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서른 한 번째┃신심(信心)을 전하는 아름다운 사람, 박영희
느티나무 백인보 서른 한 번째 - 박영희
인터뷰 · 글 : 이은주(백인보 기자)
신심(信心)을 전하는 아름다운 사람, 전래놀이 강사 박영희
안다는 것은? 배운다는 것은?
느티나무의 강좌 <북미 인디언의 자치, 어제와 오늘> 어떠셨어요?
이번 참여연대 공부 재미있어요. 근데 좀 힘들었어요. 고급 정보를 갖는 상위 5퍼센트가 하는 고민들을 우리더러 하라 그러니까... “여러분이 알아야 하는 일입니다. 그 페이스에 말려선 안 돼요!” 그런데 우리가 힘이 뭐가 있어... 우리가 현장에서 그렇게 애를 쓴다고 해도, 우리끼리는 뭘 한다고 해도 해결이 안 되니까... 아무리 고급 정보여도 내가 현실화시킬 수 있는 능력이 없으면 그게 별 의미가 없다고 생각해요. 아무리 좋은 정보를 갖고 있다고 해도...
그래서 그게 되게 부대꼈었어요. 자본주의가 점점 더 극으로 달할 텐데, 그게 단순히 자본주의 문제인가? 공산주의는 망했고 복지사회는 대안인데, 대안인 사회에서도 또 이미 소수밖에는 못 누리더라고. 그럼 뭐가 대안이야 도대체? 어떻게 할 수 있는 힘도 없고... 그래서 이게 내가 학문으로 접했을 때의 고민하고 실제 내 과제로 안았을 때가 다른 거죠.
나는 불만이 뭐였냐면, 미국인들은 사람들 그렇게 죽여 놓고서 하나님한테 그렇게 당당할 수가 있어? 그래놓고 한 번도 잘못했다고 얘길 안 해. 나는 그게 너무 힘들었거든. 근데 인디언들은 안 그랬단 말이지. 자본주의 삶의 방향으로 인디언들은 가지 않았다고. 거부했다고. 잘사는 그룹은 아닌데, 우리에게서 다시 조망 받고 있다는 거라고. 마을 공동체를 형성하는 사람들이 삶의 철학을 보고 배우고. 인디언들이 왜 소외받았나 했더니, 알고 보니까 주식회사를 안 했네! 그래서 그쪽에서는 외면 받지만 이쪽에 공동체 고민하는 사람들에게는 인정받을 수 있는 거였네.
이 수업에서 오히려 나는 배움에 참여하는 사람들한테 더 관심이 가더라고요. 다 나름대로 자기 자리에서 고민을 하는 사람들이기 때문에, 이 공부를 어떻게 자기네 삶에서 다시 고백할 수 있을까, 신앙고백 하듯이. 그게 삶의 질을 바꾸는 일이니까. 적어도 서로를 알면 쓰임들이 생기니까.
공부해서 어리석게 살지 말라고 하는데, 그것 또한 관습에 의해서 또 무너지기 때문에 우린 끊임없이 촉을 세워서 깨어있지 않으면... 너무 속상한 게, 우리가 잃어버렸던 경험들, 그러니까 김대중, 노무현 전 대통령들을 보낼 때 우리가 지켜줄 수 있는 건 아무것도 없더라고... 그게 너무 가슴이 아프더라고. 한 번은 지켜드린다 해도, 그 다음은 어떻게 할 거냐고... 다음 정권들이 칼질을 할 건데, 가족들, 보좌했던 사람들이 그 과정을 또 견뎌내야 하는데, 그걸 어떻게 못하겠더라고. 그런 경험을 아스란히 갖고 있는 사람들... 그래도 나는 믿는 게, 97년 IMF때 엄마들이, 할머니들이 금을 갖고 나왔잖아요. 나라를 구하겠다고. 6.25 때도 마찬가지잖아요. 나는 그런 마음들을 봤기 때문에, 지금 정권이 뭐라 뭐라고 해도 이 사람들 마음을 다치게 하지 않는 이상은 조금만 더 기다려주자. 우리가 그리고 빨리 정신을 차리자. 이 사람들을 어떻게 깨울 것인가가 더 중요한 거지, 그 사람들이 뭐라 하는 건 뭐라 하는 거지 뭐... 그걸 아는 데 시간이 너무 많이 걸렸어요.
