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서른 번째┃나는 걷는다, 차수련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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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는 걷는다
“지금도 ‘아이’라는 소리를 들으면 가슴이 아려요.”
인터뷰가 어떻게 진행될지 짧게 안내를 하던 순간이었다. 물어볼 질문들을 크게 네 가지 항목으로 나누고 각각의 항목들에선 이런 내용의 질문들을 하겠습니다, 하는 순간 그녀의 눈시울이 붉어졌다. 문제를 일으킨 단어는 ‘아이’였다. 젊은 시절을 노동운동에 모두 쏟아 붓고 그 과정에서 5번이나 투옥의 경험을 지녔다는 강철과 같은 여인이 ‘아이’라는 작고 연약한 단어 앞에서 눈물을 흘린다. 잠시 나도 숨을 고른다. 늘 한 사람의 사회사보다 개인사에 더 관심이 많았던 나. 그래서 그녀의 이력을 살피다가 대체 어떻게 하면 갓 돌이 지난 아이를 두고 제 발로 감옥으로 걸어 들어갈 수 있는 것인지, 그 마음은 어떻게 하면 먹어지는 것인지 묻고 싶었다. 그때 그 아이가 대학생이 될 만큼의 긴 시간이 흘렀으나 그녀의 슬픔은 세월과 함께 흐르지 못했다. 흘러가버리지 못하고 한곳에 고인 어미의 슬픔은 볕이 좋은 날에도 축축하기만 할뿐 도통 마를 줄을 몰랐다. ‘아이’라는 말은 그렇게 그녀의 생에 웅덩이가 되어 남았다.
그녀의 생애 곳곳에 그런 웅덩이는 얼마나 있을까? 그녀가 휴지를 찾는 동안 정리된 질문지를 들여다보았다. 그러나 내 머릿속은 점점 더 복잡지기만 했다.
무엇을 어디까지 얼마나 물을 것인가?
운명
“한양대 간호학과를 졸업하고 같은 대학병원에 간호사로 들어갔어요. 그때가 1983년이었는데 그땐 노동조합 같은 게 없을 때였죠. 대학생 때도 학교에 불만이 많았지만 5년 정도 사회생활을 해보니까 병원 안에도 부조리하고 불합리한 것들이 너무 많더라구요. 임금 인상 같은 건 꿈도 꿀 수도 없고, 연차 월차 생리휴가 같은 게 있는지도 몰랐고, 청소하시는 아주머니들은 화장실에서 식사를 하시더군요.”
노동조합이 필요하다는 생각을 하던 때, 마침 서울대 병원에 노조가 생겼다는 소식이 들려왔다. 제조업이 주축이 되어 설립되던 노조와는 성격이 확연히 달랐기에 사회적으로도 파장이 컸다. 1987년 노조가 없던 한양대 병원에 노조를 세우는 일, 그녀가 그 일을 시작하게 된 사회적 배경은 그랬다. 그렇다면 그 어머 어마한 일을 ‘내가’ 해야겠다고 맘먹은 개인적인 계기는 무엇이었을까?
“의대생들 하고 의료봉사를 하러 다니고 있을 무렵이었는데, 당시 호헌 철폐와 대통령직선제 개헌 문제로 각계각층에서 서명운동이 일어나고 있었어요. 서명을 하면서 생각했죠. 이 문제는 나뿐만이 아니라 다른 사람들의 동참이 필요하겠구나. 그래서 병원에 서명용지를 들고 가서 사람들을 설득해 서명을 받았어요. 그때가 86년이었는데 이듬해 6월 민주화항쟁이 일어났고, 서울대 병원에 노조가 생긴 일도 그렇고 그런 시대적인 흐름들이 저희 병원에도 여파를 미치기 시작했어요. 병원 직원들이 술렁거리기 시작했죠. 우리도 노조가 있어야 하는 거 아니냐고. 근데 그 말들이 꼭 저한테 하는 말처럼 들리는 거예요. 그래서 서울대병원에 찾아가서 노조설립에 대해 물어보고, 결국 그렇게 나서게 되었어요.”
그렇게 해서 노조를 만들었다. 노조를 만들었다고, 한 문장으로 정리했지만 그 안엔 배보다 더 큰 배꼽이 들어있다. 사측이 어용노조를 세워 방해했던 일, 조합원 개개인에게 가해지는 압력과 회유, 공갈과 협박, 그 앞에 결국 무릎을 꿇고 떨어져나가는 조합원들, 그 모든 악조건들 속에서 사투를 벌여야했던 일... 근데 그 모든 일들이 왜 그녀의 몫이어야 했는지 아직 정확한 답을 찾지 못해 재차 물었을 때 돌아온 답은 생각보다 짧았다.
