외부소식 l ※ 광고성 게시나 게시판 도배, 저작권 침해 게시글은 삭제됩니다.
스물여덟 번째┃슈뢰딩거의 고양이
느티나무 백인보 스물여덟 번째 - 황은성
슈뢰딩거의 고양이
한 고양이가 밀폐된 상자 안에 갇혀 있다. 상자 안에는 반감기가 1시간인 방사능 원자 1개가 들어있고 이 원자가 방사성 붕괴를 일으키
면 감지기가 감지하여 망치를 움직이고 망치는 청산가리가 든 병을 깨게 되어있다. 원자가 1시간 뒤에 방사성 붕괴를 할 확률과 하지 않
을 확률은 50대 50으로 같다. 1시간 후 과연 고양이는 죽었을까 살았을까?
이게 무슨 귀신 씨나락 까먹는 소리냐고 할 테지만, 사실 양자역학에 관심이 있는 사람이라면 한번쯤은 들어봤을 법한 아주 유~명한 이야기다. 이름하여 ‘슈뢰딩거의 고양이’이라는 건데 여기서 나오는 이론이 바로 ‘불확정성의 원리.’ 백인보를 오래 하다 보니 이런 용어들이 인터뷰 자리에서 오가는 날도 오는구나. 이 거친 단어들을 친절하게 설명하고픈 욕망은 활활 불타오르나 초장부터 과하게 달릴 수는 없는 관계로 가볍게 패스하고, 실로 나에게 오래간만에 물리학의 추억 속을 걷게 해준 그녀의 이야기 속으로 곧장 들어간다.
세상에 생명을 내보내고
백인보 인터뷰가 늘 그렇듯, 사전에 취합할 수 있는 자료와 정보의 양이 극히 미미한 까닭에, 이번에도 어김없이 셀프 소개를 부탁드렸다.
“1972년생이고 현재는 전업주부에요. 결혼 전엔 잡지사 내셔널지오그래픽에서 번역일을 했었구요, 결혼하고 아이를 가지면서 건강상의 문제로 일을 그만두게 되었어요. 나중에 다시 일을 하려했는데 모유수유중이기도 했고 아이가 너무 예뻐서 도저히 두고 나갈 수가 없었어요.”
그 맘, 제가 너무 잘 알죠... 나도 비슷한 경험이 있다. 큰아이가 갓 돌을 지났을 무렵 다시 직장에 나가보려 했었다. 결국 나를 다시 방바닥에 앉힌 건 너무도 서럽게 울어대는 아이의 울음소리와 그 까만 눈망울에 담긴 간절함이었다. 지금 생각해보면 그건 나의 무의식이 과하게 반영된 해석이었던 게 분명하다. 그러나 그걸 알았다 해도 필사적으로 내 옷깃을 붙잡는 아이의 고사리손을 끝내 떼어놓지는 못했으리라...
“물론 그렇게 일을 그만 두게 된 게 무척 아쉬웠죠. 지금도 가끔 회사에 나가 일하는 꿈을 꿔요. 처음에는 지금까지 내가 배우고 일하며 알게 된 모든 것들이 물거품이 되어버린다는 생각에 속이 상하기도 했죠. 근데 다시 생각해보니 그런 것들이 모두 내 아이가 성장하는 데 밑거름으로 쓰일 수도 있겠다는 결론을 얻었어요.”
변명이었을지도 모른다고 그녀가 말했다. 아이 곁에 머무르기 위해 이 땅의 엄마들이 만들어내야 하는 변명과 과도한 해석은 그렇게 산을 이루며 쌓여만 간다. 그녀를 붙잡았던 그 아이도 이제 초등학교 5학년이 되었다. 그때와는 상황도 많이 변했는데, 다시 일하고 싶은 마음이 들진 않으세요?