△ 인터뷰 중인 박영희 선생님(오른쪽)과 페북 친구인 이규상 대표님(왼쪽)
이번 생에서 지고 가는 박영희의 삶
지금 하시는 일은 어떻게 만나셨나요?
나는 운동권 출신, 운동가 하는 사람이 아니에요. 내가 소속해 있던 교회가 향린교회였고 (그게 진보적 교회였던 거고) 내가 속해 있던 대학이 한신대였고 (그게 진보적인 대학이었던 거고) “너 같은 애 찾더라?” 해서 간 데가 한국여성민우회예요. 거기서 87년부터 91년까지 일했어요. 그리고 91년도에 결혼 후 <굿연구소>가 만들어졌어요. 내 평생의 과제가, 아이들 놀이개발과 우리 예배의 토착화였어요. 한국 신앙. 그래서 굿연구소 박흥주 소장님하고 나하고 계속 같이 일을 할 수 있었어요. 95년에 둘째를 낳고 첫째를 어린이집에 보냈는데, 내가 그때 보니까 어린이집에 교육 프로그램이 진짜 뭐가 없더라고요. 그래서 내가 너무 충격을 받고, 무료 봉사를 하겠다고 해서 놀이 수업부터 들어갔어요. 그래서 교사 교육도 하고 애들 수업도 하고.
이제는 애들 사물놀이, 전통놀이 프로그램 잘 돼있어요. 근데 김덕수 사물놀이 수준이 다 들어가 있는 거예요. 어떤 강사들이 그거를 해. 아이들 눈높이에 맞췄어야지... 누구나 접근하기 쉽게, 우리나라 전통 오리지널 버전으로 넣어줬어야 하는데, 공연용으로 넣어놔서 실패한 거예요. 나는 김덕수 사물놀이가 공연용으로는 적합하지만 일반 대중한테는 적합하지 않다, 그리고 교육적으로 온 게 굉장히 위험하다고 생각해요. 그래서 유아들한테는 풍물 가르칠 필요 없다, 놀이 가르치면 된다 하고 주장하거든요. 왜냐면 사물놀이는 앉아서 장단만 치다 보니까 귀만 예민해져. 발 기운들도 다 풀어줘야 건강한데. 그래서 사물놀이를 안 가르쳤어요. 그러다 보니까 전래놀이하고 풍물을 다 가르쳐요, 개발도 하고.
나는 리틀엔젤스 단원 출신이에요. 8차 1973년, 9차 1974년에 미국으로 순회공연을 갔어요. 한 번 갈 때 단원 30명, 음악 선생님들, 담당 선생님하고 다른 몇몇 선생님들이 가고, 버스와 비행기로 지역을 옮겨 다녔어요. 73년도 유엔 총회 공연에서는 김덕수, 박훈숙, 신영옥 등이 한 무대에 있었어요. (그래서 지금도 마을 축제 같은 거는 내가 가서 보고 했던 거라서 그렇게 어렵진 않아요.) 내가 초등학교 3학년, 4학년 때였어요. 무용하고 합창하고, 2시간 공연을 해요.
2000년 <굿연구소>에 놀이학교가 생겼고 주로 관심하던 놀이 전반에 대한 고민을 응집하게 되었어요. 그때 특히 전래놀이를 맡은 선생님이 있었는데, 그 선생님한테서 리틀엔젤스 춤사위들이 보이는 거예요. ‘아, 이거구나. 전래놀이가 리틀엔젤스 춤의 기본이었어? 아, 그렇다면 이걸 빨리 교육과정에 넣어야 되겠구나.’ 당시에 전래놀이들을 교과 과정에 넣는단 생각을 했겠어요? 나는 전통 한국 무용을 무대용으로 배웠단 말이에요. 꼭두각시 춤을 예쁘게 잘 포장해서 무대해서 잘 하는 것을 먼저 배웠어요. 리틀엔젤스에서는 그걸 무대용으로 세련되게, 이동하기 쉽게, 보여주기 참 예쁘게 만든 거죠. 그런데 아이들 키울 때 보니까 뭐가 없는 거야. 내가 지금 하고 있는 수업은 전래놀이인데, 애들은 무용을 할 필요가 없다고 생각해요. 한국 사람이 우리 문화, 우리 언어, 우리 정신세계, 이런 것들이 편해야 되는데, 뭐가 계속 이상한 거예요. 화관무하고 길쌈놀이도 리틀엔젤스 무용에 있었는데, 이것들이 얼마나 중요한 놀이인지를 엄청 나중에 알게 되면서 깜짝 놀랐죠. 몽골이라든가 중국 쪽에서도 이런 형태가 보여요. 몽골의 나담축제 같은 큰 축제에서도 볼 수 있어요. 그럼 전통문화에 대한 재해석이 필요하구나! 생각하게 됐죠.