“그게 제 운명이었던 거죠.”
노조를 만드는 일. 그 일을 시작할 때의 어려움을 나열하면서 난 배보다 큰 배꼽이란 표현을 썼다. 그러나 17년이란 세월을 노동운동에 쏟아 부으며 그녀가 겪어내야 했던 그 이후의 일들은 뭐라고 표현해야할까. 아이들의 동화에 나오는 이야기처럼, ‘항아리 하나가 있었습니다. 뚜껑을 여니 그 안에는 바다가 있었습니다. 바다에는 하나의 섬이 있었고 섬 안에는 두 개의 마을이 있었고....’ 이런 식으로 표현하면 될까.
그녀는 노조라는 항아리의 뚜껑을 힘겹게 열었다. 그리고 그 안에서 세상이라는 바다를 만났다. 그러나 그 바다는 험했기에 그녀가 탄 배는 늘 위태로웠다.
바다 한 가운데서
“대학생 땐 운동권도 아니었어요. 노조를 만들 때만 해도 얼른 만들어 놓고 뒷일을 맡아줄 사람이 생기면 그만 두겠다는 게 원래 계획이었죠. 사실 그때 병원을 그만 두려고 퇴사 날짜까지 정해두었거든요. 간호사 일이 적성에도 안 맞고, 그만 두고 신문사에 취직하려고 맘먹고 있었는데…, 세월과 시대에 휩쓸려 버린 거죠.”
처음엔 마음만 먹으면 그 배에서 내릴 수 있을 거라고 생각했다. 이 배를 흔들어대는 저 파도가 좀 잠잠해지면 내리겠다고 생각했다. 마음이 단단한 항해사와 선원들로 배가 가득 채워지면 그때는 내리겠다고 생각했다. 그러나 그녀가 생을 통해 써내려가야 했던 이야기는 끝내 배에서 내리지 못하는 것으로 위태롭게 치닫는다.
“결국 노조를 떠나지 못하고 남아서 끝까지 책임을 져야했죠. 그 이후엔 서울지역노조협의회에도 참가하게 되고 전국노동조합협의회 설립에까지 힘을 보태야했어요. 그렇게 17년이란 세월을 노동운동에 몸 담아야했죠.”
한양대병원노조 위원장, 보건의료산업노조 위원장, 민노총 부위원장. 그녀의 이름 앞에 달린 긴 직함들이 그녀가 노동운동에 받친 거친 세월들을 증거하고 있었다.
“제가 사실은 딴따라였거든요. 대학 때 ‘메디컬사운드’라는 밴드의 리드싱어로 활동했어요. 대학가요제에도 나가고 학교에서 행사 있을 때마다 가서 공연도 하고 그랬는데, 그래서인지 사측에서 절 빨갱이로 몰아갈 때도 사람들이 쉽게 수긍하지 못하는 분위기였어요.”
대학에 입학하고 밴드의 리드싱어로 노래하며 가요제에도 나갔다던 이력 뒤에 노조 위원장이라는 사뭇 이질적인 직함이 붙자 삶의 한 페이지가 붉게 물들기 시작한다. 파업, 해직, 수배, 투옥, 농성, 단식투쟁... 붉은 단어들의 행렬이 끝도 없다.
“감옥도 다섯 번 갔다 왔죠.”
이 말을 좀 더 자세히 설명해줄 기사 하나를 찾았다.
차수련(44. 한양대병원) 전 보건의료노조 위원장이 9일 구속됐다. 차 전 위원장은 이날 오후 서울지방법원에서 영장실질심사를 받고, 저녁에 영장이 발부되었다. 10월 10일 서울남대문경찰서에 자진 출두했던 차 전 위원장은 그동안 경찰 조사와 함께 병원에서 진찰을 받아왔다. 차 전 위원장은 지난해 5월 전국 15개 병원의 파업을 주도하고, 같은 해 9월까지 명동성당과 병원 내에서 농성을 벌여 정상적인 병원업무를 방해한 혐의를 받고 있다. 차 전 위원장은 업무방해와 '노동조합법과 노동관계 조정법' 위반 혐의를 받고 있다.