“마흔을 목전에 두고 힘들었던 건 사실이에요. 인생에 있어 40이면 대부분 어떤 결과물들을 남기거나 그러잖아요. 저도 그런 생각에 한동안 힘들었었죠. 젊었을 땐 하고 싶은 거만 하고 살았는데, 나이가 들어서 그런지는 모르겠지만 점점 더 내가 할 수 있는 일은 뭘까 하는 고민이 깊어지더라구요. 딸에게 멋진 엄마로서 좋은 롤모델이 되어주고 싶기도 하고 또 아이가 살아갈 세상이 걱정스럽기도 하고, 그렇다면 내가 알고 싶은 거 말고 내가 알아야하는 것들도 좀 찾아서 배워야겠다는 생각이 들었어요.”
내가 할 수 있는 일, 내가 해야 하는 일을 찾아야했던 마흔 언저리의 그녀는 과연 어디에 다다랐을까?
“그건, 글을 쓰는 일이었습니다.”
블로그 필화 사건
그녀가 글쓰기의 첫걸음을 뗀 것은 블로그 활동을 통해서였다.
“주로 정치, 경제, 문화 등과 관련해서 내 생각들을 적는 일종의 비평 같은 글들이었어요. 처음엔 순수한 열정이 있어서 관련된 자료도 찾고 그동안 읽은 책들도 뒤져보고 해서 썼었죠. 그러다 하나둘 댓글이 달리기 시작했고, 책임감이 확 솟아나더군요. 단어 하나 문장 하나에도 신중을 기하게 되고 자료의 신빙성을 갖추기 위해 구글검색까지 하고 그랬었죠.”
그러던 그녀의 초심이 흔들렸다.
“방문객이 점점 늘어나면서 변해갔던 것 같아요. 그들을 의식해서인지 내가 쓰고 싶은 글보다 사람들이 원하는 것을 더 많이 쓰게 된 거죠. 그렇게 사람들의 관심이 쏠려 있는 핫이슈들을 주로 다루다 보니 내 안의 진정성도 떨어지게 되고 글에도 겉멋이 들고, 나중엔 사실에 대한 객관적인 분석보다 효과적인 선동기술을 익히는데 더 노력하고 있는 나를 발견했어요. 그런 모든 것들이 그 당시엔 잘 안 보였는데 시간이 지나니까 하나둘 보이더군요. 결국 내 글이 나 자신을 좀먹고 있었던 거죠.”
무척이나 냉철하고 객관적인 자기분석이다. 이런 차가운 이성의 소유자라면 스스로 블로그를 폐쇄했을 지도 모른다. 그러나 그녀의 블로그는 전적으로 타의에 의해 사라지게 된다.
“이명박 정부 초기였어요. 정권과 정치에 관한 비판적인 글들을 많이 올릴 수밖에 없었죠.
그런 글들이 문제가 되었는지 하루는 경찰서에서 연락이 왔어요. 너무 겁이 나더라구요.”
그런저런 우여곡절을 거치며 블로그는 폐쇄됐다. 요즘의 국정원 사태를 보면 한 시민이 운영하는 블로그 하나쯤 없애버리는 건 우습지도 않은 일이라는 생각이 든다. 그러고 보니 그녀도 일종의 민간인 사찰의 희생자로구나. 조지 오웰이 소설의 형식을 빌려 쓴 ‘빅브라더’의 전설이 현실로 구현되는 시대, 그런 어매이징한 시대를 우린 살고 있다.
“그 일이 있고 나서 한동안은 잠도 오지 않았어요. 어떻게 이런 일이, 어떻게 나에게 이런 일이 일어나나, 한 개인으로서 자존감이 짓밟히는 사건이었죠. 한편으론 그렇게라도 중단이 안 되었다면 ‘나’를 잃어버린 글쓰기에서 헤어 나오지 못했을 지도 모른다는 생각이 들기도 해요.”
앞으로는 어떤 글을 쓰고 싶으세요?