‘나는 나야’를 배우는 전통놀이
인디언들이 자연과 소통하며 신을 만나듯이, 우리 아이들 놀이 속에도 그게 있어요. 말하자면, ‘나’는 세상의 중심이에요. 또 네가 세상의 중심이고, 모든 사람이 세상의 중심이에요. 이 중심들을 모아주는 것이 당산나무에요. 영화 <아바타>에 나왔던 그 영혼의 나무처럼. 이 나무들이 마을마다 있던 거예요. 그 중심을 잡자는 거예요. 우리 전통은 되게 대단하고 우수하고 뭔가 복잡한 것이 아니고, 이 지구와 저 우주를 연결시켜주고 우리 영혼하고도 연결시켜주는 것, 이거거든요. 이거 회복하자는 거예요. 그래서 내가 인디언 수업을 들을 수밖에 없었던 거야.
‘전래놀이’가 무엇이죠?
전래놀이는 그러니까, 삶과 죽음을 배우는 교과서요. 금 밟으면 죽죠, 골목놀이. 대상에 따라 어린이 놀이, 청소년 놀이, 아낙네들 놀이가 되는 거고, 확장된다면 제천 의식, 당산굿, 마을굿이 되는 거예요. 마을굿이, ‘신심’이 살아나야 해요. 같이 결합되지 않으면 그냥 축제나 행사로 끝나겠지만, 그런 것이 몇 천 년씩 가능했던 것은 신심이 있어서 가능했다 보거든요. 고조선 2천 년, 고구려 6백 년, 조선 5백 년, 이런 게 가능했던 바탕에는 신심이 있던 거예요. 나는 그런 신심들 중에서 아이들 놀이 파트를 이어갈 대상으로 잡았어요.
원으로 도는 놀이는 역사가 굉장히 오래 됐어요. 제천의식으로 인디언 춤도 그렇고, 일본, 중국 민속춤으로 하늘에 제사 지내는 행위로 우리는 흔히 강강술래를 하죠. 아이들 수업시간에 의무적으로 해요. 오늘도 덕석몰이를 했어요. ‘나는 나야’를 알도록 말이에요. “세계의, 이 지구의 근본은 ‘내’가 중심이야. 근데 나는 너와 같이 있어서 우리가 되고, 자연과 하나가 되고, 그게 당산나무야. 너와 나 우리는 귀한 사람이야.” 자신을 회복할 때 인간 본연의 신성이 회복된다는 것, 바로 이걸 알려주려고요. ‘놀이의 근본은 ‘나’를 선포하는 거다, 꼭 이 자리까지 와야 된다, 그런 의식이다.
풍물굿에서 문굿을 칠 때 영기를 세우는데요, 영기는 삼지창에 파란색 빨간색 음양 2개 깃발을 엇갈려 세우는데, 심신 세계를 구현하는 상징이죠. (기독교가 우리 땅에 오기가 쉬웠던 게, 성부 성자 성령 삼위일체 하나님으로 예전 어르신들이 여기셨대죠.) 거기에 세 번 빌어요. 문 좀 열어달라고. 이런 데서도 우리의 사유 체계, 세계관이 반영이 돼요. 아이들 놀이 중에는 문굿과 흡사한 문지기 놀이가 있어요. “문지기 문지기 문 열어주소 열쇠 없어 못 열것네” 아이들 버전으로 만들어진 거거든요. 문이라는 걸 닫으면 밖이고 안팎이 분리되잖아요. 반대로 또 이세상에서 저세상으로 가기도 하고. 우리 민족은 죽음하고 삶하고 다른 차원이라고 생각하지 않아요.
놀이에서도 이런 의식을 행하고 있고, 우리한테 그게 잃어버린 언어였던 거예요. 그래서 우리 풍물 굿학교가 그걸 찾는 데 한 10년 걸렸어요. 우리나라에서 좋은 강사들을 전부 다 모아서 7박 8일 동안 공부를 해요. 각 분야 전문가들이 강의하고, 몸으로 해보고, 그걸 한 8년을 했어요.