차 전 위원장은 이번이 다섯 번째 구속이다. 89년 파업으로 단일호봉제를 쟁취한 뒤 처음으로 구속되었다가 91년 전노협 관련 업무조사 거부로 2차 구속되었고, 97년 파업투쟁으로 3차 구속되었다. 2000년 보건의료노조 첫 직선 위원장에 당선된 뒤 민주노총 총파업 주도 혐의로 명동성당에서 농성하다 자진 출두해 구속된 바 있다.
- 2003.12.13. 『오마이뉴스』
이것은 그저 팩트다. 그녀가 어떤 이유로 감옥에 가게 되었는지를 그저 건조하게 전해주는 정보일 뿐이다. 다섯 번의 투옥을 겪으며 그녀가 써내려가야 했던 가슴 시린 이야기들이 이곳엔 없다. 한여름의 불볕 아래에서도 마르지 못하는 그 축축한 웅덩이에 대한 이야기, 인터뷰 질문지에 적어 놓고도 묻기가 주저되었던 이야기가 이곳엔 없다.
△ 사진 차수련
웅덩이
조심스럽게 그리고 간결하게 물었다. 사연이 많으신 걸로 아는데요...
그러자 그녀가 대답하기에 앞서 다시 휴지를 찾는다.
“우리 아들이 그래서인지 트라우마가 있어요, 딸아이는 좀 덜한데. 첫 번째 투옥 때는 결혼을 미뤄야했었고, 두 번째로 수배를 받았을 때는 임신 중이었죠. 어쩔 수 없이 수배생활을 할 수 밖에 없었어요. 과로와 스트레스가 겹쳐서인지 급성신우신염이란 병도 앓고, 임신 초기엔 양수막이 터져서 유산의 위험이 있었고 나중엔 조산의 위험이 있었지요. 병원에서는 퇴원시켜주면서 누워만 있으라고 했는데 그런 사람에게 사전구속영장을 발부한 거예요. 지금 봐도 그렇고 경찰, 검찰 이 사람들 참 인간미가 없어요. 어쨌든 이래저래 힘들게 수배생활하면서 출산도 어렵게 했어요. 병원으로 가는 길에 지하철에서 양수가 터지기도 하고...”
그 무엇보다 그녀를 가장 힘들 게 했던 건 ‘불안감’이었다.
“아이를 안고 시장에만 나가도, 누군가와 눈빛만 마주쳐도 혹시 경찰인가 하며 불안해했죠. 전화벨만 울려도 내가 있는 곳이 발각된 건가 심장이 덜컹 내려앉고. 그렇게 계속 살 수는 없었어요.”
자진출두. 그녀는 스스로 감옥 안으로 걸어들어 갔다. 그 걸음 뒤엔 세상에 태어난 지 갓 돌이 지난 어린 아이가 있었다. 자진출두를 결정하고 아이 돌봐줄 사람을 물색하고 있을 무렵, 아이가 어떻게 알았는지 심하게 보채며 엄마에게서 떨어지지 않았다. 아이는 대체 어떻게 알았던 걸까? 또 그런 아이를 놓고 엄마는 어떻게 그 길을 갔던 걸까? 감히 묻지도 못할 질문들이 내 목 밑으로 차 올라왔다.
“유치장에 갇히고 나서 보름 후인가, 아이가 면회를 왔어요. 너무 반가워서 아이 이름을 부르니까 아이가 나를 모른 체 하는 거예요. 그 사이에 엄마 얼굴을 잊어버렸더군요.”
엄마가 어디론가 사라져 버린 후 아이는 사흘 밤낮을 먹지도 자지도 않았다 했다. 그러던 아이가 엄마를 잊은 채로 엄마 앞에 나타났다. 아이는 어쩌면 살기 위해 엄마의 얼굴을 잊었던 건지도 모른다. 엄마를 잊은 채로도 아이는 살아갈 수 있었을 테니 말이다. 그러나 그 방법은 엄마에게는 소용이 없었다. 살기 위해 아이를 잊을 수도 없었고, 아이를 잊고서는 살아갈 수도 없었을 테니까. 묻지도 못한 질문에 나 혼자 긴 답을 달아대고 있었다.
그런 일이 있은 후 그녀는 둘째 아이를 낳았고 그 이후로도 세 번이나 더 감옥에 갔다. 왜 그래야만 했을까. 도중에 그만 둘 수는 없었던 것일까.