“블로그에서 주로 비판만 하다보니까 뭔가 긍정적인 힘을 가진 말들, 새로운 것을 창조해내는 언어들을 잃어버리게 된 것 같아요. 그런 사고방식에 내 의식을 점령당한 나머지 무얼 보든 회의적이 되고 그러다보니 사람들하고 대화하는 것도 무서워졌어요. 대화를 하다보면 그 사람의 약점만 보고 잘못된 점만 들춰내려고 하는 자신을 발견했죠. 앞으로는 좀 더 내 안의 창의성을 끌어낼 수 있는 글들을 쓰고 싶어요, 소설 같은 것도 좋고...”
성격상 소설이나 시를 읽는 것이 무척 힘겹다는 그녀. 물리적으로 확인이 안 되는 것들을 상상에만 의존해 구체적으로 그려내고 공감하는 것이 어려운 그녀에게 문학적 언어들이 주는 풍부한 감수성들이 어색할 때도 많다고...
“누군가 그러더라구요. 생선을 도마 위에 올려놓고 난도질 하는 건 쉽다고, 그러나 그것을 가지고 보기에도 좋고 맛도 있는 음식을 만들어내는 건 무척 어려운 일이라고...”
앞으로 그녀가 쓸, 보기에도 훌륭하고 맛도 기가 막힐 글들이 기다려진다.
아줌마들, 정치를 논하다
내가 그녀를 알게 되고 결국 인터뷰까지 청하게 된 것은 ‘나의 시민정치학교’라는 강의 때문이었다. 4월 초에 시작하여 6월에 이르기까지 무려 10강이나 진행되었던 그 강의에 그녀는 초등학생인 딸아이와 늘 함께 왔다.
“솔직히 김대중 노무현 정부시절엔 그래도 막연히 믿는 구석이 있었던 게 사실이죠. 그러다 이명박 정부 시절부터, 너무 마음에 안 드는 사람이 대통령이 되어서인지 정치 쪽으로 더 많은 관심이 가게 되었죠. 그전에는 신문을 읽는 정도로 그쳤다면 그 이후에는 답답한 일들도 너무 많이 일어나고 그것들을 내 나름대로 분석하고 재해석하는 작업이 필요해진 거죠.”
김대중 노무현 정부시절엔 그들의 신념과 인간됨을 믿고 기다려줄 수 있는 여유가 있었다. 그들이 잘못을 저지르고 다른 이들이 그들의 실정을 비난할 때도 ‘조금만 더 기다려주지. 아직은 힘이 없는데 왜 그들에게 제대로 된 기회도 안 주고 저러지?’라는 생각마저 들었다. 그러나 정권이 바뀌고 이명박이 대통령이 되자 그런 맘을 먹기가 쉽지 않았다. 그것은 신념과 믿음의 문제였다.
“정치에 관심이 많냐구요? ㅎㅎ 그냥 재밌어요. 전 종교나 정치나 다 공부의 한 갈래로 생각해요. 제 종교가 천주교거든요, 근데 그것도 어찌 보면 일종의 서양사 같은 거 아니겠어요? ”
그녀와 내 또래의 전업주부들(40대 전후반), 우리가 동네에서 흔히 마주치는 ‘아줌마’들은 사실 정치에 별 관심이 없다. 거의 자신의 일상을 아이들의 사교육과 성적에만 올인하는 세대이기에 신문조차 읽지 않는 경우가 다반사다. 10강으로 이루어진 정치 강의를 그것도 아이를 데리고 꼬박꼬박 나왔던 그녀의 행보는 그래서 더욱더 빛난다.
“학생운동과도 사실 별 인연이 없었구요. 글쎄 정치에 관심이 많다기보다 책 읽는 걸 무척 좋아해요. 역사라든가 경제 같은 것이 정치와 완전히 분리된 것도 아니고 이책 저책 읽다보니 관심이 가는 분야도 넓어지고 아무래도 사회문제에도 더 예민해지는 것 같아요.”