‘길쌈놀이’라고, 길쌈을 가르쳐줬던 전래동화 있죠? ‘견우와 직녀’에서 직녀요. 그 당시에 흘러다니다가 한곳에 터를 잡고 농사하고 위험한 수렵 생활을 벗어나 옷을 만들어 입게 된 건데, 산업혁명보다 발전을 더 가능하게 한 견우와 직녀를 토착화하는 과정을 재밌는 이야기로 꾸며서 계승하잖아요. 사람이 죽어서 신이 되기도 하는데, 특히 나라를 구한 사람들은 신이 되잖아요. 단군 할아버지도 우리 조상신으로 오시고, 우리는 현대교육을 받았으니까 단군 할아버지를 그냥 노래에서 알뿐이죠. 풍부한 내용의 교육을 못 받았으니까. 이 시대의 신화 이야기들을 우리는 많이 잃어버렸으니 아쉽죠. 그중에서 길쌈놀이, 직녀가 들려주는 이 이야기는 조선 왕실에도 전해졌고 민가에까지 영향을 끼쳤어요. 티벳에서 만국기를 펼치고 축제를 여는데, 거기서 길쌈놀이를 볼 수 있었어요. 딱 보면 ‘우리하고 많이 닮았네’라고 공감할 수 있을 정도의 문화들을 보면, 그런 전승 코드들을 그 사람들은 아직 가지고 있다는 걸 알 수 있어요. 자본주의에서는 장사가 되면 계속 하고 안 되면 안 하잖아요. 이들은 장사하고 상관없이 계속 갖고 있었죠. 왜냐면 자기네 종교니까. 종교 의식이니까. 그래서 그런 부분들을 우리가 다시 회복해 나갈 때 우리한테 아직 있는 부분을 발견하게 되거든요.
지금도 마을굿을 하는 곳이 있고 단군제를 지내는 곳이 있어요. 그들이 왜 천제를 지내는지, 왜 단군제를 지내고 어떤 신심으로 계속 하려 하는지 알아야 하죠. (그런 사람들은 이런 우리 같은 사람들 속이지 않거든요. 지금처럼 비싸게 유기농 먹을 필요가 없고... 이렇게 귀한 사람(신명)들이 먹을 건데 거기다 장난을 치겠어요?)
이제는 교과 과정에 전래놀이가 들어갔어요. 그런데 선생님이 그렇게 놀아주질 않아. 그냥 마우스로 클릭해서 동영상 감상하고 끝. 내 놀이수업에서는 6-7세 정도면 강강술래 놀이하고 다른 놀이들도 경험하고 놀고 초등학교를 가요. 그런 아이들이 앉아서 모니터만 봐야 해요. 이게 교육 현실이고. 그 난리를 피워서 교과 과정에 그걸 다 집어넣어놨어도, 선생들이 가르칠 수가 없죠. 그래서 돌아다니면서 선생님들 교육하고. 불러만 주면 어디든지 갔는데, 이제는 유치원 선생들이 안 불러요. (애기를 낳아보면 그때 기억할 거예요. 너무 가슴이 아파.) 이제는 주부들이 배워요. 생태생활협동조합 하는 사람들 하고...
커뮤니티를 만드는 조직가란 이런 것?
아이들 전래놀이 수업은 내가 평생 내 업보라고 생각을 하고, (전생에 지은 죄가 많아가지고 (웃음)) 내가 이번 생에 닦고 가야 될 일이라 생각하니까 내 현장이 계속 필요하거든요. 그래서 나는 유치원 수업을 하고, 가면서 그곳 동네 사람들을 만나고 같이 얘기하고, 주변 사람들을 많이 사귀었어요. 한 3년 전에는 그 동네에서 사회적 기업을 막 만드는 시기였어요. 사람들이 뜻은 있었는데 규합이 어려웠던 때였죠. 그래서 그냥 가서 “나, 이 수업 받겠다.” 말하고선 강좌를 빨리 열도록 해서 한 공간 안에 프랑스 자수, 뜨개질, 규방공예 수업이 동시에 이뤄졌어요. 내가 가서 했던 일이 뭐였냐면, 모인 사람들하고 수다 떠는 거였어요.