“그만 두고 싶었죠. 92년에 제가 투옥되고 나니까 노조가 흔들리기 시작했어요. 병원에서는 그걸 빌미로 제게 해직을 통고하며 노조를 강하게 탄압했구요. 그때 노조 위원장 선거가 있었는데 그 일로 노조가 반으로 갈리는 일도 있었고. 노조가 흔들리면 제일 고통 받는 사람들은 열심히 참여했던 조합원들이에요. 석방되고 나서 가보니까 노조가 거의 와해돼 버린 거예요. 아무도 나서서 하지 않으려 하고, 어쩔 수 없이 제가 다시 뛰어야했죠.”
그 이후로도 그녀는 병원에서 세 번이나 해직을 당했고, 10여 년에 걸친 기나긴 싸움 끝에 99년에야 복직이 결정되었다.
“복직이 결정되고 나서야, 그러고 나니 그제야 하늘도 보이더라구요. 그때가 가을이었는데 가을 하늘이 파란 것도 보이고, 버스를 타니까 버스 안에 음악이 흐르고 있다는 것도 그제야 알겠더군요.”
한양대병원노조 위원장을 시작으로 민노총 부위원장까지 거치며 평생을 노조활동가로서 살아온 삶. 그 길고 험한 길을 묵묵히 걸었던 그녀가 배에서 내릴 마음을 먹은 것은 2004년, 마지막 투옥생활을 마치고 나온 직후였다.
“민노총에서 일하면서 그동안과는 다른 노동운동계의 모습을 보게 되었죠. 보통의 노조들은 사측이라는 구체적인 상대가 있으니까 힘들어도 때로는 강하게 뭉치고 그런 게 있는데, 민노총 같은 중앙 조직은 구체적인 적인 없다보니까 내부균열이 심해요. 헤게모니 싸움도 치열하구요. 패를 나눠서 서로 비방하고 험담하고... 그런 모습을 보는 게 힘들었어요. 또 이젠 내가 없어도 누군가 자리를 메워줄 거라는 믿음도 있었고…. 그래서 다짐했죠. 보건의료산업노조 위원장 임기만 끝나면 모두 다 그만 두겠다고.”
대지 위의 모든 것을 휩쓸어가는 폭풍. 그녀는 그렇게 살았다. 뜨거운 열기와 거친 바람으로 말이다. 그렇게 사는 것이 얼마나 힘든 것인지, 그런 삶을 지속하는 동안 자신의 몸은 어떤 상처를 입었는지, 마음은 얼마나 많은 피를 흘리고 있는 건지…. 이 모든 것들에 대해 스스로에게 물을 수 없던 시간들이었다.
세상에 나가 맞닥뜨린 첫 번째 여정이 전쟁과도 같은 삶이었다면 이제 그곳에서 가까스로 살아 돌아와 만나야할 생의 두 번째 여정은 순례의 길이어야 했다. 세상을 돌보고 살피느라 정작 잊고 있었던 ‘나’를 찾아 떠나는 길이어야 했다.
순례의 길
“신우신염도 여러 번 앓았고 단식을 무리하게 하면서 심부전을 앓아서 심장이 굉장히 약해진 상태였어요. 기능이 떨어진 심장 때문에 혈압이 자꾸 떨어지고 조금만 걸어도 숨이 차고 그랬죠.”
단식투쟁 할 당시 의사에게서 이러다 어느 순간 심장이 멈출 수도 있다는 소릴 듣고서도 말을 듣지 않았던 그녀였다. 그때는 상황이 그랬다고, 그녀는 마치 당시의 자기 자신에게 변명하듯 말했다. 조직이 어려운 상황에서 내렸던 그런 극단의 결정들 하나하나가 그녀의 몸을 할퀴고 지나갔고 돌보지 못한 상처들은 흉터가 되어 두고두고 남았다.
“몸이 아프니까 저절로 자연을 찾게 되더라구요. 아는 분의 권유로 북한산에 등산을 가게 되었어요. 처음엔 산 입구에서부터 숨이 차고 힘들었는데 계속 다니다 보니 확실히 내 몸이 건강해진다는 게 느껴지더군요.”
그러다 우연히 스페인에 있는 산티아고 순례길에 대한 이야기를 들었다. 가고 싶은 마음이 너무 간절해서 건강회복에 더욱 힘을 쏟았다. 막내딸이 대학에 입학하고 그 해 겨울, 그녀는 길을 떠났다. 늘 많은 시간을 함께 보내지 못해 미안했던 두 아이와 함께….