이야기는 자연스레 우리가 함께 수강했던 시민정치학교로 넘어갔다.
“시민정치학교 강의 중에 고세훈 선생님도 말씀 하신 적이 있지만, 저 또한 생각만 하지 말고 실천해야 한다고 생각하는데 그게 쉽지 않은 거죠. 강의 중에 버나드 쇼가 했던 ‘우리는 노동계급을 위해서 일하지만 노동계급과 함께 일하지는 않는다’라는 표현이 나왔을 때, 저도 그 말이 맞는 말이라고 생각했어요. 학문과 정책연구를 중심으로 하는 사람들의 경우는 오히려 현실에 나왔을 때 그들이 말해야 할 100을 전부다 말할 수 없을 지도 모른다는 생각이 들어요. 때론 현실과는 다른 비전을 제시해야 하고 더 높은 이상을 담아내기도 해야 하는데 그런 것들이 오히려 현실에 의해 재단되고 제약을 받을 수도 있다는 우려가 드는 거죠. 많은 사람들이 그런 지식인들을 향해 실천하지 않는다고 비난하는 것은 그런 면에서 옳지 않다고도 느껴지구요.”
강의 중에 한 강사 분이 촘스키를 비판했던 적이 있었다. 골자만 말하자면 말은 번지르르한데 실천하는 건 하나도 없지 않느냐... 뭐 그런 류의 비판이었던 걸로 기억한다.
“땀 흘리는 행위만이 숭고한 것은 아니잖아요. 학자들은 자기에게 주어진 과제들을 연구하고 그걸로 사회가 좀 더 나은 방향으로 나아갈 수 있게 도움을 주고 그런 차원이 실천의 영역일 텐데...”
살짝 시대에 뒤쳐진 논쟁이라는 생각이 들었다. 나도 강의 중 촘스키에 대한 날선 비판을 들었을 때 저건 아닌데 하는 생각이 들었다. 실천의 범주 안에 ‘거리에 나서서 돌을 던지는 행위’만 있는 것은 아니다. 촘스키의 경우는 그가 토해내는 날카로운 비판들이, 그런 정신들이 담긴 말이나 글이 모두 강력한 실천의 증거이다. 자신이 속한 유대인 사회까지 비판하여 ‘반유대주의자’라는 욕을 먹었던 그가 아니던가. 여러 사회적 관계에서 ‘고립’되고 ‘단절’되는 것을 감수하면서까지 내놓았던 그의 말들은, 그래서 그저 ‘말’일 수 없다.
참나, 또 흥분 잘하는 아줌마 기질이 나왔던 모양이다. 정치 이야기를 하다보면 번번이 길을 잃고 헤메니... 우리 어디까지 얘기했죠? ㅠㅠ
아이와 함께 하는 공부
인터뷰 내내 가장 묻고 싶었던 질문을 해야겠다. 근데 아이는 왜 데리고 오셨던 거예요?
“첨엔 말하기도 미안하고 혹시 다른 분들이 강의 듣는데 방해가 될까봐 걱정도 되고 해서 아이를 맡길 데가 없어서 함께 왔다고 했는데 사실 저 자신보다 아이에게 이 강의를 들려주고 싶어서 함께 왔던 거예요.”
아이를 위해서라구요?
“초등학생이 뭘 얼마나 이해하겠나 생각하시는 분들도 있겠지만 사실 요즘 초등학생들은 여러 가지 매체를 통해서 이보다 더 기가 막히는 일들도 다 보고 경험하고 있잖아요. 일베의 경우만 봐도 그런 왜곡된 시각을 가진 자신들이 더 우월하다고 인식하면서 나머지 사람들을 구시대의 문화 밖에 모르는 꼰대 취급을 하고 이런 문화에 속하지 않은 다른 아이들을 고립시키기도 하고... 어른들은 그래도 스스로 판단내리고 다양한 정보들을 걸러낼 능력이 있는데 아이들은 그런 능력이 아직 성숙되지 않는 상태잖아요. 분위기나 유행하는 문화에 휩쓸리기가 더 쉽죠. 그래서 아이에게 이 강의를 꼭 듣게 하고 싶었어요.”