한번은 도자기 공방에 가서 “선생님, 꿈이 뭐예요?” 했더니 “아이들이 배워서 직접 만든 도자기를 팔게 하는, 그걸 경험하게 해주고 싶다”는 거예요. 프리마켓이잖아? 알았다고. 그러고는 또 옆에 목공 하는 데 가서 또 막 사귀었어요. 그리고 우리 바느질하는 팀한테 가서 열심히 얘기하고. 그런데 마침 한 엄마가 자기 작은 아들은 도자기를 하고, 큰 아들은 목공을 한다는 거예요. 그래서 재작년에 다들 역할 분담을 해서 장을 열었어요. 작년부터는 두 번씩 하기로 했대요. 나는 사람들한테 그랬어요. 꼭, 같이 하라고. 꼭, 같이 해서 바느질처럼 생활에 필요한 것들 배워서 직접 쓰고, 같이 하라고. 정작 시작은 아버님 팔순잔치로 참석을 못해 아쉬웠는데, 올해는 꼭 보고파요. 당장의 이익에 급급하지 말고 천천히, 생활에 꼭 필요한 요소로 자리 잡길 바라고, 이 장이 서는 날 골목놀이나 마을굿까지 부활되면...
마을 만들기 사업, 보기에 어떠셨어요?
우리가 (서울)시장님을 잘 뽑은 거야. 마을 기업, 사실 꿈을 꿔온 사람들은 그냥 이렇게 계속 살아 왔던 거고, ‘뭘 좀 해볼까?’ 이 자본주의 사회에서 그런 틈새를 어떻게 활용해낼 것인가 고민하는 사람들이 지금 ‘지원금 준대’ 하니까 가고, 눈먼 돈이니까 우리가 깎아 먹자 뭐 이런 취지로 하는 사람들이 너무 많더라고요. 제발, 그러지 말고 한 군데 다 몰아줘서 누구 한 명이라도 살게 해라, 그런데도 그 사람들은 말귀를 못 알아듣더라고... 성공한 사례도 있는데 많이들 실패했어. 어쨌든 자본주의 체제에서 지금 꿈꾸는 것이 맞지가 않는 것 같아. 이제는 조금은 대안적으로 해보겠다지만, 정말 큰 그림 속에서는 그게 얼마만큼 실현이 될까, 좀 더 바닥부터 가져가야 할 일인데... 염려스럽긴 해요. 이 사업을 꿈꾸던 사람들이 우리나라 고유 마을굿을 제대로 봤다면 사업과 생활이 분리되어 따로국밥을 만들진 않았을 것을...!
‘내 일’을 하는 ‘살아 있는’ 사람
로봇이 사람 일을 대신해서 향후 5년 안에 없어지는 직업이 많대요. 대표적으로 전문직이 없어진다던데. 그런데 창의적 활동을 하는 사람은 죽지 않는고! 카피한 게 아니라 창조를 하니까. 난 늘 ‘내 일’을 할 거예요. 내 중심에는 늘 아이들이 있고 내 신앙이 있으니까, 이것이 분리될 때는 내가 굉장히 무력해지고 소외감을 느끼겠지만, 그것이 있는 이상은 이렇게도 만나고 저렇게도 만나고, 그냥 생활 속에서...!
△ 인터뷰 중인 박영희 선생님(오른쪽)
전래 놀이에 담긴 깊은 의미를 직접 몸으로 마음으로 아이들과 그 마을에 전해주시는 박영희 선생님. 그리하여 왜 우리 각자가 세상의 중심이고 전체가 서로 연결되어 하나라는 점을 인지하고 감사해하며 살아야 하는지 알려주시는 걸음을 계속하신다.
<북미 인디언의 자치, 어제와 오늘> 강좌 때 인디언과 한국 전통 문화가 담긴 자료들을 손수 챙겨 와 비교하면서 공통점을 발견하고 또 사람들과 그것을 나누고, 초롱초롱한 눈빛으로 끊임없이 질문을 던지던 수강생 박영희의 모습을 기억한다. 선생님의 말씀대로, 배운 것이 우리 삶에서 어떻게 살아 숨 쉴 수 있는지 다시금 나 자신에게 묻고 성찰해보는 시간이었다.
오랜만의 느티나무 백인보 인터뷰 반갑게 잘 읽었어요.
두분 모두 수고하셨네요.
언제 느티나무에서 전래놀이를 직접 해보거나,
특강을 마련해봐도 좋을 것같아요. ㅎㅎ
수업 내내 새롭고 창의적인 질문이 굳어있던 저의 뇌를 부수는 망치역할을 해주었어요.
늦었지만 감사해요. 박영희쌤!!!
다른 수업에서 또 만날 수 있었음 좋겠어요.
해맑은 웃음이 기억에 크게 자리하고 있어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