“물론 힘들었죠. 근데 순례길의 중반 쯤 다다르니까 적응도 되고 몸도 더 좋아지더라구요. 몸만 좋아지는 게 아니라 정신적으로도 좋아지는 느낌이었어요. 어디선가 봤는데 ‘힐링은 색감이다’라는 말이 있더군요. 그 말이 맞는 것 같아요. 푸르고 맑은 자연 속에서 그 기운을 받으며 걸으니까 진짜 힐링받는 느낌이었어요. 그전에도 내 안의 화를 다스리기 위해 이것저것 명상을 많이 해봤는데, 저한테는 ‘걷기 명상’이 제일 잘 맞는 것 같아요.”
걸으면 걸을수록 머리가 비워졌다. 잡념들이 하나둘 사라지자 머리가 맑아졌다. 그렇게 나쁜 기운들이 서서히 물러가자, 그 빈 자리에 생명의 기운이 차오르기 시작했다.
그 치유의 길을 다시 찾아간 건 작년 대선 직후였다. 참담함을 넘어서는 감정은 주체하기엔 너무 힘에 버거웠다.
“결과를 떠나 이게 사실인지 꿈인지 조차 가늠이 안 되더라구요. 어떻게 이런 일이 있을 수 있는 건지. 비행기 안에서 내내 울었던 기억이 나네요.”
예수의 열두 제자 중 한 명이었던 야고보의 무덤이 있는 스페인 북서쪽 도시, 산티아고 데 콤포스텔라(Santiago de Compostela). 그 무덤을 향해 걷는 800km의 길. 그 순례의 길을 한 달이 넘게 걸었다. 걷는 동안 삶은 다시 단순해졌다. 자고 먹고 걷는 것. 그게 전부였다. 그렇게 또 자연은 다친 마음을 송두리째 안아 주었다.
전업주부가 된지 이제 8년째인데, 소감이 어떠세요?
“워낙 일을 그만두겠다는 마음이 강해서였는지 그만 두고 나서도 헛헛함 마음 같은 건 별로 없었어요. 일을 그만두고 4년간은 건강회복에만 매달려야 했죠. 그리고 그 이후엔 우리 사회에 여러 일들이 있었잖아요. 2008년엔 광우병 문제 때문에 촛불집회도 있었고 그 이후로도 KBS, MBC파업도 크게 있었고. 광우병 집회 땐 딸 하고 처음부터 참가했어요. 세상이 시끄럽고 큰일들이 벌어질 때마다 그 역사적인 순간에 민주노총이 나름대로 해야 할 역할이 있는 건데, 그걸 제대로 해내지 못한다는 인상을 많이 받았어요. 안타까웠죠. 이래저래 나만 힘드니까 그런 것들을 의식적으로라도 생각하지 않으려 노력하면서 살아요.”
배에서 내려 뭍으로 돌아간 지 오래다. 그럼에도 그녀는 자꾸 파도가 몰아쳐대는 바닷가에 나아간다. 그곳에서 저 멀리서 위태롭게 흔들리는 배를 바라보며 발을 동동 구르고 있는 힘껏 소리쳐댄다. 주부로서의 일상을 물었으나, 그녀의 눈은 여전히 위태롭게 흔들리고 있는 세상이라는 배에 가 있었다.
울타리
다섯 차례의 수감은 노동운동계에서도 흔한 일이 아니란다. 단병호 전 민노총 위원장 다음이라 하니, 말문이 막힌다. 대체 그녀는 그 안에서 어떻게 버텨낸 것일까?
“감옥이라서, 그곳이 격리된 공간이라서 힘들거나 그런 건 별로 없었어요. 가장 괴로웠던 건 아이들 때문이었고 두 번째는 밖에서 들려오는 암울한 소식들이었죠. 노조의 상황이 안 좋다든가 하는 이야기들이 들릴 때마다 너무 괴롭고 힘들었어요. 그런 거만 아니면 때로 감옥생활은 휴식을 주기도 해요. 전 주로 책을 읽으면서 버텼어요. 계획을 세우는 거죠. 하루에 한권씩 책을 읽자, 그렇게. 그러면 누가 면회 오는 것도, 교도관이 잠깐 말 거는 시간도 아까워요.”
책과 공부를 즐기는 그녀이기에 느티나무에서 이렇게 만날 수 있는 것인지도 모르겠다. 2010년 천안함 사건 당시 참여연대 앞에서 가스통 시위들 벌이던 할아버지들 때문에 참여연대 회원으로 가입했다는 그녀는 그 이후로도 느티나무의 여러 강좌들을 들으며 인연을 맺어 오고 있다.
