진지한 자세로 임하는 분들이 모인 곳이라 그런지 참여연대에서 수업할 땐 굳이 여러 말이 필요 없었어요. 솔직히 이런 말 하면 안 되는데 학교수업보다 더 재밌더라구요.”
‘세상에는 좋은 작가와 잘 팔리는 작가 둘 다 있어야 한다. 그러니 제발 누군가는 좋은 작가가 되길 꿈꿔 달라.’ 구조조정이라는 명분하에 지방대학과 예술대학의 정원이 가장 먼저 잘려나가는 세상에 그가 던진 마지막 부탁이었다.
이 폐허를 응시하라
“재난이 발생하면 몇 분 안에 수천 명의 자원봉사들이 몰려들고 정부가 부탁하지도 않은 장비와 의류, 식품 등의 구호품들이 산더미처럼 쌓인다. 이처럼 재난의 현장에 가장 먼저 달려와 급식소를 꾸리고 재건과 도움을 위한 네트워크를 구축하는 사람들은 바로 ‘이웃’들이다. 시민들은 정부와 엘리트들이 구축해 놓은 시스템의 결함을 스스로 메우며 정부의 기능을 대신하는 조직들을 자발적으로 구성한다. 그것은 민주주의가 늘 약속했지만 실현하지 못했던 것들이다. 때문에 정부나 엘리트들은 재난의 의미나 현장의 주도권을 시민들의 연대나 자생적으로 생겨난 공동체에 빼앗기지 않기 위해 피해자들을 적대시하고 재해현장과 자원봉사자 사이의 연대를 끊으려 안간힘을 쓴다. 권력이 현장의 민중들에게 넘어가는 것, 그것만이 그들이 염려하는 가장 위협적인 것이다.”
이 내용은 레베카 솔닛의 책 ‘이 폐허를 응시하라’의 한 부분이다. 엄청난 재난 앞에서 낯선 사람과 연대하고 우정을 나누는 시민들, 공동체적 일체감이 한껏 고양되는 이 순간에 작가는 ‘재난 유토피아’라는 이름을 붙였다.
폐허 속에 사람들이 모여 있다. 붓을 들어 물감을 찍고 제주도에 도착한 아이들이 지었어야할 웃음을 그린다. 다시 붓을 들어 이번에는 그 아이들의 영정사진과 검은 리본을 그린다. 그 자리에 바로 그가 있다, 누군가를 찔러야 하는 칼 대신 한 자루의 붓을 들고서. 꺼벙이처럼 보물섬을 찾아 떠나고 싶었다던 그는 폐허 속에 머물며 자신만의 유토피아를 만들어내고 있었다.
호모아줌마데스
두 딸을 키우고 있는 애 엄마. 2007년 참여연대 회원 가입과 동시에 자원활동 시작. 아카데미 느티나무에서 ‘백인보’라는 코너에 비정규적으로 인터뷰 글을 쓰고 있음. 특기사항 : 합기도 빨간띠.
참여사회 6월 회원인터뷰 기사를 옮겨왔습니다~
아카데미느티나무 서울드로잉 강사였던 고경일 선생님을
아카데미느티나무 백인보 단장이신 박현아님이 인터뷰 하셨어요~
오옷 제가 정말 좋아하는 고경일쌤!!
6주정도의 짧은 수업이었지만 '풍자화'를 그린다는 게 얼마나 까다로운 일이었는지 문득 생각이 나네요.
앞으로도 쌤의 넘치는 에너지를 널리 널리 펼쳐주세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