아이의 반응은 어땠나요?
“자신이 이해하는 폭 안에서 듣고 배우고 하는 거죠. 근데 강의를 들을수록 이해의 폭이 점점 넓어지더라구요. 그전에는 또래 아이들의 목소리 함께 휩쓸렸다면 강의를 듣고 난 이후에는 자신의 목소리를 내기 시작했어요. 박근혜 편만 드는 친구들에게 그게 아니라고 반박하는 카톡도 보내고 그러던데요.”
무엇보다 아이들에겐 엄마가 공부하는 모습을 보여주는 것 그 자체만으로도 훌륭한 배움이 아닐까? 대학이나 자격증을 위해서가 아니라 그저 좀 더 나은 사람이 되기 위하여 하는 공부도 있다는 것을 보여주는 것, 엄마는 그런 공부를 하는 사람이라고 말 해주는 것... 내 아이가 성장하는 순간은 바로 그런 때가 아닐까?
“책을 읽고 공부를 하다보면, 이 공부가 다 무슨 소용이 있을까 하는 회의가 들기도 해요. 그래서 내 공부가 무언가를 위한 도구가 되면 좋겠다는 생각이 늘 있는 거구요. 여러 가지 생각들을 하는데 아직은 선뜻 나서기가 겁이 나네요. 무엇보다 세상에 나왔을 때 사람들과 어울리는 것이 힘들 것 같아 걱정이 돼요. 아이를 키우다보니 아이 친구들의 엄마들과도 친분이 쌓이고 어울리게 되는 데 그게 참 어렵고 힘들더라구요. 자꾸 내 얘기가 찬물을 끼얹는 격이 될 때가 많고...”
어쩜, 이렇게도 나랑 똑같을 수가... 마음은 두루두루 잘 지내고 싶어 학부모 모임에도 가고 어울려 차도 한잔 나누고 싶은데 정작 자리에 나가면 난 그들과는 다른 시각의 이야기를 하고 그들의 현실타협적인 아니 사실은 그 수준을 뛰어 넘는 현실왜곡적인 이야기들을 도저히 참아낼 수가 없던 경우가 더 많았다. 결국 모두의 평화를 위하여 난 동네에서 고립의 길을 걸었다. 근데 지금 그녀도 같은 이야기를 하고 있지 않은가. 그 경험이 혹 그녀를 계속 집안에만 가두고 있는 것은 아닌지 걱정이 앞섰다. 하여, 글쓰기에도 관심이 있고 공부하는 것도 즐기는 그녀이니 앞으로 백인보 인터뷰어나 강의 자원활동가로 함께 했으면 좋겠다고 나의 희망을 강력히 피력했다. ㅎㅎ
슈뢰딩거의 고양이
생뚱맞아 보이는 이 글의 제목은 인터뷰 도중 그녀의 전공이 물리학이라고 했던 부분에서 따왔다. 한 때 ‘별과 우주’라는 월간지를 몇 년 동안 구독할 정도로 물리학에 관심이 많았던 난 그녀에게 물리학에 대해 이것저것 물었고, 슈뢰딩거에서 시작된 이야기는 ‘고양이 실험’을 거쳐 ‘불확정성의 원리’로까지 이어졌다. 이제 이 거친 용어들 풀어내며 그녀의 이야기를 마무리할 시간이다.