“예전부터 사진에 관심이 많았어요. 임종진 선생님의 사진 강좌는 그냥 사진 찍는 걸 배우는 게 아니라 사람냄새가 나는, 사람의 향기가 물씬 풍기는 그런 사진에 대해서 배우는 시간이었어요. 한국근현대사 강의도 재밌게 들었는데, 제가 고등학교 때 이과여서 그런지 인문학이나 역사 쪽에 관심이 많았는데도 배울 기회는 많지 않았죠. 그래서 그런 배움에 갈증이 많았어요. 특히 느티나무에서 만나는 사람들은 생각하는 것이나 가치관들이 비슷해서 말도 잘 통하는 편이고 그래서 편하고 좋더라구요.”
맨 앞줄에 서서 깃발을 드는 일은 이제 더 이상 자신의 몫이라 생각지 않는다고 그녀는 말했다. 이제 그 깃발은 새로운 사람들이 넘겨 받아야한다. 다만 그 사람들이 가는 길을 곁에서 지켜보고 함께 동행하며 때로는 든든한 울타리가 되고 버팀목이 되어주는 일, 그녀는 이제 그런 역할을 맡겠다고 했다.
“제가 노동운동하면서 조합원들 교육할 때 그런 말을 많이 했어요. 노동운동이라는 게 우리만 좋자고 하는 것도 아니고 결국 민주시민으로서의 역할을 다 할 수 있게 하는 거라고. 지금 제가 집회나 시위현장에 계속해서 나가는 것도 결국 그때 제가 조합원들에게 했던 그 말, 그 약속을 제 스스로 지키기 위해서인 거죠. 김만권 선생님 강의 때 들으니까 민주시민이란 ‘민주주의를 하겠다는 약속을 지켜달라’고 요구하는 시민들이라 하시더라구요. 그렇게 세상의 울타리가 되어 줄 수 있는 시민들을 길러내고, 시민으로서의 책임감을 다 할 수 있도록 도와주는 일, 그게 바로 느티나무가 해야 할 일이 아닐까요? 그러려면 지금보다는 좀 더 많은 사람들이 느티나무를 찾아올 수 있게, 더 많은 사람들의 배움을 나누고 서로의 삶을 통해 소통할 수 있게 느티나무가 도와줘야겠죠.”
근대사 강의를 들은 후에는 함께 공부했던 수강생들과 함께 답사소모임을 만들고 지난 7월엔 종로 피맛골을 함께 다녀왔다. 내년엔 중국 상해에 있는 임시정부로 답사여행을 갈 계획도 갖고 있다. 한 곳에 멈춰 서있지 못하는 것, 그것이야말로 그녀의 운명인 듯싶다.
“세상을 더 많이 둘러보고 싶어요. 단순히 여행을 하는 것이 아니라 사람들의 살아가는 모습들을 가까이에서 보고 경험하고 싶은 거죠. 노동운동을 그만 두고 나니까 그동안 내가 너무 우물 안 개구리처럼 살았구나 하는 생각이 들었어요. 내가 살아가는 이 지구, 더 나아가 이 드넓은 우주에서 안에서, 세상과 나의 관계, 우주와 나의 관계, 이런 것들을 좀 더 생각해 보고 경험하고 싶어요. 또 다른 꿈이 있다면, 국가나 민족 같은 차원이 아니라 인류 전체 혹은 자연을 포함한 하나의 커다란 공동체를 상정하고 그것을 위해 내가 할 수 있는 역할이 있다면 아무리 작은 것이라도 힘을 보태고 싶다는 것, 그게 제 꿈이에요.”
이제 그녀의 세 번째 여정이 시작되었다. 전쟁과도 같았던 첫 번째, 잃었던 나를 찾아 떠났던 두 번째에 이어 세 번째 여정도 다시 순례의 길이 될 것이다. 그러나 그것은 아픈 몸과 상처받았던 마음의 치유를 위해 떠났던 때와는 사뭇 다른 모습이다. 원래 순례가 그렇듯 그 길은 성스러움이 자리한 곳을 찾아가는, 이 지상의 모든 생명과 그들이 살아가는 터전을 위한 가치가 무엇인지를 묻는 시간 그리고 그 물음에 대한 답을 구하는 여정이 될 것이다.
△ 사진 차수련, 2013.11.16 느티나무<근현대사답사모임>, 남산의 역사 답사중
동지들에게
“어려워지면 사람의 바닥이 드러나기 시작해요. 노동운동하면서 사람에 대해 회의가 들고 실망할 때도 많았죠. 92년에 수배됐을 때, 그때 우리 조합원이 1300명 정도였는데 조합원 집회를 열면 3-40명 정도 밖에 안 나와요. 그렇게 힘겹게 모인 사람들 대부분이 청소하는 아주머니들, 급식을 만드는 조리사 아주머니들이에요. 간호사나 의료기사들은 거의 보이지도 않아요. 그때 늘 자릴 채워주던 간호사 후배 한 명이 오래도록 기억에 남네요. 늘 묵묵히 함께 해 주었었죠.”
복도를 지나다 노조 간부라도 마주치면 얼굴을 돌리던 조합원들. 사람들은 그녀에게 말하곤 했다. 왜 그런 사람들을 위해 이 험한 가시밭길을 가냐고. 그러나 결국 그녀를 마지막까지 버티게 해 준 것 또한 사람이었다. 묵묵히 그녀를 믿고 따라와 주었던 사람들, 그녀만을 바라보던 그들의 눈길, 그걸 저버리지 못해 17년 동안 한길을 걸었다.
“지금도 집회에 나갈 때마다 그 생각을 하곤 하죠. 그때 내 뒤를 지켜주던 그 사람들처럼 나도 지금 누군가의 뒤를 지켜주기 위해, 힘들고 외로운 싸움을 하는 사람들의 곁을 지키고 그들과 함께 하기 위해 가는 것이라고...”
지금까지
나는 나의 동지들 때문에 눈물을 흘렸지
결코 적들 때문에 눈물을 흘리지는 않았다
오늘 다시 이 총대를 적시며 흐르는 눈물은
어쩌면 내가 동지들을 위해 흘리는 마지막
눈물이 될지도 모른다
우리는 그 멀고 험한 길을 함께 걸어왔고
또 앞으로도 함께 걸어갈 것을 맹세했었다
하지만
그 맹세가 하나둘씩 무너져갈 때마다
나는 치밀어 오르는 배신감보다도
차라리 가슴 저미는 슬픔을 느꼈다
누군들 힘들고 고단하지 않았겠는가
누군들 별빛 같은 그리움이 없었겠는가
그것을
우리 어찌 세월 탓으로만 돌릴 수 있겠는가
비록 그대들이 떠나 어느 자리에 있든
이 하나만을 꼭 약속해다오
그대들이 한때 신처럼 경배했던 민중들에게
한줌도 안 되는 독재와 제국주의 착취자처럼
거꾸로 칼끝을 겨누는 일만 없게 해다오
그대들 스스로를 비참하게는 하지 말아다오
나는 어떠한 고통도 참고 견딜 수 있지만
그 슬픔만큼은 참을 수가 없구나
동지들이 떠나버린 이 빈 산은 너무 넓구나
밤하늘의 별들은 여전히 저렇게 반짝이고
나무들도 여전히 저렇게 제 자리에 있는데
동지들이 떠나버린 이 산은 너무 적막하구나
먼 저편에서 별빛이 나를 부른다
『미래의 착취자가 될지도 모를 동지들에게』- 체 게바라
먼 저편에서 별빛이 그녀를 불러대고 있는 까닭일까. 올여름부터 그녀는 주말마다 국정원관련 시위 현장에 나가고 있다. 사흘 걸러 아픈 몸임에도 늘 삶의 비린내가 진동하는 현장으로 나갈 수밖에 없었던 건 그곳에서 그녀를 기다리는 사람들 때문이었다. 세상을 밝히는 작은 촛불이 꺼져버리지는 않을까 하는 염려 때문이었다. 그 불빛이 사그라지지 않게 하기 위해 자신이 쏘시개의 역할을 해야 한다는 간절함 때문이었다.
누군가의 등 뒤로 지나갈 한줄기 바람을 막아주기 위해서, 무너져만 가는 맹세들을 붙잡기 위해서, 사람들이 떠나간 빈자리를 메우기 위해서, 지난한 생이 만들어 놓은 웅덩이들의 축축함을 성큼성큼 건너뛰며 가는 길. 결국 오늘도 그녀는 그렇게 세상이 무서운 기세로 내리누르는 곳을 찾아가 가장 낮은 곳에 버티고 앉는다. 그리고 무게를 나눈다.
버팀목이란 그런 것이니까, 가장 낮은 곳에서 모든 무거움을 온몸으로 받쳐내는 것이니까, 깊은 상처를 제 몸에 새겨야 하는 운명이니까 말이다.
아. 느티나무 백인보 서른번째 축하합니다. 벌써 30회라니... 감개무량.
차수련샘 인생스토리, 마음에 깊은 울림을 주네요.
그러고 보니 백인보가 벌써 서른 번째네요.