그 고양이는 죽었을까? 고전 물리학의 영역에서 보면, 1시간이 지난 이후 고양이는 죽었거나 살았거나 둘 중 하나로 결론이 난다. 이건 우리의 상식과도 맞는 얘기다. 그러나 양자역학에서는 다르다. 우리가 상자를 열어 고양이의 생사를 확인하기 전까지 상자 안의 고양이는 살아있는 상태와 죽어있는 상태가 공존하는 상태이다. 결국 고양이의 생사는 확률로만 나타낼 수 있을 뿐 아무것도 확정지을 수 없게 된다(불확정성의 원리). 이런 상태를 결정지을 수 있는 것은 상자를 여는 행위뿐. 상자를 열고 고양이를 바라보는 순간, 우리의 관측에 의해서 고양이의 생사에 관한 결과가 결정된다. 이 실험에서 쟁점은, 어떤 결과값을 얻기 위한 관측 행위가 오리려 결과에 영향을 미친다는 것인데 여기서 양자역학의 중요한 개념이 등장한다. 결국 모든 입자는 확률로서만 존재한다는 것. 근데 이게 무슨 상관이냐고?
상자를 열기 전에는 확률로서만 말할 수 있다는 이야기가 어째 내게는 사람의 인생을 빗대는 말처럼 들렸던 것일까. 고양이의 생사가 우리가 상자를 열어봤을 때만 의미를 지니고, 관측이라는 행위를 통해서만 결정될 수 있듯이, 말이던 글이던 또는 더 구체적인 행위이던 좋은 삶과 더 나은 세상을 향한 나의 꿈 또한 내가 머릿속의 상자를 열고 밖으로 꺼내기 전까지는 오로지 확률로서만 존재할 뿐이다.
“아이가 크면 건강한 시민이 되었으면 좋겠어요. 아이한테도 항상 이렇게 말해요. 지구상에 나라가 200개 정도 밖에 안 되는데 죽기 전에 그곳에 대해 다 알고 가야되지 않겠냐구요. 한곳에 뿌리내리기 보다 더 넓은 세상에 나가 경험하고 배우며 건강한 정신을 가진 사람으로 컸으면 하는 바람이죠.”
자라나는 아이들은 꿈을 꾼다. 그러나 그보다 더 많고 더 큰 꿈을 그 아이들의 부모들은 꾼다. 그 꿈속엔 내 아이가 누릴 미래에 대한 계획과 함께 자신이 이루고 싶은 꿈 그러나 이루지 못했던 꿈들이 뒤섞여 있기 마련이다. 제 욕심의 투영이라고 비난하지만 그래봤자 우리는 한낱 연약한 인간이 아니던가. 그렇게 아이를 향한 바람 속에서, 난 그녀가 이루고 싶은 그녀 자신의 꿈의 한 자락을 발견한다. 더 넓은 세상에 나가 경험하고 배우고 건강한 정신을 향해 계속 성장하고 싶은 꿈 말이다.
이제, 그녀가 상자를 열 차례다.
황은성님은 강의에서 몇 번 마주쳤을 때는 어떤 분일까... 무엇에 관심이 있는 분일까...
막연하게 호기심을 불러 일으키는 포스가 있는 분이셨지요.
한 층 벗기고 삶으로 쑤욱 들어가서 사람을 만나는 백인보에서는 본 황은성님은 의외성(즐거운 의미로)이 있으시군요.
ㅎㅎ 두 아줌마의 육아, 정치, 물리학 수다 잘 들었습니다.
개인적으로 엄마와 딸 사이가 황은성님가 따님 같다면 얼마나 좋을까 상상도 해보게 되네요.
블로그에 정권에 대해 비판적인 내용을 올렸다고 경찰에서 전화가 왔다니... 정말 바로 옆에서 일어나는 민간인사찰...
그래도 이렇게 공부하는 은성님, 대단하세요. 기사 잘 봤습니당
단장님 글의 제목은 우선은 낯설다는 느낌이지만, 내용을 끝까지 읽고나면 이보다 더 좋은 제목은 없다는 느낌이!
황은성님 가을학기 <시민정치학교>에서도 또 뵈어요!