언제 백명 다 채우나 근심했었는데... 생각보다 세월은 더 빠르게 흐르나 봅니다.
그동안 인터뉴에 응해주신 분들께도 감사하다는 말 전하고 싶구요,
무엇보다 본인의 재능과 귀한 시간을 아낌 없이 내어주신,
우리 기자단 분들께 감사의 인사를 전합니다.
직장생활하며, 강의 들으며, 그 와중에 인터뷰 하고, 글로 옮기고....
그러시느라 얼마나 수고가 많았을까요.
또 관심과 애정을 가지고 백인보(특히나 짜증나게 긴 제 글)를 읽어주신 수강생 분들께도 감사를...
이제 또 달려봐야겠네요. ㅎㅎ
백인보 원고를 홈페이지로 옮기면서, 서른 번째임이... 새삼스러웠습니다.
농담반 진담반, '평생에 만날 좋은 사람' 총량의 법칙이 있다면,
저는 느티나무에서 그런 사람들을 너무 많이 만나고 있는건 아닌가, 생각이 들곤합니다.
특정 단어만 들으면... 목이 차 오르고, 눈물이 왈칵 쏟아지는 순간이 있었습니다.
그런 모습이 스스로 부끄러울 때도 있었네요.
차수련님의 삶을 읽으며...
수련님의 '아이'라는 존재가 저에게도 있다는 것을 인정하게 되었습니다.
그러고보니, 이름이 참 예쁘세요.
수.련.
^^
느티나무 친구들은
서로가 서로에게 함께 걷는 사람이 되었으면 좋겠다는 생각도 하게 되었습니다.
마지막으로 백인보 기자님들!
눈과 귀로 사람들의 진짜 이야기를 들려 주시는 것에 늘 감사드립니다.
백인보... 머지 않았지요? ^^
(참, 긴 원고 일 수록 '놀이정신'이 아닌 '도전정신' 발휘하여 읽게 되니 너무 괘념치 마셔요, 놀이정신님!ㅎ)
아.. 차수련 선생님,
작년 가을 임종진 사진수업에서 처음 만났던 것이 엊그제 같은데
벌써 1년이 지나, 드디어 백인보에서도 만나는군요!
앞으로 느티나무에서도, 거리의 광장에서도 자주자주 뵈어요~
좋은 말씀, 좋은 글 너무 잘 읽었습니다 :)
읽으면서 눈물이 왈칵 쏟아져서 화면이 뿌옇게 되네요.. ㅠㅠ
이렇게 자세히는 아니지만,
말씀으로는 들었던 내용인데,
글로 읽으니 중간중간에 마음이 너무나 아립니다. ㅠ
나도 보임님의 말에 500% 공감하고 있어요.
저도 느티나무에서 이런 분들을 알고 지낸다는 것만으로도
인생의 큰 기쁨과 행복으로 생각하고 있어요.
아시다시피 절망으로 시작했던 2013년,
저에게 느티나무가 없었다면 여전히 우울하기만 했겠죠..
이러한 인연에 진심으로 감사합니다!!!
아 차 수련님 !!!
< 느티나무 2013 연말 반창회> 에서
익숙한 또 새로운 친구들과 섞여 앉는 자리
서로 인사 나눌 때, 활동적인 분이네, 꾸벅 해 놓고 잠간
차 수 련 이라고, 그럼 한양대 병원 !!!
한울타리였다는 반가움과 노동조합 초기의 어려움을
먼 발치에서 전해 듣기만한 부끄러움이 동시에 ...
그 때 수배 받고 단식하고 정도를
백인보에서 조금 더 소상히 읽으며
가까이 보는 첫만남의 당당함은
한사람의 인생사와 한시대의 노동사의
큰 획에 있었구나 뒤늦게 알아차렸습니다
생략된 더 많은 이야기들
가끔 육성으로 듣는 기회가 있기를
그날 모임에서
2013 화두를 나눌때 < 민주주의, 시민교육> 으로
설명하던 의연함은 그냥이 아니라
<백인보> 대담에서 나온 것처럼
" ...곁에서 지켜보고 동행하며 .. "
생활화된 큰 이야기라는 것을 깊은 울림으로..
차수련 님,
사회지킴이의 길
가족들과 가까운 이들과 걷는 길
걷는 길에 마음의 건강과 몸의 건강이 쑥쑥 자라기를 ^O^
차수련 선생님. 처음 본 그 인상처럼 좋은 분 이시네요.
단장님 글 잘 읽었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